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목호의 난

구름위 2013. 8. 22.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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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호의 난(1374년)은 고려말기인 1372년(공민왕 21년)과 1374년 두 차례에 걸쳐 제주도의 목호(몽고인)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탐라의 삼별초 난이 평정된 뒤 원나라에서는 군민총관부를 두고 동서에 아막을 세워 소, 말, 약대, 나귀, 양을 방목하게 하고 다루가치로 하여금 이를 감독케 하였다.
 
그 뒤 충렬왕(고려 25대왕)때 탐라가 고려에 부속되어 이름을 제주로 고치고, 목사와 판관을 두어 다스렸다. 그러나 공민왕(고려 31대왕)때에 이르러, 목호의 세력이 매우 강하여, 중앙정부에서 보낸 관리들을 자주 죽이는 등 횡포를 일삼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372년에 명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은 고려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말들을 조공으로 보내기 위해 제주의 말을 징발할 관리들을 보냈다. 이때 목호인 석질리 등이 난을 일으켜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분개하여 외쳤다.
 
"세조 황제가 방축한 말을 어찌 원나라의 적인 명나라에 보낼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는 중앙 정부에서 보낸 간선어마사 유경원과 목사 겸 만호인 이용장을 붙잡아 죽여 버렸다.
 
이 난은 곧 자체적으로 해결책을 강구하여 간신히 마무리는 되었으나, 그 뒤로도 그 세력은 여전히 상존했다.
 
1374년(공민왕 23년)에 다시 명나라에서 말 2천필을 조공으로 바치라고 요구해 왔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는 이번에도 제주로 관리를 보내 다시 말을 징발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목호 석질 리가 필사초고와 함께 다시 난을 일으켰다. 이에 조정에서는 최영 장군을 양광, 전라, 경상 도통사에, 그리고 도병마사에는 염흥방을 각각 임명하여 목호의 반란군을 토벌케 했다.
 
최영과 염흥방은 그 해 8월에 전함 3백14척에 2만5천6백5명의 군사를 싣고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석질리, 필사초고 등을 비롯한 난의 주모자들을 모두 처형하고 난을 평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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