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스크랩] 임진왜란 초기 함경도의 상황과 왜군 격퇴

구름위 2012. 10. 7. 16:09
728x90

 

金 炫 榮(國史編纂委員會)

 

머 리 말

임진왜란에 있어서 의병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나라를 지키는 근본이 되는 것은 양반사족을 중심으로 한 의병이었다. 임란 의병의 주력은 사족이었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 중이었던 다산 정약용은 홍경래 란이 일어났을 때 임란기 사족들을 중심으로 하여 의병이 일어나 나라를 지켜냈던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며 내란에 있어서도 국가의 元氣인 사족이 튼튼해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고 하면서 노비종모종량법으로 노비법이 잘못 변하여 사족들이 약해졌다고 하면서 사족들이 강하게 될 수 있도록 국가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필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임란기 북부 지역의 의병 활동에 대하여 개관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 부문의 연구자도 아니고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포괄하는 북부 지역 전체 의병에 대한 개관을 하는 것이 동일한 맥락에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본고에서는 함경도의 의병 활동과 그 성격을 중심으로 글을 정리하려고 한다.

역시 함경도 의병의 중심은 정문부 군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본고에서는 필자가 일찍이 당시 함경도 관찰사를 하고 있던 윤탁연의 임란 당시의 일기인 󰡔북관일기󰡕를 정리한 바가 있으므로 정문부 군과 관군의 중심이었던 윤탁연의 관계를 중심으로 임란기 함경도 지역의 상황과 그 지역 의병의 활동에 대해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임란 시기 함경도 지역의 상황

임진왜란은 사실상 조선 왕조의 존립 근거와 명분을 무너뜨린 전쟁이었다. 백성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는 더 이상 지지받을 수 없었다. 수많은 백성이 전쟁을 통해 목숨을 잃고 생존 조건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하였다. 왜란 중에 가장 커다란 어려움은 식량 문제였다. 임진왜란 발생 후 호남 지방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농사를 전폐하였다. 민가에 저장해 놓은 곡물들도 동이 난 상태에서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서울 사람은 모두 적에게 투항하여 들어갔다고 하는데, 같은 투항이라고는 하나 다만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투항하였다면 그 정상이 가련하다.”는 내용이나, “鳳山의 백성들이 이미 투항하였으나 반드시 死生에 핍박되어 그리하였을 것이며 어찌 本心이겠는가.”라는 등의 내용을 통해서 일본군에 투항하는 주요 동기가 굶주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중에 일본군에 투항하는 자가 늘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심의 이반을 이용한 반란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서울에 침입하기 전에 난민들에 의해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세 궁궐과 형조․장예원 등이 불타버린 일이나, 1594년(선조27)년에 일어난 宋儒眞의 난과 1596년(선조 29)에 있었던 李夢鶴의 반란 사건 등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난민들의 궁궐이나 관청 방화는 국왕이 백성들을 버리고 몰래 피란한 데 대한 울분에서 돌출한 사건으로 보여 뒤의 사건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곧 우발적인 행동이었으며 직접 정부를 상대로 하는 투쟁이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에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은 발생시기가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 회담이 진행될 때이며, 반란 목적 또한 정부를 전복하는 데 있었다. 반란 세력의 구성원 또한 현실에 불평을 품은 士族이나 武人들이 일부 가담하고는 있었지만 농민들이 거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것은 농민들이 왜란을 통하여 정부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갖고 관리들의 횡포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반발을 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전쟁을 통해 이전에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실 곧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피지배층들이 실력 행동에 돌입하여 지배층에게 도전하게 된 것이다.

우참찬 성혼은 전란이 한창인 1592년 12월 ‘편의 시무’ 9조를 올린다. 그 중 제2조에서 그는 임란의 상황을 말하고 이제 다시 조선 국가가 戰勢를 되돌릴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가장 큰 공로는 남방의 의병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는 첫째, 장수를 선발하고[選將], 군사를 훈련시키며[鍊兵], 양식을 모으는 일[聚粮] 세 가지가 가장 급선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국왕이 서쪽으로 파천을 한 이후에 조정의 명령이 지방에 미치지 못하여 적병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수령은 모두 도망하였으며 난민들이 봉기하여 관고를 부순다고 하며 당시의 상황을 정리하였다. 그런데 6월 이후에 남방에서 의병이 처음 일어나서 군사를 이끌고 근왕을 하게 되니 길가에 소문이 나서 크게 그 세력을 떨쳤다. 그 이후에야 아전과 백성들이 바야흐로 나라에 충성할 마음이 생기게 되고 수령도 호령하여 군사를 낼 수가 있게 되었고 백성들도 차츰 응하게 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조금이라도 백성의 뜻을 돌리고 나라가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남방의 의병의 공로이다.

국왕이 파천을 결정하여 서울을 떠나자 도성의 난민들이 掌隷院과 刑曹를 불태우고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는 등 곳곳에서 크게 일어났다. 그리하여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다. 비록 留都大將 李陽元이 몇 사람을 참수하여 안정시키고자 하였으나, 혼란스러운 상황을 제대로 수습하지를 못한 듯하다. 백성들은 극도의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일본군에 대한 공포감으로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였다. 그리하여 자기가 사는 지방에 일본군이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피란 소동을 벌이는 등 혼란의 도가니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국가의 기강이 혼란해진 것은 물론이다. 국왕이 서울을 떠날 때 호종하던 인원은 3일 만에 개성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상당히 줄어들어 있었다. 국왕이 尹斗壽에게 칼을 풀어 주면서 “卿 형제는 나를 떠나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로 수행 관료들의 이탈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史官은 “나라가 태평을 누린 이래 내란 없애기에 힘써 宿衛하는 장수와 군졸에 있어서까지 기율로 단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위태로운 시기에 임하여 흩어지는 것이 적을 본 군사들보다 심했다.”고 한탄하고 있다. 심지어는 국왕 일행이 개성에 도착했을 때에 그곳 백성들이 失政을 비난하면서 돌을 던지기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함경도는 지리적으로는 여진족과 잡거하고 있는 곳이었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남에서 왜가 침략해 올라오자 함경도는 남북 양쪽의 적으로부터 협공을 당하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내적으로 양계 지역은 세조, 중종 대에 국가의 사민 정책을 통하여 인구가 채워진 곳이었고 이시애, 이징옥의 란과 같이 중앙에 반기를 들게 되면 곧바로 주민들이 그에 호응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經世遺表󰡕에서 지방 제도의 개혁을 말하면서 함경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후 발해가 망하자 그 지역을 野人이 몽땅 차지해서 자주 변경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세종과 세조가 이를 정벌ㆍ경략하고 겨우 經理하여 만하(압록강) 이남이 드디어 우리 판도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기후가 아주 다르며 지방 풍속이 우둔하여 李施愛와 李澄玉 등이 한번 깃발을 휘두르며 난리를 일으키자, 백성이 쓸리듯 좇았다. 그 후에도 倭將 淸正이 北關에 침입하니 난민 鞠景仁 등 이 시기를 틈타 和同해서, 藩臣과 帥臣을 다투어 죽이고 적에게 투항했다. 다행스럽게도 鄭文孚의 힘을 입어서 평정할 수 있었으나 바람이 불면 풀이 따라서 움직이는 것 같아서, 가장 걱정되는 곳이 이 지역이다. 게다가 지역이 아주 멀고 소식이 서로 전달되지 않아 그 지역을 지키는 신하가 제 뜻대로 탐학해도 조정에서 듣지 못하고, 감사도 살피지 못하여 한 지역 백성들이 마침내 호소할 곳조차 없는 불쌍한 백성이 될 것이니, 撫恤하고 위안하는 방법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는 만하성 巡察使 자리는 반드시 經幄에서 가까이 모시던 신하로서 행실을 힘써 닦은 청렴한 사람을 뽑아 보내어 백성을 회유하고 오게 하는 방법을 다하게 함을 그만둘 수 없다.

다산 정약용은 발해가 망한 이후에 함경도가 야인 즉 여진족의 차지가 되었으며 풍속이 우둔해서 반란이나 전란이 일어나면 바로 백성들이 그쪽으로 쏠려버린다고 하였다. 그러한 예로 이시애, 이징옥의 란과 임란 때의 상황을 예로 들었다. 또한 그 지역은 중앙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서 정부의 정령이 잘 전달되지 않고 탐학한 신하가 가면 그 지역의 백성들은 호소할 곳도 없게 된다고 하면서 문과 출신의 신하로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국 곳곳에서 왜군에 투항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사례가 나타나고는 있지만, 함경도 지역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을 만큼 유독 투항하거나 반민의 행위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함경도로 피란한 臨海君․順和君 두 왕자를 비롯하여 많은 수령과 군사 책임자들이 왜군에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정부에서도 함경도 지역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실태를 파악하여 민심을 위무하고자 하였다. 다음은 임진왜란 때 함경도의 실상을 밝혀주는 기사이다.

北道 사람들이 무반과 아전[武吏]들의 침학에 괴로워하여 나라를 원망하는 것이 가장 심하였다. 그러다가 倭國이 새로 임금을 세우고 國政을 개혁한다는 유언비어를 듣고는 민간에서 떠들썩하게 마음이 기울어 장수와 관리들을 다투어 결박해서 적을 맞이하였다.

위의 내용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함경도 사람들이 무반들이나 아전들의 가혹한 침학으로 고통을 받아서 다른 지역보다 나라에 대한 불평이 심했던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일본이 새로운 임금을 세워 국정을 개혁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듣고는 장수와 관리들을 결박하여 일본군을 맞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에 함경도 지역에는 특히 유언비어의 폐해가 컸던 듯하다. 다음의 사례들이 그것을 보여준다.

① ‘倭가 장차 李德馨을 강제로 옹립하여 왕을 삼고, 金誠一을 정승으로 삼을 것이다’ 하여 원근에 이 소문이 전파되면서 인심이 미혹되었는데, 北道의 군사와 백성들이 더욱 믿었으니 당시 국가가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이 이와 같았다.

② 함경도를 침입한 것은 倭兵이 아니고 吉三峰(가상의 조선 사람---필자주)이 海島에 들어가 해적에 請兵하여 들어온 것으로서 사람들은 다 조금도 방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함경도 지역은 조선 초기 이래 차별 대우를 받아 불만이 높았다. 그에 따라 함경도 지역에는 높은 관리가 배출되지 않았으며, 서북도민에 대한 중앙의 관심도도 다른 지역에 비하여 자연히 적어질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반면에 이 지방에 부임한 관리들이 수탈을 일삼아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이 매우 뿌리 깊었을 것임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함경도 사람들이 유언비어에 현혹되어 일본군에게 쉽게 투항하거나 협조적이었으며, 반민들이 횡행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鐵嶺에서 방어하던 南兵使 李渾은 甲山으로 도망하여 들어갔다가 叛民들에게 죽음을 당하여 그의 머리는 참수되어 일본군에게 보내졌으며, 갑산 사람들은 또 부사의 머리를 베어 들고 일본군에게 투항하였다. 北兵使 韓克諴이 摩天嶺에서 항거하여 싸웠으나 海汀倉이 일본군에게 차단당하자 패하여 도망하다가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加藤淸正의 일본군은 함경도 반민들의 자발적인 투항 속에 피 흘려 싸우지 않고도 함경도 전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의 함경도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더욱이 함경도 會寧으로 피란하여 온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 및 그들의 부인, 그들을 수행한 領中樞府事 金貴榮, 號召使 黃廷彧, 護軍 黃赫 등이 鞠景仁을 우두머리로 하는 반민들에 의하여 붙잡혀 가등청정에게 넘겨졌다. 이것이 1592년(선조25) 7월 23일의 일이었다. 가등청정이 회령에 박두하자, 鏡城府 아전인 국경인의 숙부 鞠世弼, 明川縣의 私奴 鄭末守 등과 함께 부민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가등청정에 의하여 판형(判刑 : 우리나라의 兵使)으로 임명되어 회령 수비의 책임을 위임받아 李彦祐․田彦國 등과 함께 온갖 횡포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가등청정은 군사를 이끌고 豆滿江을 건너 깊숙이 老土部落까지 침입하였는데, 여진인들에 의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진로를 바꾸어 鍾城의 門岩을 경유하여 강을 건너 穩城․慶源․慶興에 차례로 들어갔다가 해변의 峽路를 따라 鏡城으로 돌아왔다. 그 후 부하 장수로 하여금 군사 수천 명을 이끌고 吉州에 웅거하게 하고, 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安邊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반민들에게 判刑․禮伯 등의 倭 관직을 주어 해당 지역의 수비를 책임지게 하였다. 이것은 함경도 전 지역이 그러하였다. “관남(關南: 마천령 남쪽 지방)의 州鎭도 또한 반민들의 근거지가 되어 모두 가등청정의 절제를 받았다.”라 한 것에서 이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함경도 전 지역의 반민에 의한 피해는 일본군의 그것보다 못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함경도 반민들의 무질서한 횡포는 그 해 9월까지 약 2개월간 계속되었다. 비록 그 동안에도 의병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였지만, 아직은 일본군과 반민의 기세가 등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9월이 되면서 명나라 원군이 온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함경도의 민심도 바로잡히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의주의 조정에서 보내온 榜文은 의병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방문의 내용은 전국 8도의 의병과 관군이 곳곳에서 왜병을 토벌하고, 명나라 원병 10만이 며칠 안으로 평양에 도착할 것인데, 그 절반은 薛罕嶺을 넘었다는 것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

함경도 지역의 이러한 상황은 가등 군에 대해서도 고무적인 생각을 가지게 하여 가또 휘하여 鍋島 군은 함경도 지역에서 檢知를 하고 수세를 하려고 稅貢 목록 즉 ‘朝鮮國租稅牒’을 작성하여 각 지역 아전들의 수결을 받기도 하였다. 즉 鍋島直茂(나베시마 나오시게)는 각 군현마다 표제와 날짜를 붙여 각 지역마다 농작물, 특산물, 인구 등을 기록하고 그 뒤에는 기재에 오류가 있으면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서약을 강제하고 이어서 날짜와 각 지역 아전들의 서명 날인을 받았다. 鍋島 군의 함경도 경략 상황에 대해서는 鍋島 휘하의 田尻鑑種이 기록한 󰡔高麗日記](佐賀縣立圖書館 소장) 등에서 그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거기에는 도망한 주민들을 강제로 복귀시켜 6 향리를 불러서 일본군에 반항하지 않을 것을 회유하고, 연공과 특산물 등의 수확을 조사함과 함께 ‘모노나리(物成)’=年貢 등을 인질을 잡아 감금하여 독촉하고 식량을 계속 모았다고 하는 등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국조세첩’은 과도직무 치하의 咸興府, 德源郡, 定平郡, 洪原郡, 永興府, 高原郡 등의 것이 현재 남아있다.

2. 북평사 정문부 군의 구성과 활동

崔配天, 池達源 등이 북평사 鄭文孚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창의 기병하자, 경성 부사 鄭見龍, 경원 부사 吳應台, 경흥 부사 羅廷彦, 고령 첨사 柳擎天, 군관 吳大男 등이 합세하여 천여 명의 큰 군사가 되었다. 이들이 경성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 9월 16일의 일이며, 이때부터 의병활동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였던 것이다. 그 후 반역자 국세필을 경성에서, 국경인을 회령에서, 정말수를 명천에서 제거하고 이들 지역을 수복하였다. 이러한 의병의 활동은 함경도의 민심 안정은 물론 의병 활동에 적극 호응하게 함으로써 함경도 지방을 회복하는 데 커다란 공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문부 군의 성격과 관련하여 북평사 정문부가 국왕에게 보낸 장계를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農圃集󰡕에는 아래와 같이 9건의 狀啓와 1건의 巡營에 올린 牒呈, 1건의 檄文이 수록되어 있다.

(1) 의병을 일으켜 경성에 들어가 왜적을 격퇴하였다는 장계[倡義起兵入守鏡城後擊斬倭賊 狀啓](1592년 9월 2일)

(2) 반란 적당 회령의 국경인, 명천의 정말수 등을 주살하였다는 장계[誅叛賊會 寧鞠景仁․明川末秀等 狀啓](1592년 10월 14일)

(3) 반란 적당 경성의 국세필을 주살하였다는 장계[誅叛賊鏡城鞠世弼 狀啓] (1592년 10월 일)

(4) 길주의 장평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는 장계[吉州長坪破倭賊 狀啓](1592년 11월 1일)

(5) 길주의 임명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6진의 반란 적당을 찾아 주살하고 번호를 초복시켰다는 장계[吉州臨溟破倭賊 及六鎭叛黨搜誅藩胡招服 狀啓](1593년 1월 12일)

(6) 온성․종성․행영 3진의 복병이 오랑캐 적을 격퇴시키고 6진의 정병을 본도(함경도)에 돌려주며 다른 도의 예에 따라서 무과를 설행하게 해달라는 장계[穩城․鍾城․行營三鎭伏兵擊走賊胡 及請徵還六鎭精兵本道 依他道設科 狀啓](1593년 1월 16일)

(7) 단천에서 왜적을 격파한 내용 및 군기를 요청하고 최동망․이성길을 종사관으로 차정하게 해달라는 장계[端川破倭賊緣由 及請軍器 崔東望․李成吉從事官差定 狀啓](1593년 1월 27일)

(8) 왜적의 대군과 백탑교에서 전투한 것 및 왜적이 퇴주한 것을 (보고하는) 장계[與倭賊大軍戰白塔郊 及倭賊退走 狀啓](1593년 2월 2일)

(9) 왜적이 퇴주한 뒤에 장교와 사병의 군공을 정리하여 (보고하는) 장계[倭賊退走後 將士軍功磨鍊 狀啓](1593년 2월 3일)

(10) 순영 첩보(巡營牒報)(1593년 2월 19일)

(11) 창의하여 왜적을 토벌하자고 함경도 여러 읍의 수령 및 사민들에게 알리는 격문[倡義討倭 諭咸鏡道列邑守宰及士民 檄]

위의 장계 내용에서도 보듯이 정문부는 의병을 일으켜 경성에 들어가 먼저 국경인 등 반민들을 처단하고 세력을 모아 왜군과 접전을 하였다. 장평, 임명, 단천, 백탑교에서 왜군과 접전하여 모두 승리를 거두고 최종적으로는 전투에 참여한 장병들의 군공을 정리하여 보고하는 것으로 장계를 마무리 하고 있다. 그런데 9차례의 장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왜군과 전투를 하는 상황 속에서도 북쪽으로는 오랑캐 번호들과도 전투를 하고 귀복을 시켜야만 했던 것을 알 수 있다.(5, 6번 장계) 이른바 남북으로 협공을 당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먼저 초기에 정문부 군에 참여하였던 주요 인물들을 나열해보면 아래와 같다. 즉 정문부 군의 구성이 주로 부사나 판관, 첨사, 만호, 권관, 군관과 같은 관인들이 대부분이고 그 외에도 갑사나 보인, 충의위, 정로위, 내금위, 별시위와 같은 부류는 현지인이라고 할지라도 군사적 의무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으며 토착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좌수, 유학, 교생 등의 구성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다. 그 외에 서울에서 온 피난인, 입거인, 서리 등이 정문부 군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이는 정문부 군이 갑작스런 왜군의 침략으로 와해, 패주하였던 관군이 다시 복원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정문부 군의 구성>

鍾城府使 鄭見龍 前座首 徐遂/ 時座首 李麒壽

本府(경성부)人 安原權管 姜文祐/ 及第 朴銀柱/ 前權管 姜壽延/ 幼學 崔配天/ 正兵 姜壽遐

穩城判官 李訥

慶源判官 吳彦良

訓戎僉使 金磁

柔遠僉使 李希良

美錢僉使 金範

茂山萬戶 李蘭

玉連萬戶 安沃

朱乙溫萬戶 李希唐

黃柘坡權管 咸以良

吾村權管 具滉

兵使軍官 前監察 吳命壽/ 萬戶 金龜長/ 訓鍊奉事 許大任/ 內禁衛 李彭齡/ 忠義 李應雲․李貴瑞/ 定虜衛 孫傑/ 羽林衛 李應鸞/ 保人 洪大連

鍾城府使軍官 前萬戶 崔慶元/ 忠義衛 魚起瀛/ 前司僕 嚴俊億/ 定虜衛 鄭春氣/ 別侍衛 李壽根/ 保人 鄭時龍/ 保人 李宗信/ 保人 郭俟

鏡城軍官 前內禁衛 李鉉

穩城判官軍官 定虜衛 李光辰․李天龍

柔遠僉使軍官 前內禁衛 金大寬/ 甲士 崔命玉․申九鶴

訓戎僉使軍官 定虜衛 鄭勵/ 別侍衛 李長亨․金興福․高永珍․朴從禮/ 校生 韓得․朱德男

美錢僉使軍官 別侍衛 安德壽/ 甲士 方仁鶴/ 忠順衛 張鵬/ 甲士 李贊

黃柘坡權管軍官 別侍衛 田興漑/ 保人 崔龍潭/ 甲士 李夢福

京來避亂人 成均館權知學諭 李成吉/ 前直長 申石潾/ 生員 申櫓/ 幼學 李精瓈/ 幼學 申桴․申格

入居 林廷彥

幼學 申楣

書吏 崔彥鵬

保人 吳慶男 吳應男 等

다음으로 󰡔농포집󰡕에서 관심을 가지고 볼 수 있는 자료는 순영에 보고한 첩정이다. 이 첩정은 병마평사인 정문부가 관찰사 겸 도순찰사인 윤탁연에게 보고한 문서이다. 윤탁연은 병마평사인 정문부에게 2월 17일 [단천의 왜적 머리를 참수하여 계문한 내용에 대한 보고문의 서목에 회답]하는 형식으로 보낸 지시문에는, (1)11월 19일에 패배한 뒤에 북쪽으로 순행하려고 하여 순순히 兵使의 절제를 받아야 되는데 머리를 바칠 때에 병사가 아직 到界하지 않았다고 배척하여 쫓아내서 그것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고, 정월 28일 뒤에 패배한 것은 대장의 절제를 받지 않아서인지 또한 수로로 장계한 것인지 조사하여 치보할 것, (2)한 나라의 군사가 한 나라의 적을 토벌하는 것이고, 단천에서 적을 토벌하는 것은 정말 평사가 사사로이 처리할 것이 아닌데, 단천도 수로가 있어서 단천에서 획득한 머리를 단천군수가 장계해도 되는데 몽땅 빼앗아서 자기의 공로로 한 바 정말 군자가 할 바가 아니라는 것, (3)한백겸을 토포장으로 차정한 차첩은 빨리 거두어서 올려 보낼 것, (4)各社成冊도 비변사 관문을 등사하여 보낸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빨리 시행하라는 것, (5)倭馬를 책임지고 보내라고 하는 말은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니 다시 조사하여 길주에서 획득한 왜마를 각각 이름 밑에 아무 말은 아무개에게 허급하였고 아무 말은 아무 사또에게 올려 보냈다고 하나하나 기록하여 빨리 보고할 것 등 다섯 가지의 질의서를 보냈다.

이에 대하여 평사 정문부는 (1)11월 19일에 저(평사)는 명천에 있었고 중위장 정현룡, 좌위장 유경천, 우위장 오응태로 3위로 나누어 영동관창으로 보내 포위하여 책을 빼앗으라고 하였는데 군졸들이 여러 차례 승리한 것에 익숙해져서 가벼이 전진하다가 탄환에 맞아 사상을 당했을 분이고 특별히 패주한 것은 아니며, 가령 패배하여 죄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한 도의 명장인 정현룡이 먼저 죄를 받을 것이며, (2)머리를 바치는 장계는 8도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삭발한 승려까지도 직계를 해도 조정에서 특별히 금단하는 일이 없는데, 저(평사)만 직계하여 머리를 바쳤다고 하여 죽을 죄로 빠트리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으며, 정월 28일에도 남관의 예에 따라 관광하러 보낸 것이고 한 명의 사졸도 부상을 하지 않았는데, 제(평사)가 잘못 접전하여 피차간에 모두 부상하였고 특별히 패군한 일은 없으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장계하였으며, (3)단천에 있는 적을 초멸할 때에도 단천 사람이 정말 먼저 올라가서 참괵을 하였고 반드시 북군에게 오라고 요청할 필요도 없었으며 각각이 참획한 것을 각각 가지고 돌아가서 단천군수에게 이급을 진배하지 않았으며 남이 참수한 것을 빼앗아 자신의 공으로 하였다는 것은 더러운 사람도 차마하지 못할 일인데 제(평사)가 비록 못났지만 백일하에 이러한 일은 감히 하지 않았으며, (4)한백겸을 토포장으로 임명한 차첩은 비단 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정말 듣지도 못하였으므로 올려보 낼 수가 없다는 것, (5)각사성책은 하나하나 독촉을 하였으나 각 관에서 아직 보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 (6)왜마를 빼앗은 수가 무려 수백 필일지라도 숨기고 내놓지 않아서 하나하나 찾아서 장부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만, 100여 필 중에서 혹은 군공으로 빼앗은 사람에게 영급할 뿐이고 서좌랑의 전언은 처음부터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이미 보고하였다.

정문부는 마지막으로 “대개 종묘와 사직이 구허가 되고 임금이 몽진하였는데 신하된 자가 조금이라도 공리심이 있어서 토적을 급무로 하지 않는다면 비록 사람의 화는 면하더라도 반드시 천앙이 있을 것입니다. 한결같이 토적하는 외에는 세상의 사정이나 사람들의 곡절을 돌아볼 틈이 없어 정직하게 하기만 하고 의심을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다른 사람의 모함을 받아 끝내 중한 죄에 빠졌으니 참소하는 간사한 무리들이 어두운 곳에서 삵괭이처럼 비웃을까 매우 걱정입니다.”라고 하며 보고문을 마치고 있다. 이 답변서가 관찰사 겸 순찰사인 윤탁연에게 올라간 것은 1593년 2월 19일이다.

이제 평안도에서도 명군의 원조로 평양성 전투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전세가 서서히 역전되는 시기였다. 전쟁 초기에 바람에 쓸리듯 관군이 와해되었다고는 해도 함경도는 조선 반도의 끝이어서 가장 나중에 침략을 받는 곳이었고, 평안도로 파천을 한 선조도 조선 왕조의 발상지인 함경도의 함흥 지역을 마지막 피난처로 생각하는 곳이었다.(윤탁연에게 함경도 관찰사를 임명하면서 내린 교서)

3. 󰡔북관일기󰡕와 함경도 관찰사 윤탁연의 동향

󰡔북관일기󰡕의 내용은 전쟁 초기 서울의 혼란 상황, 임해군을 수종하여 피난하는 상황, 함경도에서의 왜적과의 전투 상황, 명과 일본과의 협상 상황 및 이에 대한 조선의 태도, 진주성 함락 및 전라도 지역의 전투 현황 등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난중에 가족들이 어떻게 피난하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윤탁연의 󰡔북관일기󰡕를 중심으로 그의 임란 초기 함경도의 상황과 윤탁연의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왕자 호종

윤탁연의 󰡔북관일기󰡕는 임란이 발발하면서 시작된다. 일기의 내용은 전쟁 초기 서울의 혼란 상황, 임해군을 수종하여 피난하는 상황, 함경도에서의 왜적과의 전투 상황, 명과 일본과의 협상 상황 및 이에 대한 조선의 태도, 진주성 함락 및 전라도 지역의 전투 현황 등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난중에 가족들이 어떻게 피난하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일기에 나타난 일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592년 4월 25일에는 羽林衛廳에 근무하였고, 4월 26일부터 29일까지는 訓練院에서 근무하였다. 파천의 결정이 나고, 윤탁연은 임해군을 호종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어 가족들과 작별을 하고 임해군을 호종한 것이 4월 30일이었다. 빗 속에 楊州 蓮亭에서 머물고, 다음날인 5월 1일에는 抱川에서 숙박하였다. 포천에서부터 5월 9일 덕원부에 들어가는 5월 9일까지의 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抱川(5/1)-豊田驛(5/2)-松澗(5/3)-淮陽官舍(5/4)-安邊高山驛(5/5)-德源府(5/9)

이 이후 10월 1일까지 4달 동안의 일기는 망실되었다. 󰡔북관일기󰡕에 쓰여진 후대의 追記에 의하면, “이 아래 넉 달 동안의 일기는 끊어졌다. 전후의 사실을 꿰맞출 수가 없으니 한탄스럽다. 이제 五峰 李好閔이 지은 北伯 敎書 및 壺谷 南龍翼이 쓴 墓碣文으로 추측하건대, 행차가 북청에 도착한 후에 검찰사에 제수되어 별해보에 입거하였고 7월에 도순찰사에 제수되었을 것이다(此下四朔日記間斷 前後事實 不能該貫 恨歎 今以李五峰所製北伯敎書 及南壺谷所撰墓碣文推之 則行到北淸 拜檢察使 入據別害堡 七月日又拜都巡察使耳)”라고 하였다.

흔히 이 시기의 윤탁연의 행적을 두고 그가 일신상의 안전을 위하여 홀로 병을 핑계로 뒤로 처졌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더 면밀한 고증이 필요할 것 같다. 윤탁연은 함경감사 유영립이 왜군의 포로가 된 후 공석이 된 함경도관찰사 겸 함흥부윤으로 임명되고 곧 이어서 겸 병마절도사에 임명된 것이 7월 10일의 일이고, 임해군 일행이 포로가 된 것은 7월 23일이다. 윤탁연은 이미 임해군 호종의 임무에서 벗어나 별해보에 들어가 왜적을 토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윤탁연은 “병을 핑계하고 딴 길로 거쳐서 깊이 별해보(別害堡)로 숨어들어갔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그런데 과연 윤탁연은 󰡔연려실기술󰡕의 내용대로 병을 핑계로 하여 도망한 것인가? 이를 알기 위하여 먼저 임해군과 순화군이 함경도로 피란할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실록에는 “두 왕자는 적병이 바로 뒤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북쪽을 향해 질주하여 마천령(摩天嶺)을 넘어갔는데 윤탁연(尹卓然)은 뒤에 쳐졌다”는 정도의 기록만 나온다. 가등청정이 철령을 넘어 왕자 일행을 끝까지 추격하므로 왕자 일행은 달아나 경성(鏡城)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임해군과 순화군이 철령을 넘어 덕원(德源)에 도착한 것은 5월 9일의 일인데, 그 후 두 달 정도를 임해군과 순화군 일행은 마천령 이남의 어느 지역에서 머물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적의 상황을 보면, 6월 12일 이후에 가등청정과 모리길성 군이 철령을 넘어 함경도로 침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함경감사 유영립은 7월 초에 북청을 지나다가 적군에게 포로가 된 것이다. 또한 7월 18~19일에는 왜군과 해정창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그런데 실록의 기록에 윤탁연이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된 것이 7월 10일이고, 비변사에서 함경도가 한창 사변 중이라는 이유로 윤탁연에게 순찰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연려실기술󰡕의 “병을 핑계로 별해보로 숨어들어갔다.”는 내용보다는 오히려 󰡔중호집󰡕의 행장과 󰡔북관일기󰡕의 추기에 보이는 것처럼 “일행이 북청에 도착하여 검찰사를 제수받아 별해보에 입거했다.”는 내용이 보다 정확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윤탁연이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 탄핵을 받는 가운데에도 호종을 다하지 않은 책임은 끝까지 추궁되지 않고 있는 것도 윤탁연이 호종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왕자 일행이 포로가 된 뒤에 윤탁연은 일행을 구출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고, 왕자 일행 구출을 위하여 교섭에 나선 沈岱를 따라나선 윤탁연의 長子 尹慶遠은 삭령에서 토적들에게 해를 당하게 된다.

10월 1일 이후 10월 25일까지 윤탁연은 함경도 관찰사로서 別害堡에 있으면서 왜군과의 전투를 지휘하였다. 10月 26日부터 11월 30일까지는 天飛村, 12월 1일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沙水村에 머물렀다. 별해보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으나 천비촌이나 사수촌은 어느 지역인지 확인할 수 없다. 아마도 별해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라고 생각된다.([해동지도] 함흥부 沙介水. 長津柵 옆/ 1872년 장진부 지도 沙水倉) 1593년의 일기에도 3월 이후 5월까지의 일기는 단절되었다. 다시 6월 1일부터 시작되는 일기에는 그가 初陽洞([해동지도] 함흥부 潮陽社)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6월 2일~3일에는 定平府에도 머물고, 다시 초양동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보아 초양동은 정평부에서 가까운 곳으로 생각된다. 그는 8월 3일까지 초양동에 머물다가 8월 9일에 영흥부에 머무는 것으로 기록이 끝난다. 그런데 적군이 다 철수한 이후에도 그는 함경도 관찰사를 계속하였으므로, 아마도 그는 영흥이나 함흥에 머무르면서 공직을 수행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2) 함경도관찰사 겸 함흥부윤 겸 병마절도사

임란이 일어났을 때 윤탁연은 서울을 지키는 검찰부사를 맡았다가 전황이 급변하자 임해군을 모시고 함경도로 피난하여 군사를 모으도록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함경도관찰사 겸 함흥부윤에 임명을 받고 겸하여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북청에서 왕자 일행과 헤어진 윤탁연은 함경도와 평안도를 잇는 요충인 별해보에 들어가 함경도를 공격하는 가등청정 군과 평안도를 공격하는 소서행장 군이 서로 연결을 가지는 것을 차단하였다.

국경인 등 토적들의 반란과 왜적에 의하여 왕자 일행이 포로로 잡힌 후 함경도 남북을 막론하고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곧 산간 지역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의병이 결정되고 윤탁연도 관군들을 모아 전열을 정비하였다.

적군이 물러간 이후 그는 함경도 관찰사 겸 순찰사 직을 수행하는데, 백성들을 안집시키는데 주력한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진휼을 통하여 백성들을 안집시킨 것이었는데, 직접 진휼곡을 나누어준 기록이 일기의 도처에 보인다.

3) 두 가지 辨誣 사항

하나는 임해군을 호종하는 임무를 가졌으면서 임해군 일행이 국경인 일파의 역모로 왜적의 포로가 되었을 때, 왜 임해군을 호종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함경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서 임란 중 왜적과 싸우지 않고 산골짜기에 숨어 있었고,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운 정문부를 질투하여 전공 보고를 가로채거나 방해하였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과 관련 기록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그가 그러한 비난을 받을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첫째의 경우, 임해군 일행과 윤탁연 일행이 나뉘어 진 것은 임해군 일행이 포로가 되기 훨씬 전인 북청에서였고, 직후에 그는 적의 포로가 된 함경도 관찰사 유영립(柳永立)의 후임으로 관찰사 겸 순찰사에 임명된 것은 7월 10일, 12일인 것이다. 또한 임해군 일행을 적으로부터 찾아오기 위하여 그는 최선을 다하였고 더군다나 맏아들인 경원이 임해군 일행을 포로 상태에서 찾아오기 위한 임무를 맡은 심대와 함께 그들을 찾으러 나섰다가 변을 당한 일이다. 적이 두려웠다면 감히 그는 그의 맏아들을 적진에 찾으러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북관일기󰡕에 남아있는 그의 기록들은 그가 매일 주상인 선조의 안부를 염려하고 국가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겠다는 다짐이 나타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정문부와 윤탁연의 알력설은 당시 조정에까지 들리게 되었고 후대의 기록에도 나오는 것이어서 잘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전쟁 상황이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은 평상시의 상황이었다면 정문부의 행위와 같은 하극상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정문부는 문관 출신으로서 임란 당시 함경도 평사의 직에 있다가 관군이 와해되자 자신도 함께 피난을 하였다가 의병들의 추대로 의병장이 된 것이다. 같은 문반 출신인 윤탁연은 전쟁 중이긴 하지만 국왕으로부터 함경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서 함경도 지역의 관료들과 의병장까지를 모두 통할하여야 할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군공의 보고이든 전략에 대한 장계이든, 관군이든 의병이든 당시 엄연한 지휘 체계를 갖추고 있는 함경도 관찰사 겸 순찰사인 윤탁연을 경유하여 보고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하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문부가 용서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군공을 세웠고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맺 음 말

이상 임진왜란 초기 함경도의 상황과 왜적을 격퇴하는 과정에 있어서 북평사였던 정문부 군의 구성과 활동, 함경도 관찰사 유영경이 포로가 된 후 관찰사로 임명된 윤탁연의 󰡔북관일기󰡕를 중심으로 그의 임해군, 순화군 두 왕자 호종과 관찰사로 임명된 후의 관찰사로서의 활동, 윤탁연과 정문부의 갈등 등에 대해서 정리하였다.

원래 양계 지역은 삼남 지역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함경도는 전통적인 양반사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변경 지역에서는 여진족과 근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통제가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임란 초기에 왜군이 파죽지세로 몰려오자 함경도 지역의 여러 군현에서는 지역 아전들이 자발적으로 수령이나 지휘관을 잡아서 왜군을 맞이하고 심지어는 왕자들까지 잡아서 바치는 형국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평사였던 정문부도 단신으로 탈출하여 주변의 유지 세력들과 함락되지 않은 지역의 수령, 지휘관과 함께 반역 세력을 제거하고 군사를 정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서 왜군을 격퇴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함경도 지역의 수장인 윤탁연은 별해보에 입거하여 함경도와 평안도의 연락 루트를 확보하고 국왕과의 지속적인 연락선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왜군을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운 정문부 등 현지의 전투 전력을 지휘하는 데에는 한계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남쪽의 왜군과 북쪽의 오랑캐라고 하는 양면 협공을 당하고 있는 함경도에서는 전통적인 양반사족 기반이 약하였기 때문에 삼남 지방과 같은 의병이 대거 일어나기에는 어려웠다. 정문부 군의 초기 구성을 보면 북쪽에 함락되지 않은 지역의 수령과 주민을 중심으로 관군이 재건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왜군을 격퇴할 수가 있었다고 하겠다.

 

출처 :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글쓴이 : 마인부우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