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애노의 난..견훤의 난

구름위 2013. 8. 22. 10:33
728x90

 

애노의 난은 889년(진성여왕 3년)에 애노가 원종과 함께 사벌주(상주)를 중심으로 일으킨 난이다.
 
<풍기문란한 여왕이 흉년 세금 독촉 웬 말이냐!>
 
신라 51대왕 진성여왕은 887년에 재위에 올랐다. 그녀는 경문왕의 딸이자 정강왕의 누이동생이었는데, 정강왕이 후사 없이 죽자 그의 유조로 즉위하였다. 재위초기에 그녀는 각간 위홍과 대구 화상에게 명하여 향가집 "삼대목"을 편찬케 하는 등 문화 사업에 힘쓰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여왕은 원래 소행이 좋지 못하였다.
 
그녀는 즉위하기 이전부터 관계를 맺어온 각간 위홍을 떳떳하게 궁내로 불러들여 사통했으며, 위홍이 죽은 후에는 궁중에 미모의 소년들을 남몰래 불러들여 음행을 일삼았다. 또한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맡김으로써 신하들의 불만을 샀으며, 뇌물을 받아 챙기는 등 왕실의 풍기를 문란케 하는 주역을 담당하였다. 이로써 궁궐에서는 뇌물 주고받기가 공공연히 이루어졌고, 상벌과 관리 임명이 공정하지 못하여 기강이 헤이 해질 대로 해이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이 부패는 곧 지방으로까지 급속도로 파급되어 갔다. 여기에 흉년까지 겹쳐 주, 군에서 공부를 바치지 않아 부고가 비고 국가 재정이 바닥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에 관리들은 세금 독촉을 심하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지방의 민심은 심히 동요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 틈을 타서, 애노는 889년(진성여왕 3년)에 원종과 함께 사벌주(상주)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정은 이를 초기에 토벌하지 못함으로써 난은 점점 크게 확대되고 말았다. 반란군은 내마 영기의 군대를 물리쳤으며 성주우운을 전사케 하는 등 한 때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우련이 이끄는 왕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러나 891년에 지방에서는 조세가 걷히지 않고 병세가 퇴폐하여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게 되었다. 즉, 북원(원주)의 양길과 궁예, 죽주(죽산)의 기훤, 완산의 견훤 등이 봉기하였는데, 왕군이 이를 토평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신라 왕조는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렇듯, 신라 왕권에 대한 도전은 신무왕 이후에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진성여왕이 즉위하고 나서부터는 그 양상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잇다. 즉, 진성여왕이 즉위 이전까지는 모반이 주로 귀족들에 의해 저질러졌던 데 비해, 진성여왕 즉위 이후부터는 일반 백성들에 의해 모반이 일어났던 것이다.
 
신무왕 이후의 모반사건을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841년(문성왕3년) 일길찬 홍필이 모반하려 했다가 발각되자 해도로 도망쳐 버렸으며, 846년(문성왕8년)에는 장보고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847년 5월에 양순, 흥종등이 모반하다 복주되었으며, 849년(문성왕11년) 9월에는 이찬 김식일, 대흔 등이 모반하다가 발각되어 복주되었고, 대아찬 흔린이 이에 연좌어 처벌을 받았다.
 
 866년 (경문왕6년) 10월에는 이찬 윤흥이 그의 아우인 숙흥, 계흥과 함께 모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대산군으로 도망쳤으나 곧 붙잡혀 처형되었다. 868년(경문왕 8년)1월에는 이찬 김예, 김현 등이 모반하다가 역시 사형되었다.
 
그리고 874년에는 이찬 근종이 모반을 일으켜 궁궐까지 쳐들어갔으나 금군에게 격파되자 잔당을 이끌고 밤에 성을 빠져 달아나다가 붙잡혀 거열형(죄인의 다리를 두 수레에 각각 묶어 반대 방향으로 달리게 하여 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해졌다. 879년(헌강왕 5년)에는 일길찬 신홍이 모반하다가 복주 되었으며, 887년(정강왕 2년)에는 한주에는 이찬 김요가 모반하다가 평정된 바 있다.

 

 견훤의 난

 

견훤의 난은 견훤이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892년(진성여왕 6년)에 반기를 들어 일으킨 난이다.

 

후백제 세우고 양위 문제로 맏아들에 쫓겨나
 
상주 가은현(문경) 농민의 아들(아자개의 아들)이라고 하여 진훤이라고도 부르는 견훤(867-936년)은 20세에 군인이 되었다. 그는 수도 경주로 가서 신라 서남해 방위에 용맹을 떨쳤다.
 
그 공이 인정되어 비장이 된 그는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892년(진성여왕 6년)에 반기를 들어 난을 일으켰다. 그는 정변, 살해극, 가렴주구, 시기, 모함, 질병, 흉년, 기근 등으로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정치사회현실을 이용하여 반란군 5천명을 이끌고 여러 성을 공격한 다음 무진주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기반을 닦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896년에는 서남 지방에 적고적(붉은 바지를 입고, 스스로 남달리 행동했으므로 그렇게 불렀다.)이라는 도적이 일어나, 국도의 서부 모량리까지 쳐들어와 닥치는 대로 재물을 약탈해 갔으며, 각지에 할거하는 호족세력들이 발호하여 기승을 부렸다. 그러자 진성여왕은 스스로 국정을 바로잡기가 힘듦을 통감하고서, 897년(진성여왕 11년) 6월에 태자인 김요(정강왕의 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 이가 바로 신라 52대왕 효공왕이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왕군과 반란군의 싸움이 아니라, 군웅끼리 싸움과 접전이 벌어지는 양상을 띠었다. 견훤은 900년(효공왕 4년)에는 양길을 회유하여 그에게 비장이라는 관직을 주고 서북지방을 공략케 하여 점령하였다. 그는 완산주(전주)에 입성하여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후백제(후백제라고 하는 것은 백제와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부르는 호칭일 뿐이었다.)
 
왕이라고 하고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 중국의 오월국과도 국교를 맺으면서, 궁예 및 왕건과도 자주 충돌하며 세력 확장에 힘썼다. 그러자 905년에 효공왕은 반란군들과 싸우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고 모든 성주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
 
"나가서 마주 싸우는 것을 삼가고 굳게 성을 지키라."
 
이리하여 결국 한반도는 신라왕조와 궁예의 태봉국, 견훤의 백제국으로 3분되었다. 궁예는 고구려의 부흥을 꾀하여 철원을 중심으로 강원, 경기, 황해, 평안, 충청 일부 등지를 영유하였고, 견훤은 백제의 부흥을 꾀하여 전주를 중심으로 금강 유역의 충청도 일부와 전라도 전체를 차지했으며, 신라 왕조는 경상도 일대를 통치했다.
 
927년(경순왕 1년)에 견훤은 신라의 국도를 기습하여 경주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어 유흥을 즐기고 있던 경애왕을 사로잡아 자살하게 만들었고, 경애왕의 친족 중 아우뻘 되는 김부를 왕위(경순왕:신라 56대왕)에 앉혔다.(그러나 경순왕은 전왕인 경애왕처럼 고려와의 화친을 도모 했으며, 935년 11월에는 고려 태조에게 귀부함으로써 신라 1천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로써 견훤은 후삼국 중에서 한때 가장 강대한 국가로서 그위세를 크게 떨쳤다. 그러나 929년 고창에서, 930년 안동 전투에서 왕건에게 참패한 후부터 형세가 기울어졌다. 게다가 유능한 신하들이 왕건에게 투항했으며, 934년 웅진(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귀순하고 말아 그의 위기의식은 한층 고조되었다. 고희를 앞둔 견훤은 나약해져 935년에 10여 명의 아들 가운데서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맏아들 신검이 935년에 반기를 들고일어나, 아버지 견훤을 김제 금산사 미륵전에 가둬 버리고, 동생 금강을 살해해 버렸다.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던 견훤은 갇힌 지 3개월만인 935년 6월에 측근을 대동하고 몰래 탈출하여 나주로 갔다가 수로로 도망하여 고려에 귀순하였다. 이때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통곡하였다.
 
"내가 자식들을 잘못 둔 죄로 대낮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었도다!"

'역사 ,세계사 > 옛 우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호의 난   (0) 2013.08.22
궁예의 난  (0) 2013.08.22
장보고의 난   (0) 2013.08.22
대공의 난. 김지정의 난   (0) 2013.08.22
조선시대 왕의 하루일과  (0) 2013.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