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오쓰 사건

구름위 2013. 7. 1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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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 차림의 니콜라이 2세)



1. 오쓰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성년을 맞아 해외순방에 나선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가 일본에 들렀을 때 경호를 맡은 순사가 그를 암살하고자 한 사건입니다. 당시 일본 조야는 러시아가 선전포고할 것이라는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만 그럭저럭 원만하게 해결되었습니다.


2. 니콜라이 2세는 사촌인 그리스 왕자 게오르기오스(대신 비테는 그의 품행을 아주 나쁘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왕실 왕자들의 모범이 될 점이라고는 전혀 없다")와 동행했는데, 이들 일행은 트리에스테(와아 어디서 많이 들은 이름이다)에서 뱃길 여행을 시작, 이집트-봄베이-실론-싱가포르-자바-사이공-방콕-홍콩-광둥-상하이-일본-블라디보스토크의 여정을 거칠 예정이었습니다. 원래는 친동생인 게오르기도 함께 올 예정이었으나 중도에 폐렴 증세를 보여 인도에서 배를 내려 귀국합니다.


3. 4월 27일에 나가사키에 도착한 황태자는 다케히토 친왕(*)의 공식 영접을 받으며 일정을 시작합니다. 당시 근처인 이나사에 머무르고 있던 8명의 러시아 해군 장교들이 니콜라이를 찾았는데, 황태자는 이들 전원이 일본인 아내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소 부러운 감상을 일기에 적어놓고 있습니다. 나가사키에 도착하기 전에 피에르 로티의 <국화 부인>을 읽으면서 일본 여자에 대한 환상을 가진 모양이라고 분석하더군요. 나가사키는 러시아와 오랜 접촉을 가진데다 서구 문화가 유입되는 곳이라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 아리스카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은 황태자가 머물 집주인이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황태자의 방문 소식을 들은 메이지 천황이 가스미가세키에 있는 다루히토 친왕의 궁을 황태자의 숙소로 정하고, 저택의 단장을 위해 2만 엔의 소요비용을 하사했거든요.


4. 나가사키에서 며칠간의 유흥을 즐긴 후 황태자 일행은 가고시마로 갔습니다(5월 6일). 가고시마 전 번주이자 공작인 향년 51세의 시마즈 다다요시는 이때까지도 상투를 자르지 않고 양복을 입지 않을 정도로 보수적이고 외국인을 싫어했지만, 국가의 손님이라는 생각에 황태자를 초대했던 거죠. 때문에 시마즈가의 황태자에 대한 접대는 철저하게 옛 방식 그대로였습니다.


 

(시마즈 다다요시)



먼저, 황태자가 시마즈가 저택에 당도했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미녀의 행렬이 아니라 조상 전래의 갑옷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려입은 170명의 원로 사무라이였습니다. 이들은 다다요시의 아들 다다시게의 지휘하에 사무라이 춤 공연(사진이 남아 있습니다)을 했고, 다다요시 본인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마상에서 활을 쏘아 움직이는 표적을 맞히는 이노오우모노(犬追物 : 살아있는 개를 표적으로 활을 쏘는데, 개가 다치지 않도록 화살 끝을 뭉툭하게 해 둡니다)를 선보였습니다. 황태자는 가고시마의 접대에 크게 만족했는데, 일단 이 곳에서 서양인을 단 한 사람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황태자는 이를 가리켜 이 고장이 "오염되지 않은 증거"라고 평했지요), 지극히 보수적인 시마즈 다다요시의 성향이 황태자 자신과 잘 맞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수행원 일부는 가고시마를 싫어했습니다. 가고시마가 "사무라이주의"와 외국인 혐오증의 발상지이자 신도와 봉건적 전통의 소굴이었기 때문이죠. 황제의 수행원이었던 우프톰스키 공작은 "사무라이춤의 음악은 음울하기만 했고, 무사들이 질러대는 환성은 귀에 거슬리는 잡음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했습니다. 가고시마에서는 숙박하지 않고 저녁에 출항합니다.


5. 고베에 도착한 것은 5월 9일입니다. 고베 시내를 구경한 후 기차를 이용해 교토로 갔고, 숙소인 호텔에서는 기껏 준비해 둔 서양식 방을 거절하고 일본식 다다미방을 달라고 해서 묵었습니다. 잠들기 전에는 갑자기 교토 유녀(京女郞, 교조로)의 춤을 보고 싶다고 해서 시내 누각에 갔다옵니다. 니콜라이는 나가사키에서도 게이샤의 춤을 보러 숙소를 빠져나간 전과가 있었죠.
5월 10일에는 시내 관광과 쇼핑을 했는데, 1만 엔 어치의 미술품을 구입하고 2백엔을 빈민 구제를 위해 기부했다고 합니다. 여기저기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구두를 벗어야 하는지 확인했다고 하는군요.
황태자가 오쓰에 간 것은 교토 체제 셋째날인 5월 11일 아침이었습니다. 오쓰의 몇몇 명승지를 방문한 다음 배를 타고 비와호를 유람하고, 현청에서 현의 주요 인사들과 오찬을 나눈 후 교토로 돌아오는 길에 문제의 "오쓰 사건"이 터집니다.


6. 당시 황태자는 줄을 지어 선 인력거 중 다섯 번째에,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여섯 번째에, 다케히토 친왕이 일곱 번째 인력거에 타고 있었습니다. 인력거 대열이 현청에서 예닐곱 마장 정도 떨어졌을 때 경비 경찰 중 하나였던 스다 산조가 황태자에게 뛰어가 양검(洋劍) - 당시 일본 군과 경찰은 모두 프랑스식 군도 및 검술을 제식으로 채용하고 있었습니다. 일본도가 아닙니다 - 을 휘둘렀습니다. 첫 일격에 황태자의 모자 테가 잘리고 오른쪽 귀 위 관자놀이에 상처가 났습니다. 당황한 니콜라이가 도망치는 사이 뒤쪽 인력거에 타고 있던 게오르기오스가 그날 산 대나무지팡이로 암살범을 잠시 저지하고, 그 사이 니콜라이의 인력거 차부가 달려들어 암살범을 쓰러트렸습니다. 이때 뒤를 따라온 게오르기오스의 인력거 차부가 범인이 떨어트린 칼을 주워 범인의 목과 등을 벱니다. 니콜라이는 자신의 무사함을 보여주어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가능한 오래 서 있었다고 하죠. 이후 1916년까지 니콜라이는 매년 5월 11일이 되면 교회에서 게오르기오스에게 감사하는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의 목숨을 구한 것은 게오르기오스보다는 두 인력거 차부였는데요.


7. 니콜라이의 일기에 의하면, 그는 일본인들에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사건 직후 일본인들이 잘못을 사죄하는 듯이 길바닥에 꿇어앉아 합장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고 쓰고 있고, 다케히토 친왕에게도 "재수 없게 한 미치광이 때문에 가벼운 부상을 입었으나, 이로 인해 이 나라를 나쁘게 기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요. 다케히토 친왕에게 한 말은 외교적 수사일 가능성도 크지만 자신의 일기에까지 감정표현을 조심할 것 같지 않습니다.


8. 이 일로 인해 니콜라이의 대일감정이 악화되었다고 보는 시각은 당시 러시아 최고의 관료라고 공인되던 세르게이 비테 백작이 대표일 겁니다. 비테는 그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니콜라이 2세의 동방에 대한 팽창정책이 "일본은 약소국"이라는 판단 못지 않게 오쓰에서의 원한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9. 그 게시판에 올라온 "퍼온 글"에서는 블라디보스톡에 황태자가 도착했을 때 러시아인들은 붕대를 두른 황태자를 보고 예상치 못한 모습에 너무 놀라 할 말을 잊었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황태자의 부상은 이미 부상 당일 전보로 페테르스부르크까지 알려져 있었으며, 니콜라이 2세는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을 때 쓴 자신의 일기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고 쓰고 있습니다. 메이지 천황이 알렉산드르 3세에게 직접 친전을 보냈고 황후는 러시아 황후 마리아 페오도로브나에게 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냈습니다.


10. 천황이 위문차 교토로 간 것은 피습 다음날인 12일입니다. 밤이 되어서야 교토에 도착한 천황이 곧바로 황태자를 방문하려 하자 러시아 공사는 밤이 깊었다는 구실로 방문을 거절했으며, 천황이 보낸 의료진도 러시아인 의사에 의해 황태자의 진료를 거절당했습니다. 상처가 가벼울뿐더러 붕대를 다시 푸는 것이 좋지 않고, 황태자가 낯선 의사의 진찰을 싫어한다는 이유에서였죠. 다음날 아침에 재차 진료를 신청했을때도 딱 잘라 거절당했고, 이후 황태자가 배로 돌아가면서 일본 의료진은 아예 접근을 거부당합니다.

11. 천황이 처음 황태자를 만난 것은 13일 아침, 황태자의 숙소인 도키와 호텔을 방문해서였습니다. 천황은 깊은 유감의 뜻과 함께 모국에 있는 양친에 대한 미안함을 전하고, 범인을 조속히 처벌할 것과 함께 회복 후에 황태자가 도쿄를 방문하고 일본 여러 곳을 둘러보아 주었으면 하는 뜻을 전합니다. 니콜라이는 한 미치광이 때문에 약간의 상처를 입기는 했으나 "폐하를 비롯한 일본 국민의 후의"에 감사하는 마음은 부상을 입기 이전과 다름이 없다고 대답하지요. 하지만 도쿄를 방문해도 되는지의 여부는 본국에서 결정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12. 13일 오후, "본국에서의 결정"이 도착합니다. 황태자에게 교토의 호텔에서 고베에 정박중인 군함으로 돌아가 정양하라는 것이었지요. 즉, 일본 체류 일정은 이것으로 끝난 겁니다. 당황한 천황이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하여 황태자가 더 머무를 것을 종용하자 러시아 공사는 "러시아인들이 황태자의 안전을 우려하고 있음"을 설명하며, 특히 "황후가 매우 걱정"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도리어 러시아 공사가 이토에게, "황태자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폐하께서 황태자를 내 자식처럼 여기시어 고베까지 따라가주실 수 없겠느냐"고 눈물로 탄원하지요. 이토는 "천황께서는 자상한 마음으로 허락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전했고, 천황은 다소 실망했지만 이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덕택에 니콜라이는 천황의 마차에 함께 타고 정거장으로 가서 함께 기차를 타고 고베로 가지요. 천황은 러시아 군함이 있는 부두까지 황태자를 동반하고 악수를 한 후 헤어졌습니다.


13. 5월 16일에는 니콜라이가 고베에 머무르고 있는 천황에게 전보를 보내 "아버지의 명으로 19일에 일본을 떠나야 한다"는 통고를 합니다. 천황은 송별연을 하겠다면서 19일 점심에 니콜라이를 고베에 있는 자신의 관저로 초대하지만 니콜라이는 배를 떠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이를 거절합니다. 대신 천황에게 자신의 배에서 오찬을 함께하자며 초청을 하지요.
이 소식을 듣자 천황은 즉시 승낙했지만 신하들은 공황에 빠졌습니다. 이들은 조선에서 있었던 대원군 납치사건 당시에도 "연회에 초청"하는 수법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거든요. 고베 항에 기항 중인 러시아 함대는 일본 함대보다 훨신 막강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천황을 실은 채 러시아로 가버리는 것은 여반장이었습니다. 대신들은 분명히 천황이 납치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메이지 천황은 "러시아는 선진 문명국이므로" 신하들이 걱정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지요.

천황은 다루히토 친왕과 요시히사 두 사람의 황족을 거느리고 약속대로 19일에 황태자의 배를 방문합니다. 오찬 분위기는 매우 즐거웠고, 동석했던 러시아 공사는 "천황이 그처럼 큰 소리로 담소하는 것은 처음 들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천황이 오쓰 사건에 대해 재차 사과하자 황태자는 "어느 나라에나 미친 사람은 있으며, 상처도 가벼우니 폐하께서 우려하실 일은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러시아 관습대로 식사중에 담배를 피우면서 서로 자신의 담뱃대를 상대방에게 권했는데, 천황은 평소 담배를 휴대하지 않았으므로(아마도 시종이 휴대했을 듯) 측근 중 누군가가 천황에게 미리 조언을 했을 것으로 보더군요. 오찬이 끝난 후 오후 2시에 천황이 배에서 내렸고, 니콜라이는 4시 40분에 출항하여 블라디보스톡을 향함으로서 일본 방문을 끝냈습니다.


14. 자, 황태자가 떠났다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지요. 일본 내에서의 뒷처리 문제가 남았습니다.

먼저, 일본 전국에서 황태자에 대한 사죄와 동정의 물결이 줄을 이었습니다. 영국 공사인 프레이저 부인의 일기에 따르면 황태자에게 보내진 갖가지 선물은 화물 운반용 고리짝으로 열 여섯 개에 달했고, 편지와 전보는 수만 통에 달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사태는 황태자가 떠난 다음날 교토 부청 앞에서 속죄하겠다면서 목을 찔러 자살한 하타케야마 유코라는 27세의 하녀였죠. 훗날 그녀가 죽은 자리에 위령비가 세워집니다.

그런 한편 암살범인 쓰다 산조는 누구에게도 동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 게시판 댓글에서 언급되었듯이 쓰다라는 성과 산조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 하게 하는 조례가 통과된 고장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다만 이는 그 댓글에서 논한 것처럼 현 단위에서 이루어진 일은 아니고, 한 "마을"에서만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야마가타현 모가미군 가나야마무라에서 저런 조례가 통과되었죠. 하지만 쓰다가 그곳 출신이라 그런 건 아닙니다. 쓰다는 본래 쓰(津)번의 번주인 도도(藤堂)가의 가신이었거든요. 이 도도 가는 임진왜란 때의 일본 수군 장수인 도도 다카도라의 가문 맞습니다. 쓰다 집안은 도도 가에서 대대로 의사 일을 했고, 백여 석의 가록을 받으며 봉직했다고 하는군요. 산조는 1872년에 육군에 들어가서 서남전쟁에 참전, 훈7등을 받고 1882년에 군조로 전역합니다. 전역 후에는 죽 경찰관으로 복무했고요.


15. 쓰다는 왜 이런 범죄를 저질렀을까요? 당시, 일본 황실 시의였던 독일인 벨츠 박사는 쓰다가 자신의 이름을 떨치고 싶어서 큰 사건을 저지른 헤로스트라토스와 같은 매명론자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위협도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대부분의 자료는 쓰다가 니콜라이를 암살하려 한 이유로 다음의 3가지를 꼽고 있습니다.

첫째, 러시아의 위협입니다. 쓰다는 러시아가 사할린을 획득한 것에 대해 매우 분개했고, 황태자의 일본 방문은 공격에 앞선 사전 정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째, 일본에 왔으면서도 곧바로 도쿄로 가서 천황을 만나지 않고 여기저기 들러 유람을 즐기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셋째, 사이고 다카모리가 살아서 러시아에 있고 곧 귀환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가 다시 집권할 경우 자신의 공훈이 몰수될지도 몰랐으므로 사이고의 귀환은 쓰다로서는 절대적인 거부 대상이었죠.


16. 쓰다가 나중에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애초에 사람이 많은 길거리가 아니라 한적한 비와호변의 삼정사에서 니콜라이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니콜라이와 게오르기오스가 풍경을 즐기려고 인력거를 타고 조금 높은 언덕으로 올라갔는데, 하필 이 장소에 서남전쟁 당시 전사한 오쓰 출신 군인들의 위령비가 있었습니다. 이 비문을 읽은 쓰다는 전쟁때의 영광스런 모습과 지금의 비참한 현실을 비교하면서 더 우울해졌고, 외국인들에 대한 울화가 한층 더 치밀었습니다. 게다가 두 왕자가 인력거 차부들과 경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정탐행위로 보였고요. 하지만 문제는 쓰다가 둘 중 누가 러시아 황태자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둘 다 죽여버릴까 하던 참에 러시아 황태자의 방문이 천황에게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내용으로 아침에 경찰서장이 한 훈시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암살을 단념했고, 비와호 옆의 가라사키 신사에서 접근할 기회가 다시 생겼을 때도 칼을 뽑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니콜라이가 오쓰를 떠나려 하자 정신이 들었지요. 지금 황태자가 떠나버리면 쓰다로서는 다시는 그를 만날 일이 없습니다. 차후 침략자가 되어 일본으로 돌아올 그를 막을 기회는 지금 이 순간뿐이었고, 절대 황태자를 살려보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암살을 결행에 옮긴 것이죠.


17. 일본 내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쓰다의 처벌 수위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쓰다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여겼으나 문제는 어떤 법 조항을 적용할 것이냐였지요. 일본의 원로와 각료들은 쓰다를 극형에 처하지 않으면 러시아가 복수를 위해 실력 행사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고, 천황과 3후(태황태후, 황태후, 황후), 황태자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가하려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명시한 형법 116조를 쓰다에게 적용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이 법조항에 외국 황족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었죠.
이미 범행 다음날인 5월 12일에 총리대신 마쓰카타 마사요시와 농상무대신 무스 무네미쓰는 대심원장 고지마 노보루를 관저로 불러 쓰다의 처벌 수위에 대해 논의한 바가 있었습니다. 형법 116조는 외국 황족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만큼 사법권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는 고지마에 대하여 마쓰카타는 "국가가 있은 다음에야 법률도 있는 것이지, 법률의 중요성을 강조하느라고 국가를 망각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반박합니다. 무쓰도 옆에서 "형법 116조는 특정 국가의 천황이라고 못박은 것이 아니므로 원용이 가능하다"고 마쓰카타에게 동조하지만 고지마는 끝내 양보하려 하지 않았지요.

다음날인 13일, 대심원 판사 전원은 116조의 적용을 거부합니다. 이에 대해서 사법대신 야마다 아키요시는 계엄령을 발령해서 그들의 재판권을 접수하겠다고 위협하지만 고지마 일행은 까딱하지 않지요. 여기에다, 같은 날 오쓰 지역 재판소장으로부터는 일반 형법의 모살 미수에 해당하는 292조와 112조에 의해 쓰다를 판결해야 한다는 보고가 올라옵니다.

사형에 반대하는 고지마의 논리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법의 잣대를 때에 따라 바궈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첫재고, 둘재는 외국의 사례를 제시하는 거이었지요. 사건 당사국인 러시아의 경우에도 타국의 군주에 대한 암살 미수는 러시아 황제를 암살하려 한 경우보다 형이 가벼웠으며, 독일의 경우에는 1년에서 10년의 형에 처하는 것만을 정해두고 있으므로 일본의 일반 형법보다 도리어 그 처분이 약했습니다. 또한 러시아의 보복 가능성에 대해서는 "러시아는 야만국이 아니므로, 일본의 합법적인 재판에 대해 폭력으로 항의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반론을 제기하죠.

논전이 계속되는 중인 5월 20일에는 천황이 고지마를 비롯한 관계자들을 교토 궁으로 불러 "이번 러시아 황태자 암살 미수 사건은 국가의 대사이니 주의해서 속히 처분하라"는 칙어를 내리는데, 이 애매모호한 칙어는 양 진영에서 각기 정 반대로 해석을 합니다. 각료 일동이야 당연히 "러시아인들을 자극하지 않도록"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고지마 등은 "헌법을 수호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지요. 당연히 싸움은 더 치열해졌습니다. 각료들은 각각 동향 출신의 판사들에게 접근하여 치열한 설득을 펼쳤고, 결국 두 명은 뜻을 꺾었지만 다섯 명은 끝까지 소신을 지켰습니다. 재판 전날인 5울 24일이 되어서 고지마에게 "116조 적용 불가"라는 통고를 받은 사법대신 야마다는 대경실색했고, 내무대신 사이고 쓰구미치는 노발대발했습니다. 사이고의 항의에 대해 고지마는 "헌법 수호야말로 성지를 지키는 일이자 법관의 양심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고, 사이고는 "그러다가 러시아 함대가 시나가와 만으로 쇄도하면 제국은 한 방에 박살이 날 것"이라면서 법관의 양심 운운하다가 나라가 망한다고 공박했으나 고지마는 끝까지 굽히지 않았습니다. 다른 판사들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다음날 열린 재판에서 쓰다 산조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습니다.


18. 당연히 러시아는 판결에 항의하기 위하여 함대를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오쯔 사건 이후 러시아 공사가 외무대신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러시아 황제는 쓰다가 사형을 받을 경우 천황에게 직접 감형을 부탁할 생각이었다고 하지요. 뭐, 다소 외교적인 멘트일 공산도 있습니다만 러시아로서는 쓰다가 무기징역을 받은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한 듯 합니다.


19. 쓰다는 북해도의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옥중에서 폐렴을 얻어 그해 9월 30일에 사망합니다. 수감 4개월만에 사망한 것과 관련지어 일본측이 그를 "처분"했다는 음모론적인 주장도 존재하나, 형무소에서 그를 특별히 "조치"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남쪽 출신인 쓰다가 북해도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을 거라는 점도 유의해야겠죠. 더구나 수감자 신분이었으니까요.


20. 고지만 본인은 후에 별 고생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1894년에는 귀족원 의원도 되었고, 오쓰 사건에 대한 수기도 썼지요. 다만 한동안 출판이 금지되다가 1931년에야 세상 빛을 봅니다. 관계자가 모두 세상을 뜬 뒤에야 책으로 나왔지요.


21. 니콜라이의 생명을 구한 두 인력거 차부의 이름은 무코하타 지사부로와 기타가시 이치타로입니다. 니콜라이는 이들의 용기에 대해 무척 감사했고, 이에 대한 보답을 위해 이들을 배로 불러 치하한 후 일금 2천 5백엔의 상금과 1천 엔의 연금(연금이니 주기가 있을 텐데, 얼마마다 주겠다고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메이지 천황은 낮은 신분인 두 사람이 갑자기 얻은 횡재에 신세를 망칠 것을 두려워하여 외무대신에게 일러 그들을 잘 타이르게 합니다.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는 천황의 명을 받들어 자신이 직접 그들을 불러 훈계한 후, 그들의 원 거주지인 교토 지사와 이시카와 현 지사에게도 훈령을 내려 그들을 장래에도 잘 돌봐주도록 하지요. 그 후의 이야기는 몰랐는데, 그 게시판 댓글을 보니 러일전쟁 발발 후 러시아 간첩으로 몰려서 개고생을 했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