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이유의 난(계유정난)

구름위 2013. 8. 2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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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의 난(1453년)은 1453년(단종 1년)에 이유(수양대군)가 권남, 한명회 등과 함께, 단종 보필의 중신이었던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인 후, 안평대군까지 제거하고 군국대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난이다.
 
이유(수양대군:1417-1468년)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며, 그의 형은 문종이고, 그의 비는 윤번의 딸 정희황후이다. 그는 젊어서부터 무예에 능하였고, 병서에도 아주 밝았다.
 
그는 1428년(세종 10년)에 진양대군으로 책봉되었다가, 1445년 (세종27년)에 다시 수양대군으로 고쳐 봉해졌으며, 세종의 명을 받들어 김수온 등과 함께 불서를 번역 감독하였고 향악 악보 정리도 관장하였다. 1452년에는 관습도감이라는 직책을 맡아 수행했고, 같은 해에 단종이 즉위하자 고명사은사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세종대왕은 위해한 위업과 18명의 왕자, 4명의 공주와 옹주를 남기고 1450년(세종32년) 2월에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30년간이나 세자로 있으면서 선왕을 도와 많은 일을 했던 이향이 왕위(조선왕조 5대왕,문종)에 올랐다.
 
문종은 관료들을 두루 중용하고, 민의를 널리 수렴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그는 군사제도도 대폭 정비한 다으 병력을 증강시켜 국방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던 그가 1452년 5월 재위 2년 3개월 만에 아깝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자 유일한 어린왕자 이홍위(단종)가 조선왕조 6대 왕위에 올랐다. 선왕인 문종은 죽기 전에 자신이 단며할 것을 미리 예측하고 당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그리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누누이 어린 왕자 이홍위를 잘 보필해 줄 것을 신신당부 해 두었다.
 
그러나 어린 단종 주위에는 7명의 숙부, 즉 수양대군 이유, 안평대군 이용, 임영대군 이구, 광평대군 이여, 금성대군 이유, 평안대군 이임, 영응대군 이염이 떡 버치고 있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제일 부담 되었다.
 
이들은 저마다 빈객들을 다투어 포섭하였는데, 수양대군측에는 권남, 한명회, 홍달손, 양정 등과 같은 무인들이, 안평대군측에는 황보인 등과 같은 문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안평대군은 수양대군보다 한 살 아래의 동생이었지만, 그는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알려질 만큼 서예는 물론 그림과 가야금 등에도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다.
 
이들은 각자 자기 일파를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등용시키려고 서로 경쟁하다시피 했다. 수양대군은 자기 주변에 무사들과 모사꾼들을 모아 심복 세력을키워 갔으며, 안평대군으 권신 황보인과 김종서와 제휴하여 조카인 단종의 왕위 보존을 위해 인사 행정기관의 하나인 황표정사를 장악하여, 자기 측근 문신들을 요직에 앉혔다.
 
그러던 중 수양대군은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여온 뒤 안평대군의 세력권인 황표정사를 폐지해 버린 후, 1453년 10월 10일에 난을 일으켰다. 그는 휘하의 무사들을 이끌고 "심야에 급한 서류가 있어 왔다."고 속여 김종서의 집을 급습했다. 그리하여 김종서와 그의 두 아들까지 철퇴로 내리쳐 살해해 버렸다. 그런 다음 단종에게 다음과 같이 거짓 보고를 올렸다.
 
"김종서 일당이 모반하려 하므로 죽여 없앴습니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온지라 미리 못하였나이다."
뒤이어 수양대군은 왕명이라고 속여서 대신들로 하여금 즉시 입궐하라고 한 다음, 대궐문에 미리 배치해 놓은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찬성 이양 등의 반대파 중신들을 모두 때려 죽이도록 지시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평소 자기 세력과 반대 입장을 갖고 있다고 판단되는 인물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거나, 모반죄를 뒤집어 씌워 귀양 보내 버렸다. 김종서의 시체를 거리에 매달아 놓게 하여 구경시켰으며,그의 자손들까지도 목을 베어 죽여 버렸고, 좌의정 정분, 평안도 관찰사 조수량등은 일단 귀양 보냈가가 죽여 버렸다.
 
안평대군까지 적대시하여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가 교동으로 옮긴 후 역시 죽여 버렸다. 그는 심지어 변방에 나가 있는 김종서와 친근한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까지도 파면시켜 버렸다.
 
그런 다음, 수양대군은 혼자서 영의정부사, 이조판서, 병조판서, 내외 병마도통사를 모두 독차지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정인지, 한확, 이사철, 박종우, 이계전, 박중손, 김효성, 권남, 홍달손, 최항, 한명회 등을 비롯한 37명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하고 정인지를 좌의정에, 한확을 우의정에 임명했다. 그리고 그는 집현전에 강요하여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를 지어 단종의 이름으로 발표하게 하였다.
 
1455년 6월 2일에 단종은 삼촌인 수양대군의 압력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여, 옥새를 가져 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단종은 동부승지 성삼문으로 하여금 상서원에서 옥새를 내와 환관 전균에게 주어 경회루로 가지고 나오라고 명하였다.
 
어명을 받든 성삼문은 할 수 없이 옥새를 가져와 전균에게 건네 주자, 전균은 그것을 경회루로 가지고 갔다. 이때 단종은 수양대군을 불러, 그에게 옥새를 넘겨 주고자 하였다.
 
러자 수양대군은 엎드려 거짓 눈물을 흘리면서 몇 번이나 사양하였다. 그러나 결국 옥새는 수양대군에게 넘겨졌다. 그 후 수양대군은 모든 문무백관이 지켜 보는 가운데,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즉위(조선왕조 7대왕)하였다.
 
그 뒤 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하자, 이들을 모두 사형에 처한 후 집현전을 아예 폐지해 버렸다. 그는 재위 14년 동안 국방, 외교, 토지제도, 관제 등의 개혁, 개편 등 수 많은 치적을 올렸으며, 조선 초기의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만년에는 왕위 찬탈로 인한 인간적 고뇌에 싸여 괴로워하다가 문둥병에 걸려 1468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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