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이인좌의 난

구름위 2013. 8. 22.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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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1728년)은 소론파의 김일경, 목호룡이 노론파의 무고로 죽은 데 대해 불만을 품은(정권에서 배제된) 이인좌, 김영해, 정희량 등의 소론파의 일부세력이 주동이 되어 남인들 및 불평분자들을 규합하여 1728년(영조 4년) 3월에 일으킨 난이다.
 
18세기 초 당시 조선은 왜란 및 호란 이후로 국내외 정세가 매우 불안정하였으며, 대기근과 질병 등의 천재지변, 그리고 관료들의 부패, 부정이 만연하였다.
이 때문에 삶의 터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유랑민들이 많이 늘어났다. 이들 유랑민들 중에는 노비나 수공업자가 되는 이들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화전민이 되거나 도적 또는 거지로 전락되는 경우도 많았다.
 
다가 조정의 치열한 당쟁으로 인하여 정치가 불안하여 국민생활의 안정은 뒷전에 밀려나 있었다. 1670년대에는 남인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는데, 1680년대부터는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되었고, 1689년부터는 다시 남인이, 1694년부터는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각각 집권하게 되었으며, 이후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어 1716년부터는 노론이 집권하여 소론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1721년 8월에 노론의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주추부사 조태채가 중심이 되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자 소론이 들고 일어나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저지하였고 나아가 노론의 4대신을 축출해 버렸으며, 1722년에는 노론파 173명 가량이 처벌되었고, 1724년에 연잉군(영조)이 즉위한 후에는 노론의 반격으로 김일경, 목호룡 등 소론의 핵심인물들이 처벌당했다.
 
이리하여 사회에는 불평객들이 자꾸만 늘어갔다. 이런 혼탁한 시기에, 이인좌는 명종 때의 영의정 이준경의 후손이자 관찰사와 감사를 역임한 이운징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광주이다. 그는 소론의 영수였던 윤휴의 손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영조는 1724년에 조선왕조 21대 왕위에 오르면서 당쟁의 병폐를 최소화하고자 송인명의 의견을 받아들여 탕평책을 펴나가면서, 노론과 소론의 인물들을 고루 등용하여 정계개편(정미환국)을 하였다.
 
이럴 즈음에, 정권에서 배제될 위기에 처한 소론의 과격파들(박필헌, 이유인, 심유현 등)은 같은 처지에 있는 남인들을 포섭하고, 나아가 향임층, 사노비, 지방 군인, 유랑민, 농민, 명화적까지 포섭하여 영조와 노론의 정권에 대한 반기를 들 계획을 세워나갔다.
 
그들은, 경종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으며,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을 왕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명분을 겉으로 내세워(실제로는 영조와 노론파를 제거하고자)난을 일으키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1725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에 걸쳐 세력 확장에 들어갔다. 이 무렵 경종의 비였던 심씨의 동생인 심유현이 경종의 죽음에 강한 의혹을 제기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전국 곳곳에서 흉서와 괘서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되었다.
 
1727년 7월에 영의정 이광좌가 영조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호남의 유민이 무리지어 변산과 월출산에 출몰하고 있다고 하지만, 관군이 손을 못 댄다고 하옵니다."
 
그리고 이어 같은 해 12월에 전주에서 2차에 걸쳐 흉서의 변이, 그 이듬해인 1728년 1월에는 경성 서소문에 괘서의 변이 있었으며, 3월 12일에는 좌포도 대장 이삼한테서 다시 전주의 불온한 격문 및 호남의 불온한 상황이 보고되었고, 3월 14일에는 소론의 원로 대신으로 용인에 은퇴해 있던 봉조하 최규서가 상변하였다.
 
그러자 영의정 이광좌, 좌의정 조태억 등이 다시 왕에게 간곡히 아뢰었다. "소요의 주도인물인 용인 지리학 교수인 안호와 그의 노비 막실을 잡아 가두었나이다. 그런데 며칠 전 양반들이 진도에 모였길래 이를 이상히 여겼는데, 알고 보니 장흥이라는 자가 안호와 그의 형 안박과 함께 역모하여 13일에 군사를 모아 14일에 소사(이산)로 갔다가 15일에 거사하려 했다고 하옵니다."
 
그러자 영조는 도성의 각 궐문과 성문 및 각 나룻터에 군사를 배치하여 경비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그 이튿날 수원 부사 송진명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가 올라왔다.
 
"적은 경외에서 서로 호응하고 남북에서 합세하여 곧 수원을 칠 것이라 하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3월 15일 아침까지도 반란군의 규모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이인좌, 권서룡 등이 난을 일으킨 상태였다. 신임사화로 실각당했던 노론이 영조의 즉위 때 재집권하여 4대신을 무고한 소론파의 김일경과 목호룡을 죽인데 대해, 그리고 경종 시해의 음모 등에 불평을 품은 소론파 이인좌는, 김일경의 아들 김영해, 목호룡의 형 목시룡 등과 연락을 취하여, 정희랑, 권서룡 등과 공모하여 그들과 함께 소론 및 남인의 불평분자들과 동지들을 규합하여 1728년 3월 15일에 무력에 의한 정권 쟁탈을 꾀하는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당시 남쪽에서는 이미 권서룡이 용인, 안성, 과천, 평양, 괴산 등지의 불평객 3백 명을 끌어모아 놓고, 청주의 이인좌의 반란군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권서룡은 3월 13일에 청주 근방에 이르러서, 상여 안에 무기를 싣고 가서 청주성 앞에 숲 속에 다 숨겨 놓고는 성 안에 들어가 태연히 술을 빚고 있었다.
 
이때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봉상(이순신의 손자)은 적이 왔다는 말을 전해 들었으나 이를 곧이듣지 않고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방심하였다.
 
이인좌는 성 안의 장리들과 내통하여 청주의 성 안의 상황을 대충 파악한 다음에 권서봉과 함께 밤중에 봉기군을 이끌고 성 안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때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깊이 잠들어 있던 절도사 이봉상은 미처 칼을 빼들기도 전에 침실에서 봉기군에게 붙들려 끌려 나오게 되고 말았다.
 
이때 그는 빈 손으로 항거해 보았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그는 마당으로 끌려나와 즉결 처형되고 말았다. 이때 군과 홍림, 영장 남연년도 함께 생포되어 살해되었다. 그러나 목사 박당은 요행히 성을 빠져나가 산 속으로 달아나 목숨만은 건졌다.
 
이렇게 청주성을 손쉽게 점령한 이인좌는 스스로 대원수라 칭하고, 권서봉을 목사에, 신천영을 병사에, 그리고 박종원을 영장에 각각 앉혔다. 그런 후에 각 읍에 격문을 띄웠다.
 
"경종의 죽음을 에도 하고, 왕대비 어씨(경종계비 선의왕후)의 밀조를 받들어서 이제 총궐기하여 흉얼(영조:숙종의 숙빈 최씨의 소생)을 내쫓고, 소현의 적파인 밀풍군 이탄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뒤이어 그는 경종의 위패를 받들고서 그 좌우에 흰 빛깔의 비단으로 장식한 장졸들을 세워 놓고, 자신들의 거사는 선왕(숙종)의 친자가 아닌 영조를 내쫓고 밀풍군 이탄을 추대하려는 반정이라고 내외에 널리 알렸다.
 
그런 후 그는 각읍에 명하여 병마를 소집하는 한편, 봉기군들이 상복을 입고 상여를 가장, 무기를 운반하여 진천을 거쳐 죽산과 안성을 향하여 진격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이와 동시에 권서봉은 봉기군을 이끌고 안성으로 진출하였다. 신천영은 청주성에 그대로 남아 성을 지켰다. 조정에서는 3월 16일에 김영해와 목시룡을 잡아들여 목을 메어 죽여 버린 후, 순토사 김중기 등에 군사를 주어 출정을 명했다. 그러나 김중기는 겁을 집어먹고 출정하지 않았다.
 
러자 조정에서는 3월 17일에 병조판서 오명항을 도순무사로, 박찬신을 중군으로, 그리고 박문수와 조현명을 종사관으로 각각 임명하여 출정시켰다. 그러나 이때 민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흉흉하였다.
 
왜냐하면, 이 무렵 평안 병마절도사 이사성, 금군 별장 남태징이 이미 반란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한강 남쪽에서는 적이 수원까지 점령했으며, 또 호남에서 변산 및 월출산의 반란군이 전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성 안의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짓눌려 피난 소동까지 일으킬 정도로 사회 분위기가 온통 어수선하고 혼란 스러웠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급히 금군 별장인 남태징을 잡아들여 목을 베어 죽이고, 전주 괘서의 죄인 이세룡 등도 붙잡아 처행시킴으로서 민심의 동요를 막고자 애를 썼다.
 
이 무렵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이미 청주를 출발하여 진천을 거쳐 죽산에 이르러 있었다. 이에 맞서 오명항은 관군을 이끌고 내려가 진위현 남쪽의 들판에 진을 쳤다.
 
그러나 관군은 밤중에 반란군의 기습을 받아 급히 직산 쪽으로 퇴각해 갔다. 그런데 퇴각하던 오명항은 도중에 갑자기 진로를 바꿔 안성 쪽으로 향했다. 이 무렵, 반란군은 오명항의 관군이 모두 직신으로 퇴각한 줄로만 알고, 밤중에 횃불을 들고 방심한 채 행군해 나아갔다.
 
이때 오명항은 관군으로 하여금 길 양쪽에 매복하게 한 다음 반란군이 지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이것도 모르고 적진 깊숙이 들어온 반란군은 관군의 갑작스런 기습 공격을 받고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는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때 이인좌, 박종원 등은 겨우 2백여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청룡산으로 급히 도망쳤다. 오명항은 관군으로 하여금 그들을 끈질기게 추적하게 하여 박종원과 반란군 병사 1백여 명을 죽였으나, 이인좌를 끝내 사로잡지 못하고 놓쳐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오명항은 포기하지않고 죽산까지 추격하여 이인좌를 포위해 들어갔다. 그런 중에, 반란군의 장수 정세윤과 그의 아우 정계윤을 비롯한 수십 명의 반란군을 목베어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자 이인좌는 청룡산에 있는 절에 들어가 숨었다. 그러나 그는 절 근처의 부락민들과 절의 승려들에게 붙잡혀서 관군의 진영에 인계되어 3월 26일에 대역죄로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청주성에 남아 있던 신천영은 창의사 박민웅이 이끄는 토벌군의 공격을 받아 저항했으나 상황이 불리하게 되자 청주성을 빠져 나와 달아났다.
그는 상당성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렀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후, 반란군에 협조한 청주 목사 권서봉, 진천현감 이지경, 장군 목함경, 박상, 곽장 등도 처형되었으며, 평안 병마절도사 이사성도 역시 처형당했다.
 
그러나 태인현감 박필현은 유민집단을 이끌고 전주 삼천까지 쳐들어가 관군과 싸웠으나 전주 감영 군사에게 패하여 그의 아들과 함께 경상도 상주로 도망쳤으나 거기서 붙잡혀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박필현과 합류하려고 했던 발필몽도 상주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처형당했다. 그리고 영남의 정희량(저온의 4대손)은 이웅좌(이인좌의 동생)와 함께 반란군을 이끌고 안음, 거창, 합천, 함양 등지에서 일시 승전고를 울렸으나, 경상 감사 황선, 성주 목사 이보혁, 초계 군수 정양빈 등이 이끄는 관군에게 제지당하여 거창에 머물고 있다가, 도순무사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추풍령을 넘어와 기존의 관군과 연합하여 공격해 오는 바람에 패하고 말았다.
 
이때 정희량, 이웅좌는 선산 부사 박필건과 곤양 군수 우하형 등에게 붙잡혀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후, 밀풍군 이탄은 감옥에 갇혔다가 이듬 해인 1729년 3월에 감옥에서 굶어 죽었다.
 
이로써 이인좌의 난은 발발한 지 한 달만에 완전히 그 막을 내리고 말았으며, 토벌군은 4월 19일에 한양으로 당당히 개선하였다. 이때 영조는 친히 숭례문루에까지 나와 회군하는 토벌군을 맞이하였다. 이후 정권은 노론 세력의 손으로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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