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진주민란

구름위 2013. 8. 2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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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민란(1862년)은 오랜 동안 문제되어온 전정, 군정, 환곡의 세 가지 납징에 대한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1862년(철종 13년) 2월에 진주를 중심으로 일으킨 난이다.
 
1861년 9월에 환곡의 가산징수 때문에 민소가 자주 일어나자, 철종은 이를 크게 걱정하여, 각 도의 감사 및 수령 가운데 비위, 불법이 있어 민소를 당한 자들은 엄중히 문책하여 파면시키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당시 영의정 정원용은 이를 의도적으로 회피하였다. "민소가 많다 해도 일일이 준신(무엇을 준거로 삼아 쫓고 믿음)할 수는 없으므로, 실정을 밝히기 전에 문책하기 곤란하옵니다."
 
이렇듯 민소에 대한 진상 규명과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 버려둔 까닭에 1862년(철종 13년) 2월 중순부터 경상도 진주 등지에서 민란이 터지고 말았다. 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병마절도사 백낙신의 과도한 탐욕과 착취, 그리고 가혹한 탄압과 박해 때문이었다.
 
그는 1861년(철종 12년)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에 부임한 후, 국고금을 횡령하고 갖은 수단과 방법, 즉 온갖 협박과 공갈을 동원하여 백성을 착취, 약탈을 자행하여 재산을 모으는 한편, 쌀 1만 5천석(6만여 냥이나 되는 거액)을 호별로 징수하는 등 민폐를 끼쳐 농민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사게 되었다.
 
여기에 각종 부당한 조세, 수령들의 탐학, 이서들의 농간, 토호의 토색질 등이 농민들을 파탄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이에 진주의 서남쪽 유곡동에 사는 유계춘는 비변사에 소장을 내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세의 부당성과 관리들의 착취에 대해 항의하였다. 그러나 이는 매번 묵살되고 말았다.
 
러자 그는 고심 끝에 무력 항쟁을 계획하기로 했다. 그는 홍문관 교리를 지낸 적이 있는 이계열(이명윤의 6촌), 장교 출신인 김수만, 유랑 농민인 이귀재 등과 함께 모의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박수익의 외방객실, 사노 검동의 집, 그리고 박숙연의 집 등을 전전하면서 모의를 계속해 나갔다.
 
1862년 1월 30일에도 그들은 산기촌에 사는 검동의 집에 모여 앞으로의 항쟁 및 집회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고자 할 때 진주 사람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이명윤도 참석하였다.
 
2월 2일에도 박숙연의 집에 모두 모여 그날 새벽에 유계춘이 소상인이나 농민들에게 보낸 한글 통문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이때 이명윤은 통문을 불태워 버리고 가급적이면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을 택하자고 주장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유계춘의 뜻에 따라 한글 통문을 읍내 곳곳에 추가로 붙이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자 이명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그러나 그들은 2월 4일에 단성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이에 힘입어 이계열을 두령으로 내세우고 나무꾼, 목동, 농민 등을 규합하였다. 그리고 격문과 선전문을 각 고을에 나눠 주고 한글 노래도 만들어 보급함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그러자 병영에서는 주동자인 유계춘을 2월 7일에 붙잡아 진무청에다 연금시켜 버렸다. 그러나 병영에서는 농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에게 고문을 가하거나 죄인 취급을 하지는 않았다.
 
2월 13일에 집안의 제사를 핑계대고 집으로 돌아온 유계춘은 2월 14일을 기해 마침내 무력 봉기를 일으켰다. 유계춘은 이계열과 함께, 마동과 원동의 농민들로 하여금 수곡시장을 습격하게 하고, 백곡, 삼장, 시천 등지의 농민들을 규합한 후, 이들을 한데 모아 이끌고 가서 덕산시장을 일시에 점령하여 버렸다.
 
이때 훈장 이윤서의 집을 불태워 버렸다. 그러자 농민들이 거리로 나와 식사를 제공하는 등 시위대를 환영해 주었다. 이어 시위대는 덕천강을 따라 진주읍으로 진격하여 2월 18일 오전에 진주읍 근교에 이르렀다.
 
시위대는 그곳에 진을 치고서 한동안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진주 목사 홍병원은 이명윤을 보내 그들을 설득하여 회유시켜 보고자 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착취와 토색질을 일삼는 관리들을 혼내주어야 한다고 시위대 군중들이 제각기 목소리를 높히는 바람에 협상은 무산되고 말았다.
 
시위대는 유계춘이 지은 노래를 한 목소리로 합창하며 진주읍으로 일제히 진격해 들어갔다. 흰 수건을 머리에 쓰고 몽둥이로 무장한 나무꾼들이 앞장서고, 그 뒤를 수천 명의 농민들이 바짝 뒤따랐다.
 
읍 내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시위대는 맨먼저 관가를 습격하여 평소 착취와 색질을 일삼던 이방, 호방, 토호, 이서, 또는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과 욕심을 챙긴 상인, 고리대금업자 등의 집 수십 채에 불을 질러 버리고 재물을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
 
이러한 방화와 약탈은 그 이튿날인 2월 19일까지도 계속되었다. 사태가 이처럼 악화되자, 병마절도사 백낙신이 자진하여 시위대 앞으로 나서서 가급적 회유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그에게 관부의 문란 및 비행 등을 열거하며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시위대는 그를 겹겹이 에워싼 채 위압적인 자세로 그와 관리들의 비행을 추궁하였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백낙신은 당황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시위대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고자 임시 응급처방으로 그 동안 횡령과 착취를 일삼아 지탄 대상이 되고 있던 이방 권준범과 포리 김희순을 군중 앞에 엎드리게 해놓고 곤장 수십 대를 가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권준범과 김희순을 묶어 불에 태워 죽여 버렸으며, 아버지를 구하려고 달려든 권준범의 아들 권만두까지 짓밟아 죽여 버렸다.
 
시위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병마절도사 백낙신을 밤새워 길가에 세워 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잡아 가두어 버리고 나서, 진주 목사 홍병원이 있는 본부로 몰려가 목사를 끌어내 삼정 문란과 관리틀의 죄를 추궁한 다음 병마절도사 백낙신과 함께 풀어 주었다.
 
그런 후에, 그 사이에 도망간 진주 이방 김윤구를 추격 끝에 붙잡아 때려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시위대를 재편성하여 다른 공격 목표를 정한 뒤 다시 진주성으로 회군할 것을 결정하고는 읍 인근 각 처로 진출하였다.
 
러는 중에, 시위대는 관아를 불태우고, 관문서를 불태워 없애 버렸다. 또한 그들은 읍 근처에 있는 부호 정영장, 성부인, 최진사 등의 집으로 몰려가 그 집들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 외 착취를 일삼아온 토호, 양반, 관리 등의 죄를 추궁하면서 그 동안 누적된 원성을 마음껏 풀었다. 이런 식의 격렬한 시위와 폭동은 2월 22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탄핵 대상들을 처벌하는 데 성과를 올렸다고 판단한 시위대는 2월 23일 오후에 모두 진주성에 모인 다음 자진 해산하였다.
 
이 민란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비상대책회의를 열어 2월 29일에 탄핵 대상인 경상감사 김세균, 병마절도사 백낙신, 진주목사 홍병원 등을 파직시키고 그 죄를 물어 처벌하였으며, 그 대신 부호군 박규수를 진주 안핵사로 파견하였다. 그는 진주에 내려와 사태 수습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민란의 소요 원인이 관리들의 탐학과 착취라고 보고 이를 조정에 그대로 보고하는 한편, 처벌자를 최소한으로 줄여 유계춘, 김수만, 이귀재 3명만을 처형시키고, 나머지는 가벼운 형벌을 내려 사건을 종결지으려 하였다.
 
그러자 비변사나 신임 진주 목사 등의 반대파들이 들고 일어나 처형 대상을 2급까지 확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벌자를 최소화하자는 자기 입장을 좀처럼 꺾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처벌 대상은 반대파들의 주장대로 주모자 13명이 처형되었으며, 19명은 유배당했고, 42명은 징방되고 말았다. 이 중 이명윤은 민란의 주동자 유계춘 등과 같은 고향인 진주 출신인데다가 고향사람들에게 신망이 두터웠기 때문에 평소 그를 미워하던 지방 이서들의 무고를 받아 민란의 주모자로 몰려 강진의 고금도로 억울하게 유배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곧 진상이 밝혀져 철종의 특사령이 내려졌으나 사서가 당도하기도 전에 그 는 유배지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무렵 진주 민란의 여파는 다른 지역으로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확산되어, 단성, 함양, 거창, 성주, 선산, 상주, 개령, 울산, 군위, 비안, 인동 등 경상좌도, 경상우도의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3월부터 5월까지 약 3개월 동안에 전라도 부안, 금구, 순천, 장흥 등지에서, 그리고 충청도 회덕, 연산, 공주, 은진 등지에서도 연달아 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해 8월부터 12월 사이에도, 제주, 함흥, 광주, 창원, 남해, 황주 등지에서도 민란이 일어나 일대 소동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862년 한 해는 그야말로 "민란의 해" 가 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개령에 안동부사 윤태경, 제주도에 부호군 이건필, 익산에 부호군 이정현, 그리고 함흥에 행호군 이삼현 등을 파견하여 주동자들을 색출함과 동시에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여러 모로 조치를 취하는 한편, 이삼현을 영남선무사로, 조구하를 호남선무사로 각각임명하여 현지에 내려보내 안핵사와 함께 사태 수습에 총력을 기울이도록 했다.
 
나아가 관료들의 개혁안이나 건의안들을 참작하여 근본 대책올 마련하는 한편, "삼정이정절목" 41개 조를 제정하여 이를 반포 시행토록 함으로써 민폐의 최소화를 위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민란 외에도, 1863년 2월에는 경성에서 금위영 군졸들이 녹미의 질이 나쁘다고하면서 해 묵은 울분을 떠뜨리며 소동을 일으켰다. 이런 저런 일, 즉 70여 차례에 걸친 잦은 민란, 궁궐의 당쟁과 분규, 척신들의 횡포 등등이 압박감을주어, 그나마도 병약한 철종은 재위 14년만인 1863년 12월 8일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말았다. 이후, 김씨 일족은 몰락하고 민씨 일족이 득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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