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스크랩] 충렬공 송상현에 대한 사회 문화적 성격(동래성에서 순절한 동래부사)

구름위 2012. 10. 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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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烈公 宋象賢 敍事’의 사회문화적 성격

 

吳 仁 澤(부산교육대학교)

 

 

Ⅰ. 머리말

Ⅱ. ‘忠烈公 宋象賢 敍事’의 성립 과정

Ⅲ. ‘忠烈公 宋象賢 敍事’의 사회문화적 성격

1. 조선후기 ‘忠烈公 宋象賢 敍事’의 존재 형태

2. 軍律로서의 忠義

3. 儒敎的 영웅화로서의 忠節

Ⅳ. 맺음말

 

 


Ⅰ. 머리말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조선이 겪었던 일본과의 전쟁을 현재의 우리는 ‘임진왜란’이란 이름으로 기억한다. 전쟁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대부분 이름 없는 병사와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참혹한 전쟁, 일본 침략의 희생자였다. 하지만 그들 개개인은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언제부턴가 공식 기록에서 잊혀졌다. 대신 다양한 전쟁 영웅들의 敍事가 만들어졌다. 정부, 향촌사회, 가문의 합작품이었다. 각기의 입장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敍事가 만들어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사회의 공적 기록이나 사적 기록에서 지속적으로 거론되는 ‘임진왜란의 영웅 敍事’는 정적인 듯 보이지만 상당히 동적이었다. 그 의미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본고는 이러한 관점에서 임진왜란의 동래읍성전투(1592.04.15)에서 전사하였던 ‘忠烈公 宋象賢 선생’의 敍事를 검토하려는 것이다. 검토 순서는 먼저 ‘忠烈公 宋象賢 敍事’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고, 이어서 ‘忠烈公 宋象賢 敍事’의 사회문화적 성격을 파악하기 위하여 세 가지 측면을 검토하였다. 조선후기 ‘忠烈公 宋象賢 敍事’의 존재 형태, 軍律로서의 忠義, 儒敎的 영웅화로서의 忠節이 그것이다. 이러한 검토 과정을 통하여 점차 영웅 이미지의 사회문화적 성격에 접근해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Ⅱ. ‘忠烈公 宋象賢 敍事’의 성립 과정


1592년 4월 15일 2만여 명의 小西行長軍은 동래읍성을 점령하였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동래읍성전투에서 조선군은 主將였던 송상현 동래부사와 함께 3천여 명 이상이 전사하였으며, 5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서 동래읍성전투가 어떻게 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가운데 송상현 동래부사, 동래읍성과 그 외 동래부 지역의 전투 참여자들 기록이 부분적으로 수집되어, ≪충렬사지≫(엄린, 1768)로 집대성되기에 이르렀다. 전투가 끝난 지 176년이 지나서 종합 정리된 것이겠다. ≪충렬사지≫(엄린, 1768)를 바탕으로 하고 ≪조선왕조실록≫ 등의 관찬 연대기를 참고하여 ‘기록’의 성립 과정을 연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592동래성 함락

1594 경상병사김응서, 적장이 송상현 순절 사실 전달

1594조경남(1570-1641), 난중잡록 권2 갑오 10월 11일

1595返葬, 이항복 祭文

1605 윤훤 동래부사 송공사 건립

1609광해1, 선조실록 편찬

1605문정공 신흠(1566-1628) 송동래전 편찬 (~1610)

1622 선위사 이민구 송공사 賜額 청원 장계

1624 忠烈(祠) 賜額

1643인조21, 선조수정실록 수정건수 설정(1657 효종8 완간)

1651 부사 윤문거 충렬사 이건

1655송시열찬 송공 行狀

1657송공에게 忠烈 諡號 追贈(실록, 신도비명)

1658동래읍성전투 구전 전승 수집(동래부사 민정중)

1658송시열찬 신도비명

1668민정중, 임진동래유사

1675을묘 숙종1, 어진익 계문, 24義勇 인정

1684이단하찬 선묘보전

1693숙종19, 신경(1613-1653) 재조번방지

1709숙종35, 부사 권이진찬 순절도 화기

1736영조12 병진, 양조한 양통한 추증함

1736영조12 병진, 별사 혁파, 충렬사 합사

1768영조42-44(3년간), 엄린(1766-68) 충렬사지 찬(미개간)

1806순조8, 오한원(1806-1809) 엄린찬 충렬사지 간행(번역, 1978)


동래읍성전투의 송상현 선생 행적이 처음 알려진 것은 1594년 경상우병사 김응서 때문이었다. 김응서는 화의 협상 때문에 선조 27년 11월 22일 함안군 地谷峴(창원군 내서면)에서 小西行長, 승려 玄蘇와 竹溪 등을 만났다(함안회담). 이 회담에서 小西行長이 송상현 선생에 관해서 김응서에게 언급한 내용은 김경남의 ≪亂中雜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동래부사는 갑옷 위에 紅團領을 입고 紗帽를 썼으며 팔짱을 끼고 椅子에 앉았는데 일본병이 검을 휘둘러서 돌입하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조금도 변색하지 않았으며 눈을 떠보지도 않고 입을 다물고 말도 하지 않거늘 愚劣한 병졸이 머리를 베어 이 사람에게 가져왔으므로 이 사람이 東萊太守에게는 이전부터 은혜를 받았는지라 곧 殮을 하여 동문 밖에 埋骨하고 말뚝을 세웠으니 이것은 여기 있는 저 사람 要時羅가 잘 알 것이외다. 貴族들이 뼈를 찾아간다면 허락하도록 할 생각이며 그의 첩은 婢女 4명과 종 2명을 거느리고 汚辱도 받지 않고 對馬島에 보냈던 바 關白이 말하기를 宰相의 妻를 데리고 오는 것은 不可타 하여 東萊에 도로 보내어 드리고자 하였소이다. 그러나 그 때 조선 사람이 한 사람도 출입하지 않아서 通知할 길이 없어 釜山에 두었다가 금년 3월 關白이 모두 데려가게 하였는 바 이 여인은 나이 30여세로서 아들이 있다 합니다. 우병사가 어찌 이렇게 좋게 할 수 있으리오하고 물으니 小西行長이 대답하기를 ‘宰相의 가족이니 汚辱하지 않고 그 종과 婢女로 지키게 하고 있는 바 다행하게도 和議가 이룩된다면 내보낼 작정입니다.’ --- 玄蘇가 홀로 ‘宰相子弟로서 잡혀서 여기 와 있는 사람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내어 보내드릴 것이옵고 또 이미 일본에 들어가 있는 사람도 宜當 보내드릴 것이온데 이미 죽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외다.’”


김경남의 ≪亂中雜錄≫은 일기 형식의 기록에 해당하므로, 그 내용은 1594년 당시의 傳聞에 해당된다. 주요 내용은 ‘죽음을 대하는 송공의 태도’와 ‘송공의 첩 李良女’ 이야기이다. 전자에서는 갑옷 위에 조복과 사모를 썼다는 복장과 의자, 그리고 의연한 죽음이 묘사되었다. 후자에서는 이양녀가 비녀 4명과 종 2명과 함께 재상가족 포로로서 보호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위에 언급된 ≪亂中雜錄≫의 내용은 후대의 서술 내용과 비교하면 부분적인 차이는 있어도 근간은 동일하였다. 특히 후술할 <송동래전> (신흠, ≪상촌집≫)과 비교하면 ≪亂中雜錄≫에서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유통되던 1차사료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亂中雜錄≫에서 확인된 1594년의 김응서 보고서 내용은 ≪선조수정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은 1643년(1657년)에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1594년의 김응서 보고서 내용이 당시 사회에 어떻게 유통되었는지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직접적으로 김응서의 보고서를 수록하지는 않았지만 1609년에 편찬된 ≪선조실록≫이 유용한 사료이다. ≪선조실록≫ 두 기사에서 김응서의 보고서 내용을 간접적으로 간략하게 확인할 수 있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兵使의 장계에 적힌 적장의 말을 보면, 송상현의 죽음은 비록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히 죽어간 옛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보다는 더 낫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각별히 그를 褒贈하고 그 자손을 錄用함으로써 그의 충절을 표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당한 일이다” 하였다.


오억령이 아뢰기를, “인심이 무너져서 군부를 위해 죽을 사람이 없는데,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은 성이 함락되자 절의를 위하여 죽었으므로 적의 추장까지도 칭찬하였으니, 포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방문하여 처리하게 했다” 하였다.


송상현 선생에 관한 2차사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록이 <宋東萊傳>이다. <송동래전>은 서술 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략 그 시기를 추정해볼 수는 있다. 우선 서술된 내용 가운데 시간적으로 가장 늦은 것은 1605년 동래부사 윤훤이 宋公祠를 건립한 사실이다. 따라서 1605년 이후에 서술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1624년에 있었던 忠烈祠 賜額의 사실이 서술되지 않았음에서 1622년(또는 1624년) 이전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송동래전>은 1605-1622(1624)년 사이에 서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송동래전>의 중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송동래의 간략한 소개

2) 임란 직전 일본의 동태와 송공

3) 송공의 의연한 죽음(朝服, 胡床, 평조익(평조신) 구조 거절, 부채절명시)

4) 평의지, 현소 등 살해 왜병 참수, 송공과 금섬 동문밖 장사

5) 갑오년에 김응서가 적장(가등청정)의 송공 칭송을 조정에 보고, 이조판서 증직

6) 부민 매동은 송공의 휘일과 절진을 맞아 해마다 제를 지냄(송상인과의 만남)

7) 을미년(1595) 상소하여 청주 가마곡에 返葬, 동래 유민 70여인 곡성, 평의지 예를 표함

8) 반장시 접반사 이항복의 제문

9) 을사년(1605) 부사 윤훤 송공사 건립

10) 두 첩(금섬,이양녀)은 수절, 수행자 신여로 송공과 함께 전사

11) 김섬전, 이양녀전, 신여로전


신흠이 <송동래전>의 자료를 어떻게 수집하였는가에 관하여 ≪상촌집≫(신흠)에는 근거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용 구조상에서 추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위의 내용 구조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5,6,7,8이며, 특히 5), 7)이 중요하였다. 5)가 중요한 까닭은 김응서가 갑오년(1594)에 적장(가등청정)으로부터 얻은 송공 정보를 조정에 狀啓함으로서 ‘의연한 죽음’ 이미지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공인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7)의 을미년(1595) 返葬을 성립시킨 동력이기도 하였다.

7)은 5)로 인하여 촉발된 사건이지만 그 나름의 중요한 의미도 있었다. 返葬 과정에서 동래읍성전투에서 생존하였던 인물들 사이에 떠돌던 다양한 형태의 송공 이미지가 송공 집안에 생생하게 채록될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왜군의 점령지역인 동래읍성에서 송공 返葬은 생존한 동래부민들에게 큰 사건여서 수많은 동래부민들이 자연스럽게 송공 家人과 접촉하면서 감정이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返葬 과정을 통해서 송공 이미지는 결집되고 확산될 수 있었다. 이는 “공의 返葬에 遺民이 그의 義에 감복하여 哭聲을 내고 백리 밖까지 따라가 송별한 자가 거의 70여 인이었다. 平義智는 공의 棺을 만나자 말에서 내려 고삐를 당겨 피하며 전송하였다”에서 엿볼 수 있다.

요컨대 5), 7)을 통하여 3), 4)의 이미지는 역사적 사실로서 확정되고 정치적 사회적 가문적으로 공유될 수 있었다 하겠다. 아울러 5), 7)은 6)과 8)의 사건을 파생시키기도 하였다.

6)은 부민 매동이 해마다 송공 忌祭日에 제사를 지냈으며, 후일 송공의 아우인 송상인공을 만나서 송공을 애도했다는 일화이다. 이 일화는 어떤 형태로든 송공 집안에서 수집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계기는 역시 5), 7) 사건였다고 추론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8)은 이항복이 返葬으로 돌아온 송공의 棺에 나아가 제사를 올리며 지은 祭文을 소개한 것이다. 따라서 7)의 返葬에서 파생된 사건임이 틀림없지만 祭文 가운데는 특별히 주목해서 검토할 부분이 있다.


“宋君의 遺骸가 적중에서 돌아와 鄕里의 들에 返葬하려 할 제 --- 그 넋을 불러 제사를 지낸다. (가)아아 달무리와 같이 적이 둘러싼 외로운 성에 담소하며 軍民을 지휘한 것은 공의 烈이 아니고 무엇이랴. 시퍼런 칼날이 눈앞에 스치는데도 단정히 두 팔을 마주 끼고 움직이지 않은 것은 公의 節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나)平生의 所養이 혼란을 당하여 나타난 것이니 사람은 淺見으로써 알 수 없다. --- (다)밤마다 南門 위에 떠오른 자줏빛 瑞氣가 바로 솟아 北斗를 찌르는 것은 公의 精氣가 아니던가. 구름을 잡아타고 바람에 나부끼어 限없이 올라가서 천궁의 첫문을 밀치고 九天에 호소하여 雷師와 癘鬼를 몰아 妖孼을 三南에서 소탕하고 陰風과 猛雨를 몰아다가 四方의 피비린내를 씻은 뒤에 표연히 내려와서 八荒을 두루 돌아 못 갈 데가 없고, 어떤 때는 녹아서 川과 개천이 되기도 하고 뭉치어서 山嶽이 되어 남쪽 변방을 막고 싶은 것이 公의 平生 소원이던 것을 못하고 돌아가서 精靈으로 나타났소이다. 항복은 ---만리 밖에서라도 고향을 생각하며 머리를 돌리소서”


위의 이항복 祭文에서 (가)는 절명시와 의연한 죽음 이미지, (나)는 송공의 의연한 죽음이 ‘平生의 所養’이라는 해석, (다)는 ‘南門 위에 떠오른 자주빛 瑞氣’이다. 형식적으로 보면 모두 1595년 당시 정부 동래부 송공 집안이 공유한 이미지라는 점에서 특이한 점은 없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나)와 (다)에는 유의할 점이 나타난다.

(나)에서 주의를 요하는 부분은 ‘平生의 所養’이라는 이항복의 해석이다. 즉 송공이 邑城을 死守하면서 보여준 ‘烈’과 ‘節’은 평생의 학문적 수양으로 얻어진 人格(人品)이라는 것이다. ‘殉節→人格(人品)’의 양상은 이항복의 祭文에서 최초로 나타났다. 충렬공 송상현 선생의 敍事가 특별한 점은 여기서 시작된다 할 것이다.

(다)는 ‘南門 瑞氣’ 이미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즉 여러 경로의 口傳이거나 특정 경로의 傳說이 이항복의 기록을 통해서 준역사적 기록으로 정착된 것이다. 이를 통하여 다른 기록으로 재생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신흠의 <송동래전> 내용을 검토해보면 <송동래전>의 원천 사료는 5), 7), 6), 8)이며, 이들 자료는 모두 송공 집안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다. 즉 <송동래전>의 자료는 송공 집안의 적극적 협조 없이는 체계적 수집이 어려운 것이다. 추측건대, 송공 집안에서 자료를 수집하여 신흠에게 <송동래전>의 서술을 요청한 결과 서술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추론한다면 송공 집안에서 <송동래전> 서술을 가장 필요로 하던 시점이 새로운 문제로서 제기된다. 이에 대해서는 1605년 宋公祠 건립과 송공의 追贈이 주목된다. 현재 그 시기의 기록이 전무하지만, 송공 집안의 입장에서 본다면 송공의 略傳이 정리될 필요가 가장 큰 시기였기 때문이다. 또 이 시기 <송동래전>과 같은 略傳이 정리되었다면 이는 1622(1624)년의 賜額, 즉 宋公祠→忠烈祠의 변화를 이끄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송동래전>(신흠, 1605-1622,1624) 이후의 송공 행적 기록으로는 <宋公行狀>(송시열, 1655), <壬辰東萊遺事>(민정중, 1658,1668), <神道碑銘>(송시열, 1658), <忠烈碑記>(東萊南門碑記, 송시열, 1670), <殉節圖畵記>(권이진, 1709)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내용은 대체적으로 두 형태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송동래전>(신흠, 1605-1622, 1624)의 서사를 기본으로 하여 1605년 이후의 관련 사건을 첨가하는 형태였다. 또 하나는 송공의 敍事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동래읍성의 순절자, 부산진 순절자, 다대포 순절자 등 임란 순절자 전체를 포괄하는 형태였다.

전자의 계열로는 <宋公行狀>(송시열, 1655), <神道碑銘>(송시열, 1658)을 들 수 있다. 이는 송공 개인의 行狀과 神道碑銘이라는 특수성이 작용하는 것이다. 후자의 계열로는 <壬辰東萊遺事>(민정중, 1658,1668), <忠烈碑記>(東萊南門碑記, 송시열, 1670), <殉節圖畵記>(권이진, 1709) 등이 그것이다. 이는 전자의 기록과 송공 관련 내용을 공유하면서도 다른 임란 순절자를 종합적으로 기리는 성격을 갖는다. 전자의 추세는 家門과 士林의 성향이 추동하는 것이고, 후자의 추세는 동래부 향촌사회의 민심과 정부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었다.

Ⅲ. ‘忠烈公 宋象賢 敍事’의 사회문화적 성격

1. 조선후기 ‘忠烈公 宋象賢 敍事’의 존재 형태

조선후기의 일반적인 송공 이미지는『여지도서』의 기록을 통해서 추론해볼 수 있다. 송공의 연고지는 청주, 송도, 고부, 동래 등이다.

청주의 기록으로 들수 있는 것은 신항서원과 금섬(金蟾) 및 이양녀(李良女)이다. 청주는 송공의 거주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공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이 없는 점이 특징이다.

신항서원에는 문성공 율곡 이이 등 배향자는 모두 8명이며, 그 가운데 충렬공 천곡 송공이 수록되었다. 신항서원은 효종 5년(1654) 사액된 서원이다.

청주 인물조에는 금섬과 이양녀 두 인물이 송공의 첩으로 수록되었다. 금섬은 동래읍성 전투에서 송공과 함께 순절한 인물이었다. 이양녀는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서도 굳굳하게 정절을 지켜 귀국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두 인물이 청주에 수록된 것은 송공의 첩, 즉 송공의 충절 이미지 때문이다.

천곡집 행장에 따르면 송도는 고려시대 송공 선조가 세거하던 곳이다. 고려시대 명문 귀족이어서 수도인 개성에 세거했다고 볼 수 있겠다. 여산의 토성에서 개성으로 출사한 사족 가문의 하나였을 것이다. 송도에서 송공이 나타나는 기록은 숭절사란 사우와 충신조이다. 송도구지의 서문에 따르면 숭절사란 사우에 송공과 더불어 증참판 김연광, 무의공 유극량 모두 3명이 배향되었다. 숭절사는 현종 7년(1666) 창건되었으며. 숙종 20년(1694) 사액된 사우이다.

송도 충신조에도 송공과 김연광 유극량 3명이 수록되었다. 모두 임란 때 순절하였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에 수록된 송공의 이미지는 네 가지이다. 첫째 작서기부(作書寄父), 둘째 의연한 죽음, 셋째 첩의 순절, 넷째 왜적의 감동(장례, 살해 병사의 주살)이다. 작서기부의 내용은 ‘달무리처럼 포위당한 외로운 성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는데,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라[孤城月暈 大鎭不救 君臣義重 父子恩經]’이다. 이들 이미지로서 조정은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충렬이란 시호를 내렸다는 것이다.

고부의 경우 충훈조의 서두에 송공이 수록되었다. 이에서 송공은 ‘여산군 송익손의 현손(고손)’으로 안내된다. 여산군 송익손은 고부에 거주하던 인물로서 송공의 3대조(증조)이다. 즉 송익손을 매개로 송공이 고부 지역에 호명된 것이다. 이에서 송공 이미지는 임란시의 순절자로서 숙종대에 충렬의 호를 받고, 고부에 있는 사우 정충사(旌忠柌)에 향사되었다. 정충사에는 무장공 신호, 장무공 김준이 송공과 함께 배향되었다. 정충사는 효종 8년(1657)에 사액되어 서원으로 운영되었다. 사우가 서원으로 발전하는 조선후기적 사례의 하나이다.

동래 명환조에는 부사 송공이 부모처럼 이민(吏民)을 섬기는 정사를 폈으며, 임란 때의 순절 사실이 충렬비기(동래남문비)에 기록되었음이 신증 항목으로 수록되었다. 『여지도서』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증보적 성격을 가지므로 송공 이미지가 그간 새롭게 증보된 사항임을 알 수 있다.

송공의 순절 이미지는 청주, 송도, 고부, 동래와 같은 그의 연고지를 통해서 재현되기도 하지만, 그와 연관된 인물들을 통해서 재현되기도 하였다. 연관 인물로는 송공의 첩 금성, 동래교수 노개방, 양산군수 조영규, 군기시 첨정 김사모 등을 들수 있다.

함흥부 읍지에는 기녀 금섬이 동래부사 송공과 더불어 의연히 죽음을 맞은 사실이 동래남문비에 전한다고 수록되었다. 동래남문비는 현종 11년(1670) 세워졌다. 금섬의 이미지가 송공의 이미지와 겹쳐짐으로서 송공 이미지는 함흥부에서도 재현된다 하겠다.

노개방의 경우 그의 연고지인 경상도 밀양조에 수록되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임란 당시 동래교수로서 동래향교 성현의 위판을 받들고 송공과 함께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선조대에 도승지로 추증되었고, 동래 충열사에 배향되었으며 후일 또 밀양부의 충효사에도 배향되었다. 노개방이 송공과 함께 죽었다고 기술한 것은 노개방의 충절 이미지를 송공의 충절 이미지를 통해서 강조한 것이다. 이는 역으로 노개방을 통해서 송공의 이미지가 밀양에서 재현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조영규에 관한 기록은 그의 연고지인 장성과 그의 임지인 양산에 수록되었다. 장성의 기록과 양산의 기록은 거의 비슷하였다. 이들 기록에서 그는 ‘충신 조영규’로 묘사되었다. 그는 명종 9년(1554) 무과에 급제한 무장으로서 임난 때 양산군수로 재직하였으며, 동래부사 송공과 더불어 순절하였다는 것이다. 현종 10년(1669)에 장려의 대상이 되었으며, 숙종대에 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조영규도 노개방과 같이 송공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어 장성과 양산에 송공 이미지를 재현하는 역할을 하였다.

김사모는 전라도 영광에 수록된 인물로서 군기시 첨정으로서 동래부사 송공의 막하였으며, 송공과 더불어 동래읍성 전투에서 순절하여 병조참판으로 추증된 인물로 기록되었다. 이에서도 ‘송공 막하’, ‘송공과 더불어 순절’하였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송공과의 연관을 강조함으로서 김사모의 순절 이미지가 부각되었다. 이 또한 김사모를 통해서 송공의 순절 이미지가 영광에서 재현됨을 뜻하였다.


2. 軍律로서의 忠義

현종 11년(1670) 동래읍성 남문 밖에 세워진 동래충렬비는 동래읍성 전투와 관련하여 민간에 구전되던 여러 가지 사실을 송공을 중심으로 종합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 내용은 맨 처음 효종 9년(1658) 당시 동래부사 민정중이 민간의 구전을 조사하여 정리하였다. 송시열은 이를 바탕으로 문장을 지었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으며 전자는 이정영이 썼다. 민정중, 송시열, 송준길의 명망이 동래충렬비 내용을 보증한 셈이다. 따라서 동래충렬비 내용은 당시 사회의 높은 신뢰 속에 회자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여지도서』에 수록된 18세기 중엽의 송공 이미지도 동래충렬비 이미지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동래읍성 전투에 관한 동래충렬비의 이미지가 시공적으로 단일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 형성 과정은 대체적으로 구분한다면 몇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그 첫 단계가 군율로서의 충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송공의 전사 사실을 확인하고, 전사자에 대한 포장과 증직을 논하고 실천하는 단계이다.

송공은 선조 25년(1592) 4월 15일 동래읍성에서 전사하였지만 조정이 그 사실을 확인한 것은 선조 26년(1593)이다. 그 전 해만 하더라도 그가 동래읍성을 지키지 못하고 전사했다는 단순 사실도 명백히 확인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는 선조 25년(1592) 11월에 선조가 경상감사에서 “정발과 송공은 과연 죽었는가?”라고 묻고 있음에서 느낄 수 있다. 당시에는 여러 가지 부정확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의 경상감사 김수의 언급도 그러한 분위기를 반영한다.


정발과 송공이 혹자는 죽지 않았다고 하지만 죽은 게 틀림없습니다. 잘못 전해진 말 가운데 심지어는 송상현이 적장이 되었다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포위를 당했을 때 홍윤관이 성밖으로 나가기를 권했으나 상현은 말하기를 “지금 성을 빠져 나가더라도 어디로 간단 말이냐?” 하고는 남문 위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으니 적이 들어와 죽이고, 바로 그의 목을 대마도로 전송했다고 합니다.


김수의 언급에서 간접적이지만 몇 가지 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정발과 송공이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있다. 둘째 송공이 적장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다. 셋째 송공은 남문에서 의연히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의 수급은 대마도로 전송되었다는 소문이다. 이에서 김수는 첫째와 둘째는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하였지만, 셋째는 실제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만큼 당시는 사실 확인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사망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에는 송공이 동래읍성을 사수하다 전사한 사실이 간접적으로 조정에 전해졌다. 비변사가 보고한 다음 내용은 그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동래 부사 송상현과 회양 부사 김연광은 모두 순국하여 절의가 칭송할 만한데도 장계에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포장받지 못하고 있어 인정이 매우 답답해합니다.


비변사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소식을 접수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아직 송공에 관한 공식 장계가 없었다는 것과, 송공 순절에 관한 향촌사회 여론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선조 27년(1594) 병사 김응서의 장계가 조정에 도착하여 송공의 순절 사실이 공식화되기에 이른다.

장계에 따르면, 선조 27년(1594)에 병사 김응서가 울산에서 청정(淸正)을 만났을 때 청정이 송공이 의롭게 죽은 상황을 갖추어 말하고, 또 집안사람이 시체를 거두어 반장(返葬)하도록 허락하였으며, 경내를 벗어날 때까지 호위하여 주었는데, 적에게 함락된 동래 유민들이 길에서 옹위하여 울며 전송하였다고 한다.

공식 장계에서 송공의 순절이 확인된 것 그 자체도 의미 있지만, 왜장이 송공의 의연한 순절에 대해 증언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이로써 송공의 순절이 확고한 사실로 인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정은 선조 28년(1595) 송공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자녀에게 음직을 내렸다.

이 시기의 송공 순절 이미지에는 전쟁 중인 탓에 민심 수습 차원과 군율 정비라는 차원이 적용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군율 정비가 크게 작용하였다. 즉 그의 순절 사실이 확인되고 그에 따른 포상이 이루어진 것은 군주에 대한 충의를 강조하려는 군율적 의미라 하겠다. 즉 아직 송공의 순절 이미지가 영웅화되는 단계에 이르지는 않았었다. 이 점에서 왜적을 감복시킨 송공의 순절에 대한 아래와 같은 당시 사관의 논평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송상현은 비록 활 쏘고 말 타는 재주는 있었으나 본디 선비의 명망은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조용히 의리를 위해 목숨을 끊기를 이처럼 고결하게 하였으므로 비록 흉적이라 하더라도 역시 그를 의롭게 여긴 것이다.”

3. 儒敎的 영웅화로서의 忠節

송공의 사우는 선조 38년(1605) 당시 동래부사 윤훤이 세웠고, 인조반정 직후인 인조 2년(1624) ‘충렬’이란 사액을 받았다. 이어서 송공에게 시호가 하사되는 과정이 뒤따랐다. 이러한 과정에는 상호 보이지 않는 연관이 작용하였다. 송공의 죽음이 정부 통제에 의해 영웅적 충절 이미지로 탄생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사우를 건립할 당시는 임란 직후로서 참혹한 전란 피해를 복구해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향촌사회 사족층의 민심을 수습하여 통치 기반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그 가운데 동래읍성 전투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일이 긴요하였다. 이 때 송공의 죽음은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투 희생자에 대한 동래 사민의 관심을 충절이라는 유교적 영웅 관념으로 포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래부가 송공 사우를 건립하여 제향하는 행위는 사민을 위로하는 동시에 통치제도로 포섭하는 행위였던 셈이다.

인조반정 직후인 인조 2년(1624) 정부는 건립된 송공 사우에 ‘충렬’이란 사액을 내렸다. 사액을 처음 청한 인물은 선위사 이민구였지만, 정부의 논의는 2년 후에 있었다. 그 가운데 사액의 필요성에 대한 주강 시독관 엄성의 견해에는 주목될 부분이 있다.


신이 일찍이 송공의 사우에 사액해 줄 것을 진달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해조가 아직도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에서는 반드시 절의를 숭상해야 하는 것인데 이런 일을 보통으로 놔두고 있으니, 어떻게 온 세상을 용동시킬 것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지난 번 이괄의 변 때만 보아도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는 것이 컸으니, 반드시 평소에 격려하여 권장하는 바탕을 삼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송공 사우의 사액은 정부가 행한 절의 숭상책의 일환이며, 절의 숭상책이 절실한 것은 이괄의 변(1624)과 같은 변고를 예방하기 위함이라는 것이겠다. 동래부사가 동래 사민의 뜻으로 세운 사우에 정부가 사액을 내린다는 것은 사우의 권위를 공인하는 동시에, 사우의 순절 이미지를 향촌사회에 권장하여 내면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조선후기 들어 정부가 끊임없이 충절 이미지를 확산시킨 주된 목적이었다.

‘충렬’사액을 받은 사우는 조선후기 들어 사우가 서원으로 변화되는 추세에 힘입어 ‘충렬사’에 강당과 재실을 갖추어 ‘안락서원’으로 확장되었다. 서원이 향촌사회의 권력 기구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안락서원은 사우의 향촌사회 권력 기구화 과정을 반영한다. 정부의 충절 이미지 내면화 정책과 향촌사회의 권력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발전한 셈이었다.

송공의 충절 이미지 강화책은 사액에 이은 시호의 하사에 의해 완결되었다. 시호 논의의 의미는 인조 21년(1643) 공조 판서 윤휘의 언급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군난에 죽은 자로서 송상현과 김천일 같은 사람은 마땅히 시호를 추증하는 은전이 있어야 합니다.

인조는 시호 추증에 동의하였지만,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37)의 틈바구니 속에서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이리하여 송공의 시호인 ‘충렬’의 추증은 동래 사족의 건의로 효종 8년(1657)에 이루어졌다. 시호 추증의 명분은 ‘의를 지키다가 순국한 것이 환히 드러난 사람에 대해서는 혹 낭서의 낮은 품계와 현읍의 소관이라도 모두 시호를 주었다’는 것과, ‘지금 이 송상현은 조헌·고경명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니 의당 시호를 내리는 가운데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송상현 죽음은 조헌, 고경명, 이순신과 더불어 조선 후기 충절의 상징적 기념물로 완성되었다. 현종 11년(1670)의 동래충렬비기 내용은 송공이라는 단일 인물이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복합체로서의 충절 이미지로 표상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래충렬비기 역시 조선후기 충절의 상징적인 기념물로 되었다.

Ⅳ. 맺음말


‘忠烈公 宋象賢 敍事’의 성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594년의 병사 김응서 狀啓와 1595년의 返葬 사건, 그리고 1595년 이항복의 제사와 제문이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敍事의 각 요소가 결집되었으며 이는 송공 집안의 家狀으로 정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송시열 행장 참조). 敍事의 각 요소가 敍事로 구성된 것은 신흠의 <송동래전>였다. <송동래전> 敍事 구조는 이후 송시열의 각종 기록에 그대로 재현되면서 고정되는 경향을 보였다.

조선후기 통용되던 동래부사 송공의 일반적 이미지는 ≪여지도서≫(1757-1765)를 통해서 살필 수 있었다. 관찬 사서로서 왕조실록 등이 있지만 조선시대 지식인이 공개적으로 두루 볼 수 있었던 사서가 아니었다. 그 대안으로서 당시 향촌사회에 통용되던 지식을 수집한 지리지가 선택된 것이다.

조선후기의 일반적 이미지가 형성되는 과정은 관찬 사서 왕조실록을 이용하였다. 왕조실록은 1차 사료는 아니지만 시간 흐름에 따른 특정 사건의 역동적인 행태를 가감없이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의 일반적인 송공 이미지는 ‘충렬공’으로 상징되었다. 이 이미지는 송공의 연고지와 그와 연관된 인물의 연고지를 통해서 재현되었으므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이미지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면, 임란 초기와 임란 이후의 성격에 차이점을 찾을 수 있었다. 임란 초기의 이미지는 민심 수습을 위한 군율 정비라는 현실적 차원에서 순절을 포상하는 차원이었다. 그러나 임란 이후의 이미지는 사우의 건립, 사액, 시호 하사 등을 통하여 정치적 충절의 성격이 강하였다. 이른 바 통치 전략의 역할을 담당하는 유교적 영웅화로서의 충절 이미지가 생성된 것이었다.

출처 :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글쓴이 : 마인부우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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