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스크랩] 김여물장군에 대한 기록

구름위 2012. 10. 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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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물(金汝?)장군에 대한 기록

 

1.일본의 기록


1.회본태합기(繪本太閤記)의 김여물 장군에 대한 기록

고니시 유키나가 함 충주(小西行長 陷 忠州)

조선의 대왕으로부터 충주방어의 대장군으로 명을 받은 신립은 조령의 험저(??)에 진을 치고 일본 세를 방어하려고 군졸을 인솔하여 나아가 군대를 편성하였는데 상주에서 이일의 군대가 패하였다는 소식에 크게 놀라 조령을 지킬 것을 포기하고 충주성에 들었다. 이때가 명의 만력 이십년 사월 이십칠일이었다.

 

저녁 무렵 한명의 군졸이 달려와서 신립에게 고하기를 왜군이 이미 조령을 넘어 이곳에 다다랐습니다. 하니 너무 놀라 펄쩍뛰면서 성을 나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는데 이로 성중은 크게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신립은 갑옷을 벗고 낡은 옷을 입고 성 밑에 있는 주막에 잠입하여 그 밤을 지내려고 했는데 이 밤에 일본세가 오는 형세는 없었다.  겁 많은 태도를 조롱하여 꾸짖고, 거짓을 꾸며 고했다고 분하게 여겼다.  동이 틀 무렵 성내로 돌아가자고 청하는 자를 붙들고 목을 베어 버렸다.

 

그런데 小西攝津守行長은 상주를 함락하고 용감하게 조령으로 와보니 그 형세가 험하고 양 협곡이 험준하여 높았다. 넝쿨나무가 무성히 나 엉켜있고 이럴 정도의 요새지에 방어 병 한 사람 없이 비여 둔 것은  앞 전투에서 공포가 컸음일까 -<중략>- 일본세가 잠시 숨을 죽인 후 함성을 지르면서 험하고 가파른 고개를 타고 넘었다. 병마를 둘로 나누어 말이 달리면서 일으키는 먼지를 뚫고 함성을 지르며 나아가는데 이 때 조선의 장군 신립은 하천변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세의 이런 형세를 보고 심신이 떨리어 병졸들은 도망하든지 뒤의 책망이나 부끄러움에 강 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중략>- 이때 군중에서 키가 칠 척이나 되고 얼굴에 수염을 좌우로 갈라 기르고 양 눈이 둥글고 큰 조선장군이 전신에 피를 흘리면서 손에는 큰 도끼를 들고 검고 굳센 황토색 말에 백담(白淡:희 백색의 천)을 두른 자가 나타나  ‘김여물이 나다’하고 크게 꾸짖고 小西勢의 중앙으로 단마(單馬)로 달려 나와 가까이 있는 갑옷무병(甲衣武兵) 8,9인을 베고는 말에서 더 나아가지는 못하고 싸웠다.

 

이 싸움은 진정 놀랄만한 싸움이었다. 큰 창을 빼어들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김여물, 그는 또한 큰 도끼를 휘두르며 치고 또 치고 했다. 한번 들어가고 한번 나오고 해서 이십여 합전을 벌렸으나 빈틈이 조금 생기는 틈을 이용하여 荒御田勘左衛門이 횡창을 들고 들어가 갑자기 김여물(金汝?)을 말에서 밑으로  끌어당겨 떨어뜨리니 모여들어온 군졸들이 머리를 취했다.

 

이로써 조선군은 흩어지고 충주성도 몰락했다. 대장군 이일은 이 와중에 명을 살려 동쪽 산 계곡으로 빠져나갔다. 小西行長은 ‘충주 성 전투’에서 삼천여군의 수급을 취하여 浮田秀家卿에게 보내고 승리의 소식을 나고야(名護屋:豊臣秀吉의 재소지)에 보고했다(*회본태합기기록 개역).


2.일본백과사전(日本百科辭典)

釜山전투에서 釜山이 함락된 後 漢城의 朝廷은 名將申砬에게 희망을 걸었다. 신립은 북방의 여진과의 전투에서 수많은 공훈을 거둔 유명한 장군이었다. 신립은 유능한 장군이었지만 그는 조령의 관문에서 방어에 실패하고 충주로 퇴각했다. 신립자신도 충주에서는 일본군을 방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신립은 일본군이 가깝게 접근했나는 사실을 알고 충주부근의 평야에서 일전을 벌릴 것을 결심했다. 그의 군세는 8,000명의 정예병 군단이었음으로 신립은 일본군을 격파하리라 확신했다.

 

신립은 강을 따라 기병부대를 배치했다. 이 들 부대는 실전경험도 있었다. 측면과 배후에는 논과 강을 뒤로하고  방어망을 보강함과 동시에 배수의 진을 침으로서(*달천을 등지고 탄금대(彈琴臺)에 진을 치다<난중잡록에서>) 일본군의 크나 큰 총포의 소리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철저히 싸울 결의를 다짐하고 있었다. 평지에서 일전을 펼치려고 한 것은 일견 타당한 판단으로 보이기는 하나 그곳에 무수히 자라 있는 여러 가지 식생 때문에 군의 이동을 은폐하기 쉬운 장소였다.

 

불행하게도 신립은 수천정의 화총(火?銃)에 의한 일제사격으로 적을 무너뜨리는 일본군의 전술을 몰랐기 때문에 신립이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적었다. 小西行長이 이끄는 18,700명의 보병은 이 전법으로 싸울 준비를 했다. 신립은 일전이 벌어졌을 때 영웅적으로 일본군을 향하여 돌진했다. 小西行長은 기병부대로 하여금 집중적으로 사격을 가하여 조선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신립은 부대를 재편성하여 다시 돌격했으나 또다시 화총의 집중사격을 받아 강 쪽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에서는 조선 병 수천인이 익사하거나 일본군의 창에 찔려 죽었다. 신립은 탈출했으나 후에 자살했다. 일본군은 조선 병 3000인을 죽이고 최소한의 피해로 충주를 탈취했다. 역사가 사이에는 신립이 취한 전술은 최악이었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최선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다른 많은 조선의 장군들은 조령의 관문에서 방어에 대하여 의론이 있었으나 전군이 기병이었음으로 험준한 산지에서의 전술은 옳은 방법은 아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확실히 조령의 관문을 지키고 있었다면 小西行長을 방어할 수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나, 이미 일본의 제2군이 한성에 다다르고 있었다(*특별한 이득이 있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전투에 참전한 일본의 주요 지휘관은 小西行長, 宗義智, 松浦?信, 有馬晴信 등이고, 조선의 지휘관은 신립, 김여물, 이일, 이종장 등 이었다.


2.조선의 기록


1.선조실록 25년(1592) 4월 17일

신립이 충주에서 패배하다. 신립(申砬)이 충주(忠州)에 이르렀을 때 제장(諸將)들은 모두 새재[鳥嶺]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적의 진격을 막자고 하였으나 입(砬)은 따르지 않고 들판에서 싸우려고 하였다. 27일 단월역(丹月驛) 앞에 진을 쳤는데 군졸 가운데 ‘적이 벌써 충주로 들어왔다.’고 하는 자가 있자, 신립은 군사들이 놀랄까 염려하여 즉시 그 군졸을 목 베어서 엄한 군령을 보였다. 적이 복병(伏兵)을 설치하여 아군의 후방을 포위하였으므로 아군이 드디어 대패하였다. 입(*申砬)은 포위를 뚫고 달천(?川) 월탄(月灘)가에 이르러 부하를 불러서는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고 하고 빠져 죽었다. 그의 종사관 김여물(金汝?)과 박안민(朴安民)도 함께 빠져 죽었다.


2.난중잡록

신립(申砬)이 용인(龍仁)을 지나다가 왜적의 기세가 창궐한다는 소식을 듣고 밀계(密啓)를 올려, “왜적의 기세가 무척 성해서 정말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사세가 답답하고 절박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운운.” 하니, 도성에서는 신립을 간성(干城)같이 믿고 있었는데 답답하고 절박하다고 한 밀계의 소식을 듣고, 사민(士民)들이 들끓고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도망쳐 흩어지다.

 

신립이 달려 충주(忠州)를 지나서는 조령(鳥嶺)을 막아 적의 길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막힌 데가 많아서 말 타고 활쏘기가 불편하겠기로 후퇴하여 충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도중에 이일(李鎰)을 만났다. 신립이 왜적의 정세가 어떤가를 물으니, 이일이 대답하기를, “이 적은 경오 년(1570, 선조 3)과 을묘 년의 그것과는 견줄 게 아니며, 경오 년의 왜적은 겨우 웅천(熊川) 두어 고을을 함락시키고는 패하여 돌아갔고, 을묘 년의 왜적은 달량(達梁)을 함락시켜 병사(兵使) 원적(元迪)을 죽이고는 잇달아 강진(康津) 등의 고을을 함락하여 영암(靈巖)에까지 왔다가 패하여 돌아갔다. 또 북쪽 오랑캐같이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이제 험준한 데를 점거하여 적의 길을 끊지 못하였으니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서울이나 지키십시오.” 하니, 신립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너는 패군(敗軍)한 데다 또 군졸들을 경동(驚動)시키니 군법으로는 목 베어야 마땅하다마는, 왜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을 세워서 속죄하여라.” 하고, 마침내 달천(?川)충주의 땅에 주둔하다.

 

27일. 전라 방어사 곽영(郭嶸)과 조방장(助防長) 이지시(李之詩)가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남원(南原) 운봉(雲峯)으로부터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영남을 구원하러 가다. 흉악한 왜적이 조령을 넘어 달천으로 달려 들어오니 신립은 패전하여 죽었다. 당초 적병은 두 재[嶺]의 넘기 어려움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당도하자 산길은 고요하고 사람의 발자취도 전연 없는지라 마침내 크게 기뻐하여 날뛰면서 곧장 충주를 범했다.

 

한편 신립은 여러 도의 정병(精兵)과 무관 2천 명, 종족(宗族) 1백여 명, 내시위(內侍衛)의 군졸 등 도합 6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령으로부터 다시 충주로 후퇴하였는데, 종사 김여물(金汝?)이 이일(李鎰)의 말에 따라 산길을 굳게 지키자고 요청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고, “바다를 건너온 왜적은 빨리 걷지 못한다.” 하고는, 마침내 달천을 등지고 탄금대(彈琴臺)에 진을 쳤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척후장(斥候將) 김효원(金孝元)ㆍ안민(安敏) 등이 달려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다가왔습니다.” 하고 고하자, 신립은 그들이 군중을 놀라게 한 일에 노하여 당장 그 두 사람을 목 베고 이어 영을 내려 진의 대오를 바꾸게 하였다. 그러나 적병이 이미 아군의 뒤로 나와 천 겹으로 포위하자 장병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모두 달천의 물로 뛰어들었다. 왜적이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러 마구 찍어대니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으며, 신립과 김여물도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병은 충주와 상주 두 전투에서 다 섬멸되었다고 한다.

 

3.백과사전

김여물 (조선 충신):[金汝?]1548(명종 3)~1592(선조 25).

본관은 순천. 자는 사수(士秀), 호는 피구자(披구子)·외암(畏菴). 찰방 훈(壎)의 아들이고, 영의정 유(?)의 아버지이다. 1577년(선조10)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했다. 병조낭관을 지내고 충주도사(忠州都事)를 거쳐, 1591년 의주목사로 있을 때, 서인 정철(鄭澈)의 당으로 몰려 파직되고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순변사 신립(申砬)이 그의 무략과 재능을 알고 자기의 종사관으로 임명해줄 것을 왕에게 간청하여, 함께 충주 방어에 나섰다.

 

신립이 새재[鳥嶺] 방어의 어려움을 들어 충주로 나아가 배수의 진을 치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새재를 점령하여 지키든지 높은 언덕을 이용하여 역습하자고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결국 충주의 달천(?川)을 등지고 배수진을 쳐 탄금대(彈琴臺) 아래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이를 막지 못하자 신립과 함께 강에 투신 자결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788년(정조 12) 장의(壯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4.충주전투의 배경

충주목(忠州牧)은 태종 때부터 충청, 경상도의 조세미곡이 남한강변에 있는 금천창(金遷倉)과 가흥창(可興倉)까지 육로로 수송되어 미창(米倉)에 보관하였다가 남한강을 타고 한양으로 조운되었던 도회지였다. 고지도를 살펴보면 충주는 육로와 남한강 수로의 결절에 위치하여 경제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 지도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여 그렸다. 읍치 북쪽에는 신립과 여물장군이 배수진을 쳤던 탄금대의 모습이 나타나 있고 수순사(水殉死)했다는 달천도 나타나 있다. 남한강에 연한 금천(金遷)은 수운(水運)의 이점이 가장 큰 취락이었다. 금천(金遷)은 동남쪽으로 영남과 충청의 물화를 받아들이고 서북쪽으로는 한양과 생선 및 소금을 교역하는 민가가 빗살처럼 촘촘하여 한양의 여러 강변 마을과 흡사하였는데 배들이 잇달아 정박하여 하나의 큰 도회가 될 정도였다.

 

인근의 가흥창(可興倉)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조운창으로 경상도의 일곱 고을과 고개 북쪽 충청도의 일곱 고을의 세곡을 거두고 수운판관(水運判官)을 시켜 뱃길로 서울까지 세곡을 실어 날랐다. 또한 충주의 북창이 이후에는 조운의 번화지로 번성하면서 이곳은 일본군으로는 전량미를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전략적 기지였다. 또한 한양으로 진군하는 근거지로 빼 놓을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전략적인 요충지를 적에게 내줄 수 없었던 것은 조정이나 전략가들이 충분히 알고 있었고 이곳의 방어가 무너지면 곧장 한양으로 진군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한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령의 험준한 고개를 배수진으로 하여 충주를 지키는 것이 한성을 지키는 최선의 전략 전술이라 생각하고 실천에 옮겼으나 세적열세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최선의 전략 전술이 죽어서 나라에 충성을 다할 수밖에 어떤 길이 있었을까 상상이 된다. 충주가 무너지니 조정은 곧 바로 한성을 떠날 채비를 했다.

 

5.기록을 통해본 충주탄금대전투의 소고

김여물 장군은 조령의 험한 지세를 이용해서 왜병을 방어하자고 주장했으나 신립에게 거절당했다. 지세를 활용하여 조령에서 왜병을 방어하자고 한 김여물 장군의 판단이 옳았는지는 모를 일이나, 당시 조선군의 주력부대가 대부분 기마병으로 조직되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신립은 충분한 기동력으로써 보병이 주력인 일본군을 압도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일본의 기록을 보면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평야에서 상대한다는 결정은 잘못된 전술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조선의 8,000여 병력으로 18,700여명의 조총부대를 부수기는 역부족이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500人, 조선군 사망자는 3,000人으로 기록하고 있어 군사와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바쳐 혈전을 감행한 결과는 기대 이상으로 성과를 올린 전투였다.

 

회본태합기(繪本太閤記)에는 김여물(金汝?)장군과 일본군 荒御田이 마상에서 겨루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김여물 장군이 탄 적토마와 얼굴 양쪽으로 기른 강직한 검은 수염이 장군의 기개를 말해 주는 듯 묘사하고 있어 왜병이 무척 두려워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에 뛰어 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절개보다 적병을 한 놈이라도 처서 죽이고 마지막까지 목숨을 다하는 것이 초개같이 쓰러져 있는 병사들에게 지휘관으로써 미안함을 덜고,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김여물 장군의 군인 정신이 말로 진정한 임전무퇴의 확실한 군인정신이 아니었을까 한다. 신립 장군과 김여물 장군을 비롯하여 이 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충성스런 조선군 3000여명의 병사들의 명복을 충심으로 빌어 마지않는다.

 

  
▲ 왜군 적장과 겨루는 김여물 장군 일본의 회본태합기繪本太閤記라는 책에 실려 있는 김여물 장군의 모습. 적토마를 타고 수염이 얼굴을 뒤덮은 왼쪽의 이가 김여물 장군이다. 왜군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심어줄 만큼 당시 김여물 장군은 결사항전을 펼쳤다. 

 

 

출처 :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글쓴이 : 코스모스 방안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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