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장보고의 난

구름위 2013. 8. 22. 10:30
728x90

장보고의 난(846년) - 장보고의 난은 장보고가 846년(문성왕 8년)봄에 청해진을 거점으로 일으킨 난이다.
 
<천민신분 때문에 내 딸을 왕비로 못 받아들인다고?>
 
"활을 잘 쏜다"고 하여 별명이 궁복, 궁파였던 장보고(?-846)는 일찍이 친우 정연과 함께 당나라 서주로 건너가 무령군에 입대한 후 무술장교가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황해에는 중국인 해적이 횡행하여 신라의 해안과 상선을 습격하여 재물은 물론 사람들까지 약탈해 와서 이들을 중원지방의 노비로 팔아 넘기는 등 갖은 횡포를 일삼았다. 이에 장보고는 의분에 못이겨828년(흥덕왕 3년)당의 관직을 과감히 내던져 버리고 돌연 귀국하였다.

그리고 그는 해적들의 인신 매매 행각을 근절시키고, 해상권을 통괄하여 신라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남해와 동지나 해상의 교통요충지인 완도에 해군기지, 즉 진을 건설하여 서해 무역로를 감시해야 한다고 흥덕왕에게 강력히 충언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왕의 윤허를 얻어내어 군사를 이끌고 해로의 요충지인 청해진(바다를 깨끗이 한다는 뜻)에 진을 설치하고 완도 가리포에 성채를 쌓고 항만 시설을 보수하여, 해군의 전략적 거점을 마련하였다.

장보고는 왕에 의해 청해진 대사에 임명된 후 수하의 수병을 훈련시키고 인근 지방민들을 모았다. 그리고 제 스스로 찾아오는 빈민들과 유민들을 모아 민병 대를 조직하여 얼마 안가 1만 여명의 병사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는 이 군대를 훈련시켜 본격적인 해적 소탕 작전에 들어갔다. 그는 뛰어난 전략을 구사하여 해적을 완전 소탕하여 동지나해 일대의 해상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장보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군사적 세력을 키우면서 선박을 많이 만들어서 그것으로 청해진을 중심으로 일종의 거대한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중국, 일본양국 사이에 개입해 동방 무역과 해상권을 주도해 나가고자 했다. 이때 무역상들의 수출품들은 주로 구리거울 등과 같은 금속제품류, 모직물류, 도자기류, 피혁제류, 문방구류, 그리고 향료, 염료, 안료, 풀솜, 비단 등과 같은 동남아시아 및 서아시아의 지역 특산품이었다.

837년(희강왕2년)에 왕위 계승다툼에서 밀려난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피신해 오자, 이를 맞아들여 보호해 주었다. 이때 정권욕에 사로잡혀 있던 김우징은 온갖 감언이설로 장보고를 설득하여 군사 지원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중앙 정치에 관여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장보고는 침묵을 지킬 뿐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희강왕의 시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김양으로부터 희강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김우징이 다시 한 번 간곡히 장보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장보고는 숙고 끝에 이에 동조했다.
"옛 사람의 말에 의를 보고 실행하지 않으면 용맹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내 비록 용렬하지만, 오직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그리하여 김우징은 장보고가 내어준 5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838년 3월에 김양, 정양과 함께 무주와 남원을 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군사들이 오랜 출정으로 피로해 하였으므로 일단 청해진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이 해 12월에 군사를 일으켜 대흔, 윤린, 의훈 등이 이끄는 왕군을 격파하고 김명(민애왕)을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그리고 김우징은 839년에 신라 45대왕(신무왕)에 올랐다. 그가 등극하게 된 것은 장보고의 공이 컸던만큼, 왕은 곧 장보고에게 감의군사라는 작호와 식읍 2천호를 상급으로 내렸다. 그 뒤 신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도 장보고의 공을 기려 그에게 진해장군이라는 작호를 내렸다.
 
그리하여 장보고는 공식적으로 해군력을 장악하여 중앙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당나라, 일본과의 국제 교역도 더욱 넓혀 나갔다. 840년(문성왕2년)에는 무역선과 함께 회역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서신과 공물을 보내어 교섭을 시도해 보는 등 사무역을 통한 정치적 외교를 시도해 보기도 했다.

845년(문성왕7년)3월에 문성왕은 군사력이 탄탄한 장보고의 세력을 감안하여 장보고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왕족과 귀족들이 일시에 들고일어나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그들은 장보고의 출신이 천한 해도인 이라는 이유를 들어 극구 반대했다. 물론 장보고의 출신이 벌족이나 골품이 아니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강성해진 장보고의 세력이 중앙에까지 미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와 불안이 그들의 더 큰 반대 이유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장보고는 분개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은 신라인의 기상을 해외에 떨쳤고, 더욱이 중국 적산 촌에 법화원이라는 대사찰을 건립하여 '신라정신'을 국내외에 발양하여 국위를 선양시켰으며, 김우징의 피난 시절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때 자기 딸의 차비영입을 김우징이 굳게 언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분 하나 때문에 자기 딸이 문성왕의 차비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청해진의 사병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서 846년 봄에 청해진에서 반기를 들었다.

이때 부패한 왕실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은 대부분 민족적인 지도자 장보고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당장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대책 마련에 부심할 뿐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때 무주 사람 염장이 선뜻 나서서 이렇게 아뢰었다.
 
"조정에서 만일 저의 말을 들어준다면, 저는 단 한 사람의 군사도 번거롭지 않게, 맨 주먹으로 궁복의 목을 잘라 바치겠습니다."

이에 왕은 자객 염장으로 하여금 거짓 투항하게 하여 청해진으로 투입시켰다. 장보고는 원래 염장을 아끼던 터라, 아무 의심 없이 그를 상객으로 앉히고 함께 술을 마시며 시국에 대해 의논했다. 장보고가 술이 거나하게 취할 무렵, 염장은 장보고의 칼을 빼앗아 그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그리고는 반란군의 무리를 설득시켜 그들도 굴복시켰다.

그 후, 장보고 휘하에 있던 부장 이창진 등이 난을 일으켜 왕군에 대항했으나, 이들 역시 무주의 별장 염문이 이끄는 부대와 귀족들의 사병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에 의해 평정되고 말았다.

'역사 ,세계사 > 옛 우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궁예의 난  (0) 2013.08.22
애노의 난..견훤의 난  (0) 2013.08.22
대공의 난. 김지정의 난   (0) 2013.08.22
조선시대 왕의 하루일과  (0) 2013.08.07
조선팔도에 퍼진 상평통보   (0) 2013.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