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궁예의 난

구름위 2013. 8. 22. 10:34
728x90

궁예의 난은 894년(진성여왕 8년)에 명주(강릉)와 철원을 함락시킨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장군으로 추대된 궁예가 895년에 양길과 정식으로 결별선언을 한후 새나라를 세우기 위해 일으킨 난이다.

 

후고구려 세운 미륵불 폭군
 

궁예(성은 김씨:?-918년)는 신라 헌안왕(신라 47대왕)과 궁녀 사이에서 서자(일설에는 신라 48대왕인 경문왕 김응렴의 후궁 소생)로 어느 따스한 단오날에 태어났다. 갓난 아이는 날 때부터 이가 나고 얼굴에 이상한 빛까지 발해 장차 국가에 해를 끼칠 인물이라고 여긴 신하들이 이를 왕에게 고하였다. 그러자 왕은 이 갓난 아이를 당장에 죽여 버리라고 명했다.
 

그러자 사자는 강보에 싸인 아이를 다락 밑으로 내던져 버렸다. 이때 유모가 다락 밑에 있다가 아이를 받았는데, 유모의 손가락이 아이의 눈을 찔러 이후부터 아이는 애꾸가 되고 말았다.
 

요행히 궁예는 왕가에서 도망하여 한동안 외가에 숨어살다가, 10여 세 때 세달사(후에 흥교사:강원도 영월군 대화산 소재)로 들어가 중(법명:선종)이 되었다. 당시의 신라 형편은 국정이 문란하여 각지에서는 도적과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 왕명이 잘 지켜지지 않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날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가다가 왕자가 새겨진 부적을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이를 보고 소년 궁예는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얼마 후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승려 생활을 청산하고 891년(진성여왕 5년)에 기훤의 부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의 사람됨이 거칠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냉대하자 궁예는 그의 휘하를 떠나 양길의 막하로 들어갔다. 이때 양길은궁예가 왕자의 신분인데다 용맹과 지략이 뛰어남을 알고는 그를 매우 신임하여 그에게 자기 군대의 일부까지 내어주는 등 후한 대접을 해주었다.
 

그리하여 궁예는 양길의 군사 3천5백여 명을 이끌고 원주, 치악산, 석남사를 거처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예천), 내성(영월), 울오(평창)등의 여러 현과 성을 차례로 정복하였다.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여 빼앗은 물건들을 자기 추종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어 그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다.
 

이후 궁예 휘하의 군졸 수가 점점 늘어났고, 싸우기만 하면 어김없이 승전고를 울렸다. 그러던 중, 894년(진성여왕 8년)에 명주(강릉)를 함락한 후 군사들을 14대로 나누어 자기 세력 기반을 삼았다. 그리고 이어 철원을 함락하였다. 이때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장군이 된 그는 895년에는 저족(인제), 생천(계구)의 2군을 함락시키고서, 양길과 정식으로 결별 선언을 한 후 한주 관내의 부약(춘천), 철원 등 10여 군.현을 석권하여 강원도 일대를 자기 세력권 아래 두어 제법 나라의 규모를 갖추었다. 896년에 그는 임진강 연암을 공략하여 송악(개성)에 있던 왕건 부자의 투항을 받았다. 이때 그는 왕건을 태수로 임명하였다. 이후 승령(토산), 임강(장단), 풍덕 등의 여러 현을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897년에는 공암(양평), 금포(김포), 형구(강화)등도 점령하였다. 898년에는 평안도와 한산주의 30여 성을 공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궁예의 세력권 남쪽인 국원(충주)등 30여개 성을 점령한 북원의 양길이 옛날의 자기 부하가 크게 성공한 것을 시기하여 궁예의 땅을 먼저 침범했다. 궁예는 899년(효공왕 3년)에 왕건을 보내어 양길 군대의 공격에 반격을 가하여 격파하였다.
 

그 여세를 몰아 그 이듬해에는 양길의 주요 점령지인 국원(충주), 청주(온양), 당성(남양), 괴양(괴선)등을 함락했다. 이리하여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전역을 지배하게 된 궁예는 901년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옛 고구려를 회복할 목적으로 국호를 후고구려라 칭했다. 이는 당시 파탄에 빠져 있던 민중들과 중앙에서 밀려나 반정부 대열에 서 있던 지방 호족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고구려의 진정한 계승자임을 부각시키면서, 틈만 나면 공공연하게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해야 한다고 반복하여 강조하곤 하였다. 901년 어느날 그가 부석사에 들렀을 때 그곳 한쪽 벽에 걸린 신라왕 초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평소 신라에 대한 강한반감을 지니고 있던 그는 칼을 빼어 들더니 그 초상화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904년(효공왕8년)에는 "동방을 전부 무마하여 편안히 한다."는 뜻에서 국호를 마진으로 개정하고, 연호를 무태로 제정하였다. 그리고 정식으로 광평성을 두어 정사를 토의 하였으며,  각 지방에 관청을 두어 나라의 기초를 탄탄히 다져 나갔다.
 

904년 7월에 그는 1천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을 수도로 정한 후 견훤의 군대와 여러 번싸워 이겨 상주 등 30여 현을 차지하였다. 천우 2년인 905년에는 철원에 궁궐과 각종 누대 등을 호화롭게 꾸미고, 궁궐 신축을 기념하는 뜻에서 연호를 성책이라 하였다. 그리고 대동강까지 쳐들어가 평양을 함락하여 신라의 북부 영토를 모두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궁예는 신라마저 아예 전몰시켜 병합해 버리고자 하는 야망에 불타, 신라를 멸도라 부르케 하였으며, 신라에서 도망해 온 장군들이나 문인들이 자기 마음에 조금이라도 거슬리기만 하면 모두 죽여 버리는 등 포악하고 잔악한 행위를 일삼았다.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라 했다. 이 해에 그는 왕건으로 하여금 해로를 타고 내려가 나주를 공략하여 견훤의 해외 교통을 차단시키는 데 성공했다.(일설에는 성격이 포악하고 의심이 많고 성급한 궁예가 충신인 왕건까지도 의심하기에 이르자 왕건 일파는 일단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원정하여 금성을 정벌하였다고 한다.)
 

이쯤 되자, 후삼국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크다고 자만한 그는 연호를 다시 정개라 고치고, 자칭 미륵불이라고 하여 머리에 금관을 쓰고 방포를 걸치고 다녔으며, 맏아들을 청광보살, 막내아들을 신광보살이라고 칭하였다. 성밖으로 행차할 때에는 그가 마치 부처님이나 교주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비단으로 말머리와 말꼬리를 장식한 백마를 항상 타고 다녔다.
 
린 소년소녀들로 하여금 깃발과 꽃을 들고 앞장서 걷게 하였고, 비구승 2백여 명으로 하여금 범패를 부르고 염불하면서 그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이때 그는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살아 있는 부처님이다. 너희들의 악한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노라."
 

애꾸눈인데 따른 자기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참다운 불제자가 되고 싶어 했던 그는 친히 불경 20권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이를 석총 스님에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석총 스님이 이를 사설괴담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하자, 화가난 궁예는 단칼에 죽여 버렸다.
 
 이때부터 성질이 더욱 포악해진 궁예는 왕후마저 의심하여 손에 쥔 쇠몽둥이로 내리쳤다. 이때 왕후가 몸을 빼내서 도망치자, 그녀를 붙잡아 몸을 지지고 국소까지 파열하는 등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왕자들(맏왕자, 막내왕자)이 말리자, "네 놈들도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겠다"  하면서 모두 때려죽이고 말았다.
 

이후 궁예는 걷잡을 수 없이 난폭해져 갔다. 혹독한 폭정으로 부하와 민중을 다스렸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민중을 수탈하여 왕궁을 호사스럽게 장식하였다. 그리하여, 부하와 백성의 신망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918년(정개 5년)에 장군 신숭겸, 홍유, 복지겸, 배현경 등의 군신들이 모의하여 덕망 높은 왕건을 추대하였다. 이를 마지못해 수락한 왕건은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왕궁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사태가 매우 불리한 것을 깨달은 궁예는 변장을 하고서 몰래 성에서 빠져 달아났다, 하지만 그는 부양(평강)에 이르렀을 때 그를 발견한 민중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역사 ,세계사 > 옛 우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유의 난(계유정난)   (0) 2013.08.22
목호의 난   (0) 2013.08.22
애노의 난..견훤의 난  (0) 2013.08.22
장보고의 난   (0) 2013.08.22
대공의 난. 김지정의 난   (0) 2013.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