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이징옥의 난

구름위 2013. 8. 22.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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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옥의 난(1453년)은 1453년(단종 1년)에 계유정난에 의한 중앙 정변에 크게 분개한 이징옥이 군사를 이끌고 반기을 든 난이다.
 
이징옥(?-1453년)은 지중추원사 이전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양산이며, 그의 형은 판중추부사 이징석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예와 용맹이 남달리 뛰어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청소년 때는 어머니를 위해 멧돼지를 산채로 잡아오는가 하면 어떤때는 산에서 만난 호랑이를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 보았는데 호랑이가 겁을 집어먹고 고개를 떨구자 화살로 쏘아 죽일 정도로 담력이 컸으며 힘이 장사였다.
 
1416년 8월에 그는 무과 별시에 응하여 장원으로 급제한 뒤 관직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다가 세종 초에 김종서를 따라 북변에 종군하여으며, 1424년(세종 6년)에 황상의 추천으로 경원진 첨절제사가 되어 아산에 침입한 야인(여진족)을 격퇴했으며, 이어 영북진 절제사가 되었다.
 
1436년에 판회령 도호부사가 되어 오랑캐의 추장을 살해하는등 큰 업적을 쌓았으며, 같은 해 판경홍도호부사로 전직했다.
 
1438년 모친상을 당해 한때 사직했다가, 다시 3달 후에 북방의 경비를 담당했으며, 이후 2년 동안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김종서를 도와 서북 4군(지성, 무예, 여연, 무창), 동북6진(경흥, 경원, 온성, 종성, 회령, 부령)개척에 큰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다음 네 명의 조선 장수를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다.
"김종서, 이징옥, 전시귀, 하경복!"
 
북방 개척의 공을 인정받아, 이징옥은 마침내 김종서의 후임으로 함길도 도절제사에 올랐다. 1449년에 그는 그 동안 20여년에 걸친 북방 경비를 담당한 공으로 지중추원사에 승진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다시 함경도 절제사로 부임했다.
 
김종서는 그와 작별하고 돌아서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징옥과 그의 형 이징석은 모두 다 명장이나, 징석은 욕심을 내어 재물을 모으기에 급급한 반면에, 징옥은 청렴으로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로다!"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으면서, 그는 함부로 여진족을 죽이거나 약탈하지 않고 그 지역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높은 지지와 신망을 받았으며, 조정으로부터는 뛰어난 지략가요 담력 큰 장수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그는 가산을 돌보지 않고 오직 변방 경계와 개척에만 모든 정열을 다 바쳤다.

 
또한 그의 처가 죽은 지 오래되어 그를 돌볼 사람이 없었으나 "청백은 무복인의 별호이니라"는 김종서의 조언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고자 애를 썼다. 이를 알게 된 문종은 옷 세벌을 짓도록 하여 그에게 하사하기도 하였다. 하루는 여진족이 그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재물과 여자를 보내 유혹을 해온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추상 같은 호령을 하여 그들을 당장 내쫓아 버렸다.
 
1453년(단종 1년) 10월에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을 쳐죽이고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도에 압송한 뒤 정권을 장악하여 국가의 주요 업무를 통괄하여 장악하였다.
 
그런후, 그는 이어 김종서 일파를 모두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 대상에는 김종서의 천거로 함길도 도절제사에 오른 이징옥도 포함되었다. 수양대군은 이징옥을 파면시키고, 그 자리에 박호문을 대신 앉혔다.
 
수양대군은 자기 일파인 박호문을 은밀히 보내 군사 반란과 외침을 미리 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박호문은 근무지로 가서 후임자로서 전임자인 이징옥에게 전입신고를 하면서, 이징옥에게 한양으로 올라오라는 소환장을 보여주었다. 이에 이징옥은 멋도 모르고 자기 직을 박호문에게 내어준 다음 호위 병력 약간만 거느리고 한양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런데 도중에 그는 우연히 계유정난에 관해서 얻어듣게 되었다. 그때서야 그는 중앙에 정변이 일어났으며 김종서가 사살되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자기를 파면시킨 이유가 김종서의 심복이라는 오해 때문이며, 자기를 한양으로 불러들인 것이 자기를 처형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도 모두 눈치채게 되었다.
 
이에 크게 분개한 이징옥은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수양대군 일파에게 반기를 들기로 작정하고 곧장 발길을 돌려 예전의 근무지로 돌아갔다. 그는 먼저 선수를 쳐서 박호문을 포박하여 당장에 목을 베어 죽여버린 다음, 자기의 부하들을 이끌고 반기를 들어 난을 일으켰다.
 
그는 병마를 이끌고 두만강 상류쪽으로 북진하여 종성으로 가서 그곳을 본거지로 삼고 주둔하면서 스스로 대금황제라고 칭하고, 군병력을 정비했다. 그런 다음 근방의 여진족들에게 격문을 보내 후원을 요청하였다.
 
장차 그는 두만강 건너편의 오국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근처의 여진족 및 한민족을 통합하여 "대금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웅대한 포부를 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징옥의 적은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에 있었다. 이징옥이 대병력을 이끌고 오국성으로 향해서 북상하는 도중이었다. 어느날 두만강 상류에서 하룻밤을 쉬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불안한 마음에 잠이 들지 못한 채 마루에서 방어태세를 취한 채 앉아 있었다. 이때 그의 아들 하나가 졸다 말고 눈을 번쩍 뜨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이 피투성이가 된 불길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자 이징옥은 아들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안심시켰다.
"거사를 앞두고, 무슨 그런 잡념을 하느냐? 염려 말거라."
 
바로 이때였다. 종성판관 정종, 호군 이행검등이 이끄는 부하들이 이징옥 부자에게 덤벼들었다. 위기에 처한 이징옥은 얼떨결에 마당으로 뛰쳐나온 다음 담을 뛰어넘어 이웃 민가로 도망쳐 숨었지만, 곧 들키고 말았다.
 
이때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처절한 혈투극을 벌였으나, 그만 외팔을 잘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고 오른팔 하나로 끝까지 싸웠다. 그러다가 결국 체포되어 그의 아들 셋과 함께 처형되고 말았다.
 
이로써 이징옥의 난은 의외로 너무 싱겁게 평정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난은 조선인으로서 황제를 자칭한 것과 또 이씨 왕조의 중앙정권에 대해 처음으로 지방적 반란을 일으켜 지방의 민심을 자극하고 이로 인하여 후일 이시애의 난의 선구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한사건이었다.
 
이징옥의 난(1453년)은 1453년(단종 1년)에 계유정난에 의한 중앙 정변에 크게 분개한 이징옥이 군사를 이끌고 반기을 든 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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