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일본의 총포 전래 日本의 銃砲

구름위 2013. 7. 10.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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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혼란기의 종언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화승총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고전한 가장 큰 이유도 일본군의 화승총이었다. 즉, 화승총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전국시대의 일본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강력함을 자랑하는 총포는 언제 일본에 전래 되었을까?

 

    총포의 일본 전래를 말하기 앞서 당시 유럽의 상황을 대략 알아보자. 유럽에서는 15세기 말에 화승총이 개발되었고, 또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통일 국가를 건설했다. 이들은 교역을 위해 아시아로 진출하려고 하지만, 지중해는 이탈리아 상인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동쪽에는 이슬람 국가들이 있어, 지중해를 통한 아시아와 직접 교역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아시아와의 직교역은 엄청난 부를 보장하는 것이었고, 여기서 지중해를 통하지 않은 아시아의 직항로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게 되었다. 또한 항해술의 발달과 지구가 둥글다는 과학적 사실 또한 재발견되어 대항해시대의 막을 올리게 된다.

 

    총포의 일본 전래 이전의 중요한 지리상의 발견은 아래와 같다.

 

1492년 콜롬부스 서인도 제도 발견

1498년 바스코 다 가마 희망봉을 경유한 인도 항로 발견

1497년 세바스찬 카보트 북아메리카 탐험

1499년 아메리고 베스푸치 남아메리카 탐험

1513년 발보아 파나마 지협 횡단

1519년 마젤란 세계일주 시작

 

    이러한 탐험가들에 의해 신항로와 새로운 지리상의 발견이 이루어지고, 유럽인들은 상인에 의한 무역만이 아니라, 식민지 개척, 기독교 전파를 위해 해외로 진출하게 된다.

 

    포르투갈은 1515년, 인도 서부 고어에 공창을 설립했다. 공창의 설립 목적은 대소의 총포를 제조하여, 아시아에서의 주요한 교역 상품으로 거래하기 위해서였다. 목표는 1만정의 총포 생산이었지만, 목표가 달성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원재료인 철은 인도에서 구하였고, 총포 제조 기술자는 유럽에서 보충되었다. 그리고 아시아에 대한 무역을 강화하기 위해 1525년에 멘테스 핀트가 고어에 부임헸다. 포르투갈인들은 해로를 통해 아시아 각지에 총포를 교역 상품으로 가지고 다니며 판매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존재와 정세에 대해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금은이 풍부하고, 전란의 시대에 있던 일본은 비싼 총포를 판매할 수 있는 최적의 무역 상대라 판단 되었을 것이다. 포루투갈 상인들은 1543년 마카오 부근에서 정크선으로 일본으로 출발하였으나, 폭풍우를 만나 표류한다. 그러나 운 좋게도 목적하던 일본의 타네가시마(種子島)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에 의한 총포의 전파                                     

 

    《천문 12년(1543) 8월, 한 척의 커다란 중국배가 폭풍우에 밀려, 타네가시마의 남단 카도쿠라미사키(門倉岬)에 표류했습니다. 승선자는 낯선 복장을 하고 있었고 말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마을의 책임자는 곤란했습니다만, 승선자 중에 고호(五峰)라는 이름을 가진 중국인이 있어 그 사람과 모래 위에 글자를 쓰는 것으로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배에는 포르투갈인의 상인이 타고 있으며 무역을 목적으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타네가시마에 도착한 지 며칠 후, 승선하고 있던 포르투갈인들은 섬의 영주인 타네가시마 토키타카(種子島時堯 : 1528~1579)와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3명의 포르투갈인들은 각각 길이가 3척(약 90 cm)정도의 무거운 것 같은 막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다른 쪽의 끝은 막혀있었습니다. 안에 이상한 약을 넣고 작은 납구슬(나마리다마)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막대를 들어오려 몸의 앞에 두고 한쪽 눈을 감아 목표를 겨냥해 불을 지르자 일순 번개와 같은 빛과 소리가 나며 목표를 정확히 맞추었습니다.》

 

    토키타카는 젊은 영주였지만 총포의 위력에 완전히 놀라 앞으로의 시대에 병기로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2정의 총포를 큰 돈을 지불하고 구입했다. 이때 총포 1정당 1000금을 지불했는데, 1000금은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1억에 달하는 거액이다. 토키타카는 단순히 총포를 구입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포르투갈인으로부터 구입한 총포를 기초로 시노카와 소시로(篠川小四郎)라는 가신에게 화약의 조제법을 배우게 했다.

 

    또한 수명의 대장장이를 모아, 총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게 한다. 그러나 이들은 총신의 바닥을 막을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것은 나사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당시 일본에는 나사의 제조법이 아직 알려지기 전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다음해에 온 외국선에 총포 기술자가 한사람 타고 있었다. 그에게서 바닥을 막는 방법을 배우게 되고 마침내 총포 제작에 성공했다. 그 후 불과 1년 만에 수십정의 총포를 제작할 수 있었다.

 

 

총포가 최초로 전래된 타네가시마

 

    근래에는 동남아시아에 전파되고 있던 총포가 1543 년 전후에 왜구 세력에 의해 일본의 복수 개소에 유입되어 전래 당초에는 사냥용의 소총으로서 이용되고 있었다는 설이 우다가와(宇田川)교수에 의해 주장되어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제작된 총포가 포르투칼인들에 의해 동남아시아에 판매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포르투갈인들은 동남아시아와 중국에 총포를 판매하고 있었고, 이들 중 일부가 왜구에 의해 일본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렇게 유입된 총포를 연구하여 제작하려고 하는 시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자체의 총포 제작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왜구에 의해 총포가 이미 전래되었건 말건 타네가시마가 일본 총포의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변동될 수 없는 사실이다.

 

    타네가시마 전래 이후 총포의 제작기술은 순식간에 일본 전역으로 확장된다.

 

◆ 쿠니토모(国友) : 타네가시마 토키타카는 포르투갈인으로부터 구입한 2정의 총포 가운데 1정을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사(1533~1611)에게 헌상했다. 요시히사는 그것을 다시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하루(재위1521~1546)에게 헌상했다. 요시하루는 총에 무관심했던 것 같지만, 그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총에 대해 매우 흥미를 가졌다.

    요시테루는 검술의 달인이기도 한데, 이러한 그의 성격으로 보아 무서운 위력을 자랑하는 총포에 무관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칸레이管領)의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통해 알게 된 오미의 사카타군 쿠니토모의 대장장이인 후지구로 사에몬에게 수중의 총포를 주어 제조를 명했다.

 

◆ 네고로(根来) : 또한 타네가시마에 와 있던 츠다켄모츠(津田監物)에 의해 키이에 전파되어, 네고로사의 승려인 미요산(明算)이 사카이 출신의 시바츠지(芝辻)라는 사람에게 제조시켰다.

 

◆ 사카이(堺) : 이것과는 별도로 사카이의 상인인 타치바나야가 타네가시마에 머물면서 기술을 습득한 후 사카이로 돌아가 총포 제작 기술을 전했다.

 

◆ 이즈(伊豆) : 또 타네가시마로부터 출항한 배가 이즈에 표류해, 승선하고 있었던 타키토시의 가신 마츠시타 고로 사부로에 의해 총포가 관동지방에도 전해졌다.

 

 

초창기 총포 제작 지역

 

    이렇게 해서 순식간에 오미의 쿠니토모, 기슈의 네고로, 이즈미의 사카이, 이즈등의 각지에 총제작 기술이 전해져 총포의 제조가 일본 전역에서 시작되었다. 오미의 쿠니토모와 히노, 기슈의 네고로, 이즈미의 사카이는 총포의 주요 생산지로서 번창했지만, 네고로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기슈 공략의 영향으로 모모야마기 이후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쿠니토모, 히노, 사카이는 그 후도 총포의 생산지로서 번창해 높은 기술력을 자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