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대공의 난. 김지정의 난

구름위 2013. 8. 2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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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난은 768년(혜공왕 4년)에 대공이 대렴과 함께 일으킨 난이다.
 
"흉년에도 나 몰라라 방탕한 왕 타도하자!"
 
경덕왕의 맏아들인 혜공왕(신라 36대왕)은 8세때인 756년에 즉위하여 한때 태후가 섭정을 맡았다. 재위 중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났으며 흉년이 심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런 와중에 여러 모반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왕은 사치와 방탕에 빠진 채 선정을 베풀지 못해 백성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들었다. 자연히 정치는 문란해졌고 나라의 기강도 흐트러지게 되었다.
 
이때, 일길찬이라는 벼슬에 있던 문신 대공이 768년 (해공왕 4년)에 그의 동생인 아찬대렴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그는 봉기군을 이끌고 쳐들어가, 왕궁을 겹겹이 포위하고서 왕의 항복을 받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의 만만치 않은 반격을 받았다. 봉기군과 정부군은 계속 대치하며 신경전을 펼쳤다. 정부군은 이를 잘 막아냈다.
 
그러다가 결국 봉기군은 정부군에게 패하여 대공은 주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그 후 일어나는 일련의 난들, 즉 김은거, 염상, 정문 등의 모반에 기폭제 역할을 해 주었다. 가령, 775년에 이찬 김은거가 모반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사형되었으며, 같은 해 8월에 이찬 염상과 시중 정문이 모반하다 역시 체포되어 사형된 바 있다.
 
 김지정의 난
 

김지정의 난은 780년(혜공왕 16년)에 김지정이 일으킨 난이다.

 

780년(혜공왕 16년)에 왕족이면서 이찬 벼슬 자리에 있던 김지정이 난을 일으켰다. 그는 봉기군들로 하여금 궁궐을 철통같이 에워싸게 한 후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봉기 군은 마침내 혜공왕(신라 36대왕)과 왕비를 사로잡아 처형을 시키는 등 한때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상대등(귀족 대표로서 수상의 직책)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 등의 반격으로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는 곧 체포되어 주살되고 말았다.
 
김양상은 내물왕의 후손이요 효방의 아들로서 764년에 아찬을 거쳐, 774년에 상대등이 되었는데, 780년에 왕과 왕비가 살해되자, 아찬 김경신과 함께 김지정을 비롯한 모반의 무리를 소탕하였다. 그리고 혜공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바로 신라 하대의 첫 왕인 선덕왕(신라37대왕)이다.
 
신라의 역대를 3분하여 시조 박혁거세로부터 28대 진덕왕까지의 성골 계통인 28왕을 상대, 제29대 무열왕으로부터 36대 혜공왕까지의 무열왕 직계인 8왕을 중대, 그리고 37대 선덕왕으로부터 56대 경순왕까지의 방계 왕족인 20왕을 하대라한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난을 진압하는데 함께 공을 세운 김경신을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자기 아버지를 개성대왕에, 자기 어머니를 정의태후에 각각 추존하였으며, 재위5년 동안(780-785년)동안 선정을 베풀고자 애를 썼다.
 
그런데 그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그 유골을 동해에 뿌려달라."
 
당시에 화장은 불법이었지만, 그의 유언은 그대로 집행되었다.
 

 김언승의 난

김언승의 난은 809년(애장왕 10년)7월에 김언승이 김제옹과 함께 일으킨 난이다.

 

<애장왕을 살해하고 외삼촌이 즉위>
 
통일신라 때 김경신(원성왕, 신라 38대왕)이 왕위에 올라 재위 4년째인 788년(원성왕 4년)에 독서삼품과(과거제의 효시)를 두어 과거법을 제정하였으며, 이외에도 790년에는 벽골제를 증축하고 전읍서에 향2인을 두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위 중 791년에는 이찬 제공(791년에 붙잡혀 사형됨)이 모반을 일으키는 등 몇몇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게다가 왕은 태자를 두 번이나 세웠으나 이들(김인겸, 김의영)이 모두 일찍 세상을 뜨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셋째 아들 김예영이 있었으나, 왕은 장손 김준옹(소성왕)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그러나 소성왕(신라 39대왕)은 재위 1년도 채 되지 못하여 승하해 버렸다. 그러자 태자인 애장왕이 13세로 신라 40대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왕의 외삼촌 되는 김언승이 병부령이라는 벼슬 자리에 올라 정사를 모두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언승과 그의 동생 김제옹은 조카인 애장왕이 장성하여 친정을 하게 될 경우 자기들이 거세될까 두려워 내심 초조하고 불안했다. 이런 염려와 불안은 그들로 하여금 왕에게 칼을 들이밀게 했다.
 
마침내 김언승(당시 병부령).김제옹(당시 이찬) 형제는 애장왕 10년(809년)7월에 난을 일으켰다. 그 해에는 한발이 심하여 백성들의 생활은 매우 곤궁했고 민심이 흉흉했다. 이런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하여 김언승.김제옹 형제는 궁중으로 쳐들어갔던 것이다.
 
삽시간에 궁중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애장왕은 동생 김체명과 더불어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 숙부인 김언승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언승은 왕을 살해한 후, 궁중 안에다 크게 잔치를 벌여 신하들에게 춤까지 추게 하는 등 호탕하고 현란한 유흥을 벌인 다음 헌덕왕 (신라41대왕)에 즉위하였다.
 

 김헌창의 난

 

김헌창의 난은 김헌창이 자기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옛백제 땅인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822년 3월에 일으킨 난이다.

 

<폭우 때문에 즉위 못한 부친의 한 풀어보자!>
 
선덕왕(신라37대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김지정의 난을 함께 수습한 공신 김경신을 중용하여 상대등으로 삼았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왕은 왕족인 김주원을 등용하였다. 그러자 김경신이 꿈을 꾸었다. 사모를 벗고 갓을 쓴 채 12줄 거문고를 끌어안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우물로 들어가는 꿈이어서 그는 옥에 갇히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심히 걱정했다. 그런데 여삼이라는 자가 찾아와 이렇게 해몽을 해주었다.
 
"사모를 벗은 것은 더 이상 높은 자가 없다는 것이고,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며, 12줄 거문고를 않은 것은 12대 손까지 대를 이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대궐로 들어갈 징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김경신은 이렇게 말했다.
 
"나보다 한 등급 위에 김주원이 있는데, 그가 왕위에 오를 것일세."
 
그런데 이 꿈을 꾼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덕왕이 세상을 떠났다(785년). 왕의 아들이 없었으므로, 궁궐에서는 무열왕계 왕족중에서 가장 가까운 친척인 김주원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우고자하였다. 가장 가까운 친척인 김주원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주원의 집이 북천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김주원이 북천을 건너지 못하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김경신이 먼저 궁궐에 들어가 왕위(원성왕, 신라 38대왕)에 오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김주원은 세력 다틈에서 밀려나 명주(강릉)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김헌창은 계속 중앙 관직에 남아 활동하였으며, 807년에 이찬으로서 시종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당대 실세요, 실력자인 김언승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급성장 하였다. 그런데 김언승이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죽이고 자신이 헌덕왕(신라 41대왕)으로 즉위하는 바람에, 이찬 김헌창은 자연히 중심 세력에서 밀려나 813년 1월에 무진주의 도독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817년 가을에는 흉년으로 굶어죽은 자들이 속출하였다. 이래저래 살아가기 힘든 백성들이 819년에 전국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821년에도 봄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 중에는 자손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틈을 타서 평소 자기 부친 김주원이 귀족들의 반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과 자신이 좌천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김헌창(당시 웅천주 도독;821년에 발령을 받음)이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옛 백제 땅인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822년 3월에 난을 일으켰다. 그는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경운이라건원하고서, 무진주(광주), 완산주(전주), 사벌주(상주), 청주(진주)의 4주 도독과 국원(충주), 서원(청주), 금관(김해)의 사신들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이때 청주 도독 향영은 불복하고 추화군으로 도망쳐 버렸다. 게다가 한산(경주), 우두(춘천), 삽량(양산), 패강, 북원등에 있는 군사들을 동원하여 대항하는 중앙 귀족들의 연합세력에 의해 반란군의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되었다. 헌덕왕은 우선8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왕도 팔방을 수비하게 한 다음, 일길찬 장웅을 먼저 출동시키고, 이어 잡찬 위공과 파진한 제릉을 보냈으며, 그 다음에 이찬 균정과 잡찬 웅원 및 대아찬 우징 등에게 군사를 주어 적을 막아 치게 하였다.
 
또한 각간 충공과 잡찬 융응에게는 문화 관문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때 김헌창도 반란군을 정비한 다음 요소요소에 장수들을 파견해 왕군에 대비 시켰다.
 
그러나 반란군은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잘 훈련된 중앙 군대의 정규군을 이길 만한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병졸로 동원된 양민들이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해 주지 아니 했기 때문에, 왕군과의 싸움에서 계속 밀리게 되었다.
 
왕군은 먼저 장웅이 도동현에서 반란군과 접전하여 격파시킨 것을 필두로, 위공과 제릉이 장웅과 합세해 삼년산성(보은)을 공격해 역시 승리를 장식한 다음, 속리산으로 군사를 돌려 그곳의 적도 격멸시켜 버렸다. 왕군의 균정 등도 성산에서 싸워 반란군을 격멸시킨 다음, 3군을 웅진으로 모아 반란군과 대접전을 벌인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반란군의 주력 부대는 격파되었다.
 
이때 김헌창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여 성으로 도망쳐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마지막 저항을 했다. 왕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로부터 열흘 만에 성이 함락 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김헌창은 사태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며 자기는 사형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감지하고 자살하고 말았다. 성을 함락한 왕군은 김헌창의 시신을 찾아내어 주형을 가했으며, 그 친족과 남은 무리 2백39명을 모두 처형했다. 이때가 822년 이었다.
 
그러나 김헌창의 반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헌창이 죽은지 3년이 지난 825년(헌덕왕 17년) 1월에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고달산적(여주), 수신 등에서 모은 농민군 1백여명과 함께 난을 일으켜, 평양(양주) 도읍을 세우기 위해 우선 북한산주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싸움에서 한산주 도독 총명은 반란군을 대파하고 김범문 부자 2대에 걸쳐 일어난 모반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김명의 난

김명의 난은 838년(희강왕 3년) 1월에 김명이 이홍과 함께 일으킨 난이다.

<왕을 자결케 하고 임금 되어 1년 천하>
 
헌덕왕의 뒤를 이은 흥덕왕(신라 42대왕)이 재위 11년만에 승하하자, 한동안 잠잠하던 왕위 쟁탈전이 다시 벌어졌다. 흥덕왕이 아들이 없어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왕의 아우인 균정과 조카 제륭이 왕위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시중 김명과 아찬 이홍과 배훤백 등은 제륭을, 균정의 아들 아찬 김우징과 조카 김예징과 무주도독 김양 등은 균정을 각각 받아들었다. 처음에는 균정의 무리가 기선을 잡아 궁궐을 호위하였으나, 이어 제륭의 무리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공격을 가했다. 이때 김양이 소리쳤다.
 
"새 임금이 여기 계시는데, 너희들은 어찌 감히 이와 같은 역적질을 하느냐?"
 
그러면서 활을 쏘아 제륭의 군사10여명을 쓰러뜨렸다. 그러자 제륭의 부하인 배훤백이 활을 쏘아 김양의 다리를 맞혔다. 이어 벌어진 싸움에서 균정 쪽이 불리하게 되었다. 이때 균정은 김양과 김우징에게 일단 피신해 훗날을 도모하라고 권했다. 김양과 김우징은 간신히 뭄을 피해 달아났으나, 균정은 이때 목숨을 잃었다.
 
균정의 무리를 제압한 제륭은 836년에 신라 43대 왕위(희강왕)에 올랐다. 그러나 희강왕은 왕위에 오른지 3년만인 838년 1월에 생애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가 신임했던 상대등 김명과 시중 이홍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김명은 반란군으로 하여금 왕의 측근을 모두 죽이고 왕을 위협해 스스로 자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김명은 838년에 당당히 신라 44대 왕위(민애왕)에 올랐다.
 
한편 김우징과 김양은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배려로 군사 5천명을 얻어 무주를 습격했다. 민애왕(김명)은 왕군을 급파하여 대항케 했으나, 왕군은 격파되고 말았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출정해 있었던 터라 피로에 찌든 김우징의 군사들이 일단 청해진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838년 12월에 김우징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왕군을 공격해 왔다. 김우징이 김양을 평동장군으로 삼고, 엽장, 장변, 정연, 낙금, 장건영, 이순행 등 6명의 장수를 포진하고서 맹공격을 가해 오자, 김명은 왕군을 증파하여 이에 맞섰다. 그러나 김양순이 무주군을 이끌고 김우징 군에 투항해 버리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김양의 군대가 무주 혈야현 북주에 이르자 대감 김민주는 왕군을 이끌고 가서 이에 대적했다.
 
김양군은 장군, 낙금, 이순행이 기병 3천명으로 김민주가 이끄는 왕군을 대파하였으며, 그리고 계속 진군해 839년1월 19일에는 달구벌에 이르렀다. 이에 김명은 이찬대흔, 대아찬 윤린, 의훈 등을 보내 김양의 군을 막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때(839년 윤1월) 김명은 서교의 나무 아래 있다가 자기를 호위하고 있던 군사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홀로 월유택에 숨어 있다가 김양의 군사들에게 발각되어 시해당하고 말았다.
 
김양의 군대는 궁궐까지 수복한 다음 839년 4월 김우징을 맞아들여 즉위시켰다. 그가 바로 신라 45대왕 신무왕이다. 그러나 신무왕은 즉위한 지 불과 석달 만인 839년 7월 2일에 등창으로 인해 숨을 거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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