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스크랩] 충청지역 임진란 의병활동에 관한 연구

구름위 2012. 10. 7.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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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期 湖西義兵의 基盤과 活躍

 

郭 鎬 濟(충남도립 청양대학)

 


Ⅰ. 머리말

Ⅱ. 湖西義兵의 基盤

1. 學緣的 基盤

2. 血緣的 基盤

3. 地緣的 基盤

Ⅲ. 湖西義兵의 蜂起

Ⅳ. 湖西義兵의 活躍

1. 秋風嶺戰鬪

2. 淸州城戰鬪


Ⅰ. 머 리 말


임진왜란 때 의병은 국가적 存亡의 위기에서 일본군에 대항하여 이들을 격퇴함으로써 국가 再造의 토대가 되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였다. 이들 의병을 주도한 세력은 관직을 물러나 향촌에 머무르던 전직관리와 양반 유생 등 향촌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일본군의 직접적인 침략을 받은 지역은 물론이고 일본군이 미치지 않은 곳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되었다.

조선시대 湖西는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요인과 국가 寶庫인 三南의 한 곳이며 嶺·湖南으로 연결되는 교통상의 要衝地이기 때문에 항상 지배층의 관심이 컸었다. 따라서 조선 건국 이후 사대부들의 隱居地로서, 家勢를 보존하면서 재기를 준비하던 지역으로 각광받았다.

한편 호서는 한반도의 중간에 위치하여 임진왜란 전까지만 하더라도 역사상 거란족과 여진족, 홍건적 등의 북방민족이나 남방 왜구의 침입과 같은 큰 전란에 휩쓸리지 않았던 곳이다. 대규모 전쟁을 경험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만큼, 전쟁에 대비하는 능력 역시 다른 지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경우에는 상황이 다르게 전개되었다. 우선 북상하던 일본군의 세 경로가 모두 호서를 통과하였고, 일본이 거점을 정하여 주둔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도 예외없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儒敎的 節義精神을 바탕으로 양반 유생들이 전국에서 ‘義’로써 의병을 봉기하자, 호서지역에서도 예외 없이 의병이 봉기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호서지역 의병에 대하여 소수의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영·호남 의병 연구에 비하면 대단히 부진한 편이다. 호서의병의 기존 연구에서 연구대상이 주로 趙憲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으며 기타 의병연구는 각각 1편씩 밖에 없는 상태이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진행된 호서의병에 대한 연구를 정리하면서, 호서지역에서 의병이 봉기되는 기반과 시기, 그리고 의병의 활약을 고찰하여 그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특히 死地에 자발적으로 앞장서서 달려나가게 한 요인으로 의병장과 의병 구성원간의 상호 관계를 살펴보고, 의병봉기의 과정을 면밀히 추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의병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던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의병들의 활약을 밝혀 보겠다.

그럼으로써 미진했던 호서지역의 의병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활성화할 수 있고, 나아가서 연구의 대상에서 소홀하게 대했던 의병장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될 것으로 생각된다.

Ⅱ. 湖西義兵의 基盤

1. 學緣的 基盤

16세기 이래 湖西地域은 士林의 새로운 근거지로 각광을 받았다. 특히 中宗朝에 실시된 賢良科 급제자의 대부분이 京畿道와 忠淸道 출신이었고, 靜菴 趙光祖 등과 밀착되어 개혁에 동조한 士林派 가운데 호서지역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近畿의 栗谷 李珥와 牛溪 成渾, 龜峰 宋翼弼에서 土亭 李之菡(保寧), 徐起(公州), 趙憲(沃川)으로 연결되어 호서사림의 학통을 형성하였다.

호서의병의 주도층은 향촌에서 중망받는 士族들로서 조선초기 이래 그 지역에서 세력기반을 확보해 온 계층들이었다. 즉 사림 가운데 명망있는 자가 倡義하여 門下 및 從遊人 등의 호응을 얻은 다음, 그 호응자들이 다시 각각 지역의 향민들을 동원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호서지역에서 學緣을 기반으로 규모를 확대시킨 의병장은 趙憲이다. 조헌은 16세기 畿湖 士林의 宗匠인 李珥와 牛溪 成渾의 門人이었다. 사림의 명망을 받던 조헌이 이들과 門人으로 연결된 계기는 선조 4년(1571) 조헌이 洪州敎授로 있으면서 보령에 살던 李之菡에게 가르침을 청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지함은 조헌의 학식이 높음을 알고 李珥 · 成渾을 스승으로 섬길 것과, 龜峰 宋翼弼과 孤靑 徐起를 찾아 뵐 것을 추천하였다. 그리고 이지함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다만 汝式(趙憲의 字)이 나를 스승으로 하는 것을 알뿐 汝式이 진정 내 스승인 줄은 모른다”라고 할 정도로 조헌을 소중히 여겼다. 조헌이 선조 3년(1570) 坡州敎授로 부임하여 成渾에게 학문을 청하였을 때 성혼은 조헌을 畏友라 하였으나, 조헌은 성혼을 끝내 스승으로 섬겼다. 또한 李珥를 평생동안 존숭하면서 號를 後栗이라고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조헌의 학문적인 성장은 李之菡·成渾·李珥의 영향하에 이루어졌다. 특히 李珥와 조헌이 똑같이 10년내에 禍亂이 있을 것을 예측하여 민생안정을 위한 개혁을 제기하였다. 조헌이 일본의 침입에 대한 준비론을 제시하였고, 일본의 침입에 신속하게 문인을 중심으로 의병을 봉기할 수 있었던 학문적 배경도 이미 李珥에서부터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조헌은 파주교수에 임명된 이후 정주·홍주교수, 전라도사와 보은현감 및 공주제독을 지냈다. 그는 위의 관직을 수행하면서 지역의 사림과 자제들을 교육하여 학문적 관련을 맺었고, 공주 제독을 사직한 후 옥천에 머물면서도 二止堂과 三樂齋, 金川寺 등지에서 沃川·報恩·永同의 문생들과 함께 학문을 강마하였다. 조헌이 擧義할 때 (수년전 자신이 提督으로 봉직했던 公州의) 鄕校에서 군대를 일으켰다는 사실도 의병진 구성원의 상당한 수가 그 지역의 學生 또는 이와 관련된 사람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重峰集󰡕의 「殉節錄」에 수록된 141명의 인물 중 조헌의 門人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88명이다. 이들의 학문적 師承은 스승이 평소 교육한 바의 義理精神을 부르짖었을 때, 다수의 문생들이 동조하여 의병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의병의 출신지를 통해서 비교해 보자.

출신지를 알 수 있는 88명 중 옥천·영동·보은 지역 출신이 48명(54.5%)이었고, 그 이외에 조헌이 敎授 및 提督과 같은 교육분야의 관직에 있었던 공주·홍주·전라도 등지에서도 상당수가 참여하였다. 특히 報恩의 11명은 조헌이 보은현감을 지냈다는 사실과 옥천에서 보은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옥천 출신자와 함께 학문관계를 형성하기가 용이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의 대부분이 조헌과 學緣을 통한 문생으로 스승의 起義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호서의병의 대표적인 조헌의 의병진 구성 요인에서 사승관계를 바탕으로 한 學緣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학연에 의해 의병이 모집된 출신범위도 호서지역 뿐만 아니라, 호남에서까지 조헌 의병진에 참여하였다. 이와 같이 넓은 지역에서 다수의 의병들이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헌이 교육분야의 外職에 부임하여 지역 문인들에게 義理精神을 함양시킨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청주에서 기의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했던 趙綱은 목천에서 태어났다. 청주로 이거한 후 8세 때인 中宗 29년(1534) 회덕에 유배되어 있던 鄭思顯에게 수학하였다. 鄭思顯은 慕齋 金安國의 문인으로 그의 先祖 鄭吉孚가 고려 때 처음 청주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鄭思顯은 조정을 모함하고 高官 10여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모의하였다는 혐의로 懷德에 3년간 유배되었다. 鄭思顯이 회덕에 유배되었던 동안에 청주에 살던 조강이 鄭思顯에게 수학할 수 있었고, 정사현의 셋째 아들 若은 다시 趙綱의 문인이 되어 조강이 임란 때 起義했을 때 조강을 도와 의병을 이끌게 되었다. 趙綱은 15세부터는 東洲 成悌元과 圭庵 宋麟壽를 師事하였다. 당시에 청주의 馬巖 村舍에서는 東洲 成悌元 · 圭庵 宋麟壽 · 西阜 宋龜壽 등이 함께 講道하여, 소위 三賢閭라 불리웠다. 趙綱의 父 承胤은 이들 三賢과 道義之交를 맺었고, 趙綱은 이들과 學緣을 맺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 血緣的 基盤

호서지역 각지의 의병장들이 起義했을 때, 넓게는 門人들의 學緣과 좁게는 親·姻戚과 通婚圈을 바탕으로 한 血緣이 의병을 봉기하고 활동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 특히 호서의병의 門人關係는 趙憲과 의병 주도층 사이에 형성되어 있었으나, 혈연관계는 조헌과 의병 주도층 사이에는 아주 미약하고 주로 주도층 상호간에 형성되어 있었다

 

가. 白川趙氏

趙憲이 이 지역에서 가지고 있던 土着的 · 血緣的 기반은 매우 미약하였다. 그는 京畿道 金浦縣 坎井里에서 태어나 선조 17년(1584) 報恩縣監을 파직당한 후, 沃川 安邑 栗峙(밤티)에 後栗精舍를 짓고 강론하면서 옥천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호서지역에는 조헌과는 寸數가 먼 白川趙氏로는 永同에 趙愈, 靑陽에 趙敬男 등이 이미 살고 있었다. 姻戚으로는 조헌의 의병진을 주도하다가 錦山에서 순절한 開城金氏 金節의 아우 簵가 조헌의 사위가 되었고, 역시 개성김씨 鑑이 조헌의 族叔 淑文의 사위가 되었을 뿐이었다

조헌의 의병주도층에 조헌과 직접 血緣으로 연결되는 자는 소수 있을 뿐이지만, 門人을 포함한 의병주도층 상호간에는 혈연관계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조헌과 이들의 혈연관계는 麗末鮮初 무렵부터 출신 지역에 世居해온 姓氏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특히 옥천지역의 경우 형제들이 함께 의병에 참여한 경우가 많았고, 여기에 사위를 비롯한 인척들도 함께 포함되기도 하였다.

나. 開城金氏

같은 본관의 성씨로 한 지역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의병에 참여한 가문은 開城金氏이다. 옥천의 개성김씨는 고려말에 版圖判書를 지낸 月村 金南寶가 고려가 망하자 沃川 安南 化鶴里에 은거하면서 옥천과 연결되었다. 그후 府使를 지낸 그의 아들 金曜가 安南에서 伊院 義坪里로 이거하였고, 이후 金曜의 4대손 참봉 金慮의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南寶의 5代 族孫 金滉은 趙憲이 12세에 詩書를 수학하여 어려서 학문의 방향을 제시해준 장본인이었다. 金節·金籥·金簵는 金慮의 아들 工曹正郞을 지낸 大鎰의 4형제 중의 세 아들이고, 그들의 4寸 金篆과 함께 의병활동에 참여하였다. 金節은 金籥과 함께 조헌의 2차 起義 때 조헌을 도와 報恩을 방어하였다. 그러나 金節은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고, 金籥은 청주성을 회복한 후 조헌의 命으로 全承業과 함께 行在所에 捷書를 전달하느라 금산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고 전투가 끝난 뒤에 殉義碑 건립을 주도하였다. 金簵는 조헌의 사위로 兩家의 家事를 위임받아 양가의 老親을 청주의 동쪽 仙遊洞에 모셔 놓고, 향병을 모아 청주성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금산전투가 끝난 후 조헌의 屍身을 沃川 安內에 장사지냈다

다. 沃川全氏

沃川全氏로 조헌의 의병진에 포함된 인물은 全承業·全忠男·全渫 3인이다. 옥천전씨도 옥천의 유력성씨 중의 하나로 고려말부터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옥천전씨가 沃川을 貫鄕으로 한 것은 고려 충숙왕 때 판도판서를 역임한 全侑가 管城君에 봉해진 것이 계기가 되는데, 전유의 어머니가 沃川黃氏였던 것으로 보아 外家쪽으로 연결된 것으로 추측된다. 全侑의 아들 全淑은 판도판서에 있다가 고려가 망하면서 沃川郡 東二面 赤下里(기시래)에 은거하면서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沃川全氏의 두드러진 인물은 中宗 때 彭祖·彭壽·彭齡 3형제부터 주목된다. 특히 彭齡(號 : 松亭)은 中宗 19년(1524) 문과에 올라 禮曹參議를 지냈고, 淸白吏에 뽑혔다. 그의 학문은 鄭澈이 御前에서 ‘正人德老’라 극찬하였고, 趙憲이 그의 「嶺北題咏」을 보고 ‘死節之人’이라 할 정도로 올바르고 절개가 있었다. 宣祖 4年 (1571) 士林들이 雙峰書院을 건립하여 全彭齡을 배향하였다. 全彭齡의 손자 全承業은 조헌과 더불어 起義하여 淸州城 탈환에 참여하였으나, 조헌이 行在所에 捷書를 전달하라는 命으로 금산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또한 全承業의 族孫인 全渫도 조헌 의병진에 참여하였으나 금산에서 同殉하지 못한 것을 평생 恨으로 삼았다

 

沃川全氏는 주변의 유력성씨와 姻戚關係로 얽혀 있다. 임란 의병의 주도층을 중심으로 옥천전씨와 姻戚으로 관련된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全彭齡은 河東人 鄭雴의 父 鄭惟謇을 사위로 맞았고 전팽수의 손자 全慶男은 정유건의 동생 惟諶의 사위가 되었으며, 全燁은 善山人 郭自防의 仲祖父 郭之屛의 사위가 되었다. 또한 全承業은 咸陽人 朴亨林의 사위가 되었고, 全彭壽는 密陽人 菊堂 朴興生의 曾孫 사위, 전팽수의 아들 全煥은 박흥생의 玄孫 사위가 되었다.

沃川全氏와 함께 河東鄭氏는 沃川에 世居하면서 그 지역의 유력한 성씨들과 가장 폭넓은 通婚圈을 형성하였고,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가문이다. 하동정씨가 옥천지역에 入鄕하여 유력 성씨들과 通婚關係를 맺은 것은 世祖 때 鄭韶가 全淑(沃川全氏)의 사위가 되어 영동 풍천에서 옥천 동이면 적하리 기시래에 移居하면서부터이다. 宣祖初에는 祥雲察訪을 지낸 鄭惟謇이 松亭 全彭齡의 사위가 된 후 陸廷蘭(沃川陸氏), 韓日躋(淸州韓氏), 郭自堅(善山郭氏)을 사위로 맞기에 이르렀다. 鄭韶와 鄭惟謇이 통혼관계를 맺었던 이들의 姓氏들도 모두 고려 때부터 沃川에 정착하여 土着勢力을 형성해왔다. 옥천지역에서는 이들의 성씨 중에서 의병에 참여한 사람이 다수 배출되었다. 의병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던 하동정씨의 인물은 鄭霔·鄭雴 형제와 그들의 堂姪 鄭弘績이었고, 옥천육씨는 陸廷華·陸承福, 청주한씨는 韓琦·韓日休, 선산곽씨는 郭自防·郭鉉·郭崇仁 등이었다.

라. 河東鄭氏

鄭雴(號 : 顧菴)의 옥천지역에서의 위치와 의병운동에 대해서는 󰡔顧菴先生遺稿󰡕와 「顧菴日記」를 통하여 살펴 볼 수 있다. 鄭雴의 兄弟들은 조헌의 의병진으로 실전에 참여한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은 鄭雴이 임란 당시에 전염병으로 실전에 참여하지 못하고, 옥천에서 전개하였던 의병운동과 일본군의 침략 상황을 「顧菴日記」에서 판독이 가능한 것만 요약 정리한 것이다.


임진년 5월 1일 : 諸兄弟들과 (동이면 금암리의) 末瑞洞으로 피난하였다.

6월 16일: 染病으로 집에 누웠고, 仲侍(鄭霔)도 또한 染病으로 집에 있었다.

6월 18일 : 趙憲이 內浦에서 돌아와 公文으로 나(鄭雴)에게 郡舍에서 만나자고 통보했을 때에 나는 病 때문에 (집에서 가까운) 雙峰書院에 나가 기다렸다.

6월 19일 : 趙憲이 나에게 힘주어 말하기를 “지금 자네(鄭雴)는 (奴僕과 馬가 죽는 傳染)病이 있어 멀리 同巡할 수 없으니, 都典粮으로 東南五邑의 식량을 모으겠는가?”라고 물었다. 鄭雴이 처음에 病이 악화될 것을 우려했으나, 반드시 곧 나아지리라 생각하고 본래 바라던 대로 수긍하였다. 따라서 行粮과 弓矢를 金和叔(金節)에게 주었다.

6월 22일 : 아침에 일본군이 永同에서 赤登津 東岸에 이르러 我軍과 강을 사이에 두고 싸웠으나 我軍이 不利하여 돌아왔다. 이때 鄭雴은 病으로 墨寺洞에 있었다.

8월 7일 : 牛峙에 이르렀던 일본군이 郡城을 함락시켰다. 이때 鄭雴은 병으로 墨寺洞에서 통곡하다가 거의 기절하였다.

8월 22일 : 鄭雴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 마침내 병이 집안에 옮겨 奴僕이 죽었고 병이 회복되기도 전에 家馬가 또한 죽는 등 이러한 몇 가지로 인해서 義兵陣에 따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헌은 뜻밖에 패배하였으니, 단지 계속된 병을 위문하는 소리는 慕義之心에 본받지 못하였다. 男兒로서 오늘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10월 20일 : 李忠範을 義兵將으로, 雙峰書院을 義兵都廳으로 삼았다. 李循周를 參謀士, 鄭雴과 李時立을 掌書記로 하였다. 鄭霔를 都典集으로 하고 ······.

11월 : 義兵將 前佐郞 姜節이 懷德에서 와서 沃川郡 赤登村에 진을 치고, 사람을 시켜 鄭雴이 올 것을 요청하였다. 鄭雴이 鄭霔와 함께 토치의 伏兵幕으로 가서 畫軍策을 썼다.

11월 26일 : 趙憲의 葬禮에 모여 書院 儒生들이 致奠하였다.정립의 종자 홍량이 따라 가서 각기 襦衣 1領씩을 棺 속에 넣었다. 그 때 雙峰書院 유생들이 똑같이 도와 致祭하여 鄭雴과 弘量이 동참하였다.(괄호 : 필자)

 

위에서 鄭雴의 형제들은 染病으로 일본군이 옥천에 들어왔을 때 직접 出戰하지 못하고 末瑞洞, 또는 墨寺洞 등지로 피난하면서 다른 의병의 활동을 배후에서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당시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일본군의 침입에 피난한다는 의식보다는 奴僕과 家馬가 죽는 염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傳染되는 것을 줄이기 위한 조치이었다. 그러나 趙憲과 李忠範, 姜節 등의 의병장이 의병운동에 관하여 鄭雴과 상의하고, 鄭雴이나 兄인 鄭霔에게 軍需를 맡게 했던 것으로 그들 형제와 조헌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즉 鄭雴이 전염병에 걸려 의병진으로 實戰에 참여하지는 못하였으나, 옥천에 머물면서 의병진의 모집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고향에서 都典粮으로서 軍需를 지원하여 의병운동의 背後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할은 鄭雴 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와 조카들도 같았다고 생각된다.

마. 善山郭氏

善山郭氏로 趙憲의 문인에 포함된 인물은 龍村 郭垠의 자손 郭自防·郭鉉·郭崇仁 3인이다. 善山郭氏도 옥천에 고려말 郭綏元이 입향한 이후, 옥천에서 세거하였다. 옥천의 선산곽씨로 주목되는 인물은 成宗 때 潭陽府使를 지낸 龍村 郭垠과 中宗 때 承文院 正字를 지낸 坦菴 郭詩이다. 이들은 후에 三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옥천의 선산곽씨는 거의 입향조의 11世孫 郭垠의 후손으로, 이 지역의 士族인 沃川全氏·河東鄭氏·開城金氏 등과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옥천지역의 士族으로 군림해 왔다. 郭垠의 세 아들(之翰·之屛·之楨) 중 둘째 아들 之屛은 金昆星(開城金氏)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으며 全承業의 父 全燁(沃川全氏)을 사위로 맞았고, 또한 郭垠의 손자 坦菴 郭詩는 全彭祖의 손자 全以謹을 사위로 맞았다. 之楨의 아들 語는 生員 宋世勘(恩津宋氏)의 사위가 되었으며, 語의 아들 自堅은 鄭惟謇(河東鄭氏, 鄭雴의 父)의 사위가 되었다. 특히 之楨의 손자 自防은 宋時烈의 父 宋甲祚를 사위로 맞았으므로, 후에 선산곽씨의 각종 문헌을 송시열이 짓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趙憲의 門人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鄭惟謇의 從子 鄭霑과 朴益誠은 郭垠의 曾孫婿로 郭自防과는 4촌간이 된다.

이와 같이 옥천지역의 유력한 사족들과 血緣으로 연결된 선산곽씨에서 의병운동에 나섰던 郭自防·郭鉉·郭崇仁 3인 중 가장 활발한 의병운동을 전개한 사람은 郭自防이다. 그는 武科에 급제하여 奉事로 있다가 옥천에 잠시 머무는 동안, 임란이 일어나 趙憲의 起義에 달려가니 조헌이 손을 잡고 “우리 일이 잘되겠다”라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순찰사 윤선각이 의병의 부모를 가두었으므로, 곽자방의 父 郭諺이 忠義로써 권면하면서 “나에게 괘념치 말라”고 하여 다시 조헌을 따라가니 이미 청주성 전투가 끝난 후였으므로 금산으로 가서 함께 순절하였다.

바. 忠州朴氏

조헌의 妹婿 朴事三, 그리고 從孫 朴光烈, 조헌에게 달려가 금산에서 전사한 朴士振 가문의 忠州朴氏는 혈연적 기반을 잘 보여 준다. 忠州朴氏 家系圖에서 볼 수 있듯이 충주박씨는 이미 고려말부터 유성현이었던 대전지역에 자리잡고 세거해온 성씨이다.


충주박씨는 박영 이후 대대로 개경에서 고려조에 사환하다가 8세인 朴光理 때 이 지역에 정착하여 토성이 되었다. 충주박씨가 개경에서 이 지역으로 이주한 것은 이 지방의 재지사족과 연결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고려말 李春啓는 두문동 72현으로 조선조에 들어와 사림으로부터 절의를 지킨 선비로 추앙되었다. 이춘계는 당시의 권문세가로 朴光理를 사위로 맞고 있다. 또 扶安林氏의 林騫은 두 딸을 朴光理의 아들 朴蓁과 密陽孫氏 孫順에게 출가시켰다. 이와 같이 충주박씨는 처가의 재산을 분배받고, 재지사족과 중첩되는 연혼관계를 맺으면서 유등천변에 토착하게 되었다.

朴光理의 장자 蓁은 가장골을 중심으로 세거하여 주로 武臣側으로 번성한 가문을 이루었다. 朴蓁은 孝諴·忠諴·悌諴·信諴의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중 첫째 朴孝諴과 셋째 朴悌諴의 자손 중에서 의병 참여자가 나왔다.

朴孝諴의 자손으로 趙憲과 함께 의병운동을 전개한 사람은 6世孫 朴事三(1564~?)으로, 그는 조헌의 門人이자 妹夫이다. 朴事三은 황간에 거주하였는데, 그의 祖父 成楗과 父 以麟의 묘가 황간에 있는 것으로 확인될 뿐 자세한 내력은 확실치 않다. 朴悌諴의 자손으로 趙憲과 함께 의병운동을 전개한 사람은 그의 4世孫 朴士振(1544~1592)과 6世孫 朴光烈, 그리고 박사진의 사위 辛澈 등이다. 朴士振과 朴光烈이 조헌의 의병진에서 활동하다가 순절하였으며, 또한 박사진의 사위가 된 辛澈도 조헌의 門人錄에 함께 수록된 인물이다.

박광리의 둘째 아들 蘇는 구즉에 터를 잡았으나, 뒷날 유성구 문지동을 중심으로 전라도 광주로 移居한 박사진의 5대 傍祖 蘇의 외손자들 중에서도 의병운동 참여자가 많이 나왔다. 호남의병장 霽峰 高敬命과 海狂 宋濟民이 그들이다.

이와 같이 충주박씨 내지 이와 관련된 인물로 의병이 다수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顯達하지 못하고 일정한 지역에서 累代동안 世居함으로써 지역민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사. 驪州李氏

홍주 출신 驪州李氏 李光輪은 조헌의 문인으로서 親姻好義者와 家童 村丁 300명을 데리고 조헌의 막하로 들어가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웠고,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가 홍주에 살게된 계기는 祖父 師瑗이 연산군 때 폭정과 사화로 인해 벼슬을 버리고 홍주목 화성 신기리에 은거한 것이다. 이광륜의 가계를 보면 그의 高祖 孜가 양녕대군의 사위로 왕실과 혼인하였고, 그의 장자 대준은 淸陰 金尙憲의 姪婿였다. 그러나 그의 조부가 홍주에 은거한 이후 이렇다할 가세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대로 관직이 끊이지 않았고, 혼인도 김상헌과 같은 유력 가문과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광륜은 서인에 속해 있음을 추정할 수 있고, 이것이 조헌과 연결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헌의 의병진 중 거리가 가장 먼 홍주에서 모병하여 청주와 금산전투에서 탁월한 공을 세움으로써 금산의 종용사에 조헌의 참모 서열 두 번째로 올라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호서의병의 혈연적 기반은 부자와 형제, 그리고 사위, 조카 등 친인척으로 연결되어, 이들이 가동과 촌정을 거느리고 의병에 응모한 것이다. 학연과 함께 혈연으로 맺어진 의병 상호간의 유대관계가 일본군의 침입에 공동 대응하여, 스승이나 친척 중 유력자가 창의했을 때 동참하여 근왕과 향토수호에 앞장섰던 것이다

 

아. 순천박씨

순천박씨로 의병에 나선 이는 의병장 박춘무이다. 朴春茂(호:花遷堂, 자:至元, 본관:順天)의 집안이 청주지역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증조부인 朴宜倫 때부터이다.

순천박씨는 朴彭年의 고조부로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중시조 朴淑貞으로부터 계통을 세우고 있다. 박숙정은 고려 충숙왕 13년(1326) 國子祭主를 지냈고 關東存撫使로 나갔을 때에는 高城 三日湖에 四仙亭, 강릉 경포대에 鏡湖亭, 울진에 翠雲樓를 세웠고 이제현과 안축으로 하여금 창건기를 짓게 하면서 풍류를 자랑하였다. 이후 박춘무의 선대는 朴元象 - 朴安生 - 朴仲林으로 이어진다. 박원상은 박숙정의 다섯 자제 중 막내로 공조참판을 지냈고, 退官 후 公州 儒城縣으로 낙향하여 청주 부근에서 순천박씨의 기반을 닦게 되었다.

박춘무의 가문은 박안생의 뒤를 이은 8대조 박중림에 이르러 다시 한번 문장가로서의 명성을 드높인다. 박중림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그의 맏아들인 朴彭年을 비롯하여, 그 문하에서 배출된 成三問·河緯地 등이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하였다. 단종복위운동은 당시 박중림의 문하에서 하나의 학맥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死六臣 사건 당시 세조가 謀議의 배후를 추궁하였을 때, 박팽년이 “가정의 교훈일 뿐이다”라고 하였다는 사실이 그 단적인 반영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단종복위운동 때에는 박팽년 뿐만 아니라 그 동생인 引年·耆年·大年·永年 등이 모두 참가하거나 연루되어 참화를 입었다. 이들 형제 중에서 박춘무의 선대는 박인년으로 7대조이자 派祖이다. 박인년은 집현전학사로 있으면서 단종복위운동으로 참화를 당하였으며, 그 아들 朴璡도 연좌되었다.

이렇듯 사육신 사건으로 絶門의 위기에 놓였던 박춘무의 집안이 다시 재기하고 淸州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의 증조부인 박의륜 때부터였다. 사육신 사건의 참화를 입어 珍島로 숨어들었던 그의 집안이 고조부인 朴仁龍 때에 사면되고 관직까지 제수받음에 따라 뭍으로 나올 수 있었고, 이어 박의륜이 伯父를 모시고 청주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청주에 정착한 이후 박춘무의 선대는 당시 지역의 세력 있는 가문과 통혼관계를 맺으면서 빠른 성장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증조부 박의륜은 남양홍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고, 조부 박곤손은 청주한씨, 부친 박기정은 용인이씨·전의이씨·경주김씨 등 3명의 부인을 맞이하였는데, 이들 가문은 모두 지역의 세력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3. 地緣的 基盤

1) 沃川地域

在地士族들이 향촌에서 의병을 봉기하여 붕괴된 官軍을 대신하여 일본군에 대응하고, 民心을 수습한 것은 새로운 지배세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호서지역에서도 재지사족들이 16세기에 향촌의 지배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書院 건립과 鄕約 보급, 司馬所 설치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書院은 先賢을 제사하고 後進을 교육하는 본래의 기능 이외에, 士林이 향촌에서 결집할 수 있는 求心點으로서의 역할이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이었다. 따라서 임란 때 서원에서 公論을 논의하고, 그 결과 의병을 봉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옥천의 재지사족은 선조 4년(1571)에 雙峰書院을 건립하여 金文起 · 全彭齡 · 郭詩를 제사하였으나, 임진왜란에 서원이 불타고 선조 41년(1608)에 서원을 옮겨지으면서 조헌을 배향하였다. 이미 청주의 신항서원과 같은 때에 서원 건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쌍봉서원에 대한 임란 이전의 구체적인 것은 확인할 수 없고, 임란 당시 옥천에서 쌍봉서원의 역할에 대하여 다음의 자료는 새로운 사실을 시사해 준다.


萬曆 20년 임진(1592) 6월 18일 趙重峰이 內浦로부터 懷德에 도착하여 公文으로 장차 郡舍에서 先生(鄭雴)을 만날 것을 통보하였으나, 선생은 질병으로 雙峰(書院)에 나가 대하였다.

10월 20일 雙峰(書院)에서 擧義를 상의하였다. 李忠範이 義兵將이 되고 雙峰(書院)으로 義兵都廳으로 삼았다.․․․


임란 때 雙峰에서 의병문제를 의논하고 있으므로, 雙峰書院은 옥천지역 재지사족의 藏修之所였고 향촌에서 사족들이 의병봉기와 같은 公論을 거론하는 장소였다. 쌍봉서원을 건립했던 주체는 건립 초기의 배향인물과 의병을 봉기하기까지 출입했던 인물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쌍봉서원에 배향된 인물 3인은 모두 옥천 출신의 鄕賢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이다. 이들 3인 중에서 全彭齡과 郭詩의 후손들이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이들이 쌍봉서원에서 공론에 참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의 혈연적 기반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이지만 全彭齡은 선산곽씨 之屛의 사위인 燁의 父이고, 조헌 의병진에 참여하여 행재소에 첩서를 전달했던 全承業의 祖父이다. 또한 전팽령은 하동정씨 惟謇의 장인인데, 유건의 아들들 중에서 임란을 전후하여 옥천에서 활동한 이가 많이 나왔다. 예를 들면 鄭惟謇의 아들 鄭雴과 鄭霔를 비롯하여 사위 陸廷蘭 · 韓日躋 · 郭自堅 등이다. 이들은 모두 조헌의 문인으로 의병활동에 참여했던 이들이었다. 또한 郭詩는 全燁의 사촌 처남이고, 郭自堅과 郭自防의 從祖父이다. 곽시의 자손들 중에서도 전팽령의 자손들과 마찬가지로 향촌활동과 의병에 참여한 이들이 많이 나왔다. 결국 쌍봉서원에 배향된 전팽령과 곽시의 자손들이 서원의 건립을 주도했을 것임은 自明하다. 특히 1571년에 서원이 건립된 사실과 이들의 연령을 고려할 때, 鄭惟謇이 서원 건립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제2차 금산성 전투에서 옥천지역을 비롯한 호서의 의병들이 전사한 후인 1592년 10월 20일에 쌍봉서원을 義兵都廳으로 삼고 거의를 상의하여 이충범이 의병장이 되었던 것을 볼 때, 이 당시에는 이충범이 쌍봉서원을 중심으로 사족들을 주도하였음도 추측할 수 있다. 이 때 구성된 의병진을 살펴보면 하동정씨, 옥천전씨, 인천이씨가 중심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성씨와 조직에 편성되지는 않았지만 의병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선산곽씨, 개성김씨 등의 성씨는 여말선초부터 오랜동안 세거해온 성씨들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 봉기의 기반으로 앞에서 學緣과 血緣이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살펴본 결과 의병을 봉기했던 주도층은 향촌의 사족이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사족들은 서원과 향약, 그리고 유향소를 통하여 향촌지배를 강화시켜왔고, 또한 임란 이후에도 주도세력의 변화는 있을지라도 사족의 향촌 지배권은 지속되었다.

2) 淸州地域

사림의 서원 건립은 중종 38년 풍기군수 朱世鵬이 白雲洞書院을 건립한 것이 최초이지만, 명종대에 이르러서는 호서지역에도 서원건립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호서지역의 서원은 명종 4년(1549) 成悌元이 보은에 象賢書院을 건립한 것이 최초이다. 그후 선조 3년(1570) 청주 사람 縣監 趙綱이 발의하고, 西溪 李得胤과 卞景壽가 여러 章甫들과 협의하여 莘巷書院을 건립하여 圭庵 宋麟壽, 江叟 朴薰, 徵君 慶延 3인을 배향하였다.

趙綱은 淸州의 在地士族으로서 明宗 43년(1568) 淸州에서 최초로 鄕約을 창설하였고, 향교에서 鄕飮禮를 거행하기도 한 것이다. 당시의 淸州牧使 李增榮이 부임하면서 백성들을 이끌고 갈 방안을 협의하여 마침내 향약을 창설하였으니, 후에 李珥의 西原鄕約은 이것을 중수한 것이라고 한다. 결국 최초로 향약의 창설을 발의하였고, 莘巷書院 건립을 주도하여 향촌에서의 영향력을 강화시킨 趙綱이 의병을 봉기했을 때 향민들이 호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趙綱은 壬辰年 7월 淸州 蓮亭里에서 의병을 봉기하여 松峴(솔고개)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아들 趙光翼과 門人 鄭若으로 하여금 竹山에서 승첩을 거두게 하였던 의병장이다.

 

趙綱의 선조는 조선 초기 趙仁沃을 전후하여 漢陽에 살았으나, 고조 仁村 趙銘에서부터 목천에 살게 되었다. 趙綱의 5대조 坡西 趙順生이 端宗 즉위 1년만인 1453년 首陽大君의 정권탈취 기도에 당시의 三相인 芝峯 黃甫仁 · 節齋 金宗瑞 · 愛日堂 鄭苯과 함께 절개를 지키며 固城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安平大君 일파로 몰려 賜死되었다. 이 때 고조 趙銘은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면서 사위 判書 黃尙文을 따라 木川 細城山 아래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趙銘이 목천에 정착한 이후 4대 동안 살다가, 趙綱의 父 承胤이 己卯士禍 이후 청주로 移居하게 되었다.

趙承胤이 청주 蓮亭里로 移居하게 되는 연유는 承胤의 외할아버지 副司猛 柳岸秀가 承胤의 어머니 柳氏에게 재산을 別給해준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 후 承胤의 父 璲가 孝友學行으로 復恩을 받아 자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趙綱은 16세 되던 중종 37년(1542) 당시 목천에 살던 安東金氏 參奉 允忠의 딸과 혼인하였다. 金允忠은 고려 忠惠王 때 上洛府院君에 봉해진 金永暾의 8세손으로, 趙銘이 정착했던 木川에 세거해온 士族이다. 趙綱이 태어날 때까지 4대의 선대가 목천에서 살았으므로 金允忠의 딸과 혼인할 수 있었고, 趙綱이 임란 때 기의하자 그의 妻男 金繼宗과 妻從姪 金希憲 · 金希式 등이 妹兄과 姑母夫를 도와 의병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생각된다.

趙綱은 자신이 사사했던 宋麟壽가 죽은 후 유교적 교화를 위해 스승을 尊崇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는 宣祖 3年(1570) 宋麟壽의 위판을 改題하고 서원을 건립할 것을 발의하여, 청주지역 사림들과 함께 상의하였다.

李楨·李增榮·趙憲·鄭澈 등 4인은 청주 출신은 아니지만 이정과 이증영은 청주목사를 지냈고, 나머지는 청주 인근 지역에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李增榮은 청주목사 재직시 청주의 士族 趙綱과 더불어 청주의 鄕約을 창설한 인물이다. 청주의 향약은 대개 栗谷 李珥가 宣祖 4年(1571) 청주목사에 부임한 후 西原鄕約을 만든 것이 최초인 것으로 일컬어져 왔다. 그러나 이보다 8년 앞선 明宗 19年(1564) 趙綱이 淸州牧使 李增榮과 導迪之方을 상의하면서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鄕約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후 李公遴이 향약을 정비하였으나 그가 조정으로 돌아가면서 중단되었다가, 李珥가 다시 실시하게 된 것이다.

趙憲은 원래 金浦에서 태어났으나 沃川으로 이사하였고, 또한 宣祖 15년(1582) 報恩縣監에 부임하였다. 趙憲이 청주와 가까운 보은과 옥천에 있으면서 청주 지역의 사림들과 어느 정도는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찍이 趙憲이 조정에서 備倭之策을 거론할 때 천거된 10여 명중 청주의 金時敏과 趙綱의 族弟인 趙熊이 칭송할 만한 사람으로 포함되어 있고, 趙憲이 옥천에서 머무는 동안 옥천의 향현사에서 함께 강학한 것으로 보아 조헌의 학문적 명성이 청주 지역에도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趙綱이 서원 창건에 함께 상의했던 인물은 西溪 李得胤과 卞景壽을 비롯하여 청주 지역의 장보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자료에서 앞의 4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청주에 거주한 인물이거나, 趙綱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인물이다. 이들이 함께 서원 건립에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李得胤은 益齋 李齊賢의 후손으로, 그의 선조는 曾祖 李公麟 때부터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에서 살았다. 李公麟은 死六臣의 한 사람이었던 朴彭年의 사위로서, 사육신이 피해를 당하자 이곳에 은거하게 된 것이다. 李公麟의 집은 8명의 아들을 두어 世稱 ‘팔별집’이라 일컬어졌다. 李得胤은 孤靑 徐起에게 수학하였고, 守菴 朴枝華에 易學을 師事한 후 대부분 청주에서 살았다. 당시 청주의 飛龍에 거주하던 進士 卞景壽는 卞景福의 兄이며, 世宗 때 卞孝文은 그들의 高祖이다.

韓日休는 中宗朝에 三陟都護府使를 역임한 韓琦의 둘째 아들로 회덕에서 中宗 37년(1542)에 태어났다. 한일휴는 태어난 곳은 회덕이지만 친족들이 청주에 세거해 왔고, 그가 청주의 검암서원에 배향된 것으로 보아 청주에서의 향현으로 서의 위치를 짐작케 한다. 임란에 韓日休가 義州 행재소에 가니 즉석에서 掌苑署別座를 제수받았다.

Ⅲ. 호서의병의 봉기


亂初에 일본군이 전개하였던 작전은 陸路로 선발대가 북상하고 점령지에는 선과 점으로 연결되는 각 거점을 중심으로 군사정보와 병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륙지방에 공급되는 병력과 군수품의 보급로로 西南海路를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상도 의령에서 봉기한 곽재우가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 등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은 후속부대의 진격을 지연․차단시켰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남해에서 적선을 격파함으로써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따라서 일본군은 평양까지 점령한 이후 더 이상 이전과 같이 활발히 진격하지 못하였고, 후방지역에서는 각 지역의 거점을 점령하고 거점의 주변지역을 약탈하여 필요한 군수품을 충당하는 정도의 소강상태에 있었다.

일본군이 북상한 세 갈래 중의 하나인 右道는 다시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金山(金泉)에서 추풍령을 넘어 永同 - 沃川 - 淸州로 연결되어 북상하는 경로이고, 또 하나는 茂朱 - 錦山 - 全州로 연결되는 경로로서 전주로 향하기도 하였고, 다시 옥천·영동과도 연결될 수 있는 경로였다. 따라서 淸州는 서울로 진격하는 중간 거점이면서 호서 右道를 넘볼 수 있는 교두보였다. 그리고 錦山은 일본군이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한 최대의 전방이었으며, 서울로 북상할 경우에는 우회로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호서우도와 호남은 전국이 일본군에게 유린된 상황에서도 조선측의 입장에서 유일하게 침입을 받지 않은 국가의 寶庫로 간주되었고, 일본측의 입장에서도 보급로가 차단된 상태에서 군량미를 충당할 수 있는 곳으로 小早川隆景에게 現物納稅를 징수하도록 분담되었다. 일본군의 小早川隆景과 安國寺惠瓊은 북상로 중 右道를 이용하여 湖西에 들어온 이후, 錦山에 주둔하면서 아직 진출하지 못했던 湖南을 넘보고 있었다. 따라서 임란 당시 금산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에서보다 격전이 많이 치뤄질 수 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정에서는 募兵勸獎敎書를 내렸고, 5월에는 소모의병을 위한 관리를 전국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사림은 尊王攘夷의 春秋精神을 체득하고 化家爲國의 義理思想으로 무장하여, 국가의 위기에 勤王的 忠義思想을 강하게 발휘할 수 있었다.


우리가 평소 배운 것이 무엇이며 읽고 논한 것이 무엇이냐. 신하가 忠에 죽고 자식이 孝에 죽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평소 배우고 논한 것이 과연 여기에 있다. 어찌 오늘에만 一介 半介의 死忠死孝者가 보이지 않으랴.


위의 의병을 촉구하는 글에서 擧義의 명분을 밝힘에 있어 忠君愛國이 백성의 의무임을 강조하면서 化家爲國의 儒敎的 倫理觀을 고양시키고 있다.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는 조정에서 조처를 취하기 전인 4월 22일 최초로 의병을 봉기하여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시작한 후 전국적인 의병의 봉기는 일본이 부산에 상륙한지 2개월 후인 임진년 6월에 이르러 전개되었다.

호서지역에서는 임란이 발발한 이후 癸巳年(1593) 11월까지 50餘陣의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들 호서지역에서 봉기했다고 하는 50餘陣의 義兵陣 중에서 활동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의병진은 대략 5~7그룹으로 파악되었다.

호서지역 최초의 의병은 5월 3일 趙憲에 의해 淸州에서 봉기되었다. 일본군은 이미 5월 2일 朱豊陣을 무너뜨리고 靑山을 거쳐 연속하여 報恩·懷仁·淸州·鎭川을 함락시키고, 鳥嶺을 넘어 左路로 북상하던 일본군과 竹山에서 합류하여 5월 3일 동대문으로 京城에 입성하였다. 그러므로 조헌이 최초로 의병을 봉기하였던 때는 일본군이 호서지역을 지나 北上한 다음날이었던 것이다. 召募使가 湖西에 도착했을 시기는 빨라도 5월초 이후일 것이므로, 조헌이 5월 3일에 起義한 것은 교서가 하달되기 이전으로, 자발적인 기병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建義大將 稱號, 年老로 실패
 


임란 이전에 조헌은 일본을 無道의 나라로 규정하고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왜군의 침입을 예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대비책과 충의를 권장하였다. 조헌이 임란을 예견했으면서도 일본군의 침입 후 20일이 지난 5월 3일에야 起義하게 된 까닭은 4월 20일 부인 辛氏의 장례를 간략하게 치르고 나서, 老母를 청주 선유동에 피난시키고 돌아오던 중 이미 일본군이 보은과 청주를 점령했기 때문에 지연된 것이었다. 여기에 임란 초기 대부분의 義兵將이 官軍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듯이 趙憲도 순찰사 尹先覺과의 갈등이 있었고, 趙憲이 청주에서의 지역적 기반이 미약했기 때문에 5월 3일의 1차 起兵은 실패하였고, 1차 기병에 참여했던 李逢과 李命百 등은 7월에 경상도 尙州에서 의병활동을 주도하였다.

조헌의 1차 봉기에 이어 永同에서 의병을 봉기하는 5월 13일에 쓴 通文이 전달되었다. 영동지역은 일본군이 북상하는 과정에 추풍령을 넘어 호서지역으로 들어오는 경계로서 일본군의 침략을 최초로 받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호서지역의 다른 지역보다 의병을 봉기한 시기도 빠른 편이었다. 그러나 앞의 通文을 작성한 자가 永同人으로만 되어 있을뿐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임란 때 영동지역의 대표적 의병장은 張智賢이다. 장지현은 宣祖 24年(1591)에 감찰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서 물러나 永同 梅川里에 隱居 중 임란이 일어나자, 從弟 張好賢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秋風嶺에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북상하는 일본군에 대항하다가 전사한 인물이다. 장지현이 의병을 봉기한 상황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朝廷에서 임진년 7월 25일 장지현의 義烈을 褒贈하였던 것으로 보아 임란 초기에 起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5월 13일에 작성되었던 永同人 通文은 장지현의 의병 봉기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조헌의 1차 기병이 실패한 후 그의 실질적인 기병은 1차 起兵인 5월 3일보다 1개월 후인 6월초의 2차 기병이며, 이 때에 報恩 車嶺을 방어하였다. 그러나 3차는 약 1,000여명을 모병하였으나 安世獻의 作奸으로 의병의 부모 처자를 가두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조헌의 討賊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은 4차 기병이다. 4차 기병은 7월 4일 공주에서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의병 1600여명을 모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4차 기병에서는 모병 지역의 범위도 공주목을 포함하여 홍주목까지 확대되어 호서지역 대부분의 의병들은 이때부터 조헌을 따르게 되었다.

조헌이 의병을 봉기할 때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최초의 의승군으로 靈圭가 봉기하였다. 영규가 의병을 일으킨 목적은 爲國에 있었다. 그가 미천한 僧侶의 신분으로 의병을 일으키면서 “한 그릇의 밥도 다 나라의 은혜이다”라고 외친 것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靈圭大師는 西山大師 休靜의 제자로서 亂이 일어나기 이전에 亂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公州의 靑蓮庵에서 禪杖을 가지고 演武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왜구의 침입이 있다는 소식을 처음 듣고 여러 스님들과 (岬寺)절문 앞에 모여 도적을 칠 것을 의논하고 장차 出征할 것을 약속하였다. 靈圭가 公州 靑蓮庵에서 봉기할 때 “우리들의 起義는 朝廷의 명령이 아니니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외쳤다. 영규가 승군을 봉기한 시기는 남방 지역에서 의병이 활발히 전개되던 6월 경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申欽이 영규의 起義를 南方의 初期 의병장들과 함께 거론한 것으로 보아 영규의 起義도 이와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趙憲이 4차 기병할 때 淸州 지역에서는 前察訪 朴春茂와 前縣監 趙綱이 각각 起義하였다. 청주는 일본군이 처음 북상할 때 지났던 지역이고, 일본군이 서울에 들어간 이후 8월 1일 청주성 전투에서 격퇴될 때까지 계속 군대를 주둔시킨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朴春茂와 趙綱이 기의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다만 이들의 檄文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박춘무는 일본이 침입하여 입은 피해가 4개월째 지속되던 7월중에 격문을 작성하였다. 박춘무가 8월 1일 조헌 의병진과 연합하여 청주성 탈환의 공을 세웠으므로, 늦어도 7월중에는 의병을 봉기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趙綱도 박춘무와 비슷한 시기인 7월 청주 蓮亭里에서 봉기하여 仁山(懷仁)과 三山(報恩)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松峴(솔고개)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 후 조헌과 함께 2차 모병에 참여했다가 금산성 전투에서 살아남은 조헌의 門人들이 다시 擧義를 모색하였다. 10월 20일 沃川의 雙峰書院을 義兵都廳으로 하고 李忠範을 義兵將으로 350명의 精軍을 분속하여 편성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옥천지역에 이미 士林의 세력기반으로 書院이 건립되어 있었고, 서원은 실제로 향촌사회에서 사림의 學緣·血緣·地緣을 바탕으로 의병을 구성하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임진년 10월 25일에는 前右議政 沈守慶이 牙山에서 기의하여, 조정으로부터 의병의 통수권을 부여받게 되었던 것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임란 때 호서지역의 의병은 일본군이 이 지역에 침입하기 시작한 5월 초부터 의병의 성격이 변질되는 10월까지 각지에서 봉기되었고, 그 절정은 조헌의 4차 기병하고 박춘무, 조강이 기병했던 7월이었다. 일본군이 점령했던 지역의 점령 시기와 피해를 감안할 때, 호서지역의 의병 봉기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일본의 침략에 보다 신속하게 대응한 조치였다. 또한 의병의 蜂起地도 일본군이 직접 점령했던 永同 · 沃川 · 淸州 지역에서 의병 봉기의 빈도가 많았고 참여자도 다수였으며, 일본군의 직접적인 침략을 받지 않은 湖右 지역에서도 적극적인 의병 참여가 있었다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Ⅲ. 호서의병의 활약

1. 秋風嶺 戰鬪

추풍령 전투는 5월 중순 黑田長政과 毛利가 이끄는 일본군에 대항하여 義兵將 張智賢과 黃澗縣監 鄭善復이 장렬한 최후를 마친 싸움이었다. 장지현은 경상좌도병마사 장필무의 아들로 永同 梅川里에서 태어났다. 그는 선조 23년(1590) 함경도병마사 申砬의 副將이 되어 변방의 토벌에 공을 세우고 平難原從功臣錄에 이름을 올렸다. 이듬해인 1591년 사헌부 감찰에 올랐으나, 당시 치열하게 계속되는 정쟁을 피해 낙향하였다.

5만여의 왜군이 추풍령을 향해서 밀려들었으나 장지현이 이끄는 의병은 수적으로나 군장비로나 열세였다. 전략적으로 가장 유리한 방어진으로 추풍령에서 당마루 양 계곡에 전초진을 치고 제2 방어선을 五龍洞에 배수진을 쳤다. 그리고 관군 조방장 李世瀕의 군대는 오룡동에, 훈련봉사 朴儀의 군대는 괘방령에 복병하였다.

먼저 黑田長政이 이끄는 2만여 명의 왜군이 추풍령을 침공하여 왔다. 관군은 싸우다 말고 모두 달아났고, 장지현이 이끄는 의병만이 필사적으로 싸워 왜군을 김천 방면으로 격퇴시키고 다음 공격에 대비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튿날 새벽에 왜군이 기습하여 공격하였다. 관군이 없이 의병만으로 피비린내 나는 육박전이 벌어졌는데, 장지현은 적을 향하여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졌다. 칼을 뽑아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몸을 날려 적 수십명을 베었으나 칼 또한 부러지고 말았다. 함께 종군했던 從弟 張好賢이 사태가 지극히 위급함을 보고 소매sd를 끌며 잠깐 피신하였다가 싸울 것을 권유하였으나, 장지현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훈계의 말씀을 생각지 못하고 그게 무슨 소리인고. 항상 ‘忠義報國 淸白傳家’ 여덟 글자의 家訓을 잊었단 말이냐. 적을 쳐서 나라에 보답을 못할지언정 어찌 비겁하게 살기를 바라며 아버님의 가르치심을 저버릴 수 있는가?”라고 호통치며, 부러진 칼을 잡고 언덕 위에 올라 종제와 더불어 北向四拜한 다음 敵鋒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2. 淸州城 戰鬪

淸州城 戰鬪는 임진년 8월 1일 義兵將 趙憲, 朴春茂와 僧將 靈圭, 防禦使 李沃 등이 청주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5번대 蜂須賀家政이 이끌던 7천 병력중의 일부를 축출하고 청주성을 탈환한 격전이었다.

일본군은 이미 5월 2일 永同에서 淸州를 경유하여 서울로 진격한 후, 후방지역에 주둔군을 배치하고 중간 거점으로 삼았다. 청주는 일본군이 북상한 경로상에 있던 거점 중의 한 곳이었고, 일본군이 湖西 右道와 호남으로 진출할 경우 橋頭堡로 삼을 수 있는 要衝地였다. 따라서 일본군은 淸州와 忠州에 군사를 주둔시켰는데, 청주에는 蜂須賀家政이 이끄는 7천 병력의 일부가방어사 이옥과 兵使 申翌을 도망치게 한 뒤 3개월 동안 주둔하고 있었다.

임란이 일어나던 당시에 조헌은 吉州에서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옥천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선조가 西幸하였다는 말을 듣고 청주에서 격문을 보내고 李瑀 · 李逢 · 金慶伯 등을 비롯한 武人 · 士人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는데 당시에는 昇平이 너무 오랜동안 계속되어 士民들은 兵馬를 모르고 모두 唐慌失措하여 도저히 수습할 수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옥천으로 돌아와 그의 門人 金節 · 金籥 · 朴忠儉 등과 같이 향병 수백명을 모집하여 보은군 방면으로 나가다가 車嶺에서 적과 만나게 되었다. 조헌은 여기에서 重圍에 빠져 위태로웠으나 門徒들의 力戰으로 겨우 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趙憲은 다시 충청도 서남지역에서 모병한 결과 前參奉 李光輪, 士人 張德盖, 申蘭秀, 高擎宇, 盧應晫 이하 1,600여명을 얻어 旌旗를 세우고 부서를 짜서 溫陽郡, 定山縣, 洪州, 懷德縣 등 여러 곳을 巡撫한 다음, 僧軍將 靈圭 이하 천여명과 합동하여 청주성의 西門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조헌이 湖西右道에서 의병을 모집하던 때, 청주 江西에서는 前察訪 朴春茂가 從事官 李時發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청주성의 南門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防禦使 李沃은 燕岐縣 동쪽에 진을 치고 있다가 7월 하순에 청주 쪽으로 진출하였으며, 僧將 靈圭는 청주성에서 15리 되는 安心寺에 집결하였다가 다시 西門外에 있는 氷庫峴에 진출하여 조헌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8월 1일에 의병군은 淸州城 서문을 향하여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武人 출신은 갑옷으로, 士人 출신은 각양각색의 무장으로 僧兵들은 낫이나 큰 도끼, 또는 곤장을 들기도 하였는데, 비록 훈련은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見賊必滅의 비장한 각오가 眉間에 서리고 서로 뒤질세라 주장 조헌의 앞을 勇進하는 것이었다.

이 때 城中의 적은 먼저 기선을 제압하려고 수십명의 一團이 성밖으로 뛰어나와 鳥銃을 쏘면서 덤비므로 공격군은 地形과 樹林을 이용하면서 활을 쏠 수 있는 곳까지 잠복하여 나갔다가 일시에 包圍隊形으로 적을 에워싸고 집중하여 활을 쏘니, 半裸體로 칼을 휘두르던 일본군은 비명을 올리면서 쓰러졌다. 그래서 공격군의 일부 용사들은 조총수의 총을 빼앗아 머리를 내려치기도 하고, 일부 장정들은 棍杖으로 일본군의 칼을 공중에 날리기도 하였으며, 또 어떤 승병은 도끼로 갑옷 입은 적장을 장작패듯 하니 적은 많은 시체와 부상자, 그리고 무기 그리고 자재를 버리고 성안으로 도망하여 들어갔다.

이날은 날씨가 몹씨도 무더웠는데 어떤 장정은 반나체로 적을 쫓아가니 조헌이 큰소리로 “가죽 갑옷 위에 옷을 입어라”하니 의병들이 일제히 웃으면서 “소가죽” 또는 “말가죽”이라 외쳐서 처절한 전쟁터에 한동안 웃음꽃이 피었다. 조헌은 선두에 서서 몸소 矢石을 헤치며 종일토록 독전하여 성문 밖에 다다랐는데, 미리 마련하였던 사다리와 밧줄을 이용하여 城壁을 기어오르게 하고 활이 없는 사람은 돌까지 던지면서 肉薄攻擊을 되풀이 하였다. 이때 일부 군사들은 성의 동남북 삼면에서 함성을 울리면서 적을 견제하고 西門에 주력을 투입하여 급히 공격하니 적은 병력을 사방에 분산 사용케 되므로 커다란 저항을 못하는 사이에 드디어 일부 壯士들은 성벽을 올라 가는데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장차 일제히 성안에 뛰어 들려고 하는 차에 별안간 하늘이 암흑 세계를 이루고 소낙비가 서북쪽으로부터 폭류같이 쏟아져 군사들이 모두 비에 젖고 성벽에서 미끄러지면서 추위에 떨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雷聲마저 요란하여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조헌이 크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古人이 이르기를 成敗는 在天이라 한 것이 과연 진실이로다”하고 드디어 金(꽹과리)을 울려 陣을 물리게 한 다음 雨中을 뚫고 서쪽 산 상봉에 올라가 성중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그러나 적은 다시 출격을 하지 못할뿐더러 아군 군사가 성벽 위에 세워 놓은 旗幟를 뽑아 버리지도 않은 채로 날이 저물어갔는데 이날 밤에 한 여인이 성안에서 뛰쳐나와 하는 말이 “적들은 우리 쪽의 義兵과 僧兵들을 보고 軍容이 정연한데 놀랬사오며, 이 군사들은 죽음을 무섭다 하지 않고 서로 다투어서 진격하므로 기가 꺽이어 같이 싸울 도리가 없느니라 하면서 횃불을 놓고 기치를 세웠사옵니다. 또 疑兵을 만들어 여러 곳에 배치한 다음 시체를 모아 불태우고 있사오니 곧 도망칠 듯 하오이다.”하는 것이었다.

조헌은 이것이 혹은 賊의 謀略이 아닐까 의심하고 곧 斥候將을 보내어 성중 동향을 살피게 하니 과연 그 여인의 말한 것과 같은지라 드디어 날이 밝기 전에 다시 진격을 시작하여 無血로 청주성을 수복하게 되었다.

조헌은 성을 수복하자 곧 防禦使 李沃을 불러 성안에 있는 米粟 수만석을 풀어서 난민에게 주고 牛馬 수백두를 여러 동리에 나누어 주어 耕作에 힘쓰면서 治安을 유지토록 하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李沃은 관군의 전공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여 이 말을 듣지 않고 반대하기를 “이미 巡察使와 상의한 바가 있는데 적이 재차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겠소이다”하고 성안에 있던 양곡을 모조리 불태우고 그냥 성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官軍으로 청주성 전투에 참여한 防禦使 李沃과 從事官 崔沂는 일본군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북문을 맡기로 전략이 수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李沃과 崔沂는 청주성 전투를 감행하기 이전에, 충청감사 尹先覺을 찾아가 西幸 중인 선조를 隨行할 것을 요청한 바 있었으나 감사가 꾸짖고 중지토록 하였다. 이리하여 성중에는 몇 斗의 쌀밖에 없게 되니 趙憲軍은 하는 수 없이 군을 해산시키고 각자 집에 돌아가 잠시 쉬면서 사기를 회복케 한 뒤에 다시 모여 西上勤王하기로 하였다.

청주성 전투에서 義兵將 趙憲과 朴春茂, 義僧將 靈圭, 防禦使 李沃의 관군이 각각 성의 3門을 공격하였지만, 결국 이옥의 관군이 공격하기로 약속되었던 북문이 뚫리면서 일본군은 북문을 통하여 죽산 방면으로 도망하였다. 이것은 의병에 비해 관군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청주성 전투의 승리는 의병과 관군이 연합작전을 수행하였지만, 그 주도적 역할은 의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청주성을 탈환함으로써 일본군이 의도했던 호서우도와 호남 진출이 제지될 수 있었다.

3. 금산 연곤평전투

금산 연곤평전투는 8월 17일부터 18일까지 양일간에 걸쳐 금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小早川隆景과 安國寺惠瓊 등의 일본군 1만여명을 조헌 의병과 영규의 승병 1,300여명이 공격하여 패전했던 전투였다.

7월 31일 安國寺惠瓊은 제1군을 지휘하여 龍潭, 鎭安을 거쳐 熊峙를 넘어 가려다 도절제사 權慄이 통합지휘하는 羅州判官 李福男·金堤郡守 鄭湛·海南縣監 邊應井·義兵將 黃璞·從事官 李葑의 銳鋒에 크게 패하였고, 小早川隆景도 安國寺惠瓊이 熊峙에서 패하던 같은 날에 주력을 이끌고 全州로 들어가려다가 梨峙에서 權慄 지휘하의 同福縣監 黃進 등에게 격퇴되었다. 그러나 전라도 진출을 기도하면서 금산성에 머물고 있던 小早川隆景은 錦山 와은평전투에서 招討使 高敬命 義兵이 감행했던 공격을 敗死시킨 이후 더욱 포악하게 부근의 민가를 약탈하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高敬命의 의병이 7월 10일 錦山城 공격에 실패한 후 적극적으로 금산성을 공략할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의병장 趙憲이 錦山城을 공략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조헌은 5월 초 충청도 沃川에서 의병을 봉기하여 義僧將 靈圭와 함께 8월 2일 청주성 탈환한 후 勤王을 위해 북상하려고 溫陽에 이르렀다. 그러나 순찰사 尹先覺은 조헌이 북상하여 行在所에서 자신의 우유부단했던 사실을 아뢸까 두려워, 조헌의 막하인 張德盖를 불러 자신과의 불편했던 관계를 후회한다고 하면서 兩湖를 노리는 금산의 적을 친 후에 북상하여도 늦지 않음을 전달하게 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순찰사는 자신의 요청에 동의하여 公州로 돌아간 조헌과 의견을 합치시킬 수가 없었다. 윤선각은 다만 조헌이 행재소에 가는 것을 막으려고만 하였지 실제로 금산의 적을 치는데 협력할 의도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순찰사가 다수의 壯士들을 감금하였으므로 조헌의 휘하에는 7백여명의 의병만이 남게 되었다.

8월 15일 조헌은 儒城에서 영규의 승병과 합류하여 금산성을 공격하기로 약속하고, 전라도 순찰사 權慄에게 8월 17일에 금산성을 공격하자고 제의하였다. 권율은 서면으로 날짜를 연기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조헌은 권율의 회신을 기다리지 않고, 16일 1,300여 명을 이끌고 유성을 출발하여 금산으로 향하였다. 別將 李山謙(李之菡의 子)이 금산의 일본군은 수만 여명에 이르는 精銳部隊로 마땅히 軍勢를 살펴 경계할 것을 요청하였다. 조헌은 눈물을 흘리면서 “君父가 어디에 계신데 감히 利鈍을 말하는가? 君主가 辱을 당하면 臣下는 죽는 것이니, 오직 한번 죽음이 있음을 알 뿐이라”라고 하였다.

17일, 금산성 밖 10리 지점인 延昆坪에 도착하여 權慄軍을 기다리던 조헌은 그날 저녁까지 권율군이 도착하지 않자, 다음 날 단독으로 공격할 결심을 하였다. 이 때 權慄은 全羅道 軍이 미처 출전준비를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금산성 공격을 연기하자는 회답을 보냈는데, 조헌은 그날까지 회답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밤을 새워 공격 준비를 한 조헌군은 18일 아침에 병력을 출동시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전날 밤에 금산성에 있던 小早川隆景은 趙憲 義兵部隊의 병력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고 야음을 틈타 의병의 배후에 일부 병력을 투입시켜 놓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채 城을 향해 진격하고 있을 때, 왜군이 성에서 나와 선제공격을 가해왔다. 동시에 전날 밤 의병의 背後에 투입되었던 왜군이 의병의 배후를 공격해 왔다.

이렇게 하여 적에 의해 포위상태에 빠진 趙憲軍은 무기면에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奮戰하였다. 조헌은 부하 군사들에게 “오늘은 다만 한번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마땅히 ‘義’字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고 명령하여 모든 장사들이 다시 力戰敢鬪를 맹서하고 必死無退를 결의하여 싸웠다. 마침내 적은 일제히 공격하여 장막으로 돌입하였다. 이 때 偏裨 몇 사람이 조헌에게 탈출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웃으며 말안장을 풀면서 “여기가 나의 殉節地이다. 丈夫는 죽음이 있을 뿐 亂에 임해서 구차하게 모면할 수 없다”라 하고, 북을 울리며 싸움을 독려하였다. 군사들이 죽기를 작정하고 맨주먹으로 싸우면서도 隊列을 이탈하지 않고, 요행으로 죽음을 모면한 사람이 없었다. 의병장 조헌과 승장 영규를 비롯한 700여 명이 용감한 血戰을 거듭하였으나 延昆坪 벌판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비록 衆寡不敵이라 全軍이 모두 죽었으나 賊도 또한 죽은 자가 많아서 氣勢가 꺽이어, 남은 兵卒들을 거두어서 本陣으로 돌아간 뒤 3일 동안이나 시체를 운반하였으나 다 거두지 못하고 불태웠다.

이상에서 살펴본 제2차 금산성 전투는 조헌과 영규가 이끌었던 의병이 금산에 주둔하면서 호남을 넘보던 소조천융경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가, 의병은 全軍이 戰死하고 일본군은 錦山에서 星州 방면으로 쫒겨간 싸움이었다.

이 전투에서 의병은 불리한 입장에서 開戰하여 결국 전군이 전사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데에는 몇 가지 원인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의병과 관군의 갈등이다. 임란이 시작된 이후 各道의 監司들은 일본군의 침입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싸운 경우가 거의 없었고, 오히려 의병장이 봉기했을 때 軍事 指揮權 문제와 功名心으로 의병장을 괴롭혔다. 의병장 조헌과의 관계에서 순찰사 윤선각이 책임져야 했던 문제는 應援軍의 編成 急派이며, 軍糧의 補給支援이었다. 그러나 윤선각은 조헌의 의병 모집을 방해하였던 것이다. 한편, 조헌과 전라도 순찰사 권율과의 관계에서는 조헌의 과격한 성격을 들 수 있다. 조헌이 亂前에 일본사신을 斬할 것을 상소하였던 것은 당시의 朝廷의 文弱과 國運의 危殆로움에 대한 義奮心의 발로였으며, 청주성을 수복한 후 금산에서 7백의사와 함께 장렬하게 순절한 것도 忠義精神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조헌이 권율에게 8월 17일에 금산을 공격할 것을 일방적으로 통보한 후,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금산에 진격한 것은 성급한 처사였다고 할 수 있다. 순찰사 권율이 주도하던 전라도는 일본군이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넘보던 지역으로, 자신이 책임을 맡은 지역을 방어하려는 권율이 이치대첩에서의 적극성으로 볼 때 제2차 금산성 전투를 회피하려고 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둘째는 의병의 戰爭에 대한 認識不足이다. 조헌을 중심으로 한 의병주도층은 性理學에 침잠했던 兩班儒生이었고, 이들을 추종했던 의병은 農民 또는 賤民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武人이나 武藝에 능했던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조선 건국 이후 2백년간 지속된 평화와 호서가 한반도의 중간지역이라는 지리적 조건은 이들로 하여금 다른 지역에 상대적으로 戰爭의 經驗을 덜 갖게 하는 요인이었다. 의병장이 성리학의 節義精神으로 무장되었고 의병들이 의병장을 중심으로 學緣·血緣·地緣 등으로 연결된 것은 鄕村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주저하지 않고 격전지에 나아가게 하였으나, 정작 이들에 있어서 전투경험이나 전투준비는 전혀 없는 상태였다. 오로지 의병이 일본군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은 의리정신 뿐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자국에서 戰國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많은 전쟁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무기면에서도 당시의 신무기인 鳥銃을 소지하고 있었다.

제2차 금산성 전투에서는 의병들이 전투 개시 이전 전투 경험이나 준비가 부족했던 것과 함께 전투 수행과정에서 정보와 전술상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조헌이 금산으로 가기 전에 권율에게 협공을 제의한 후 권율의 회답을 받지 못하고 금산으로 가서, 금산성 10리 밖에서 진을 정비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접전이 시작되었다. 조헌과 권율과의 유기적인 협력관계가 되지 못하였음은 앞에서 지적한 바이지만, 여기서는 원활한 정보연락체계의 필요성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조헌이 금산에 도착한 17일 야간 경계가 소홀할 때, 일본군은 夜陰을 이용해 군사를 의병의 배후에 배치시켜 놓고 공세를 개시하여 협공하였던 것이다. 즉 조헌의 의병은 권율과의 협공 기도가 실패하였고, 반대로 일본군은 군사를 나누어 협공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의병의 전군이 전사하였기 때문에 외형상 패배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의병의 일방적인 敗戰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선 의병이 일본군보다 열악한 전투조건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의도했던 湖南 進出을 抯止하였고, 오히려 호남 진출의 橋頭堡였던 錦山과 茂朱로부터 일본군을 축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의병이 일본군보다 유일하게 우위에 있었던 의리정신 때문이었다. 제2차 금산성 전투 이후 湖西와 湖南은 일본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게 되었으며, 나아가서는 나라를 恢復하는 기틀이 되었던 것이다.

4. 진천전투

진천전투는 청주성전투 이후 8월 말경에 박춘무가 진천에서 일본군을 퇴각시킨 싸움이다. 박춘무의 진천전투에 대해서는 박춘무 의병진이 독자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으므로, 그의 문집『花遷堂集』이외에는 현재로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실제로도 진천지역의 古邑誌 및 현재의 市郡誌 등에 임란 당시 활동한 의병장으로 金孝騫, 李時發, 林秀荃, 林秀蓂, 林賢 兄弟父子 등이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박춘무 의병진은 청주성 수복 직후 진천지역으로 진군하여 왜군과 열흘 정도 대치하다가 한쪽의 포위를 풀어 적의 퇴로를 열어준 다음 이를 통해 퇴각하는 적의 후미를 공격하여 패퇴시키는 방식, 즉 退路誘導 및 後方攻擊의 작전으로 다시 한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전면적 공략의 방법을 택하지 못하고 퇴로유도의 작전을 구사한 까닭은 절대적인 수적 열세에 놓여 있던 상황에서 지원병을 요청하는 격문을 주변의 군현에 발송하였으나, 순찰사 윤선각의 방해책동으로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전투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Ⅳ. 호서의병의 성격


호서에 일본군이 들어온 시기와 의병 봉기 시기에 대하여 다른 지역에 일본군이 침입한 시기와 의병 봉기 시기를 보면, 호서의 의병 봉기는 비교적 빠른 편이었다. 일본군이 호서의 경내에 침입한지 단 하루만에 조헌이 기의했기 때문에 일본군 후속부대의 북상을 곧바로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영규가 이끌었던 의승군도 타지역의 의승군에 비해 가장 빠른 시기인 6월에 봉기하였다. 예컨대 다른 지역에서 의승군을 봉기한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조정에서 승통을 설치하고 묘향산에 있던 휴정을 부른 7월 이후에 승군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는 것 뿐이다.

호서의병은 관군과의 불화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봉기하였다. 관군과 의병과의 작전상의 차이는, 관군은 적극적인 공격전이 아니라 방어적인 작전을 수행하였고, 이에 비해 의병은 일본군의 주둔지를 직접 공격하는 작전이 주로 나타났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도 의병과 관군과의 관계는 갈등관계가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전란 상황에서 관군으로서의 임무인 국가방위의 작전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功名心에 의한 猜忌·嫉妬가 더 큰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호서의병의 경우에는 관군과 협력하려는 면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호서의병에 있어서 그 경향이 뚜렷했다.

호서의병은 다른 지역의 의병들과 마찬가지로 명분상으로는 勤王을 표방했으나, 실제 활동에서 향촌수호적 활동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일본군의 진로를 저지·방해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의병들이 순절함으로써 향촌수호 활동에 그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호서의병의 대표적인 의병장은 趙憲이었다. 그러나 趙憲이 호서지역에서 의병을 봉기하고 대규모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在地的 基盤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다. 조헌은 원래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성년이 되어서야 沃川地域에 정착하게 되었다. 조헌이 호서에서 의병을 봉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外官職에 봉직하면서 교육분야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그로 인해 형성된 學緣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헌을 제외한 호서의 다른 의병장은 재지적 기반이 강하게 작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의병을 봉기하고 의병활동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병 모집의 문제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곧 재정지원의 문제였다. 조헌은 호서에서 토착적 기반이 미약하였지만, 이 문제는 그의 문인들의 토착적 기반에 의해 해결하였다. 즉 옥천지역을 비롯해서 공주지역의 사족들이 향촌에서의 지배강화를 위해 亂前부터 전개하였던 재지적 활동은 각자의 출신지에서 의병을 봉기하여 주도하는데 큰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의병운동을 전개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은 출신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혈연관계이다. 옥천이나 보은, 공주 등지의 의병 주도층은 한 가문에서 父子, 兄弟, 叔姪, 사위, 처남 등으로 관련된 의병들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이 같은 마을에 거주하면서 공동체를 형성해오고 있었고, 亂이 발발했을 때에는 공동 대응해서 향촌을 수호하려고 일어선 사람들이었다.

마지막으로 호서의병은 독자적인 의병활동보다는 다른 의병진이나 의승군, 또는 관군과의 연합작전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비록 연합작전을 수행할 때 관군의 지원을 크게 받은 바는 없으나, 연합을 통해서 전력을 극대화하려고 했던 점이 주목된다.

 

 


 

 

 

 


 

 

 

 

 

 

 

 

 

 

 

출처 :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글쓴이 : 마인부우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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