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쿠후 시대의 일본에서는 칼의 성능과 자신의 기술을 시험해 보기위해 인체를 시험 베기 하는 일이 많았는데, 특히 연고가 없는 거지의 경우 아무도 모르게 시험 베기의 재물로 많이 희생 당했다. 또한 전문적으로 시험 베기만을 하는 시험관들이 존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야마다 아사에몬(山田淺右衛門)이 유명하였다.
에도 바쿠후 시대에 코기오타메시고요(公儀御樣御用)로서 칼의 시험 베기 역할을 맡은 야마다가(山田家)의 당주를 지칭하는 이름이 야마다 아사에몬(山田淺右衛門)이었다. 후에는 사형 집행인을 겸하게 되었기 때문에 '머리 베는 아사에몬'이라 불리게 된다. 야마다가는 친자라도 팔이 없으면 가문을 계승하지 못하게 하고 양자를 들였다. 코기오타메시고요(公儀御樣御用)는 바쿠후의 공식 직함이 아니었기 때문에 바쿠후로부터 영지를 받지 못하였고 신분상으로는 낭인이었다.
처음에는 칼의 시험 베기만 했을 뿐 사형 집행인은 아니었으나, 바쿠후의 정식 참수 관리가 직접 사형 집행인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아사에몬의 입장에서는 시험 베기를 위해서 시체가 필요했기 때문에 사형 집행을 대행하게 되었다.
사형 집행을 대행 했지만 대행비는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체의 대금을 바쿠후의 관리에게 주었기 때문에 사형 집행으로 인한 경제적인 이득은 없었다. 그 대신에 필요한 시체를 손에 넣을 수가 있었으며 시체에 시험 베기 1회로 사형 집행 대금의 10배 이상의 사례금을 받았다. 또한 부업으로 칼의 감정도 하였다. 또한 사람의 간장(肝臟)은 인담환(人膽丸)이라고 하는 고가의 한방약으로 취급되었는데, 그것을 파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가된 것은 야마다 아사에몬 뿐이었다. 이런 이유로 야마다가는 낭인의 신분임에도 3~4만석의 다이묘에 필적할 정도로 부유하였다.
야마다 아사에몬은 시험 베기를 한 실적을 활용하여 명검 도록을 작성하였는 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5대 당주인 야마다 아사에몬 요시미츠(山田淺右衛門)의 카이호 겐쟈쿠(懷寶劍尺)이다.
카이호 겐쟈쿠(懷寶劍尺)에는 명검들을 4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사이죠 오와자모노(最上大業物) 12工, 오와자모노(大業物) 21工, 료와자모노(良業物) 50工, 와자모노(業物) 80工, 大業物・良業物・業物混合 65工 등 모두 228工이 수록되어 있다.
칼을 시험하는 방법은 뼈가 굳은 중년 남성 시체(참수형을 당한 시체이기 때문에 머리가 없음)의 가슴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한 번에 베는 인체 양단이었다. 등급은 10회 시도에 9회 이상 성공하면 사이죠 오와자모노(最上大業物), 7~8회 성공하면 오와자모노(大業物), 5~6회 성공하면 료와자모노(良業物), 2~4회 성공하면 와자모노(業物)의 4등급으로 나누었다.
만화 원피스에서도 이것을 그대로 이용하여 조로의 와도우 이치몬지(和道一文字)는 오와자모노(大業物), 유바시리(雪走)는 료와자모노(良業物), 산다이 키데츠(三代鬼徹)는 와자모노(業物)로 설정하고 있다.
야마다 아사에몬이 카이호켄샤쿠(懷寶劍尺)에 기재된 모든 칼을 시험 베기 하지는 않았으나, 그 중 상당수를 실제로 시험 베기 했고, 또한 시험 베기 하지 않은 칼도 축적된 시험 베기 경험을 바탕으로 칼을 직접 보고 평가한 것이기 때문에 카이호켄샤쿠(懷寶劍尺)의 등급 분류의 신빙성은 높은 편이다. 그러나 유명한 칼들 중 야마다 아사에몬에게 의뢰되지 않은 것들은 제외되었으며, 무라마사(村正)는 토쿠가와가(德川家)의 거부로 시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카이호켄샤쿠(懷寶劍尺)에 수록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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