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왜 고려와 조선은 화약을 애용하지 않았을까...

구름위 2013. 10. 30. 16:11
728x90

우리나라에 처음 화약이 도입된 것은 14세기 말엽 최무선에 의해서 였다.

그 후 고려는 첨단 화약무기(당시로서는)를 상당히 많이 생산했고, 이후 조선에 까지 그 기술에 전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무기 분야에서 일본이나 서양에서와 같이 화약무기의 전파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물론 화약의 종주국인 중국에서 조차 화약무기는 역시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

그러한 전차로 많은 밀리 매니아들이 조선은 기껏 화약 개발해놓고도 대량으로 쓰지 않아서 임진왜란 때 고생했다고 비꼬기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원인없는 결과는 없으니, 오늘은 왜 중국과 조선, 특히 우리나라가 화약 무기 생산에 소극적이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화약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19세기까지 화약이라고 하면 흑색화약을 의미할 정도로 화약은 단 한가지 종류뿐이 없었다. 물론 최초 중국에서 발견되었을 때도 임란기의 조선군이나 일본군이 사용한 것도 흑색화약이다.

 

이 화약의 주성분은 목탄, 유황, 초석(질산칼륨)인데 흑색을 띄는 이유는 목탄(나무가 타고 남은 재)를 섞었기 때문이다.

사실 목탄이나 유황 따위는 자연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문제는 질산칼륨(KNO3)인데 이게 그리 녹녹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물론 자연계에서 질산칼륨 덩어리가 존재하기도 한다. 이른바 초석이라는 광물이 바로 그것이다. 다만 이 놈은 아메리카 대륙에서만 소량 생산된다.

 

결국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까지의 구 대륙 사람들은 좀 독특한 방법으로 이 질산칼륨을 정제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초석 이외에도 자연계에 질산칼륨 성분이 없지는 않다. 이를테면 동물의 사체에 박테리아 활동를 통해서 만들어지거나, 칼륨 성분이 있는 토양에 비(정확하게는 대기 중에 질소 성분을 머금은)가 내린 후 햇볕을 통해서 어느 정도 온도가 유지되면, 만들어지기도 한다.

다만 옛날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을 뿐 아니라, 위의 방법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절대양도 턱없이 적다.

 

최무선이 초반에 번번히 실패했던 이유가 바로 이 질산칼륨(염초)를 정제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숱한 실패 끝에 이 성분을 찾아낸 것은 오래된 가옥의 아궁이나 마루 밑 흙에서 였다. 드디어 염초를 만드는 법을 찾았지만 문제는 여기서도 발생한다.

 

전국방방 곡곡에 아궁이나 마루가 없는 집은 없겠지만, 문제는 오래된 집의 흙이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물론 오래된 가옥의 흙이라고 해도 전부 쓸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토양이 풍부한 칼륨 성분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좋은 조건의 흙을 얻었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조선시대 방법으로 이 염초를 얻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고 단 맛이 나는 위의 조건의 흙을 구한다음.

둘째, 재와 함께 섞은 후

셋째, 오줌과 섞어서 오랜 시간 썪인 다음.

넷째, 다시 태운 후

다섯째, 걸러내서

여섯째, 응고 시켜야 드디어 소량의 염초(질산칼륨)을 얻을 수 있다.

 

이 놈의 염초라는 게 하루 아침에 만들어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이다.

 

흑색 화약의 성분 중 약 3/4가 바로 이 질산칼륨 성분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조건의 흙을 얻었다고 해도 흙 1톤당 질산칼륨 100g를 얻기 힘들었다. 결론적으로 조선은 화약을 대량 생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2. 화약무기라고 해도 만능은 아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최초의 화약인 흑색화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서양은 죽기 살기로 화약무기 생산에 목을 매단 반면, 조선과 중국은 1등, 2등으로 화약을 만들어놓고도 그 사용에는 후발 주자들에게 뒤졌다.

그 이유는 도대체 뭘까...

 

최초로 화약을 사용한 무기는 전부 화포류였다. 인마살상용 총기류가 개발된 것은 화약기술이 유럽에 전래된 이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물론 중국에서 구경을 줄여 개인화기라고 부를만한 무기가 유럽보다 먼저 송대에 개발되지만, 그것이 널리 쓰여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화약무기는 몇 가지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화포고 총기류이건간에 화약의 폭발력의 반작용으로 탄환이나 포탄을 날리는 용도로 화약을 사용한다. 그런데 당시의 금속 제련술로는 약실이 일정 두께를 유지하지 않는 한 화약의 폭발 반작용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중국과 우리의 초창기 대포들은 포탄을 장전하고 발사하는 과정에서 폭발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최초의 총기류라고 할 수 있는 유럽의 머스켓소총류까지만 해도 이러한 폭발 위험은 매우 컸다.(머스켓 소총의 사고률은 상상을 초월한다.)

지금도 총신이나 포신을 만드는 기술은 첨단 기술에 속할 만큼 고도의 제련술을 요하는 부분인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당시 화약무기의 첫번째 문제는 바로 늘 상존하는 폭발 위험이었던 것이다.

 

 

흑색화약은 또한 습기에 매우 약하다. 젖어버리면 못쓰는 것은 당연하고 공기중에 습도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심한 경우 불발이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물론 그만큼 세밀한 관리를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날씨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쉬운 말로 화약무기는 비가 오면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두번쨰 문제였다.

 

 

세번째는 화약무기 취급의 번거로움이었다.

 

임란기에 조선군의 화포 발사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심지 고정, 화약 장전, 화약 다지기, 격목 장전, 탄환장전, 심지에 불 붙이기

 

말로 해도 한참되는 이 과정을 실제로 하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물론 병사의 숙련도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꽤 오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조총이나 유럽의 머스켓등의 소총류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발사하게 된다.

허나 화포와 달리 신속 발사가 생명인 개인화기가 이렇게 오랜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쉽게 말해서 연사력이 꽝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럽과 일본에서는 이러한 화기 연사력의 맹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3열 대형을 고안해낸다. 첫번째 횡대가 사격후 두번쨰와 세번째 열이 사격하는 동안 재장전을 마치는 방법으로 화력의 딜레이를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장 상황은 늘 이들에게 3열대형을 갖출만한 시간을 주지는 않았다.

그게 당시 개인 화기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던 것이다.(지금이야 패키지형 탄환의 개발로 그냥 땡기기만 하면 분당 수백발에서 수천발씩 쏟아내게 되었지만...)

 

 

네번째는 사거리의 문제였다.

 

임란기 일본의 조총의 유효 사거리는 기록에 따르면 200보, 약 70~80미터쯤이다. 그에 비해서 조선군의 활은 400보, 약 150미터 가량의 사거리를 지닌다.

 

사실 이 차이가 일본 혹은 서양과 달리 조선이나 중국이 개인화기 생산에 열을 올리지 않은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중국과 조선은 서양이나 일본과는 달리 장사정거리 활의 보급과 생산능력이 월등햇던 것이다. 게다가 활 쪽이 재장전에 걸리는 시간이 월등히 짧았음으로 즉응성과 사거리면에서 오히려 당시의 개인화기류에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다섯째는 명중률 문제로 이 경우는 대구경 화포류에 해당한다.

 

임란기에 사용된 대구경 신기전의 경우는 최대 사거리가 1킬로미터에 달한다. 물론 대부분의 대구경 화포들이 수백미터 때의 유효사거리를 자랑했지만, 사거리가 늘어난 만큼 치명적인 목표 도착 오차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필자가 전포병이라서 하는 말이지만, 현대 포병의 경우에는 최초 관측병이 목표물을 포착한 후에 재원을 알려주면, 도판병이 이를 해독하고 다시 계산병이 포의 발사각과 장약의 양을 결정해서 전포에 전달한다.

이렇게 복잡한 계산을 통해서 발사함에도 현대 포병에게도 전포명중은 녹녹한 문제가 아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자면 탄도계산의 문제 때문에 오늘날의 수학이 고속으로 발전했고, 최초의 컴퓨터인 애니악 역시 탄도 계산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계산은 커녕, 탄도학이라는 것도 모르는 과거에 특히나 발사시 반동이 엄청난 화포를 가진 임란기까지만 해도 화포 사격은 눈감고 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 까닭에 당시의 화포가 거의 성체나 함선과 같이 거대한 목표물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물론 함포 사격의 경우는 위의 포병 계산만으로는 턱도 없다. 왜냐하면 바다에는 항상 파도가 있기 때문에 롤링과 피치를 계산해야 한다. 덤으로 느리기는 하지만 움직이는 목표물이니 니드계산도 필수다.

 

주- 요즘 전투함선에서 중요시되는 것이 얼마나 대구경 화포를 장비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정밀한 사격통제 컴퓨터를 장비했는가가 중요시 되는 이치와 같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T62전차 포탑을 떼다가 붙여놓은 북한고속정은 정말 주체사상이 아니면 명중시키기 어려운 무기라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한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과 중국은 화포무기 생산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중국과는 달리 조선의 경우는 화약 생산이라는 측면부터가 골치 아픈 문제였던 것이다.펌-

 

 

'역사 ,세계사 > 옛 우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 태종① 정몽주 제거  (0) 2013.12.07
마음으로 그린 90년 전 한국과 한국인  (0) 2013.11.21
동학혁명   (0) 2013.08.22
갑신정변   (0) 2013.08.22
임오군란   (0) 2013.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