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스크랩] 중부지역(서울․경기도․강원도) 임진란 의병활동에 관한 연구

구름위 2012. 10. 7.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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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 海 恩(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1. 머리말

2. 임진왜란초기 경기의 적침 상황

3. 경기 의병의 실태

4. 경기 의병의 특징

1) 의병의 출신성분 2) 의병의 소속처

3) 의병의 활동 시기

5. 맺음말

1. 머리말

지금까지 임진왜란시기 의병에 관한 연구는 특정지역 또는 의병장 중심으로 지역이나 의병부대 단위로 활발하게 이루어져왔다. 하지만 경기 의병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저조한 편이다. 이미 경상도와 전라도 의병에 대해서는 상호 비교 연구가 있을 만큼 큰 진척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다소 의아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나마 양주에서 활약한 고언백을 비롯해 변응성, 김천일을 중심으로 경기 의병의 활동을 기초적으로 검토한 논고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초기 경기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를 정리한『경기도사(京畿道史)-제5권 조선후기』가 있어 경기의 적침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이 밖에『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경기 의병으로 홍계남과 우성전을 살짝 언급하는 정도이다.

이처럼 경기 의병에 관한 연구가 부진한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경기 의병의 존재가 임진왜란의 전황을 바꿔놓은 데에 큰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또 김천일처럼 경기에서 활약한 의병장이 경기의 토착민이 아니라는 사실도 경기 의병을 연구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연구가 저조한 데에는 경기 지역의 학맥이나 사족 세력과 연관이 크다고 보여진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영남 의병은 남명학파가 의병 결집의 구심점이 되었고, 호남에서는 이항․기대승․이이 등 서인계 기호학파 문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므로 경상도 의병에 관한 연구는 의병 활동 못지않게 지역의 인물이나 학통에 대한 연구와 맞닿아 있으며, 오늘날 영남과 호남의 학문적 연원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 이에 비해 경기의 경우 학통의 중심에 서있거나 사론(士論)을 이끈 비중 있는 인물이 모호한 편이며 관련 연구도 부진한 실정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경기 의병에 관한 연구도 지지부진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다고 판단된다.

마찬가지로 서울 의병도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성의 경우 비변사에서 선조에게 “도성 백성은 한 사람도 창의한 자가 없었는데, 김향린 등이 이번에 무기를 바쳐왔으니 가상한 일입니다.”고 보고했듯이 의병 활동이 뚜렷하지 않았다. 1592년 5월 3일에 일본군이 도성을 점령한 이후 이듬해인 1593년 10월 1일 정릉동 행궁으로 되돌아오기까지 1년 5개월 동안 한성은 일본군이 끊임없이 출몰하던 지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창의가 사실상 가능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한성민들은 한성을 둘러싼 경기 지역의 의병 부대나 관군으로 지원해 활동을 벌였다. 그러므로 경기 의병에 관한 자료에는 한성 의병에 대한 이야기도 부분적으로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발표문은 중부지역 가운데 경기 의병에 대한 기초적인 검토이다. 각종 자료에 나타난 경기 의병의 존재를 찾아내어 이들의 출신성분과 활동 지역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경기에서 활약한 의병들의 특징에 접근하기 위해 영․호남의 의병과 어떤 차별성이 있었는지도 관심을 가져보았다.

하삼도의 의병 활동은 임진왜란 초기 1년여 동안 가장 활발했으며 1593년 1월 제2차 평양성 전투 승리 이후 하락세였다. 의병장들은 군공으로 관료가 되었고 의병 통제책에 따라 군수품 수송부대인 양향군(糧餉軍)으로 바뀌어갔다. 하지만 경기는 이와 다소 달랐던 것 같다. 경기가 한양의 외곽이자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경기 의병은 근왕(勤王)과 도성 회복을 위해 관군과 연계하여 1593년 1월 이후에도 계속 활동한 정황이 포착된다.

이 발표는 이 점에 주목하여 당시 한양 및 경기의 상황이 경기 의병의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경기 의병에 대한 특징을 파악하고 나아가 임진왜란 의병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였다.

2. 임진왜란초기 경기의 적침 상황

1592년 4월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에 상륙한 날은 14일 아침이었다. 해안에 상륙한 일본군이 한성을 점령한 날은 5월 3일이었다. 전쟁을 시작한 지 20일만이었다. 부산 앞바다에 상륙한 일본군은 세 길로 나누어 북상하였다. 중로(中路)는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선산, 상주를 거쳐 조령을 향하였다. 동로(東路)는 장기, 울산, 경주, 군위, 용궁을 거쳐 조령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서로(西路)는 김해, 성주, 무례, 지례, 김산을 거쳐 추풍령으로 향하였다.

4월 20일 조선 정부는 전쟁을 총괄지휘하는 도체찰사에 유성룡을, 부사에 김응남을 임명하고 삼도도순찰사에 신립을 임명하였다. 4월 26일 신립은 한성 방어를 위해 도성에서 모집한 군사를 이끌고 충주에 도착하였다. 신립 군의 규모는 약 8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신립은 탄금대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다가 점차 전세가 기울자 남한강에 투신해 자결하였고 순변사 이일은 패전 보고를 하고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신립이 이끄는 군대가 충주에서 패하자 일본군은 충주에서 서울 진공 계획을 세웠다. 고니시[小西行長] 군은 여주-양평을 경유하여 동대문으로, 가토[加藤淸正] 군은 죽산-용인을 거쳐 남대문 방면으로 진공하기로 결정하였다. 30일에 고니시 군과 가토오 군은 함께 충주를 출발해 불과 4일 만에 서울로 점령하였다. 따라서 충주에서 한성 사이에 놓인 경기는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충청도․경상도로 통하는 길목인 한강이남 지역의 피해가 컸다.

그러면 경기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경기의 상황을 세밀하게 보기 위해 먼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경기에 파견된 수령의 규모부터 알아보도록 하겠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경기에 파견된 수령은 총 37인으로 목사 4인, 도호부사 7인, 군수 7인, 현령 5인, 현감 14인이었다. 관찰사는 1인이었으나, 1592년 12월부터 경기 좌감사(京畿左監司)와 경기 우감사를 각각 임명하였다. 선조가 “당초 좌·우 감사를 나누어 둔 것은 왜적이 가득 차서 소식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한 것이다.”고 말했듯이 행정 및 군정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한 조치였다.

<표1> 『경국대전』에 나타난 경기 수령의 현황

구분

수령 파견 지역

목사

광주, 여주, 파주, 양주

4

도호부사

수원, 강화, 부평, 남양, 이천, 인천, 장단

7

군수

양근, 풍덕, 안산, 삭녕, 안성, 마전, 고양

7

현령

용인, 진위, 영평, 양천, 김포

5

현감

지평, 포천, 적성, 과천, 금천, 교동, 통진, 교하, 연천, 음죽, 양성, 양지, 가평, 죽산

14

37

1592년 4월 28일 선조는 일본군이 경기에 다가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조는 4월 30일에 도성을 떠났고, 이튿날인 5월 1일에 일본군은 경기에 들어왔다. 당시 상황을 전라도병마절도사 이광하 막하에서 활약하던 조경남(趙慶南)은 “흉악한 왜적이 경기에 가득 들어와 한강 이남이 연기와 화염으로 하늘이 자욱하고 포성이 땅을 뒤흔드니 용인ㆍ수원ㆍ광주 등지가 깡그리 불타버리다.”고 기록하였다. 경기를 점령한 일본군은 경기 도내와 강원도에 글을 보내 임금이 이미 도망갔고 명()도 일본에 함락되었으니 조선인들은 일본에 항복하고 복종하라고 협박하였다. 이처럼 전황이 악화되자 “경기 사람들은 다 강화ㆍ아산 등지로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 경기의 수비 상황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1592년 4월 30일 대가가 몽진을 하기 위해 인정전에 나올 때 경기 관찰사 권징(權徵)은 “무릎을 끼고 앉아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할 정도로 무방비 상태였다. 당시 경기감영은 서대문 밖에 자리하였는데 선조는 권징에게 왜적의 임진강 도하를 저지하는 방책을 강구하도록 명하였으나 경기관찰사의 힘만으로서 역부족이었다.

경기 도내의 수령들이나 군사지휘관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경기 수령들의 행적에 대해 단편적인 기록을 전해주는데 도망친 기록이 대부분이다. 양근 군수 김암(金巖)은 적변이 처음 일어났을 때 소문만 듣고 지레 달아나면서 관아의 곡식창고를 불사르고 다른 곳으로 도망쳤으며, 부평 부사 남유(南瑜)는 고을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마전 군수 박치홍도 도망갔다가 감사의 복귀 명령을 받고 3개월 보름 만에 뒤늦게 복귀하였다. 왜적이 가평에 들어왔을 때 병마절도사 조경 등도 먼저 도망치는 바람에 가평 백성 모두 적의 칼날에 함몰시켰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심지어 1593년 3월까지 조정에서는 전() 파주목사 박기백과 전 경기도사 정엽의 행방조차 파악하지 못하였다.

한편, 경기의 적침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는 자료가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1593년 6월에 명에서 조선의 피해 상황을 알려달라고 요청하자 조선의 조정에서 전국의 피해 지역을 집계해서 보냈다. 이 가운데 경기의 상황을 보면 광주·여주·파주·양주·수원·부평·이천·인천·장단·남양․양근·풍덕·가평·안산·삭령·안성·마전·고양․용인·진위·영평·양천·김포·지평·포천·적성·과천·금천·통진·교하·연천·음죽·양성·양지·죽산이 일본군의 침략을 겪거나 점거된 적이 있으며, 오직 강화·교동만 일본군의 침입을 받지 않았다. 경기 37개 읍 가운데 35개가 일본군의 침입이나 점거를 당했다면 경기 전역이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경기의 피해 정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임진왜란 초기 적침을 크게 당한 경상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592년 임란 직후 경상도는 총67개 고을 가운데 침입을 받지 않은 곳이 22곳 정도였다. 1593년 6월 위의 답변서에서도 17곳(25.4%)이 무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곧 전체의 4분의 1정도가 비교적 일본군의 침입으로부터 지역을 보존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경기의 경우 육지와 떨어진 두 곳만 제외하고 한 도 전체가 침략을 받았으니 피해가 대단히 심했음을 알 수 있다.

경기 전체가 이처럼 피해가 컸던 이유는 경기가 일본군의 북상로와 퇴각로와 맞물렸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경기는 한양으로 북상하는 경로에 있었으므로 일본군의 침입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593년 1월 제2차 평양성전투와 행주대첩 이후 조․명연합군에 쫓기던 일본군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더 큰 피해를 당했다. 곧 일본군이 죽산-충주-죽령을 경유해서 경상도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도성 근방 및 경기, 충청도에서 전투가 잦아졌고, 강화협상이 진행되면서 도성 근방의 일본군의 침탈 행위가 더 노골화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강 이남의 피해가 많았는데 남양과 수원이 경상도 방면으로 퇴각하는 일본군으로 재차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상황은 도체찰사 유성룡이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거듭 확인된다. 1593년 2월 유성룡은 “경성에 있는 적의 무리가 12일의 행주 전투로 인하여 사망자가 많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도망해온 사람들의 말이 모두 같습니다.…한강 이남은 사평원(沙平院)에서부터 왜적의 분탕질의 전보다 더욱 치열하여 죽산까지 미쳤으며, 충주·음성·죽산 지경의 적세가 아주 큽니다."고 보고서를 올렸다. 3월에도 유성룡은 한강 이남의 왜적이 강성해져서 금천, 수원 남양 경내에서 분탕질이 심하다는 보고하였다.

1593년 3월 경기좌도 관찰사 겸 순찰사 성영(成泳)도 유성룡과 비슷한 보고를 올렸다. 곧 서울 이북은 명()의 군대 때문에 일본군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나, 한강 이남은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과천․용인․양지․죽산은 물론 진위․수원․남양․안산․금천․인천 일대의 피해가 많다는 것이었다. 1593년 9월 무렵에도 대사헌 김응남이 한성 주변의 고을 가운데 양주, 포천, 파주, 고양, 교하, 풍덕, 양천, 김포, 부평, 금천, 과천, 용인, 죽산, 광주가 심하게 피해를 입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런가 하면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가 승리했다는 소식이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에게 전해지자 김성일은 명군에 대한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막하에서 있는 이로(李魯)를 한성으로 급파하였다. 하지만 수원 경계에 도착한 이로는 도체찰부사 김찬(金讚)의 군관들에게 “용인, 죽산, 사평에 주둔한 왜적이 수원, 금천 땅에 출몰 약탈하여 날마다 쉴 사이가 없어, 저희들도 산길을 타고 간신히 피해 오는 참입니다.”는 정보를 듣고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로의 기록에는 날짜가 적혀있지 않으나 제2차 평양성 전투의 승리가 전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므로 2월을 전후한 시기라고 판단된다. 이로가 수원 경계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아 2차 평양성전투 직후에 도성은 물론 한강 이남의 경기 지역에 일본군이 넓게 퍼져있던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기존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1592년 5월에 한성이 일본군에 함락당할 무렵을 전후하여 경기에서 벌어진 전투는 대표적으로 5월 17~18일 사이에 벌어진 양주 해유령 전투와 임진강전투, 6월 5~6일에 벌어진 용인 부근 전투, 6월 10일경 이천부사 변응성과 강원도 조방장 원호의 합동작전인 남한강 마탄 전투, 7월 하순 홍계남이 활약한 안성부근의 전투, 9월 행주대첩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조선군이 승리한 전투는 양주 해유령 전투, 남한강 마탄 전투, 안성부근의 전투, 행주대첩이었다. 용인부근 전투는 삼도근왕병 5만이 참패를 당한 전투로 조경남은 “삼도(三道)의 군대가 용인에서 무너졌다.”고 기록했으며, 영남 사족 정경운은 “관군이 수원에서 궤멸하였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이밖에 양주에서는 돌격장(突擊將) 인천 부사 이시언(李時言)과 양주 목사 고언백의 활약으로 일본군을 격퇴하면서 조선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임진왜란 초기 경기는 전체 37개 읍 가운데 강화와 교동을 제외한 35개 읍이 피해를 입었다. 이는 임진왜란 초기 피해가 컸다고 하는 영남보다도 더 나쁜 상황이었다. 도성의 외곽이자 일본군의 북상로와 퇴각로에 놓인 경기는 그만큼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고 방어력이 부재한 상태에서 일본군의 침략을 고스란히 받았다. 특히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에서 패한 후 후퇴하는 일본군이 경상도 방면으로 퇴각하면서 도성 인근과 한강이남 지역의 피해는 더 막심하였다. 그렇다면 이처럼 피해가 컸던 경기에서 과연 의병 활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다음 장에서 경기 의병의 실태를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3. 경기 의병의 실태

1593년(선조 26) 1월 조선 정부는 명군(明軍) 지휘부의 요청으로 보고서 한 건을 작성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조선 각도에 주둔해있는 병력 수였다. 이 보고서에서 본고의 논의와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부분이 경기 의병의 병력수다. 당시 보고서의 내용을 관군과 의병으로 나누어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보고서의 수치는 비교적 간략하다 할 수 있으나 전국의 상황을 알 수 있어 경기 의병의 실태나 위상을 가름해볼 수 있다. <표3>에서 보듯이 정부에서 파악한 경기 의병은 5,900여 명이며, 관군은 13,400명이다. 경기 전체 병력 19,300명에서 의병이 30% 정도를 차지하므로 결코 작지 않은 비중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규모는 집계의 누적이나 파악조차 되지 않는 소소한 의병 부대까지 감안하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표2> 1593년 1월 각도에 주둔해있던 병력 규모

지역

관군

의병

경기

13,400

5,900

충청도

5,800

5,000

경상도

좌도

35,000

2,000

우도

30,000

10,000

전라도

25,000

함경도

10,200

강원도

2,000

평안도

15,000

300

황해도

8,800

145,200

23,200

<표2>의 내용을 다시 세부적으로 나타내면 <표3>과 같다. 표에서 보듯이 관군 13,400명은 전라도절도사 최원, 전라도순찰사 권율, 경기순찰사 성영 등이 이끄는 병력으로 강화, 수원, 양주, 여주 등에 주둔해있었다. 참고로, 고언백의 경우 그 무렵 양주 목사였으므로 관군으로 구분하였다. 다음으로 의병 5,900명은 창의사 김천일, 의병장 우성전, 이일, 홍계남이 이끄는 병력으로 주로 양근과 안성에 주둔해있었다.

구분

주둔지역

대장

인원(명)

관군

강화부

전라도절도사 최원

4천

13,400

경기도순찰사 권징

4백

수원부

전라도순찰사 권율

4천

양주

방어사 고언백

2천

여주

경기순찰사 성영

3천

의병

창의사 김천일

3천

5,900

의병장 우성전

2천

양근

의병장 이일

6백

안성

조방장 홍계남

3백

다음으로 다른 기록에 나타난 경기 의병의 실태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이 시기 경기 의병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자료로 임진왜란시기 군무를 책임진 유성룡의 기록이 있다.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허다한 열사와 의사가 있으니…경기에 전 정언 정숙하(鄭淑夏), 수원인 최흘(崔屹), 고양인 진사 이로(李魯), 이산휘(李山輝), 전 목사 남언경(南彦經), 김탁(金琢), 전 정랑 유대진(兪大進), 충의위 이일(李軼), 사인 왕옥(王玉)…고양사람 신거상(愼居常) 등이 있다.”고 하였다. 곧 정숙하, 최흥, 이로, 이산휘, 남언경, 김탁, 유대진, 이일, 왕옥, 신거상 등을 경기 의병으로 꼽았다. 이 기록에는 경기의 대표적인 의병으로 일컬어지는 우성전과 홍계남이 빠져있으며, 신거상은 여기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다음으로 경기 지역의 의병을 알려주는 자료로 17세기 중반 신경(申炅, 1613~1653)이 지은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경은 경기의 의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때 각 도의 군사들이 여기저기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경기에서는 본도 감사인 심대(沈岱)ㆍ전 사간 우성전(禹性傳)ㆍ전 정언 정숙하(鄭淑夏)ㆍ수원인 최흘(崔屹)ㆍ고양인 이로(李魯)와 이산휘(李山輝)ㆍ전 목사 남언경(南彦經)ㆍ유학 김탁(金琢)ㆍ충의위 이일(李軼)ㆍ서얼 홍계남(洪季男)ㆍ선비 왕옥(王玉) 등이…일어나서 의병이 되어 순절하거나, 혹은 고단한 군사로 적에게 대항하기도 하였다.

신경의 기록에 따르면 수원, 고양 등지에서 우성전, 정숙하, 최흘, 이노, 이산휘, 남언경, 김탁, 이일, 홍계남, 왕옥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고 되어 있다. 앞서 유성룡의 견해와 유사하나, 우성전과 홍계남을 포함시킨 점이 다르다. 이 기록에서 유의할 점은 경기관찰사 심대의 경우 전라도에 이순신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의병으로 거론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경기 의병에 관한 기록은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지은 야사(野史)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도 잘 남아있다. 이 책의 <경기의병>조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전 정() 정숙하(鄭叔夏), 수원 사람 최흘(崔屹), 선비 이산휘(李山輝), 전 목사 남언경(南彦經), 선비 김탁(金琢), 전 정랑 유대진(兪大進), 충의 이일(), 선비 왕옥(王玉) 등이 모두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였으나 기록할 만한 공적은 없었다.

여기에 이어서 <경기의병>조에는 우성전(禹性傳), 원정(元挺), 김적(金績), 이로(李魯), 이산휘에 대해서는 특별히 지면을 더 할애하여 자세히 소개하였다. 이 밖에 <임진제장(壬辰諸將)>조에 고언백, <선조조명신(宣祖朝名臣)>에 이신의(李愼儀), <선조조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에 홍계남이 들어 있다.

이처럼 『연려실기술』에는 비교적 다른 기록에 비해 많은 의병의 존재를 알려준다. 정숙하, 최흘, 이산휘, 남언경, 김탁, 유대진, 이일, 왕옥, 우성전, 원정, 김적, 이로, 홍계남, 고언백, 이신의 등이 수원, 삭녕, 고양, 인천, 강화 등지에서 봉기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김적, 원정, 이신의는 『연려실기술』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밖에 경기 의병의 전반적인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18세기 후반 읍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도 조사해보았다. 조사 결과 『여지도서』에서 경기 37개 지역 가운데 의병이 기록된 곳은 불과 두 곳으로, 양지의 김충수(金忠守), 안성의 홍계남이다. 김충수는 『여지도서』에만 나오는 인물이다.

번호

내용

이름

직함

지역

출처

1

김 적

전 부사

삭녕

2

김충수

양지

3

김 탁

징, 재, 연

4

남언경

전 목사

징, 재, 연

5

신거상

고양

6

왕 옥

선비

징, 재, 연

7

우성전

전 사간

강화, 인천

재, 연

8

원 정

진사

9

유대진

전 정랑

징, 연

10

이 로

고양

징, 재, 연

11

이산휘

선비

고양

징, 재, 연

12

이신의

전 참봉

고양

13

이 일

충의위

양근

징, 재, 연

14

정숙하

전 정언

징, 재, 연

15

최 흘

수원

징, 재, 연

16

홍계남

서자

안성

재, 연, 여

※ 연 : 연려실기술, 여 : 여지도서, 징 :징비록, 재 :재조번방지

이상으로 경기 의병을 수록한 자료들을 검토해보았다.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을 정리해보면 경기 의병으로 거론된 사람은 총 16명이다. 16인 모두 의병장으로 부를 수 있을지 여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럼에도『선조실록』에 경기 의병장 4명의 병력이 5,900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16명이 보유한 병력 규모나 활약상이 결코 적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표5>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을 제외한 자료에서 경기에서 활약한 의병으로 손꼽히는 김천일의 존재가 빠져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고언백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연려실기술』에 고언백이 실려 있으나 <경기의병>에 들어 있지 않고 <임진제장(壬辰諸將)>조에 들어 있다. 『연려실기술』을 제외하고 고언백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고언백의 경우 1592년 7월에 양주목사로 기용되어 활약했으므로 의병 명단에서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김천일이 빠진 이유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이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앞선 시대의 자료를 그대로 전사(傳寫)하는 과정에서 생긴 현상일 수 있다. 하지만 당대인이나 조선후기 사람들이 생각한 경기 의병의 범주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예컨대 『동사략(東史略)』(1849년)에는 경기 의병에 대해 “당시 경기 도내에는 전 목사 남언경, 전 정랑 정숙하, 유대진, 이산겸(李山謙)<지함(之菡) 서자>, 선비 박춘무(朴春茂), 최흘, 이로, 김탁옥(金琢玉), 이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도 김천일과 고언백이 빠져있는데 한 가지 눈길을 끄는 사항이 앞의 자료에서 보이지 않던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는 점이다. 이산겸(李山謙)과 박춘무(朴春茂)가 그 주인공이다. 김탁옥은 김탁의 오류로 여겨진다. 이 중 박춘무는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형 박팽년과 함께 사형을 당한 박인년(朴引年)의 7세손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7백 명을 모아 청주에서 조헌과 함께 일본군에 맞선 인물이다. 박춘무의 활동 지역이 청주임에도 불구하고 경기 의병으로 오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김천일이 각종 자료에서 빠진 배경은 김천일이 창기한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뒤에서 다시 논의하겠지만 당시 경기에는 각지에서 온 의병들이 활동하였다. 하지만 당대인이나 후대사람들은 경기에서 활동했다 하여 그들을 경기 의병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김천일의 존재는 경기 의병의 개념이나 범주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알려주고 있다.

4. 경기 의병의 특징

1) 의병의 출신성분

임진왜란시기 군무를 총괄하던 유성룡은 “의병이란 애초에 수령과 변장들이 서로 잇따라 도망쳐 숨었기 때문에 의병들이 제 각기 스스로 군사를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 중 스스로 향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고, 충분(忠憤)에서 일어난 사람도 있으니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유성룡의 언급대로 의병에는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거사가 있는가 하면 충()을 위해 일어난 거사도 있었다.

호남과 영남의 의병 성격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영남은 일본군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아 피해를 당한 지역으로 가족과 친지, 지역을 지킨다는 현실적인 목적이 있었다. 반면에 호남은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일본군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으므로 국왕에 대한 충과 의()라는 유교적 이념을 강조하는 근왕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그리고 호남 의병은 전라도가 직접적인 전쟁터가 아니었기 때문에 서울․경기나 경상도 등으로 진출하여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또 영남과 호남 의병의 지도층은 명망이 높고 탄탄한 재지 기반을 가졌으며 지역의 유력 학파와 연결된 인물들이라고 한다. 영남에서는 경상우도의 남명학파가 구심점이 되고, 호남에서는 이항․기대승․이이 등 서인계 기호학파의 문인들이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위의 분석은 다소 도식적인 측면이 있으나 경기 의병을 어떤 틀로 분석해야 하는지 방향성을 제시해주므로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경기 의병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앞 장에서 소개한 16인의 출신성분이나 지역 연고 등을 검토하여 어떤 사람들이 왜 의병에 투신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김적에 대해서는 전() 부사로서 삭녕에서 군사를 일으켰다는 정보 이외에는 더 알 수 없다. 『연려실기술』에는 김적이 선조에게 “천명과 인심이 이미 전하에게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성혼(成渾)을 장수로 삼으소서.”라는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기년편고(紀年便攷)』(1917년)에는 김적이 1592년 이전에 부사를 지냈으며 1593년 10월 선조가 환도한 후 세자(광해군)에게 선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고 되어있다. 이 두 기록을 종합해보면 김적은 전직관료이자 사족으로서 선조에게 선위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릴 수 있는 심지와 배포를 가진 인물로 파악된다.

김충수(金忠守)는 『여지도서』에만 올라있는 인물로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죽산에서 싸우다가 아들 김함(金涵)과 함께 죽었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정려를 세워 표창했다.”고 되어 있다. 이외에 김충수에 관한 기록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남언경(南彦經)은 개국공신 남재(南在)의 6대손으로 서경덕의 문인이다. 명종 대에 학행으로 헌릉 참봉에 천거된 이후 1573년(선조 6)에 양주 목사, 1592년에 여주 목사에 임용되었다. 1593년에 공조참의로 있으면서 이황을 비판하다가 양명학을 숭상한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양근으로 와서 여생을 보냈다. 양근의 미원서원(迷源書院)에 배향되었다. 1592년 9월 무렵 전 승지 성영(成泳)과 방어사 변응성이 이끄는 군대와 연합해 여주에서 활동하였다.

신거상(愼居常)은 이정구(李廷龜, 1564~1635)의 피난일기에서 인적 사항과 활약상을 파악할 수 있다. 1592년 5월 하순에 우여곡절 끝에 고양으로 피신한 이정구는 고양의 지세가 사방이 뚫려있고 한 곳만 막혀있어 산 정상에서 왜적을 만나면 더 이상 피난할 곳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마을에 사는 무인(武人) 신거상 등에게 사람들을 규합해 일본군과 맞서자고 권유하였다. 신거상은 당시 70세로서 이정구의 권유에 힘입어 무사 60인 정도를 규합했고, 고양으로 쳐들어온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신거상이 우림위(羽林衛)에서 50년간 근무한 인물로 관직에는 나가지 못했으나 오랫동안 금군 생활을 한 무인이라 할 수 있다.

우성전(禹性傳, 1542~1593)은 퇴계 이황에게 수학했으며 1562년부터 유성룡과 친분을 쌓았다. 1568년(선조 1) 문과에 급제한 후 한림, 옥당, 대간 등을 거쳤으며, 동인․서인으로 분당이 시작되면서 동인 편에 섰다. 이후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분열할 때 남인의 거두가 되어 당내 여론을 이끌면서 이발, 이산해 등 북인세력과 대립하였다. 우성전의 집안은 파주에 세거해오다가 증조부 우수(禹樹) 대에 수원 호매절면(현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으로 이거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우성전은 전쟁이 발발하자 고향이자 한때 현감으로 재임한 수원 지역을 중심으로 추의군(秋義軍)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나주에서 북상한 의병장 김천일 부대와 함께 강화에 들어가 전공을 세워 1592년 7월에 인천도호부사, 9월에 성균관대사성에 특진되었다. 우성전은 퇴각하는 왜군을 경상도 의령까지 추격하다 돌아오던 도중 부평에서 사망하였다. 우성전이 이끈 병력은 2천으로, “우성전이 거느린 군사 추의군이 매우 출중”하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활동이 컸다.

원정(元挺)은 원균(元均)의 동생으로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한 인물이다. 원정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하는데 현전하는 사마방목(司馬榜目)에서는 원정을 찾을 수 없었다.

유대진(兪大進, 1554~1599)은 기성부원군 유홍의 아들로 1579년(선조 12)에 진사가 되고, 158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정자, 낭관, 이조좌랑, 정언, 이조참의 등을 거쳐 1593년에 수원부사를 지냈다. 임진왜란시기에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이로(李魯)는 진사로서 고양사람이다.『연려실기술』에는 "혹 영남 전 직장"이라고 되어 있다. 이로의 경우 사마방목에서 1564년(명종 19) 식년 진사시에 합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산휘(李山輝)는 고양의 선비로 적군을 사로잡은 공이 많이 세웠다. 특히 정토사에 침입한 일본군 4명을 기지를 발휘해 스님들과 함께 죽인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유성룡은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고양에 의병장인 선전관 이산휘란 사람이 있습니다(高陽有義兵將宣傳官李山輝)”고 표현하였다. 따라서 이산휘는 무반청요직으로 꼽히는 선전관을 지낸 무신으로 가문이 뛰어난 사람으로 판단된다.

이신의(李愼義, 1551~1627)는 형조참의 이원손(李元孫)의 아들이다. 민순(閔純)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 15) 학행으로 천거되어 예빈시봉사가 되었고, 참봉·종묘서봉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에 의병을 일으켜 향병(鄕兵) 300여 명을 이끌고 적을 섬멸한 공으로 주부가 되었다. 이신의도 고양에서 활동한 인물로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에 배향되었다. 이 서원에는 민순(閔純), 남효온(南孝溫), 김정국(金正國), 기준(奇遵), 정지운(鄭之雲), 홍이상(洪履祥), 이유겸(李有謙)이 함께 배향되었다.

이일(李軼)은 『선조실록』에 의병장으로 호칭되고 병력 규모도 올라있어 꽤 이름을 날린 의병장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충의위(忠義衛)라는 사실 이외에는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다. 충의위는 1418년(세종 즉위년)에 공신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설치한 양반의 특수병종이었다. 공신정훈자손의 적장자와 중자가 입속했으며, 17세기 전반까지 대우가 비교적 좋아 입번이나 시위 등 일정한 직임을 수행하면 녹봉이나 체아직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일은 공신의 후예로서 사족으로 볼 수 있다. 또 이일은 『선조실록』에 의병장으로 호칭되고 휘하 병력도 6백 명이라 하므로 활약이 컸다고 보여 진다.

정숙하(鄭淑夏)는 157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 의병 활동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없다. 1594년(선조 27)에 청주목사, 이듬해에 동부승지가 되자 의총(義塚)을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홍계남(洪季男)은 수원의 충의위(忠義衛) 홍언수의 서자이다. 홍계남은 말타기와 활쏘기가 뛰어나 금군에 소속되었다가 1590년(선조 23)에 황진(黃進)의 군관으로 일본에 갔다 온 경험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홍계남은 아버지를 따라 안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싸워서 모두 승리했으며, 아버지가 일본군에 의해 죽자 아버지의 군사를 수습해 의병 활동에 나섰다고 한다. 홍계남 부대의 규모는 정확하지 않으나 1백 명 정도라는 기록이 있으며, 왜적을 많은 격퇴한 공으로 1592년 9월에 수원 판관으로 임명되었다. 홍계남이 주로 활동한 지역은 안산이며 양천에서도 활약하였다. 안성에는 ‘진터[陣基]’라 불리는 비봉고성(飛鳳古城)이 있는데 홍계남이 성을 쌓아 싸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유성룡은 홍계남에 대해 “경기 의병 가운데 홍계남이 가장 용맹하였다.”고 평하였고, 비변사에서도 “홍계남은 적을 만날 때마다 사살하여 명성이 크게 떨치고 있습니다.”고 보고하였다.

이밖에 최흘(崔屹)은 수원인이라는 기록만 남아있다. 김탁(金琢)에 대해서는 유학 또는 선비, 왕옥(王玉)도 선비 또는 사인(士人)으로 표현되고 있어 두 명 모두 사족이라 할 수 있다.

직함

전직 관료

진사

선비

군직

서자

미상

이름

김 적, 남언경

우성전, 유대진이신의, 정숙하

이로

원정

김 탁

왕 옥

이산휘

신거상

이 일

홍계남

김충수

최 흘

이상으로 경기 의병 16명에 대한 인적 사항을 검토하였다.<표5 참조> 자료가 불충분하여 지역 기반을 밝힐 수 없었으나 이를 토대로 몇 가지 특징을 유추해낼 수 있다. 첫째, 11명이 전직 관료이거나 선비로 판명되어, 경기 의병 경상도․전라도와 마찬가지로 향촌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의병에 적극 가담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의병을 봉기한 지역을 보면 안성, 수원, 고양, 강화, 인천, 양지, 삭녕 등이었다. 임진왜란시기 의병의 봉기 양상은 지역이나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대체로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진 곳은 일본군의 미점령 지역이면서 사족의 세력이 강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지역도 단언할 수 없으나 김충수, 남언경, 우성전, 이산휘, 이신의, 홍계남처럼 거주지나 연고지에서 의병을 규합했다고 판단된다. 이 부분은 앞으로 지역 기반과 역할에 대한 조사를 심도있게 진행하면 더 확실해지리라고 여겨진다.

2) 의병의 소속처

앞서 보았듯이 경기 의병()으로 알려진 사람은 16명 정도다. 이 안에는 <표3>(『선조실록』근거)에 보이는 우성전, 이일, 홍계남같은 의병장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사항이 경기 의병을 이들로 한정하는 것은 경기 의병을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여러 자료에는 이들 이외에 또 다른 의병의 존재를 알려주는 단서들이 제법 많으므로 시야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1593년 12월 경기감사 이정형이 비변사에 올린 장계에는 안성의 선비와 민()이 제일 먼저 창의하여 향병(鄕兵)을 결집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비록 일본군을 크게 막지 못했으나 향리를 보전한 공이 있고, 장단․양주․과천․금천․광주에서도 의병을 규합하거나 수령과 함께 사살한 일본군의 수가 많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의 또 다른 장계를 보면 “고양이나 양주 백성들은 매번 적병과 싸울 적에 맨 먼저 왜적의 성벽에 올라가서 왜적의 목을 베고 적병을 사로잡은 일이 자못 많다.”는 말이나 “인천산성과 수원 독성(禿城)에서는 그곳에 사는 백성이 들어가 지켜서 적이 감히 침공하여 함락하지 못하였다.”는 지적도 있다.

이처럼 구체적인 인명은 거론되지 않았으나 안성, 고양, 양주, 장단, 과천, 금천, 광주, 인천, 수원에서 지역민들이 향촌 수호나 도성을 회복하기 위해 참여한 흔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안성은 홍계남이 활동하던 지역으로 이정형이 언급한 안성의 선비와 백성이 홍계남과 연관이 있어 보이나, 양주, 장단, 과천, 금천, 광주, 인천 등은 앞 장에서 언급되지 않은 지역으로 경기 도내에서 폭넓게 의병 활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그러면 ‘촌민(村民)’이나 ‘주민(州民)’ 등으로 표현되는 지역민들을 통솔한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 문제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1593년 2월 비변사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비변사에서는 “유수 이정형이 의병을 모아 장단과 적성 사이를 지키면서 적을 참획한 공이 많았는데 지금 체직되었으니 필시 흩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마땅히 신임 유수 노직(盧稷)을 시켜 빨리 달려가 때맞추어 수습하게 해야 합니다.”고 하였다. 이 말에서 현직 유수가 의병을 모아 장단과 적성을 오가면서 일본군을 격퇴했다는 지적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곧 경기 도내의 의병을 통솔한 사람 중에는 수령이나 병마절도사 같은 군 지휘관이 다수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하여 “고언백의 군병은 모두 서울과 양주의 백성”이라는 언급도 눈여겨봐야 한다. 심대는 양주목사 고언백의 명성이 멀리까지 자자하여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왕왕 멀리서 호응한다”고 보고하였다. 멀리서 호응한다는 것이 어떤 행위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한양에서 피난 온 사람이나 일반 한양 사람들이 고언백 휘하로 자발적으로 들어온 상황을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또 김천일과 함께 강화를 중심으로 활동한 전라도 병마절도사 최원의 휘하 병졸도 마찬가지였다. 최원은 여러 비난에도 불구하고 비변사로부터 오랫동안 외로운 섬에 있으면서 비록 한 일은 없으나 남로(南路)를 통하게 하고 한양 도성의 백성을 거두어 모으고, 멀리서 성원(聲援)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은 지휘관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비변사가 최원 부대에 지원한 한양 사람들을 ‘창의군(倡義軍)’으로 표현한 점이다. 창의군의 의미 역시 불분명하나, 비변사에서 최원이 강화에서 나왔으므로 창의군을 돌려보내도록 주장하고 있어 고언백 휘하의 일부 군졸처럼 의기를 발휘해 자발적으로 지원한 사람을 지칭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수령을 포함한 지방 관료나 군 지휘관 휘하로 들어간 지역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임진왜란 초기 성혼은 시무책에서 “의로운 군사를 거두어 모아 각자 군대를 삼고 주현의 호령이나 부름을 받지 않는 경우를 의병이라 하고, 수령이 군민을 조발해 권수의 통제를 받는 경우를 관군이라 합니다.”고 하여 관군과 의병의 차이를 국가의 공식 지휘 체계에 소속되어 있는지 여부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전황이 급박해지자 비변사에서는 의병을 고무하기 위해 “의병이 올라올 때에는 관병과 똑같이 군량을 지급하여 모자라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의병장 및 연도의 각 고을에 모두 하유하소서.”라고 건의하여 선조의 재가를 받음으로써 의병이 국가의 지휘체계 안으로 흡수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래서 동일 인물이라 해도 의병과 관군을 오간 경우가 많아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의병으로 볼 수 있는지 명쾌하지 않다.

대표적으로 영남의 경우 의병장이 관직에 임용되면서 어제의 의병장이 이제는 수령이나 병사로서 관군은 물론 휘하의 의병까지 통솔하였다. 그리고 임란 초기 관군이 패배하여 후퇴할 때에 부대에서 이탈한 산졸(散卒)들이 곧 거주지에서 창의한 의병장 휘하에 집결했으니 어제의 관군이 의병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경기는 다소 사정이 달랐던 것 같다. 산졸이나 지역민이 의병장 휘하에 집결하는 양상이 아니라 감사나 병사 또는 수령의 휘하로 들어갔던 것이다.

경기에서 이러한 양상이 조성된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유추된다. 하나는 자발적으로 일어난 지역민을 이끌 의병장의 부재이다. 정곤수가 부평(富平) 주민들이 일본군을 공격하고 싶은데 장수가 없다고 하므로 사람을 파견하자고 건의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때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의병장의 부재는 사족 세력의 부재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앞으로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배경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경기 도내에 타지에서 온 수령이나 관료, 군 지휘관들이 다수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경기에는 근왕(勤王)과 도성 회복을 위해 타지에서 온 의병장과 군 지휘관들이 포진해 있었다. 1593년 초반 당시 전라 감사 권율, 전라도 병마절도사 최원을 비롯해 전라 감사는 고양 해포(醢浦)에 머물렀고, 충청 감사 허욱(許頊)과 수군절도사 정걸(丁傑), 건의부장(建義副將) 조대곤(曺大坤)이 모두 양천에 있었다. 전라 병사 선거이도 노량에 있다가 3월에 수원 독성으로 옮겨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감사나 병마절도사, 수령들이 민()을 모집해 군대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주민들은 이 휘하에 집결하게 되었다.

예컨대, 1592년 5월 강원도 조방장 원호(元豪)는 군사가 없었으나 도망 온 사람들을 모집해 신륵사에 주둔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6월에 원호가 전사하자 9월에 전 승지 성영(成泳)이 여주에서 원호(元豪)의 옛 군졸[舊兵]과 새로 모은 인원을 합해 군대를 만들었다. 또『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경기감사 심대가 삭녕과 연천에서 군사를 모집할 때의 일화가 실려 있다. 심대가 지역민들에게 신하로서 죽어야 할 의리를 말하면서 통곡하자 백성들이 모두 크게 느끼어 응모한 자가 수 천 명이었다고 한다. 과장된 측면이 있기는 하나 경기 지역민의 심리적 향방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이상으로 경기 의병은 겉으로 드러난 의병 부대 이외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는 경기라는 지역적 특성과 맞물려 경기 의병의 존재를 규정짓는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수령이나 병마절도사의 휘하로 들어간 지역민의 존재를 관군으로 단순화시켜 이해할 없다고 본다.

3) 의병의 활동 시기

경기 의병의 특징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사항이 의병의 활동 기간이다. 경기 의병이 언제 거병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592년 중순 이후가 아닐까 싶다. 1592년 9월 선무원종공신 오극성(吳克成)이 전국의 의병을 기록하면서 “경기도는 전 정랑 유대진, 전 목사 남언경, 전 정언 정숙하, 충의위 이일 등이다.”고 하였다. 9월 무렵 전직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 활동이 외부에 알려질 정도라면 이전부터 이미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경기 의병의 활동 시기에 대해서는 선조의 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593년 1월 선조는 “경기 의병은 양식만 허비하고 한 가지 일도 성취하지 못했는데 명군이 이제 전진하면 식량이 부족할 것이다. 의병장을 시켜 서둘러 군사를 통솔해 양식 있는 곳으로 가서 최식․이성중․권징․이정암 등이 있는 곳으로 수송해 들이도록 하라. 만일 명을 받들지 않으면 군율로 다스리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1593년 1월 평양성 승리 이후 조정은 전투는 명군이, 군량미나 군수품 수송은 조선이 담당한다는 식으로 협업 관계를 맺음에 따라 의병부대가 수송부대로 전환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경기 의병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1593년 초반 경기 의병 역시 명 군대를 위한 군곡을 운반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1593년 3월 무렵 유성룡이 경기를 비롯해 각처의 관군과 의병들이 반수 이상이나 무너져 흩어졌다고 보고한 것도 이 조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경기 의병은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 활동했다고 판단된다. 그것은 1592년 5월초 한성이 함락된 직후부터 도성을 회복할 때까지 조선의 군사작전이 활발하게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1592년 9월 비변사에서 의병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특별히 강구된 대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제 심대(沈岱)의 장계를 보건대, 장단과 삭녕의 의병은 이정암의 절제(節制)를 받게 하고, 이천․여주․음죽․죽산의 의병은 성영의 절제를 받게 하고, 통진․양천의 의병은 김천일의 절제를 받게 하고, 파주․양주․광주(廣州)의 의병은 심대의 절제를 받게 하여 동․서가 힘을 합하여 경성을 협공하고자 한다 하였는데, 그 계책이 온편하고 유익하며 일의 계획도 깊이가 있습니다.

경기 의병을 이정암, 김천일, 심대의 지휘를 받게 하여 한성을 협공하자는 대책은 경기 의병의 존재 가치가 도성 회복에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경기 의병들은 자연스럽게 한성 수복의 임무를 맡은 관군과 밀접한 연계를 맺고 연합 작전을 실시하였다. 의병장 김천일과 전라 병사 최원의 연합 작전, 우성전과 김천일․최원 부대의 연합 및 권율 부대와의 연합 등 경기 지역에서 의병과 관군이 연계해 전투를 벌인 사례가 일일이 제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도 도성회복이라는 절박한 목표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특히 의병과 관군의 연계는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 이후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가속화되었다. 평양성 전투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도성을 회복하려는 조선 정부의 의지가 경기 지역에서 의병과 관군의 연계를 높여 놓은 것이다. 비변사에서 평양성 전투이후 각지의 관군과 의병이 일제히 한성을 포위하여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 무렵 조선 정부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유성룡의 존재가 관군과 의병의 연계성을 높이는데 일조하였다. 선조는 일본군의 북침이 가속화되자 군민을 총괄하는 최고 군정권자로 도체찰사를 임명하고 군작전의 최고 군령권자로 도원수를 임명하였다. 그 결과 1592년 말경에 전국에는 유성룡(평안도), 정철(하삼도), 유홍(경기, 황해도, 강원도), 심수경(의병 절제) 등 4명의 도체찰사가 존재하였다.

그 후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에 유성룡이 명군과 각종 연락과 군무를 관장하기 위해 개성으로 남하하게 되자 지휘권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그래서 1593년 1월에 삼도도체찰사에 유성룡이 임명되었고, 3월에는 80세의 심수경을 대신하여 한성 부근의 의병 절제권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영남에 김성일이 관군과 의병을 관할했다면 서울․경기에는 유성룡이 그 역할을 도맡았던 것이다.

하나의 사례로, 유성룡은 행주대첩 이후 일본군의 재침에 대비해 권율과 순변사 이빈에게 파주산성을 근거지로 하여 서쪽의 적병을 막고, 방어사 고언백과 이시언, 조방장 정희현, 박명현을 좌익으로 하여 해유령을 차단하고, 의병장 박유인, 윤선정, 이산휘로 우익을 만들어 창릉과 경릉 사이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창의사 김천일과 추의사 우성전, 경기 수사 이빈과 충청 수사 정걸에게는 수군을 이끌고 용산과 한강으로 기습하라고 명하였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박유인은 창의중위장(倡義中衛將)이며 윤선정은 추의중위장(秋義中衛將)이다.

한편, 유성룡이 의병부대를 관할하면서 군사 작전에 포함시킨 사례로 이산휘를 들 수 있다. 1593년 3월 유성룡은 “고양의 의병장 선전관 이산휘가 거느린 군사도 식량이 없어 흩어진 지 벌써 오래입니다. 신이 그들을 불러와서 군량을 조금 주고 용산 등지에 군사를 매복시켜 잇달아 적병의 목을 베고 적병을 사로잡은 일이 있었습니다.”고 보고하였다.

며칠 뒤에 유성룡은 “북변에는 벽제관에서 군대를 퇴각시킨 뒤로 적병이 나돌지 않는데, 다만 적병이 연서역 등을 왕래하면서 풀을 베어 성중으로 들어가므로 창의장 박유인, 추의장(秋義將) 윤선정, 의병장 아산휘 등이 날마다 적병과 교전하여 죽인 것이 많습니다.”고 하면서 “관군과 의병의 여러 군대가 앞 다투어 진격하지 않은 이가 없다.”고 보고하였다.

요컨대, 1593년 2월 이후부터 도성을 회복할 때가지 도성과 경기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지속되었다. 퇴각하는 일본군을 섬멸하고 도성을 회복하기 위한 조선군의 역습이 시도되면서 경기에서는 의병과 관군의 연계가 더욱 긴밀해졌다. 영남에서 의병장의 관인화와 의병의 양향군 전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의병 활동이 쇠퇴기로 접어들었지만, 경기에서는 오히려 의병이 관군과 연합하면서 활동이 더 살아나는 양상을 띤 것이다. 이 점이 바로 경기 의병이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오래 활동할 수 있던 배경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5. 맺음말

이 발표문은 임진왜란기 중부지역의 의병 활동 가운데 경기 의병의 실태와 특징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경기 의병에 대한 연구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이 발표문은 경기 의병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인 검토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경기 의병이 다른 지역과 달리 어떤 특징을 띠고 있는지 시론적으로 문제 제기도 해보았다. 임진왜란 초기 경기는 전체 37개 읍 가운데 강화와 교동을 제외한 35개 읍이 피해를 입었다. 이는 임진왜란 초기 피해가 컸던 영남보다도 더 나쁜 상황이었다. 경기 지역은 도성의 외곽이자 일본군의 북상로와 퇴각로에 있었으므로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에서 패하고 후퇴한 일본군이 일부는 한양에 주둔하고 일부는 경상도 방면으로 퇴각하면서 도성 인근과 한강이남 지역의 피해가 막심하였다.

각종 자료를 토대로 경기 의병을 조사한 결과 16명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11명이 전직 관료이거나 선비여서 영남과 호남처럼 경기도 지역의 기반을 가진 사족들이 의병에 적극 가담했다고 할 수 있다. 또 경기 지역도 김충수, 남언경, 우성전, 이산휘, 이신의, 홍계남처럼 거주지나 연고지에서 의병을 규합하고 있어 지역의 기반이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이와 함께 필자가 주목한 사항은 광범위하게 형성된 의병의 존재였다. 경기의 지역민들은 수령이나 병마절도사같은 국가의 공식적인 지휘관 휘하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관료 휘하에 들어간 사람들이 의병의 형태로 활약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는 이들을 '의병'이나 '창의군'으로 불렀다는 점이다. 경기에서 이같은 현상이 두드러진 것은 의병장의 부재와 함께 경기에 근왕과 도성회복을 위해 각지에서 모여든 공식 지휘관들이 포진해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경기 의병의 특징은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 이후 관군과 연계하면서 활동이 더 두드러졌다는 데에 있다. 이 점은 더 논증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나, 1593년 1월 이후 도성 회복이 관군이나 의병에게 중요한 당면 과제로 떠오르면서 경기에서는 의병과 관군의 연계가 더욱 긴밀해졌다고 생각한다. 영남에서 의병장의 관인화와 의병의 양향군 전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의병 활동이 쇠퇴기로 접어들었지만, 경기에서는 오히려 의병이 관군과 연합하면서 활동이 더 살아나는 양상을 띤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논고는 경기 의병에 대한 이해를 시작하는 첫 걸음에 불과하다. 필자는 경기 의병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생긴 여러 의문이나 흥미로운 사실을 공유하고 싶었으며, 이를 통해 경기 의병의 존재 양태와 성격에 대해 말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경기 의병의 출신 성분이나 지역 연고,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일이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앞으로 논문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보완할 것을 약속드린다.

 

출처 :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글쓴이 : 마인부우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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