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스크랩] 임란격전지, 사천왜성을 가다

구름위 2012. 10. 7. 16:11
728x90

임란격전지, 사천왜성을 가다

임진왜란 당시 격전이 벌어졌던 사천왜성.최근 수년간 복원 공사가 이루어진 상태다.


임진왜란이 막바지로 흘러가던 1598년 10월1일 명나라 중로군 동일원 제독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군이 진주를 거쳐 사천으로 진출했다.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다시 공세이전으로 나선 시점에 조선에 주둔하는 명군은 극소수였다. 명군이 병력을 계속 증원하여 전면적인 반격에 나서는 것은 1598년에야 가능했다.

1598년 8월 이후 본격화된 명군의 반격작전 개념은 분명했다. 서로의 유정 제독이 순천의 고니시군을, 중로의 동일원 제독이 사천의 시마즈군을, 동로의 마귀 제독이 울산의 가토군을 공격하고 해상에서는 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진린 도독이 수군으로 육상부대의 작전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동일원이 이끄는 중로군의 초기 작전은 순조로왔다. 일본군의 자주적 철수로 진주를 무혈입성한 명군은 사천으로 진격, 10월1일 아침에 사천왜성(사천왜채,사천신채)으로 육박한 것이다. 당시 명군의 총병력은 최소 1만3500명, 최대 3만6700명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사료에 남아있는 1만3500명이라는 숫자는 공격 작전 초기에 입안되었던 병력 규모이므로 실제 공격 당시 명군의 병력은 2만6700~3만6700명 사이였다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

사대문궤 등 당시 외교문서를 모은 사료에서는 2만6700명으로 나오므로 이 숫자가 신뢰도가 높다는 견해도 있지만, 상촌집의 기록을 중시해서 2만6700명과 별도로 기병 1만명이 추가로 존재했다고 보기도 한다. 여기에 정기룡이 지휘하는 2000명 수준의 조선군이 추가됐다.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 일부 일본측 역사서에는 중국 강남 기병 80만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경우도 있으나 심각하게 따질 이야기가 아님은 물론이다.

당시 사천일대의 일본군은 시마즈 요시히로를 주축으로 한 시마즈 가문의 5개 부대가 다소 느슨한 지휘체계로 결합되어 있었다. 병력은 1만5000 수준.

명군은 사천왜성으로 돌입 공성전에 나섰으나 화약 폭발사고가 발생하면서 혼란에 빠졌다. 기회를 타 오히려 일본군이 성밖으로 나와 명군을 공격했다. 일본군 일부 병력이 출성하자 명군 주력은 뒤로 물러나 맞은편 언덕에서 포진했다. 그 와중에 명군 일부 병력이 다시 공격에 나서 성밖으로 나온 일본군의 배후를 차단하면서 전황이 호전되는듯 했다. 그것도 잠시... 출성한 일본군이 오히려 명군의 후방을 집중공격하는등 물고물리는 난타전이 벌어지면서 전세는 명군에게 불리해졌다. 결국 일본군이 강한 압박작전을 펼치자 명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면서 퇴각, 사천왜성에 대한 공성전은 실패했다.

일본측이 주장하는 전과는 수급만 3만~3만8000명 수준. 사실이라면 명군이 거의 전멸에 가까운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는 이야기다. 반대로 중국 군사사학계에서는 이 숫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7000명 수준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같은 주장은 국내 학자 중에 일부에서도 긍정하고 있다. 여하간 분명한 것은 명군이 우세한 병력으로 공성작전을 폈으나 작전에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중로군의 참담한 패전으로 1598년 8~10월에 걸쳐 단행된 명군의 사로병진작전은 실패했다. 반대 입장에서 본다면 남해안 일대의 중앙에 포진한 시마즈군대가 안정적으로 생존함에 따라 일본군은 전선중앙돌파라는 최악의 사태를 피할수 있었다. 몇달뒤 고니시군의 해상 탈출을 사천의 시마즈군이 지원했고, 이를 막는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노량해전)했으니 사천전투의 경과는 전쟁의 마무리 국면에 큰 영향을 끼친 셈이다.

사천전투의 참가 병력 규모, 전사자 규모, 전투의 정확한 경과에 대해선 개별 사료를 통해 따져봐야 할 문제가 많이 남아있지만 일단 사천전투의 현장을 우선 보고 싶었다. 봐야겠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품었으나 사천왜성을 보기 위해 사천까지 내려가는건 직장인이자 유부남으로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사천왜성을 보겠다는 소망을 소망으로만 간직하고 있던 차에 마침 진해-사천-창원방면으로 3박4일 출장이 잡혔다. 둘째날 다행스럽게 3시간 정도의 시간이 비었다. 폭우가 쏟아져 사천왜성에 가야할지 말지를 망설였지만 결국 가기로 했다.기회가 왔을때 보지 않으면 하세월을 보내야한다는 것이 이때까지의 경험이었기에...

우산을 썼지만 10분만에 속옷까지 완전히 젖을 정도로 비바람 속의 전적지 답사는 쉽지 않았다. 차분히 지형을 살피는 것은 기대하기도 힘들고 현장 사진을 남기는 것에 급급할 정도였다. 다행스럽게 우중에 촬영한 사진치고는 상태가 좋은 사진이 많았다. 물론 그 댓가로 남은 출장기간 동안 젖어서 질척한 구두와 습기로 가득한 옷을 참아야했다.

사천왜성 자체는 완전히 새롭게 신축한 성곽이라기보다는 통일신라~고려시대에 조운용 창고시설로 활용되던 통양창의 외곽을 보호하던 외곽 토성을 활용, 약 2개월만에 단기간에 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워낙 비가 많이 와서 원래의 토성 터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사천왜성의 주출입구는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오른쪽에서 왼쪽을 따라 비스듬하게 진입하면 출입문쪽으로 향하는 진입경로가 꺽이는데다 광장형 공간으로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마쓰형 호구(虎口)의 일종 내지 그 변형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구조에는 외곽 입구에 다시 소형 출입문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지만 현재 복원된 사천왜성에는 외부 출입문 없이 내부 출입문만 존재하는 형태다.

측면에서 보면 출입구 외곽은 이런 형태가 된다. 양쪽으로 돌출된 성벽에서 이른바 횡시(橫矢),측면공격이 가능해 공격자를 괴롭힐 수 있다.


출입문 자체의 구조는 상당수 일본 성곽이 그렇듯이 매우 빈약해서 성문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민망할 정도다. 물론 출입구를 둘러싼 성벽의 구조물이 방어에 적합한 형태로 되어 있어 전체적인 출입구 자체의 방어력이 약한 편은 아니다. 2005~2006년 발굴 과정에서 문터가 발굴되기는 했으나 복원과정에선 기본적으로 히메지성의 출입문을 참조해 복원했기 때문에 원래 형태에 얼마나 근접할지는 미지수다.


출입문을 안쪽에서 보면 이런 모양새다.



전체 성곽의 형태는 이런 모양새다. 출입구의 형태를 좀 더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다.



성의 한쪽 모퉁이에 자리한 천수각 터. (배치도에서 오른쪽 위 모퉁이)



성벽에서 바로 바다가 보인다 (배치도에서 위쪽) 삼면이 바다여서 성을 공격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방어자는 해상 교통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성 내부는 당시 일본의 성곽이 흔히 그렇듯이 넓은 편은 아니다.



사천왜성은 해발 33m 정도의 언덕에 자리잡은 성으로 일본식 분류에 따르자면 평산성(平山城)에 가깝다.돌로된 성벽 밖으로 인공적으로 가공한 계단형 토축이 보인다.여기에 목책이 설치되면 주성벽을 보호하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



바다에 면하지 않은 지역도 경사도가 제법 있어 성벽의 방어력을 보완해 준다.

직접 살펴 본 사천왜성은 울산왜성의 판박이라는 느낌. 별로 높지 않은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지만 경사도가 상당해서 막상 공격하기는 쉽지 않은 지형. 해안을 끼고 있어 해상교통이 자유롭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문제는 일부 지점에 대한 발굴보고서만 나왔을뿐 완전한 발굴보고서가 발간되지는 않은 상태인데다 복원을 가장한 현상 파괴가 상당히 많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역시 난감했다. 2005년 이전의 사진과 현재의 성벽 상태는 완전히 다르다.


복원이 이루어지기 전의 성벽 모습 (사진출처-네이버 지식인)



현재의 성벽 모습. 동일 지역에서 촬영한 사진은 아니지만 과거 사진과 비교해보면 거의 재창조에 가까운 수준의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형태의 일본식 성곽의 구조와 돌쌓기 방식, 구배를 지나치게 의식해 복원할 경우 한정된 기간에만 존재에 당시 일본식 성곽의 구조물을 가장 적확하게 보여준다는 한반도 지역 왜성의 자료적 가치가 훼손될 우려도 없지 않다.

성곽 외곽에 나뒹굴고 있는 돌무더기.복원 과정에 사용된 돌들중 제자리를 찾지 못한 돌일까? 여하간 원형을 짐작못할 정도로 복원된 사천왜성을 보자니 순천왜성도 빨리 답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출처 :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글쓴이 : 마인부우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