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의 난
정여립의 난(1589년)은 정여립이 정옥남, 변사, 연령, 박춘룡 등과 함께 왕위 찬탈을 목적으로 1589년에 일으킨 난이다.
정여립(1546-1589년)은 정희중의 아들로 전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인백이고, 본관은 동래이다. 그의 성격은 사납고 잔인했으나 통솔력이 있었고 두뇌가 명석하여 경사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전주남문 근교에 살았다. 그는 청소년 시절에 간혹 익산군수였던 아버지의 일을 대신하여 일을 처리할 정도로 영특하고도 조숙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아전들은 군수보다는 그의 아들 정여립을 더 어려워했다. 1567년(명종 22년)에 그는 진사가 되었으며, 1570년(선조 3년)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스승의 총애를 받았다. 박순도 그의 재능을 아껴 친자식처럼 돌봐주었다.
1583년(선조 16년)에 그는 예조좌랑이 되었다. 이이는 그가 죽기 4개월 전인 1583년 9월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10월 상경하여 전날 자기를 쫓아낸 이들을 포용하면서 다음 3인재를 천거하였다.
`허봉의 재주, 정여립의 박학과 다재, 정구의 유능.`그러나 동인과 서인 사이에서 조정과 화합에 힘쓰던 이이가 1584년 1월에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자 원래 서인이었던 정여립은 스승 이이를 배반하고, 당시 집권 력인 동인에 빌붙어 아부하여 1584년 3월에 수찬이 되었다.
그런데 1585년 5월에 의주목사 서익이 상소해서, 박순, 정철, 이산보, 박점 등을 변호함과 동시에, 정여립을 탄핵하였다. 서익은 또한 노수신,유성룡의 과오도 지적하면서, 송응개, 허봉, 박근원을 석방시킬 것과 외방에 내보낸 사람들을 다시 조정에 불러 올릴 것 등을 주청하였다. 이를 간략히 정리해 보자면, 그 동안 서인에 밀려 외방에 나가 있던 심의겸 등을 비롯한 서인을 입각시키고 노수신, 유성룡, 정여립 등의 동인들을 몰아내자는 것이었다.
그러자 동인들이 들고 일어나 일제히 서익을 모함하였다. 이때 정여립도 박순, 성혼 등을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선조는 매우 괘씸하게 여겼다. 아무튼 이 소란 통에 유성룡은 예조 판서의 직에서, 정여립은 수찬의 직에서 각각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정여립은 고향인 전주로 내려가 버렸다. 그러나 1585년 6월에 영의정 노수신의 비호 아래 박근원, 송응개, 허봉 등의 동인들이 석방되고, 반면에 서인 심의겸이 8월에 파직당하자, 동인의 기세가 다시 높아졌다.
1587년(선조 20년) 9월에 심의겸이 죽은 뒤에도 동인과 서인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지만, 노수신이 영의정에, 이산해가 좌의정에, 유성룡이 병조판서에, 그리고 이발이 대사간에 각각 오르는 등 조정의 주요 요직을 동인들이 두루 차지해 여전히 그 건재함을 과시했다.
1589년 10월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 재령군수 박충간, 안악군수 이축, 신천군수 한응인 등이 상소하여, 전에 수찬이었던 정여립의 모반을 밀고하여 탄핵하였다. 그러자 선조는 조정 대신들을 모두 불러 앉힌 다음 정여립의 사람됨됨이가 어떠하냐고 의견을 물었다.
이때 영의정 유전, 좌의정 이산해는 잘 모르겠다고 답변했으며, 우의정 정언신은 `독서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밖의 일은 잘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그리하여, 선조는 선전관, 의금부 도사 등을 현지에 보내 정여립을 감시하도록 했으며, 정여립의 조카 이진길을 잡아 옥에 가두는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그 뒤로도 동인측에서 정여립을 등용시키자는 의견을 여러 번 제시했으나, 그때마다 선조는 그 제의를 물리쳐 버렸다. 한편, 전주에 내려간 정여립은 많은 선비들과 접촉하였다. 점차 그의 명망이 높아지자 전주 감사나 수령들이 앞다투어 그를 찾아와 인사를 하였다.
이에 욕심이 생긴 그는 정권을 잡기 위해 여러 모사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는 임꺽정의 활약 무대였던 황해도에도 손을 뻗쳐 안악의 변숭복, 박연령 등과도 손을 잡아 황해도인 수백 명을 동지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죄를 지은 뒤 이름을 바꾸고 호서, 호남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정여립을 스승으로 섬기겠다고 하면서 황해도 사람들을 많이 소개 시켜 준 해주 사람 지함두와도 손잡고, 그 외 송익필, 운봉의 요승인 의연 등과 같은 기인들 및 모사들을 휘하에 넣은 다음 변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그와 동시에 그는 (정감록)의 참설을 이용하는 한편, 이적 등을 조작하여,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말을 퍼뜨리며 민심을 교묘히 선동하였다.
요승 의연은 정여립과 미리 짜고 `목자망 전읍흥`이라는 참설의 여섯 글자를 옥판에 새겨 지리산 석굴 속에 숨겨 놓은 다음, 그의 동료인 도잠, 설청 등으로 하여금 그 옥판을 찾아내도록 하여 참설을 더욱 신빙성 있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각지의 이름난 산을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요동에 있을 때 동쪽 나라에 왕기가 있어 와 보니, 그게 바로 전라도 전주의 동문 바깥에 있었다."
정여립도 아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이렇게 떠들어댔다.
"내 아들 옥남의 등에 본래 왕이란 글자가 찍혀 있었다."
때로는 성리학의 이념에 배치되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임금 한 분만을 하늘처럼 섬겨야 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두 임금을 섬기면 어떤가? 누구를 임금으로 섬기든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다는 말인가."
하루는 의연과 함께 자기 집의 뽕나무 밭으로 들어가 그는 나무껍질을 긁어 흠집을 내고 그 틈바구니마다 말갈기털을 채워 놓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맹랑한 전래 동요 때문이었다.
"뽕나무에 말갈기털이 생기는 집의 주인이면 임금이란다."
며칠 후 그는 이웃집 몇 사람만을 따로 불러 그것을 비밀리에 보여준 다음에 절대로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하였다. 그런 후 그 문제의 나무껍질을 벗겨 없애 버렸다.
그는 진안의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신분에 제한 없이 반정부적인 선비, 불평객, 무뢰한, 승려, 천민, 무사들을 불러 모아 그들 중 힘깨나 쓴 자들을 선발하여 보름마다 한번씩 활쏘기 등 무술 훈련을 시킨 후 함께 술과 고기를 나눠 먹으며 동지적인 연대감을 결집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1587년(선조 20년)에 왜구들이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해오자 놀란 전주부윤 남언경이 정여립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그는 대동계의 무사들을 동원하여 이끌고 출동하여 관군을 도와 왜구를 격퇴시키는 데 크게 공헌을 했다. 이후 그는 대동계를 더욱 조직적으로 만들어, 안악에는 변숭복과 박연령을, 해주에는 지함두와 송익필을, 운봉에는 의련을 각각 책임자로 두었다.
이후 더욱 자신감을 가진 정여립은 민중을 더욱 선동하는 말을 퍼뜨렸다. 천안의 사노 길삼봉이 도적이 되어 관군에게 쫓기는 몸이 되자, 정여립은 지함두를 황해도에 보내 다음과 같은 낭설들을 퍼뜨리게 하였다.
"길삼봉, 길삼산 형제는 신병을 이끌고 지리산에 들어갔다는 말도 있고 계룡산에 들어갔다는 말도 있다."
"정팔룡(팔룡은 정여립의 환호)은 용감무쌍하기 이를데 없는 사람인데, 그는 왕이 되어 계룡산에 도읍하려고, 멀지 않아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
"호남 전주 땅에 성인이 나서 우리 백성들을 구해 주시려고 한다. 그에 의해 백성은 모두 부역을 면하게 되고, 공사천 노예나 서얼이나 죄인은 모두 천대를 면하게 되고, 그에 따라 국가는 태평 무사할 것이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이를 보다 못한 장성 선비 정윤룡은 장성현감 이계와 의논하여 조정에 보고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계는 아직 이렇다 할 뚜렷한 단서가 잡히지 않는 상태이므로 좀더 관망해 보기로 했다.
이 무렵, 의연의 동료 승려인 도잡, 설청 등은 모반을 두려워 하여 도망가 버렸다. 이 무렵, 고부에 살고 있던 정여립의 사위인 김경일은 항간에 떠도는 이상한 소문을 전해 듣고, 그 소문의 진실 여부를 묻는 편지를 정여립에게 띄웠다.
그러자 정여립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짤막한 답서가 도착했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그런 소문을 꾸며낸 것이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1589(선조 22년)에 갖가지 해괴한 소문이 점차로 퍼져 궁궐에까지 새어 들어갈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정여립은 더 이상 꾸물거리다가는 자신이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래서 그는 거사를 앞당기기로 결심하고서 그의 일당들을 불러 모아 함께 구체적인 거사 모의를 하였다.
"1589년 겨울에 한강이 얼게 되면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한양으로 쳐들어가 맨먼저 무기고를 불사르고, 다음에는 강창을 빼앗고, 심복들을 도성 안에 배치한 다음 자객을 보내 대장 신입과 병조판서를 살해한 후, 왕명이라고 속여서 각처의 병사, 수사 및 방백들을 죽이고, 대간을 시켜 전라 감사 및 전주부윤을 파직시킨 다음 왕위를 찬탈하자."
그런데 이때 구월산의 승려 의엄이 그 거사 계획을 재령군수 박충간에게 밀고해 버렸다. 그러나 박충간은 그 밀고를 의심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때 안악군수 이축이 항간에 떠도는 정여립의 역모설을 얻어 듣고 진사 남절더러 좀더 자세히 그 내막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남절은 다시 교정 조구란 자가 정여립의 제자임을 자랑하면서 무리를 모으는 것을 수상쩍게 여겨 이를 이축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이축은 그 즉시 조구를 잡아들여 문초하였다.
그러자 조구는 모든 내막을 순순히 자백하였다. 이에 이축은 박충간, 조구와 함께 신천군수 한응인에게로 가서 의논한 다음 연명으로 황해 감사 한준에게 보고하였다.
근무지로 돌아온 박충간은 정여립의 일당 중 하나인 이수란 자를 체포하여 문초했다. 그 결과 조구의 말이 모두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의엄, 조구, 이수의 말들을 종합하여 비밀 장계(임금에게만 올리는 보고서)에다 자세히 적은 다음 그것을 자기 아들에게 주어 한양으로 올려보냈다.
이리하여 선조는 황해 감사 이준의 비밀 장계와 박충간의 비밀 장계를 동시에 받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선조는 크게 놀라 한밤중에 대신들을 즉시 입궐하게 한 다음 대책을 강구하였다.
다음날(1589년 10월 초) 선조는 의금부에 명령하여 선전관 및 의금부도사를 전주로 내려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의금부 군졸들이 정여립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여립은 도망가 버린 뒤였다.
조구가 모든 걸 발설해 버린 사실을 변숭복을 통해 알게 된 정여립은 금구의 별장을 떠나 정옥남(정여립의 아들), 변사(안악 사람), 박연령, 박춘룡(박연령의 아들), 그리고 변숭복 등과 함께 진안의 죽도로 달아나 숨어 버렸다.
그러나 갑자기 피신한 탓에 먹을 것을 준비해오지 못한 터라, 산 속에 은거하면서 마을로 내려가 동냥으로 밥을 빌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마을 주민들이 관가에 신고해 버렸다.
그러자 그 해 10월 14일에 선전관 이용준, 내관 김양보, 진안현감 민인백 등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죽도의 산을 포위하였다. 점점 관군들이 포위한 채 압박해 들어오자,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여긴 정여립은 먼저 변사를 죽인 후 뒤이어 정옥남, 박춘룡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정옥남과 박춘룡이 몸을 피해 달아나 버리자, 그들을 죽이지 못한 채 정여립은 혼자서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 선전관 이용준은 정여립과 변사의 시체와 생포된 정옥남, 박춘룡 등을 한양으로 압송하였다. 이후부터, 정여립 일파와 동인에 대한 가혹한 박해(기축옥사)가 시작되었다.
10월 15일에는 황해도에서 잡혀온 이기와 이광수를, 10월 17일에는 안악군수 황언륜과 방의신 등을, 10월 20일에는 박연령을, 그리고 10월 27일에는 정여립의 시체, 이진길(정여립의 조카), 정여립의 처첩을 각각 처형했다. 그리고, 11월 초에는 정여립과 평소 교분이 두터웠던 병조참지 백유양, 우의정 정언신, 이조판서 이양원, 이조참판 정언지 등이 한꺼번에 모두 사직당했다.
11월 12일에는 정언지는 강계로, 홍종록은 구성으로, 이발은 종성으로, 백유양은 부령으로, 이길은 희천으로, 정언신은 중도로, 그리고 김우옹은 회령으로 각각 유배당했다.
그리고 11월 25일에는 동지 정윤복, 부교리 송언신 등도 역시 정여립과 교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파직당하고 말았다.
12월 3일에는 참봉 한백겸이 정여립의 시체를 몰래 싸들고 가서 잘 묻어 주었다는 죄로 유배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