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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1894년) 은 전봉준, 최시형, 손병희 등과 같은 동학당의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들이 주동이 되어 농민들과 함께 1894년에 일으킨 농민 전쟁이다.
민중의 자각과 정치에 대한 불신이 뒤엉킨 전환기에 서학을 능가하는 동학이 1860년도에 창도되었는데, 이 동학은 토속 신앙을 그 바탕에 두고 그 위에 유교, 불교, 도교, 천주교 4교를 통합하여, 전통적인 신분제도의 철폐, 인간 평등주의 실천, 보국안민과 제폭구민, 인내천등 평등사상과 사회개혁운동을 그 목표로 내걸었다.
이 동학의 교조는 최제우였다. 동학의 목표는 당시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 즉 관리의 매관매직, 문란한 세제, 경제 악화에 따른 농민 생활 곤궁, 서리들의 횡포에 찌들려 있던 농민의 요구와 아주 잘 부합되었기 때문
에 그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 갔다.
그러던 중, 최제우는 1864년 3월 10일에 처형되고 말았다.최제우는 일찍부터 경사를 익혀 학문 탐구에 전심하다가 1844년부터 10여 년 동안 전국 각지를 유람하며 구도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울산 유곡에 은거하여 도를 닦았다.
그러던 중 1855년 금강산 유점사에 있던 승려에게서 얻은 (을묘천서)로 도를 터득한 후, 천성산 내원암에 들어가 49일간의 기도를 한 후 술수를 터득하였다.
그는 다시 1857년에 천성산 적멸굴에 들어가 또한번 49일간의 기도를 하고 나온 뒤, 1859년 경주 용담정에서 보국안민의 대도를 깨우치고 마침내 유불선 동양 3교와 천주교 및 기독교를 토착 민간신앙 위에 융합하여, 시천주의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의 교리를 완성하여 마침내 동학을 창시하였다.
그 후, 그는 천, 인을 대도의 근원으로 하고, 성. 경. 신을 도의 본체로 하며, 수심정기를 수도의 비결로 삼았으며, 도를 천도라 하였다. 1862년 남원을 거쳐 보국사로 들어가 (수도사), (권학가)를 짓고, (동학론)를 집필한 다음 마침내 포교를 시작하였다.
차츰 교세가 확장되자, 각 지방에 접소를 설치하고 접주를 두어 관내의 동학 교도를 관장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하여 1863년에는 동학교도 3천여 명, 접소 14개소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는 이 해 7월에는 수제자인 최경상(경주 동촌 황오려 태생, 35세에
동학에 입문)을 북접대도주로 삼고 8월 14일에 그의 도통을 최경상에게 전수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그가 포교하는 동학 교리가 요사스러운 것이라 여겨 그를 체포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선전관 정운귀가 각 접소를 순회 중이던 최제우를 1864년 봄에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 다음, 그 해 3월 10일에 대구장대에서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그를 처형해 버렸다.
이후부터 동학은 정부의 주요 탄압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대 교주 최경상은 최제우의 뒤를 이어, 포,장,접이라는 특수한 조직망을 설치하는 데 성공하여, 커다란 사회적 조직으로 키워나갔다. 최제우보다 세 살 아래인 최경상은 강수, 박춘서 등과 함께 갖은 위험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영양 일월산에서 강원도 양양까지 왕래하며 교세의 재건을 위해 몸을 다 바쳤다.
특히 그가 비밀히 포교한 지역은 대체로 태백산맥 일대, 즉 경상, 강원, 충청 3도였다. 그런데 1871년 이필제가 영해의 동학교들을 이끌고 거사하여 실패하는 바람에, 관헌의 탄압과 추적이 심해지자, 소백산 암굴로 일단 피신하여 여러 날을 숨어 살아야 했다.
그 뒤 영월군 직곡리의 교인 박용걸의 집에 피신해 있다가, 1873년 10월부터는 태백산 갈래산 적조암에서 49일 동안 기도 수련을 했다. 그런 후 1875년에는 단양 도솔봉 송현동에 가서 숨어 살았다. 이때부터 그는 자기의 본명인 최경
상을 최시형으로 바꾸었다.
그 뒤 1880년 4월에 인제 갑둔리의 교인 김현수의 집으로 가서 그곳을 경전 간행소로 삼아 (동경대전)을 대서시켜 간행했다. 1882년 6월에는 다시 단양으로 가서 여규덕의 교인집에서 머물면서 (용담유사) 8편을 대서시켜 간행했으며, 1883년 2월에는 충청도 목천의 김은경 교인집에 머물면서 (동경대전) 1천여 부를 간행하여 배포하였다.
1884년 10월에는 손병희를 데리고 익산 사자암으로 가서 함께 49일간 기도 수련을 했다. 이때 교장, 교수, 도집, 집강, 대정, 중정을 근간으로 하는 교단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1885년 본거지를 충정도 보은으로 옮긴 후 그는 정국 혼란의 틈을 타서 좀더 적극적인 교세 확장 운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충청도 관찰사인 심상훈이 끈질지게 그를 추척하는 바람에, 다시 보은을 떠나 공주를 거쳐 영천 화계동에 이르러 초막을 짓고 한동안 숨어 살았다.
그러나 그곳도 위험하여 다시 상주 화령면 전촌으로 옮겨 가 은거하였다. 1887년에는 서인주. 손천민 등을 대동하고서 정선을 거쳐 갈래사로 가서 49일 동안 기도 수련을 했다.
그런 다음 다시 보은으로 가서 몸소 밭을 갈며 수도하면서 교인들을 양성하였다. 1888년에는 전주, 삼례 등지로 가서 포교에 힘썼으며, 1889년에는 관헌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 괴산 신양동을 거쳐 인제, 간성등지로 피신하였으며, 끄월에는 다시 경상도로 내려가서 금상 복호동의 김창준의 교인집에 머물면서 6개 조항으로 된 (내수도문)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첫째, 집안의 모든 사람을 한울님같이 공경하라. 며느리를 사랑하라. 노예를 자식같이 사랑하라. 우마육축을 학대하지 말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 한울님이 노하실 것이다.
둘째, 하루 세끼의 식사 때 한울님께 심고하라. 청결한 물을 길어 음식을 청결하게 하라.
셋째. 묵은 밥을 새 밥에 섞지 말라, 흐린 물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 가래침이나 콧물을 아무 데에나 토하지 말라. 만일 길이거든 반드시 묻어라. 그렇게 하면 한울님이 감응하실 것이다.
넷째, 모든 사람을 한울님으로 인정하라. 손님이 오거든 한울님이 오셨다 하라.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 이는 한울님을 치는 것이다.
다섯째, 잉태하면 몸을 더욱 조심하고, 아무것이나 함부로 먹지 말라. 태아를 위하여 모든 일에 조심하라.
여섯째, 다른 사람을 시비하지 말라. 이는 한울님을 시비하는 것이다. 무엇이건 탐내지 말라. 다만 근면해야 할 것이다."
이후, 그는 1890년부터 두 해 동안 손병희, 손병흠 형제를 비롯하여 여러 우수한 제자들을 거느리고 충주, 공주를 거쳐 양구, 간성, 인제까지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서 태인, 부안, 전주 등지를 돌며 포교에 힘썼다.
이에 충청, 강원, 전라 3도에서 동학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갔다. 이렇게 되자, 그들의 조직력과 역량이 중앙 정부를 상대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교조 최제우에 대한 신원 운동이 중앙 정부를 상대로 당당히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1892년 10월 서인주, 서병학, 손천민, 손병희 등이 교조의 신원 운동을 전개해야만 교세를 더욱 확장시킬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자, 그때까지 신중을 기하기만 하던 최시형이 마침내 결심을 굳혀 교조의 신원 운동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의 교인들을 격려하는 입의문을 배포하고, 서인주 등의 간부들로 하여금 각 지방 접주들에게 통문을 발송하여 그들의 대표자와 교도들을 전주 삼례에 소집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1일에 전라도 삼례역에는 수천의 동학교도들이 모이게 되었다. 이들은 교조 최제우에 대한 신원은 물론 신앙과 교단의 자유를 요구 하였으며, 관리와 군졸들의 탄압에 대해서도 거센 항의를 하였다.
그들은 손천민을 대표로 뽑아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전라도 관찰사 이경직에게 "교조 최제우는 무죄이며, 또한 동학이 결코 서학의 일파가 아니며, 그리고 공자의 유교 외에 다른 종교들에게 대해서는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오직 동학만을 이단으로 몰아 탄압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이서들과 군졸들이 함부로 양민인 교인들을 침학 또는 살상하지 못하게 해 달라" 는 내용이 담긴 청원서를 보냈다. 그래도 2도 관찰사의 태도가 미온적이자, 11월 7일에 다시 모여서, 또 한번 더 청원하였다.
그러자 관찰사 이경직은 "교조의 신원 문제는 중앙에서 해결할 문제이니 자신이 언급할 수 없으나, 지방의 이서와 군졸들의 횡포 등은 자기 권한으로 즉시 금지하겠다" 라고 했다.
이에 동학 교도들은 지방 관헌을 상대로 한 시위는 더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서와 군졸들의 행패는 여전했다. 그러자 박광호, 손천민, 남홍원, 임규호 등이 중심이 되어 상소문을 작성하여, 박광호를 비롯한 40여 명의 동학 대표자들이 1893년 2월 8일에 한양으로 올라가, 이틀 후인 2월.10일부터 광화문 앞에 봉소하고 엎드려 사흘 동안을 밤낮으로 호곡하며 상소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2월 13일 정오에 칙령이 내려졌다. "너희들은 각각 집에 돌아가서 생업에 종사하라. 그렇게 하면 곧 너희들 소원대로 해주겠노라,"
이에 동학 지도자들은 지방으로 내려와 해산하였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동학 교도들의 소원을 들어주기는 커녕 2월 26일에 동학의 포교를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동학 지도자들을 체포하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이서들과 군졸들에 의한 동학 교도 박해는 전보다 더욱 심해졌다. 이렇게 되자, 동학당은 매우 분개하면서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최시형은 곧 손병희, 손천민 등의 간부들과 상의한 후, 3월 10일에 보은에서 모임을 갖는다는 통문을 전국 교인들에게 돌렸다. 이날 모인 교인 수는 대략 2만5천여 명 정도에 이르렀다.
그틀은 최시형, 손병희, 손천민, 서병학, 임규호 등의 지휘를 받으며 평화적으로 시위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보은 군수 이중익등을 보내, 회유하며 해산할 것을 한사코 종용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해산을 거부하였다. 사태가 이처럼 악화하자, 3월 17일에 어윤중을 양호도어사로 임명하여 보내 회유케 했으며, 충청도 관찰사에 조병호를, 전라 감사에 김문현을 각각 임명하였다.
어윤중은 3월 26일에 공주영장 이승원, 보은군수 이중익, 순영군관 이주덕 등을 데리고 직접 보은으로 내려가 시위대의 대표자들과 만나 해산을 권하였다.
4월 1일에도 그는 청주영장 백남석과 보은 군수 이중익을 데리고 시위대를 방문하고 무조건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 시위대는 척왜, 척양의 취지를 역설하고, 지방 관리들의 불법 탐학을 호소하면서, 앞으로 5일 이내에 모두 해산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자 어윤중이 3일로 단축시키자고 하여 시위대측에서 이를 수락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충청 병영의 군사 1백명이 선무사를 호위한다는 구실로 장내에 도착하고, 경병 1천명이 대포를 끌고 출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최시형을 비롯한 간부들이 그 이튿날 밤 보은을 떠나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그러자 시위대도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하여 4월 3일에는 장내가 텅 비게 되었다.
이 무렵,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은 자기 부친의 비각을 세우겠다는 명목으로 농민들에 게서 1천냥을 불법으로 거둬들였다. 그리고 그는 면세해 주겠다고 약속하고서 진황지를 개간케 한 다음 수확기에는 강제로 징세하였으며, 또한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군내에 만석보(관개용 저수지)를 수축케 하여 7백석의 수리세를 징수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
이에 분개한 농민들은 수차에 걸쳐 군수와 관찰사에게 진정하였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에 고부 지방의 동학교 접주 전봉준(전봉준: 1854-1895년, 본명은 전명숙, 별명은 녹두장군, 전창혁의 아들, 전부 태인 출신, 부친이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뒤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으며, 30세경에 동학에 입문하여 고부 접주가 되었다)은 탐학 불법을 일삼는 조병갑에게 힘으로써 응징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정익서, 김도삼 등의 동지들과 상의하여 고부군의 아문을 습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1894년(고종 31년) 1월 10일 새벽에 그는 1천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마항 시장터에서 봉기하였다.
봉기군은 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길이가 대여섯 자쯤 되는 죽창들을 손에 들고서 "탐학 군수를 응징하러 가자" 라는 전봉준의 독려를 받자마자. 도도한 기세로 나아가고 고부관아를 습격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관가의 무기를 탈취한 다음, 이서나 관속배들을 모조리 붙잡아 문초하고, 그들이 부당하게 강탈하여 거두어 들인 수세와 세곡을 원주인인 농민들에게 다시 나누어 준 다음. 문제 많은 만석보를 파괴해 버렸다.
이때 군수 조병갑은 재빨리 담을 넘어 도망가 버렸다. 봉기군들이 그를 추격하였으나 그 행방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조병갑은 변장을 하고 정읍을 거쳐서 1월 15일에 전주 감영에 도착하였다.
그는 감사 김문현에게 온갖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1천명의 병력을 지원해 주면 고부로 돌아가 소요를 진압하겠다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감사는 그의 요청을 거부하고 중앙의 지시를 기다리자고 했다. 그러면서 감사는 병방 비장에게 병력 50명을 주어 급히 고부로 출동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변장을 하고 봉기 군들 속에 숨어 들어가 전봉준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봉기군들에게 들켜 모조리 체포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조정에서는 조병갑 군수를 구속하여 처벌했으며, 감사 김문현
을 감봉에 처하고, 장흥 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그러나 봉기군은 전봉준의 지시에 따라 1월 하순에 자진 해산해 버렸다. 그런데 안핵사 이용태는 부임 때 8백여 명이나 되는 역졸을 데리고 위세당당하게 나타나더니, 선정으로 뒷수습을 하기는 커녕 모든 책임과 죄를 동학 교도들과 농민들에게 덮어 씌워 가혹한 탄압과 횡포를 일삼는 등 광태를 연출했다.
그는 새로 임명된 군수 박원명을 공갈 협박하여 민란의 주모자들을 수색하게 하고, 동학 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나누어주면서 그들을 체포하라고 역졸들을 사방에 풀어 놓았다.
이들 역졸들은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무고한 농민들을 함부로 구타, 포박, 약탈을 일삼았으며, 심지어 부녀자들을 겁탈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도 이용태는 나 몰라라하며 전주 한벽당에 가서 밤낮없이 기생들을 품에 끼고 술을 마셔대며 놀아났다.
전봉준은 이러한 이용태와 역졸들을 응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서, 정익서, 김도삼 등과 상의한 다음, 이웃 군과 현의 다른 접주들에게 함께 궐기할 것을 요청하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그리하여, 태인, 고부 등지의 수천명의 동학교도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그러자 전봉준은 3월 21일에 "동조대장"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다시 봉기하였다. 전봉준은 봉기군을 이끌고 먼저 고부군 내의 백산면 백산을 점령한 뒤 그곳에서 진용의 정비 및 대오를 편성하여 지휘자를 임명하였다.
그는 우선 병력을 손화중포, 김개남포, 김덕명포의 3개 부대로 나누고, 손화중포 중 1대(1천5백명)는 고창 두령 오하영, 오시영. 임형로, 임천서 등이, 2대(1천3백명)는 무장 두령 송경찬, 강경중 등이, 3대(7백명)는 흥덕두령 고영숙이, 4대(1천2백명)는 정읍 두령 손여옥, 차치구 등이 각각 지휘 책임을 맡도록 하였으며, 김개남포(1천3백명)는 태인 두령 김낙삼, 김문행이, 그리고 김덕명포(2천명)는 태인 두령 김경선, 김제 두령 김봉년, 금구 두령 김사엽, 김봉득, 유한필등이 각각 지휘 책임을 맡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3월 25일에 다음과 같은 4대 강령을 내걸었다.
"하나,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고 짐승도 죽이지 말 것.
둘, 충효를 다하고 세상을 안정시키며 백성을 편하게 할 것.
셋, 왜이를 다 몰아내고 성도를 맑게 할 것.
넷, 군사를 몰아 한양으로 가서 권귀를 다 쳐 없앨 것."
이들 봉기 소식은 순식간에 주위에 퍼져 나가, 태인, 금구, 부안, 정읍 등지에서 동학 교인들 외에 농민들도 백산으로 몰려왔다.
이 무렵, 전남의 고부뿐만 아니라, 금산, 장성, 무장, 그리고 영남의 김해 등지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다.(이 무렵 동학 교주 최시형은 전봉준이 봉기하자 이에 호응하여 북접 산하 동학도들을 궐기시켜 청산에 집결시킨 다음 희덕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전라 병사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장위영 병정 8백명과 야포 2문, 기관포 2문을 주어 출동케 했으며, 안핵사 이용태. 균전관 김창석, 전운사 조필영등은 문책하여 파직시켰다.
그러나 관군은 남하하는 도중에 3백여 명 이상이나 탈영해 버려 전주
에 도착했을 때는 4백70여 명의 관군밖에 남지 않았다.
4월 3일 동학군은 금구, 부안 두 곳으로 몰려가서 부안현 아문을 습격하여, 부안현감 이철화를 구속하고 그곳 관속들을 모두 결박한 다음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후 봉기군은 전주에서 출동한 관군과 황토현에서 맞붙어 4월 6일 밤부터 7일 새벽까지 통쾌히 쳐부순 후, 그 여세를 몰아 정읍,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 등 10여 군, 현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버렸다.
이어, 장성 황룡촌에서 경군까지 격파한 봉기군은 4월 24일 노령을 넘어 다시 정읍으로 진입하였다. 그런 다음 태인을 거쳐 전주성 밖 삼천까지 진격해 갔다. 그러자 관군들이 봉기군의 기세에 놀라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 버리는 바람에 전주성을 별로 힘 들이지 않고 4월 28일 아침에 함락해 버렸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동학군을 회유함과 동시에 휴전을 제의하였다. 이때 봉기군은 "탐관오리와 지방관과 양반부호들의 횡포 및 토색질 근절, 노비 문서의 소각, 신분 차별의 개선, 과부 재가의 허용, 토지 균분제의 실시, 외국상인, 특히 일본상인들에 의한 상권 침해 근절" 등을 골자로 하는 12개 폐정개혁을 내세웠다.
이를 정부가 모두 들어주기로 하고 또한 동학군의 생명 및 생업의 안전을 약속하자, 동학군은 5월 7일과 8일 양일에 걸쳐 자진 해산하였다. (사실상, 전봉준은 민란을 구실로 청군이 개입하고 천진조약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입국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더 이상 외국군이 나라를 침범하게 해서
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는 한 걸음 물러서기로 했던 것이다.)
휴전 협정대로 정부는 전라도 53개 군에 집강소(민정기관)를 두어 이를 지방행정 보조기관으로 삼아, 동학교도들에게 이를 관장케 하여 구체적으로 폐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이후 전봉준은 20여 명의 간부를 인솔하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교도를 격려하고 집강소를 전국에 설치하는 등 조직 강화에 힘쓰는 한편 정부 관헌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시정을 감시하고 신임 관찰사 김학진과도 만나 도정을 상의하는 등 부패한 지배계급의 근절과 근본적인 시정계혁에 혼심의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894년 6월에 일본군이 갑자기 궁궐로 쳐들어가 민씨 정권을 제거하고 대원군을 옹립한 후 새 정부를 수립하자, 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전봉준은 "척왜"를 부르짖으며, 그 해 9월에 삼례에서 남도접주로서 동학군을 다시 집결시킨 다음, 북도접주 손병희와 연합 하여, 교주 최시형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의 기치를 내걸고 9월에 재봉기하여 대일전을 시작하였다. (교주 최시형도 전봉준이 재봉기하자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하여 대병력의 봉기군을 이끌고 논산에서서 남접군과 합세했다)
그리하여 한때 중부, 남부의 전역과 함남, 평남까지 항쟁의 불길이 확장되어 갔으며, 특히 이천, 목천, 공주 등지에서 혈전을 벌여 그 위세를 크계 떨쳤으며, 그 해 11월 중순에는 논산까지 진출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공주 쪽으로 병력을 급파하였다. 이리하여, 동학군과 일본군은 공주의 우금치고개에서 6-7일간 치열한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군은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정예부대인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패하고 말았다.
이후 후퇴를 거듭하여 전주. 태인을 거쳐 전라도 남단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봉준은 일단 남쪽으로 후퇴하여 머물면서 동학군의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재봉기를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봉준이 수명의 동지들과 함께 순창으로 피신하여 있을 때,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 등 지방민의 급습으로 12월 28일에 피로리에서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된 후 이듬해인 1895년 3월에 사형당하고 말았다. (교주 최시형은 공주에서 일본군의 혼성군과 싸워 참패한 뒤 논산을 거쳐 장수 등지에서도 패하고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송경인 에게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사형당 했다)
이리하여, 안으로는 양반 중심의 봉건 체제에 대항하고, 밖으로는 외국 자본주의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운 동학혁명은 결국 그양자의 연합세력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지만, 이 결과로 대내적으로는 1896년의 갑오개혁이라는 내정 개혁을, 대외적으로는 청.일 전쟁을 유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깊은 농민전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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