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이필제의 난

구름위 2013. 8. 2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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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제의 난(1871년)은 1871년(고종 8년) 3월에 이필제가 최시형 등과 함께 동학 교조신원운동과 반봉건 투쟁 및 중국땅 정벌 등을 목표로 내세우고 동학교도와 농민들을 모아 영해에서 일으킨 봉기이다.
 
문경의 향반 출신인 이필제(이필제의 본명은 이필)는 1863년에 동학에 입교하였다. 그는 충청도 진천에 거주하면서 여러 민란을 통해 드러난 봉건적 모순 및 사회의 구조적 모순 등을 직시하고 동학의 조직력과 무력 봉기를 통하여 반봉건 투쟁 운동을 벌여 갈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동학에 입교한 직후부터 동학 교도들을 아주 열정적으로 규합해 나갔다. 조정에서는 최제우를 붙잡아 처형하고 이필제와 같은 강경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는 1869년 말에 진천을 떠나 영월 지방에서 한동안 유랑생활을 했다. 이 무렵, 그는 최시형을 만나기 위해 교도 이인언, 권일원 등을 보내서 다섯 차례나 면담 요청을 하였다. 그는 이인언을 통해 이렇게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계해년에 용담 장석에서 도를 얻고 돌아와 포교에 종사하였소이다."
그러나 최시형은 용담 문도 속에 그런 인물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를 경계했다. 이필제는 유랑 생활 끝에 결국 경상도 진주로 피신하였다. 그는 주성칠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그곳에 거주하면서, 다시 동학을 포교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해 나갔다.
 
그는 또한 제 2대 교주인 최시형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영덕, 상주, 문경, 영해 등지의 교도들을 선동하였다.
 
그러다가 1870년 7월에 정만식, 장경로등과 항께 농민들과 동학교도들을 규합하여 거사한 다음, 진무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금병도라는 섬을 거점으로하여 세력을 커운 뒤 중국으로 건너가 새 왕조를 세우겠다는 거창한 거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는 어떤 이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경상도 영해로 급히 피신하여 몸을 숨겼다. 그 이듬해인 1871년 2월에 최시형(본명, 최경상)이 박사헌과 함께 이필제를 찾아와, 시국과 동학에 대해 진지하게 토의하였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필제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최제우 선생의 수치를 씻고 창생의 재앙을 구하고, 이어 중국을 차지할 뜻을 갖고 있소이다. 3월 10일이 선생께서 돌아가신 순교 기념일이 아니요? 그날에 거사합시다."
 
이에 최시형은 '아직 동학의 교세가 확장되기도 전에 그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버린다면 더 이상 동학이 설 자리가 없다"고 판단하여 선뜻 동의하지 못하고 한참이나 주저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큰 일을 경륜하는 데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외다. 아직은 그런 시기가 아닌 것 같소. 경망히 의거했다가 실패하면, 오히려 교세의 기초도 바로 세우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필제는 성급하게 자기 뜻을 고집하였다. 결국, 이필제는 최시형의 뜻을 거역하고 동지들과 함께 대충 거사 계획을 수립한 뒤, 3월 10일에 읍의 동학교도 5백여 명을 이끌고 난을 일으켰다.
 
그는 봉기군을 이끌고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여 야밤에 영해관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런 다음 부사 이정을 문책한 뒤 처단해 버렸으며, 곧바로 성 안으로 진격하여 성 전체를 완전히 점령해 버렸다.
 
그는 성의 경계를 강화하면서도 동시에 소를 잡아 봉기군을 배부르게 먹인 후, 탈취한 돈과 곡식을 풀어 농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해 주었다.
 
그런 다음, 성을 썰물같이 빠져 나가 영양의 일월산으로 빠른 속도로 퇴각해 버렸다. 그러자 영해 주변의 수령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언제 어디서 이들이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여 갑자기 들이닥쳐 관가를 습격하고는 다시 종적을 감춰 버릴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수령들과 관리들 중에서는 미리 겁먹고 도망쳐 버리는 자들이 속출하였다. 이러한 현상들은 바로 이필제가 노렸던 것들이었다.
 
이필제는 봉기군의 거점을 문경조령초곡에다 두고서 활약하다가, 그 해 여름에, (정감록)을 믿어 "정씨 천하" 가 가능하다고하는 망령된 꿈을 꾸고 있던 정기현과 함께 공모하여 다시 봉기하고자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그런데 당초에는 수백, 수천 명이 모여들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실제로 모인 봉기군은 6O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빈약한 수의 봉기군으로나마 8월 2일에 문경읍을 급습한다는 거사 계획을 세워 놓았다.
 
그러나 지방 관헌에게 미리 기밀이 누설되어 버리는 바람에, 거사 예정일에 이필제와 정기현 등 44명이 관군들의 뜻밖의 역습을 받아 일망 타진되고 말았다.
 
이로써 동학에 뿌리를 두고 반봉건 투쟁 및 중국 북벌론을 펼치고자 하는 이필제의 꿈은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후 동학교도들은 정부의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들에 대한 관헌의 추적은 경상도뿐만 아니라 강원도, 충청도, 나아가 경기도까지 뻗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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