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스크랩] 임진왜란의 의승군 활동과 그 불교사적 의미

구름위 2012. 10. 7.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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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龍 泰 (동국대)

머리말

1. 청허 휴정과 그의 문도

2. 임진왜란의 의승군 활동

3. 의승군 활동의 불교사적 의미

맺음말

머 리 말

조선 초의 억불정책에 이어 15세기 초 연산군․중종대에 󰡔경국대전󰡕의 도승조 삭제와 같은 실질적 폐불 상태에 놓이면서 활로를 찾지 못했던 불교계는 16세기 중반 명종대에 기사회생의 전기를 맞이하였다. 즉 1550년(명종 5) 문정왕후에 의해 선교양종이 다시 세워졌고 이에 度僧과 僧科가 재개되면서 인적 재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승과에 합격한 승려들은 승직을 정식으로 부여받고 주요 사찰의 주지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승과 출신이 이후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그 대표자가 선․교종판사를 역임한 西山大師 즉 淸虛 休靜(1520-1604)과 제자 四溟 惟政(1544-1610)이었다. 한편 문정왕후 사후인 1566년(명종 21) 양종이 다시 혁파되었고, 선종판사를 맡았던 虛應 普雨는 제주도로 유배되어 입적하였다. 하지만 양종 복립으로 인해 이전 시기에 단절될 뻔 했던 교단의 인적 계승과 존립이 가능해졌고 이때 승려 자격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이들이 이후 임진왜란 때까지 활동하면서 불교 존립의 새 전기를 만들어내었다. 즉 안정적인 신분 보장의 토대 위에서 수행과 교육, 불사 설행과 불서의 간행 등이 활발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대에는 다수의 유교 명현이 등장하고 사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붕당 정치가 시작되는 등 조선이 본격적인 유교사회로 접어든 시기이다. 이러한 시대 추세를 반영하여 불교에 대한 적대적 태도보다는 정치적 방임이 대세가 되었다. 이 시기에 휴정 등 고승들은 학습과 저술, 교육에 매진하였고 신앙 활동과 각종 불사를 주도하였으며 유명한 사대부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하지만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국가 존망의 위기였을 뿐 아니라 불교계에도 엄청난 지각변동을 가져오는 등 조선후기 불교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사건이었다. 본고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義僧軍을 이끌었던 청허 휴정과 그 문도들의 면모, 이들이 주도한 의승군의 활동과 업적, 그리고 의승군 활동의 폐해와 불교에 대한 인식 변화, 조선후기 불교의 전개에 미친 영향 등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의승군 활동의 역사적 의미뿐 아니라 불교와 국가와의 관계, 당시의 시대성에 대해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청허 휴정과 그의 문도

조선시대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인 청허 휴정은 양종 복립 때 禪敎兩宗判事에 제수되었고 임진왜란 때는 八道都摠攝으로 의승군을 일으켜 충의의 공적을 인정받았다. 그는 한편 󰡔禪家龜鑑󰡕등 많은 저술을 남겼고 간화선 우위의 선교겸수나 선, 교, 염불의 三門修業 등 조선후기 불교의 수행 방향을 정립하였다. 또 그 문하에서 수많은 문도들이 배출되어 교단을 이끄는 주도세력이 되었는데 휴정의 법맥을 이은 후손들을 통칭하는 淸虛系는 조선후기 최대의 계파로서 동문 浮休 善修의 浮休系와 함께 교단을 양분하였다. 여기서 계파는 선종의 법맥 전승을 일차적 기준으로 한 것으로 법통과 계파인식을 공유하였는데, 청허계의 연원은 당시 휴정의 조사인 碧松 智嚴에서 시작된 것으로 인식되었다. 지엄은 폐불 조치로 큰 타격을 입은 연산군과 중종대 전반에 활동한 인물로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여 ‘杜門冥寂 不修人事 不諂於世 不賤賣佛法’하였고 수행과 저술에 매진하면서 불교 전통의 명맥을 이은 인물이다. 제자로는 芙蓉 靈觀과 敬聖 一禪이 있는데 두 사람은 각각 휴정의 전법사와 수계사였고 휴정은 전법사 영관의 법맥을 계승하였다.

최고위 승직을 역임한 휴정은 교단 내에서 그에 필적할만한 대상이 없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명성을 떨쳤다. 또 당시 선과 교로 나뉘어 분열해 있던 불교계의 통합을 지향하여 간화선을 중시하면서도 선과 교를 겸수하는 수행체계를 정립하였다. 관동의 유정, 호남의 雷黙 處英, 황해도의 義嚴을 비롯한 임진왜란 때의 승장들 또한 휴정의 제자였고 휴정이 말년에 주석한 묘향산을 거점으로 하여 금강산, 지리산 등 전국적 범위에서 문도들이 활동하였다. 휴정의 문도 중 문집을 남긴 주요 승려들을 생년 순으로 정리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이름

생몰년

문집명

활동 및 근거지

탑비 건립지

정관일선

1533-1608

정관집

덕유산(입적)

영허해일

1541-1609

영허집

능가산 실상사(출가/입적)

사명유정

1544-1610

사명당집

직지사(출), 해인사(입)

해인사/밀양 홍제사/건봉사

운곡충휘

? -1613

운곡집

해인사

제월경헌

1544-1633

제월당집

천관사(출), 심원사(입)

심원사

청매인오

1548-1623

청매집

부안 변산, 연곡사(입)

기암법견

1552-1634

기암집

금강산

유점사

소요태능

1562-1649

소요당집

백양사(출), 연곡사(입)

금산사/심원사

중관해안

1567- ?

중관집

영월청학

1570-1654

영월당집

가지산 보림사(출)

편양언기

1581-1644

편양당집

묘향산 내원암(입)

보현사/금강산 백화암

먼저 사명 유정은 휴정에게 심법을 전수받고 수제자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휴정을 대신해 의승군을 이끌면서 크게 활약하였다. 霽月 敬軒도 승장으로 활동하였지만 선교양종판사 직책을 사양하고 수행에만 전념하였으며 이력과정의 四集 교재로 제자를 훈도하였다. 또 그의 문집인 󰡔제월당집󰡕서문에는 太古법통이 아닌 懶翁법통설을 제기하고 있어 주목된다. 奇巖 法堅은 금강산 지역을 주요 근거지로 활동하면서 많은 중창불사와 법회를 열었고 逍遙 太能은 처음에 부휴 선수에게 수학하였지만 다시 휴정의 법맥을 전수하였다. 中觀 海眼은 臨濟太古 법통설의 정립에 관여하였고 화엄사, 금산사, 대둔사의 사적기를 짓는 등 불교사에 큰 관심을 가졌다. 또 詠月 淸學의 󰡔영월당대사집󰡕에는 이력과정의 四集, 四敎, 大敎 체제가 최초로 정리된 글이 수록되어 있다. 휴정의 말년제자인 鞭羊 彦機는 󰡔청허당집󰡕을 재간하고 휴정의 수행체계를 정비하는 등 스승의 선풍과 사상을 선양하였고 임제태고법통설을 주창하여 조선 불교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였다. 편양파는 이후 청허계의 주류 문파로서 교단 내에서 가장 세력이 큰 전국적 문파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휴정의 제자로서 대부분 승장으로도 활동하였는데, 특히 청허 문도 중 다음의 4대 문파가 세력을 형성하였다.

우선 사명문파는 사명 유정이 당대에 휴정의 수제자로 인정받았고 적전의 위상을 가졌기에 초기에는 교단을 주도하였다. 유정은 처음 직지사 信黙에게 출가, 득도하고 1561년 승과에 합격한 후 직지사의 주지가 되었다가 이후 묘향산의 휴정에게 수학하고 법을 이었다. 그는 스승을 대신하여 임진왜란 때 의승군을 통솔하였고 휴정의 명으로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보호하기도 하였다. 전쟁은 물론 외교에도 공을 세워 국난 타개의 일등공신으로서 불교계를 대표하는 명승으로 이름을 떨쳤다. 휴정은 그에게 “지금 그대가 팔방의 승려들을 대함에 본분사인 경절문의 활구로 스스로 깨우침을 얻게 하는 것이 종사로서 모범이 되는 것이다. 정맥을 택하고 종안을 분명하게 하여 부처와 조사의 은혜를 저버리지 말라”고 당부하였고 정법을 부촉하였다. 유정은 왕명으로 일본에 사행을 떠나게 되면서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지만 휴정의 탑을 금강산에 다시 세우고 그 문집 간행을 유명으로 남기는 등 전법제자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유정의 적전 松月 應祥은 선교양종을 겸비하였다고 평가되며 1624년 남한산성 팔도도총섭으로 임명되었지만 거절하고 교화에 힘썼다. 대신 그의 전법제자 虛白 明照가 1627년 정묘호란 때 팔도승병대장으로 안주에서 4천여 승군을 이끌었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군량 보급을 담당하는 등 유정의 활동을 계승하여 승군을 통솔하였다. 사명파는 유정의 근거지였던 금강산 일대와 영남을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였지만 18세기 이후에는 약화되었다.

다음 정관문파의 靜觀 一禪(1533-1608)은 휴정의 심인을 전수하였고 다른 한편 휴정의 조사 벽송 지엄에게 禪法을 전한 登階 正心으로부터 이어지는 法華 교학의 또 다른 계보를 전해 받았다. 즉 일선은 정심 이후 선과 교의 양쪽 전법을 모두 계승한 것으로 그는 휴정을 대신하여 󰡔금강경󰡕, 󰡔능엄경󰡕등의 경전을 강의하는 등 교학에 정통하였다. 정관문파는 17세기 초까지 해남 대둔사(현 대흥사)에 연고를 두었고 부휴계와 밀접한 교류를 가지면서 호남 지역에 근거지를 가졌는데 18세기 이후에는 세력이 미약해진다. 한편 소요문파는 소요 태능(1562-1649)을 조사로 하는 문파이다. 태능은 임진왜란에서 승장으로 활약한 후 남한산성 축성에도 조력하였고 뒤에 ‘忠君憂國’을 인정받아 1652년 효종에게 慧鑑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으며, 소요파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호남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마지막으로 편양문파를 개창한 편양 언기(1581-1644)는 휴정의 말년 제자로서 스승이 주석한 묘향산 보현사를 주된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휴정의 탑을 건립하고 문집 󰡔청허당집󰡕을 재차 간행하였으며 임제태고법통설을 주창하는 등 휴정의 유업을 이었고 그로인해 청허계를 대표하는 적전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또 휴정의 수행 기풍과 사상을 계승하여 선교겸수와 삼문수업 체계를 정립하고 새롭게 정비된 이력과정 교재들을 대규모로 간행, 유포하였다. 이처럼 언기는 사명 유정에 비해 대외적 활동에는 소극적이었지만 수행방향 정립과 불교 교단의 정체성 확립에 매진하고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기에 종문 내에서 큰 권위를 가질 수 있었고 문하에서 많은 학승이 배출되어 이후 편양파는 조선후기 불교계의 대표 문파로 성장하였다.

휴정의 높은 위상을 반영하여 청허계의 지역범위는 전국을 망라하였다. 휴정은 벽송 지엄과 부용 영관이 주석하였던 지리산 유역에서 출가하였고 장년 이후에는 금강산과 묘향산에 주로 머물렀는데 三山이라 불린 이 세 산은 당시 불교의 중심지였다. 먼저 지리산 일대는 소요 태능이 구례 연곡사를 근거지로 하여 지엄과 영관을 추숭하고 문도를 양성하였으며, 영월 청학 또한 지리산 서쪽 금화산에 주석하였다. 정관 일선의 정관파는 덕유산, 계룡산, 전주 종남산, 해남 대둔사 등 호서와 호남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지리산과 호남, 호서 지역은 청허계 뿐만 아니라 부휴계 세력의 주된 기반이기도 하였다. 다음 금강산 지역은 사명 유정이 주석하였던 곳이며 또 제월 경헌과 기암 법견의 오랜 연고지였다. 마지막으로 묘향산은 휴정이 입적한 곳으로서 편양 언기 이후 17세기에는 편양파의 주류가 머물면서 휴정의 유풍을 계승한 청허계의 본산이었다.

2. 임진왜란의 의승군 활동

1592년(선조 25)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고 義州까지 몽진을 간 선조는 7월에 僧統을 설치하고 승군을 모집하면서 묘향산에 있던 청허 휴정에게 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의 직책을 수여하여 승군 동원과 통솔을 담당하게 하였다. 당시 선조는 행재소에 휴정을 불러, 국가의 위기를 맞아 널리 구제하기를 청하였고 휴정은 “나라 안의 승려 가운데 늙고 병들어 나설 수 없는 자들은 신이 이미 명하여 각자 있는 곳에서 수행하며 신령의 도움을 기원하게 하였고 그 나머지는 신이 모두 소집해 오게 하여 종군케 하고자 합니다. 신 등은 비록 人丁의 부류[人類]는 아니나 이 나라에서 태어나 성상의 은혜와 훈육을 받았는데 어찌 한 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목숨을 바쳐 충심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한다. 휴정은 앞서 1589년 鄭汝立 사건 때 무고로 옥고를 치르고 무혐의로 풀려났는데 당시 휴정의 글을 선조가 읽고 인품에 감동하여 御筆墨竹과 詩를 하사한 인연이 있었다. 국왕의 명을 받은 휴정은 順安 法興寺에서 전국 사찰에 격문을 띄워 5천여 명의 승군을 소집하였다.

황해도에서는 제자 의엄이 총섭이 되었고 관동의 사명 유정과 호남의 뇌묵 처영을 비롯해 각지의 승장들이 승군을 이끌고 일어났다. 충청도의 騎虛 靈奎는 의승군을 모집하면서 “우리들이 분기함은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다. 만일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우리 군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였고 이에 승군이 스스로 모여들어 800여 명에 이르렀다. 영규의 의승군은 8월에 의병장 趙憲을 따르는 7백 의병과 함께 金山에서 적과 싸우다 모두 전사하였다. 이 사건은 의승군의 충의와 전투력에 대한 조야의 신뢰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의승군은 다음 해 平壤城과 幸州山城 전투에 직접 참전해 큰 전공을 세우는 등 국왕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또한 1593년 3월 서울 수복 후 10월 1일 선조가 환도할 때 大駕를 맞이해 호종한 것도 휴정이 인솔한 100명의 승군이었다. 이후 의승군은 군량의 보급, 山城 축조와 수호 임무 등에 주력하였다. 한편 全州에 있던 󰡔朝鮮王朝實錄󰡕이나 국가 기록물, 태조의 畵像 등도 江華나 海州, 義州 등을 거쳐 묘향산으로 옮겨졌고 승직을 수여받은 승려가 이를 지키는 일을 담당하였다.

전쟁 중에 고위 승직을 맡아 의승군을 통솔한 대표적 인물로는 의엄과 유정을 꼽을 수 있다. 의엄은 1593년 선조의 환도 후 휴정이 연로함을 이유로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도총섭을 맡았고, 전쟁 기간은 물론 종전 후에도 종묘 건립과 서적 인출 등 주요 국가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僧王’이라고 비판받았을 정도로 당시 큰 위세를 가졌는데 뒤에 환속하였기 때문인지 이후 거의 주목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유정은 휴정의 수제자로서 임진왜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충의의 승려로 그 명성을 떨쳤다. 유정은 강원도에서 8백의 승병을 모아 거병한 후 휴정을 대신하여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고 산성축조와 군량조달 등 전쟁 지원 사업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일본군과의 강화교섭 과정에서 조정을 대표하여 적장을 만났으며 정세를 분석하고 대비책을 주달하기도 하였다. 또 전후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국교 재개 문제나 포로 쇄환 등 외교적 처리를 전담하였다. 도총섭을 역임한 유정의 공은 선조에게 높이 평가되어 정3품 당상관인 僉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았다.

그 밖에 뇌묵 처영, 중관 해안, 기암 법견 등 다수의 휴정 문도들이 승장으로 활동하였다. 처영은 호남에서 1천명의 의승군을 일으킨 후 평양성 전투와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고 남원에 蛟龍산성을 쌓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그는 공적을 인정받아 18세기에 휴정, 유정과 함께 밀양 表忠祠에 공식 향사되기도 하였다. 해안은 숙부이자 스승인 처영에게 출가한 후 휴정에게 수학한 인물로서 처영, 유정과 함께 활동하였다. 법견은 전라도 笠巖산성의 축조와 수호를 맡았고 전후 금강산 일대의 수많은 중창불사에 참여하였다. 또 소요 태능, 청매 인오 등 다수의 승장들이 휴정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전쟁 기간 중 산성 축조와 방어를 의승군이 주로 담당한 이후 남․북한산성 승군의 예에서 보듯이 조선후기에 하나의 전형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각지에서 의승군이 조직되어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먼저 호남지역의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표적 사례로 화엄사의 의승군을 들 수 있는데, 당시 주지였던 雪弘은 승군 300여 명을 규합하여 호남 일대로 진격하는 일본군과 맞서 楡谷의 石柱鎭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1593년 화엄사의 전각 500여 칸을 소각하였고 이때 丈六殿의 華嚴石經도 불에 탔다. 또 무주와 덕유산 일대는 호남으로 들어가는 요충지여서 담양과 남원 인근의 의승군이 지켰고 호남의 승장 처영은 1593년 1천명의 의승군을 이끌고 權慄의 군대와 함께 서울 쪽으로 가서 참전한 후 유정과 함께 다시 영남으로 내려갔다. 한편 경상도에서는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信悅의 활약이 주목되는데 그의 의승군은 농사를 지으면서 화포를 교습하였고 거제 전투에 郭再祐의 의병 등과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 충청도의 의승군 2천명은 의병과 함께 관군에 편입되어 활동하였다.

이와 함께 의승군이 水軍으로 활약한 사례도 많이 나온다. 李舜臣의 全羅左水營에는 1592년 9월 5개 부대 400명의 의승 수군이 조직되었고 순천의 三惠, 본영의 義能이 僧將 및 軍師를 맡아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1594년에는 삼혜가 도총섭 직책을 맡으면서 여수 興國寺에 상설군으로 의승 수군이 주둔하며 제도화되었고 300명 규모의 승군이 좌수영이 해체된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300년간 존속하면서 守城 및 잡역 등에 종사하였다. 또 화엄사 출신 慈雲 處寬도 좌수영 수군에 들어가 副將으로 해전에 참여하였으며 전공을 세워 大選의 승계를 얻고 禪敎判의 승직을 얻었다. 처관은 潤訥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그는 1593년 호남 일대의 의승 300명을 흥국사에서 규합하여 수군에 참여한 후 熊川 전투부터 직접 참전하였다. 전후에 선조가 전공을 치하하기 위해 백미 600여 석을 내리자 윤눌은 전몰자 위령을 위한 水陸齋를 열었고 화엄사, 흥국사, 실상사 등의 중수 불사에도 참여하였다. 수군 활동에는 부휴계 碧巖 覺性도 참여하였는데 1593년 사명 유정의 천거로 明의 군대와 함께 해전에서 적을 격파하여 명군의 칭송을 얻었고, 1595년 해인사에서 각성을 만난 명의 장수 李宗誠이 그에 대해 찬탄하였다고 한다.

3. 의승군 활동의 불교사적 의미

임진왜란 당시의 의승군 활동과 충의의 공적은 불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위상이 제고되고 승도의 효용성을 새롭게 환기시키는 전환기적 계기가 되었다. 반면 불교계로서는 막대한 인적, 경제적 손실과 수행기풍의 퇴조 등 큰 피해를 입어서 전쟁과 의승군 활동이 긍정적 결과를 가져온 것만은 아니었다. 우선 병화와 약탈, 田地의 황폐화는 사찰 건물의 소진과 함께 사원의 재정 기반을 크게 약화시켰고 승군 활동으로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었다. 지역별로 동원 인원이 과중하게 책정되거나 승려의 도첩 유무가 문제가 되기도 하였고, 승군의 활동 유지비를 屯田 외에 寺社奴婢의 身貢과 寺位田의 소출에서 감당하게 하는 등 인적, 재정적 타격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군 활동이 승려 본분에 어긋남을 지적하고 수행에 전념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휴정의 주요 제자이며 전란 중에 병으로 은둔해 있던 정관 일선은 “말법이 쇠하고 세상이 매우 혼란하여 백성이 안도하지 못하고 승려도 편안히 머물지 못한다. 적의 잔해와 사람의 노고를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 더욱 처감한 것은 승려가 속복을 입고 종군하여 죽고 도망치면서 출가의 뜻을 잊고 계율 실천을 폐하며 허명을 바라고 돌아오지 않으니 장차 선의 기풍이 멈추게 될 것이다”라고 하여 불교가 처한 현실적 위기 상황을 개탄하였다. 청매 인오도 “참상과 전쟁이 날로 심하고 부역이 해마다 더욱 압박하여 남북으로 갈리고 산중에 희비가 끊어져 병통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토로하였다. 이러한 우려는 기우에 그치지 않았고 실제로 공을 세워 직책을 받은 승려들 중 전쟁이 끝나고 환속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편 전쟁 중의 활약으로 승려의 위상이 높아지고 불교의 입지가 강화될 조짐이 있자 조정에서 고위 승려의 권한 남용 사례가 비판되거나 양종이 다시 세워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표명되는 등 불교의 세력화에 대한 견제와 경계의 시각도 표출되었다. 하지만 승군에게는 동기 유발과 공로 치하를 위해 禪科帖이 지급되었는데, 선과는 원래 승과에 급제한 승려에게 주는 것이지만 이때는 승려의 자격증인 도첩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의승군의 동원과 그에 대한 선과 지급은 선조가 강력하게 주장한 것으로 일각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시세의 급박함으로 인해 시행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진주성이 일본군에 함락된 직후인 1593년 7월에는 선과 발급의 시행령을 재차 삼남에 내려 전공을 올린 승군에게 선과첩을 주도록 하였고 의승군이 전과를 보고하면 속히 선과를 급여하게 명하였다. 또 8월에는 전국 8도에 선교 2명의 총섭을 두어 승군의 동원을 효과적으로 하게 하였다. 다음 기사는 선과 지급에 대한 선조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각도 승려의 수가 상당히 많지만 세상을 등지고 구름처럼 떠도는 무리라서 국가에서 사역시킬 수 없게 되어 있으니, 그들을 사역시킬 수 없을 바에야 한 장의 종이를 주어 적의 수급 하나라도 얻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하면 승려들이 다투어 분발하여 각자가 싸우기 위해 날마다 몰려들 것이니, 의병에게 빈 관직을 주어 조정의 법도를 문란케 하는 것과는 다르고 또 재물을 소비하며 군사를 먹여야 할 걱정도 없을 것이다. 이는 이단을 존숭하여 禪科를 회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임시로 적을 초토하려는 술책일 뿐이다. 전일에도 本司와 상의하여 승려로서 적의 머리 한 급을 바치는 자에게는 즉시 선과를 주기로 했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조항은 진실로 적을 초토하는 일에 유익해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적의 수급을 참획한 승려에게는 각각 선과를 주되 즉시 휴정에게 내려 보내어 그로 하여금 반급하게 할 것이니, 속히 이 뜻을 여러 도의 승려에게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한편 전쟁 중에 의승군을 조직적으로 통솔하기 위해 승장에게 직책을 수여하였는데 처음에는 최고위직을 禪敎兩宗判事로 명하였다. 하지만 승려의 위상이 높아지고 불교의 입지가 강화될 조짐이 있자 이에 대한 비판과 함께 양종이 다시 세워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표명되었다. 이에 선교양종판사 대신 都摠攝의 직책을 내렸고 각 도에 선과 교의 總攝이 두어졌으며 備邊司에서 이들을 임명, 관리하였다. 전쟁에서 전체 의승군을 통솔한 도총섭은 ‘승병의 공을 평가, 보고하고 승군 활동의 대가로 발급된 禪科를 직접 배급’하는 중요한 권한을 가졌고 또 실직은 아니지만 당상관의 품계가 제수되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전란기의 임시책이었고 법제상의 공식 규정은 아니었으며 한 도에 총섭이 한 명만 두어지거나 총섭이 아예 임명되지 않는 도가 있는 등 제도적인 운영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여러 문제점과 서로 다른 목적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를 맞아 승려들이 의연히 떨쳐 일어났고 사림이 주도한 의병의 활약에 견주어 손색이 없는 공업을 세운 것은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18세기에는 휴정과 유정 등을 향사하는 사당이 국가 공인 賜額祠로 지정되기도 하는데, 1738년 밀양의 표충사, 1789년 해남 대둔사의 표충사, 1794년 묘향산 酬忠祠가 사액되고 공식 향사가 이루어졌다. 승려의 향사를 용인한 정조는 “불교는 자비가 중요한데 휴정은 그에 부끄럽지 않아 人天의 안목이 되었다. 종풍을 발현하고 국난을 널리 구제하니 勤王의 원훈이며 上乘의 교주이다. 속세를 구제하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교의 자비이다”라고 하여, 근왕을 위해 일어난 의승군의 공업을 치하하고 이를 불교의 올바른 모습이라고 치켜세웠다. 이처럼 국난을 맞아 충의를 발현한 의승군과 의승장의 업적은 불교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켰고 이러한 위상 제고는 조선후기 불교 존립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전반은 전란과 그로 인한 피해 때문에 불교의 종교적 효용성이 크게 부각된 시기였다. 전쟁 중 서울 안팎의 시체를 묻는데 승려들을 동원하였고 국가에서 선과첩과 도첩을 발급하기도 하였다. 특히 전몰 혼령을 위로하는 역할을 불교가 담당하여 연고 없이 죽은 無主孤魂의 명복과 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재와 수륙재가 설행되었다. 당시 글에는 전쟁의 참상과 함께 야장과 초제를 지낸 후 원혼 구제를 위해 수륙재를 개설한 사실 등이 기재되어 있다. 한편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인적, 물적, 정신적 손실과 함께 선조의 파천과 인조의 굴욕적 강화는 국왕의 권위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불교계는 법회와 기도를 통해 ‘主上殿下壽萬歲 王妃殿下壽齊年 世子邸下壽千秋’와 같이 국왕 일가의 장수와 안녕을 빌고 국가와 민의 안정을 기원하였다.

한편 전쟁 직후의 시대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사례를 들면, 1606년(선조 39)에는 거사들이 도로를 수리한 후 서울 창의문 밖에서 승속이 모두 참여하는 수륙대회를 열었는데 撤市가 이루어졌고 士女들이 큰 길에 가득차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당시 남자는 거사가 되고 여자는 祠堂이라 칭하며 승복을 걸치는 풍조가 생겨났고 일반민이나 사대부가 승려를 접대하고 부처를 공양하며 捨身과 재회를 베푸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불교계는 영혼 구제, 민심 위무와 같은 종교적 역할 수행과 함께 정치적 목적에도 부응하였고 파괴된 다리와 도로 재건, 궁궐 조영 등 전후 복구사업에 참여하였다. 결과적으로 전쟁은 불교의 종교적 기능을 새롭게 환기시키고 신앙 수요를 창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맺 음 말

임진왜란 이후 승군의 조직과 활동은 계속되어 1626년에 완성된 남한산성 축성 공사에 팔도도총섭 벽암 각성이 통솔하는 승군이 동원되었다. 남한산성 내에는 9개의 사찰이 조성되었고 승군이 주둔하면서 방비를 맡았다. 승군은 국가 공역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군사적 전통도 이어갔는데,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유정의 문손인 虛白 明照가 팔도의승도대장이 되어 4천여 승군을 일으켜서 평안도 안주 방어전에 참여하였다. 이어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벽암 각성이 화엄사에서 “우리도 국왕의 신민이며 더욱이 널리 구제함을 종지로 삼고 있다. 나라일이 위급하니 차마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승군 3천을 모아 降魔軍을 조직하였고, ‘항마군이 호남의 관군과 기각지세를 이루어 충의를 내세워 원조한다’는 전언을 듣고 인조가 가상히 여겼다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을 중화의 황제국으로 받들어야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명에 대한 의리와 尊周의 명분을 강조하여 자존심 회복과 민심의 결속을 도모하였다. 불교계 또한 정통론에 입각한 法統을 정립하고 尊明, 春秋大義를 강조하는 등 시대사조에 부합하였고 국왕권 수호와 국가의 안정을 위해 기원하였다. 華夷論에 입각한 성리학자들은 불교에 대해 중화의 도가 아닌 오랑캐의 교라고 비판하여 왔는데, 양란을 겪으면서 불교계는 시종일관 국가의 안정과 국왕권의 수호를 위해 기원하고 승군을 일으켰으며 성리학적 명분론에도 적극 동참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勤王과 輔國安民을 내세워 일어난 의승군 활동이 국왕, 사대부, 일반민 모두로부터 큰 인정을 받았고, 국가 차원에서 승군 조직을 관례화하는 한편 공적이 있는 승려들을 공식 향사하는 등 불교는 조선후기 사회에서 당당히 지분을 얻게 되었다.

출처 :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글쓴이 : 마인부우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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