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츠지 마사노부, 작전의 신

구름위 2013. 6. 1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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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과 성장기

일본의 이시가와 현 에누마 군, 히가시타니 오쿠무라(현재는 카가시 야마나카 온천)에서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숯을 파는 일을 했고 부락에서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나 야마나카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고야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하여 수석졸업한 후, 중양 유년학교를 거쳐 육사에 입학했다.
예과 2년을 마치고 사관후보생으로 카나자와에 주둔하는 보병 제 7연대에 약 6개월간 배속되었고, 그 후에 본과를 거쳐 다이쇼 13(1924년)년 7월에 육사를 졸업했다. 유년학교와 사관학교 모두 수석졸업으로 일왕이 하사한 은시계를 받은 바 있고, 견습 사관으로 예의 보병 제 7연대에 배속되어 3개월 후 소위로 임관했다. 1927년에는 중위로 승진했고 그 다음해에 일본육군대학에 입학하여 3년간 공부한 뒤, 1931년 11월에 졸업했으며 여기서는 아마노 쇼이치와 시마무라에 뒤를 이어 3등 졸업으로 일왕이 하사한 군도를 받은바 있다.
츠지 마사노부가 제 7연대로 복귀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중국 상하이에서 제 1차 상해 사변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제 9사단이 동원되어 츠지는 제 7연대 2중대장으로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다음해 5월에 상하이 정전협정이 조인되어 일본에 귀환한 후에는 사단을 대표하여 출정했던 시기에 관한 연설을 하여 신문에도 이름이 보도되었고, 같은 해 8월에 일본육군 참모본부 참모로 배속되어 제1과에 배속되었다.

2차대전 이전

참모본부에의 전출과 육군 사관 학교 사건

일본육군의 참모본부 제 1과는 편성 및 동원을 담당하는 부서로 당시 1과의 과장이 도조 히데키 대령으로 츠지 마사노부는 그를 여기서 처음 만났다. 다음해 8월에 대위로 승진, 12월에는 1부 제 3과로 옮겼다.
1934년 9월, 사관학교의 부교장으로 부임해 있던 토죠 히데키의 권유를 받아 모스크바 주재무관 자리를 대신 사관학교의 본과 학생대 중대장으로 임관한다. 육군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장교가 이런 직위에 근무하는 것은 전례가 없던일로, 츠지 마사노부가 본인의 의사로 이런 행동을 한 것은 당시 육사 본과에 입할할 예정이던 일본의 왕자(나중에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왕자)와 가까이에서 만나 친분을 쌓으려는 목적이었다는 설도 있으며 실제로 그는 츠지 마사노부가 중대장으로 근무하던 제1중대에 배속되었다.
당시 일본 사관학교는 1932년에 발생한 5.15 사건의 영향으로 군부에 의한 국가혁신을 목표로 하는 우익적 사상이 퍼지고 있었으며 그 리더격인 제 2중대의 무토 요이치 후보생은 이른바, 황도파에 속하는 6지대의 무라나카 코지 대위나 이소베 아사이치 일등 회계와도 접촉하고 있었으며 육사 제1중대의 사토 마사루 후보생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츠지 마사노부는 이 사건에 대하여 사토 후보생에서 보고를 듣고 그를 황도파에 스파이로 잠입시키기 위하여 무라나카 대위와 접촉하도록 명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장파 장교단과 사관학교 학생들에 의한 쿠데타 계획을 입수하게 되자 츠지는 이사실을 다시 참모본부의 카타구리 소좌 및 헌병 사령부의 츠카모토 대위에게 통보했다.
본래의 명령계통상 이 사건을 보고해야 할 육사의 학생대장인 기타노 대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던 것은 이를 정치 문제로 이용하려 했던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츠지는 직접 쿠데타 계획에 관한 정보를 육군 차관 하시모토 도라노스케 중장의 관사로 향하여 용의자들의 처벌을 강력 주장했다.
이리하여 헌병대는 무라나카 코지 대위 및 쿠데타 계획에 참여한 이들을 군법회에의 회부하게 되었고 츠지가 스파이로 활용했던 사토 마사루를 비롯하여 육사 학생들 5명도 퇴학처분을 받았으나 다른 청년 장교들은 불기소 내지 정직 처분 또는 벌금형으로 그쳤다. 사실, 이들의 계획은 현실성이 부족하고 주도면밀하지 못한데다가 애매한 것이었음이 후일의 조사에서 판명되었다.
아무튼, 이 육군사관학교 사건에서의 행동은 상당히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이 제기 되었고, 무엇보다 후보생을 자신의 스파이로 사용한 것이 문제시 되어 무라나카 및 이소베 등 재판에 회부되었던 이들은 그를 무고죄로 고발하고 격렬하게 비판하였으나 츠지 마사노부에 대한 처분은 근신 30일 및 미토의 보병 제2연대로 전속된 것 뿐이었다.
이 후, 이런 처분에 불만을 더한 무라나카와 이소베는 후일에 "숙군 의견서"를 공표한 바 있고 나중에는 더더욱 통제파와 황도파의 대립이 격화되어 후일의 2.26사건까지 이어지고 있다.

관동군에의 전출

2.26 사건이 있은 후인, 1936년 4월에 츠지 마사노부는 카타쿠라 소령의 알선으로 관동군 참모부로 전출된다.
병참 담당의 제 3과에 배속되어 만주 사변의 경과나 전술을 상세하게 알고 있었으며 사조직인 교와회의 기본이념을 굳히기 위해서 도쿄에 왔을때에는 당시 참모본부에서 전쟁 지도과장을 역임하고 있던 이시하라 간지와 면회한 바 있고, 이를 계기로 이시하라 간지를 존경하게 되었다.
1937년 5월의 만주사변후, 심양 교외의 절에 안치되어 있던 장작립의 장례를 교와회의 이름으로 거행하기도 하였으며, 동년 7월 7일의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중국군과 관동군 사이에 전투가 발생하자 츠지는 관동군의 토죠 참모장이나 카타쿠라 고급참모 등에게 동조하여 전선의 확대를 주장했다. 이 시기에, 작전 주임 이케다 중령에게 츠지 마사노부 자신이 직접 폭격기에 올라 중국군을 폭격하겠다고 신청하여 그의 독단전행에 놀란 이케다 주임이 만약 그런 일을 할 경우 전투리고 공격해서 격추하겠다고 까지 경고하여 단념했다는 일화도 있다.
아무튼 7월 말에는 중국 주둔군에 전출을 자천해서 8월에 편성된 북중국 방면군 제1과의 참모가 되었으나 여기서 고급 참모를 맡고 있던 시모야마 타쿠마 대령과 예전에 개인적인 다툼이 있었던 바 있어 제5사단에 일시적으로 전출되었다가 다시 관동군 작전 참모로 임명되었다.

노몬한 사건

1939년 4월, 당시 관동군 작전참모였던 츠지 마사노부는 장고봉 사건 이후, 관동군 사령관 명의로 "만소 국경 처리 요강"을 발표한다. 이것은 당시에 소련-중국간 국경선이 명확하게 결정되어 있지 않은 지점들에 대해서는 "현지 사령관이 자주적인 국경선을 인정"한다고 하여, 충돌이 발생할 경우, 병력의 많고 적음이나 문제의 확대 경중에 관련하지 않고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국경을 넘어서라도 적을 분쇄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지침에 의하여 같은 해 5월 11일, 할힌골 동쪽 언덕에서 몽골군과 만주국의 국경경비대 간의 소규모 충돌이 발생하자 하이랄에 주둔중이던 제 23사단이 즉각 부대를 증파하게 되었고, 충돌이 보다 확대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소련의 쥬코프 중장이 제 57군단장으로 임명되어 분쟁지역에 파견되었고 관동군 사령부에서는 분쟁을 보다 확대하여 적을 격파해서 해결하겠다는 원칙에 따라 외몽고의 탐스크 소련기지에 공군이 폭격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이에 대하여 도쿄의 참모분부는 전보를 보내어 중지를 명령했으나 츠지 참모장은 독단으로 전보를 묵살하고 작전을 속행했다. 전보의 결재서에서는 작전과장, 참모장 및 군사령관의 결재란에 츠지 마사노부가 모두 대리 서명했는데, 참모장과 군사령관의 결재는 대리할 수 없는 것으로 그의 이런 행동은 명백히 일본육군의 형법 37조에서 금지하고 있는 월군행사로 중죄에 해당했다.
아무튼, 이 사건에서 소련군이 승리를 거두고 8월 31일 일본군은 분쟁지역에서 철수하였으며 9월 16일, 정전협정이 성립되었으며 12월에 하얼빈에서 보다 국경선을 엄밀하게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협상이 타결되기 직전에 소련측 대표가 귀국해 버렸고 이것은 츠지 마사노부가 벨로루시계 소련인을 사주해서 소련 대표와 외몽고 대표의 암살을 시사했던 것이 원인이라는 증언도 있다.
자신의 저서 "노몬한"에서 츠지 마사노부는 스미 신이치로 연대장이 제일선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의분에 휩싸여 계급을 무시하고 연대장에게 호통을 쳤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스미 연대장은 이를 반론하여 자신은 술을 마시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당시 맥주병 빈병에 헐하 강의 물을 넣고 있었을 뿐이라고 적고 있으며 이 기록은 연대장의 당번병도 증언한 바 있으나 이런 항의에 대해서도 츠지는 사죄한 바가 없다.
노몬한 사건 이후, 츠지 마사노부와 함께 관동군 작전과의 관리주임이었던 핫토리 다쿠시로 중령은 일단 보병 학교 및 교욱 총감부에 좌천되었으나 1940년 다시 참모본부로 돌아와 작전반장으로 임명되었고 다음해에는 작전과장으로 승진했으며, 독소전이 개전한 다다음달인 1941년 6월 24일, 츠지 마사노부도 참모본부에 복귀했다.

태평양전쟁

싱가폴

당시 일본 참모본부의 작전부장은 다나카였지만 작전과장은 핫토리 다쿠시로가 맡고 있었으며 츠지 마사노부는 그 밑에서 작전과 병참반장으로 임명되었다. 핫토리의 전임으로 작전과장을 역임한 도이 아키오 대령은 츠지를 불러들인 핫토리 작전반장(당시)과 대립해서 좌천되었으며 결국 태평양 전쟁이 개전되던 당시의 육군의 작전은 대부분이 츠지 마사노부-핫토리 다쿠시로-다나카 라인으로 형성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말레이 작전에서 제5사단의 선두에서 직접 작전지도를 실시해 적구느이 전차를 탈취해서 적군 진지에 돌입하는 등의 기책을 세운바 있으나 작전참모로서의 임무를 방폐해서 제일선에서 명령계통을 무시해서 지휘를 하는 것에 대해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말레이 작전중의 일기에서 "이 사람은 자신의 뜻이 너무 강하여 잔재주에 기대어 월권행사를 일삼는데, 국가의 대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충분히 주의해야할 소인배"라고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싱가폴을 점령한 일본군은 시내에서 화교 20만명을 집단검문해서 이 중에서 항일분자라고 판단한 사람을 대량으로 처형했고 이싱가폴 화교 학살사건을 둘러싸고 도쿄 전범재판에서 6천명의 화교와 최고재판소 장관 호세 산토스가 살해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말레이 작전이 종료된 1942년 3월에 츠지 마사노부는 도쿄로 귀환하여 작전반장으로 승진했다.

필리핀

필리핀 전선을 담당하던 혼마 마사하루 중장의 제 14군은 마닐라 점령 후에 바탄 반도에서 미군을 추격하도록 명령했으나 주변의 환경이 정글지대인데다가 정보가 부족하여 공격은 좌절되었고 도쿄의 일본군 총사령부(이하 대본영)이 이 곳에 일부 참모를 파견하게 되었으며 여기서 츠지 마사노부도 전투 지도 명목으로 파견되었다. 4월 3일에 개시된 제 2차총공격에서 미군 진지가 점령되어 많은 병사가 투항하자 남은 것은 코레히돌 섬 뿐이었다. 이후, 미군 포로의 이송 중에 발생한 바탄 반도 죽음의 행진을 둘러싸고 당시의 일본군의 병참사정과 미군 병사의 대부분이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있었던 점으로 인하여 고의적으로 포로를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는 의견도 존재하였으나 반면에, 대부분의 연대에서 "미군 투항자를 이률적으로 사살할 것"이라는 대본영의 명령을 구두로 전달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대본영이 이러한 명령을 낸 적도 없고 혼마 중장 자신도 이런 명령을 내린적이 없었으며 당시 보병 제141연대장인 이마이 다케오는 전후의 수기에서 이 명령은 츠지 마사노부가 직접 구두로 전달해서 전파시킨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포트 모르스비

츠지 마사노부는 포트 모르즈비 공략 작전에서 전략 연구 명령을 받고, 다바오로 가게되었으나 그가 독단으로 공량 명령을 가로채서 바꾸었기 때문에 작전이 실행되었다고도 한다.
파푸아 뉴기니의 지형지물의 문제라던지, 보급의 곤란한 부분들을 고려하지 않고 실행한 이 작전의 무모함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을 뿐, 일본군은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해야했다.

과달카날

말레이 반도 공략 작전에서, 츠지 마사노부는 일왕의 탄생일이나 육군의 기념일, 일본의 건국 기념일 등의 각종 기념일에 맞추어 거점을 점령하도록 하는 그야말로 실정을 무시하는 작전계획을 세워 일선 부대의 혼란을 불렀으며 게다가 다음해의 포트 모르즈비 공략적전을 자신의 독단으로 결정했고 과달카날에서도 마찬가지로 실정을 무시한 공격을 강행하고 있었다.

특히, 과달카날 섬에서의 작전에 있어서는 현지 지휘관인 가와구치 키요시 소장과 대립하여 참모본부 작전 참모라는 유리한 입장을 이용하여 가와구치 소장을 파면시켰고 츠지 마사노부가 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장소는 이미 가와구치가 총공격을 실시했던 장소로써, 재차의 총공격으로도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알려져있던 곳이었다.
게다가 총공격의 일시는 달의 밝기에 의존해서 야간에 함대가 무조명 항해를 할 수 있는 기관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무리하게 추진하도록 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정글을 통과하는 험준한 도로의 사정으로 대포등도 거의 수송하지 못한채, 결국 소총으로 기관총과 야포로 무장되어 있는 진지에 돌격을 하도록 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작전이 실패한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전후 츠지 마사노부는 이 작전의 실패를 가와구치에게 돌려 자신의 저서 "과달카날"에서는 K소장이 문제가 있었다고 묘사한 바 있다.(당시 이 날조에 분개한 가와구치는 츠지 마사노부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시카와 현에서 강연회를 열었지만 츠지 마사노부의 찬동자들에 의하여 강연회는 야유로 가득찼고 결국 실패했다.)
미군의 기지에 총공격을 실패한 일선 병사들은 말레이 등지의 공략에서 일선에 직접 나와서 작전을 지도하는 등의 활약으로 이미 "직전의 신"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유명인이던 츠지 마사노부에게 보고해서 공격방법의 개선을 제안하였고, 그는 츠지 마사노부라면 당연히 전군에 정보를 전하여 신속한 대응책을 마련해 줄것이라 기대했으나 츠지 마사노부는 사관학교 동기인 지휘관들이 죽었다는 보고를 듣고 망연 자실한 상태라서 신속한 대응을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츠지 마사노부는 이 과달카날에서 "담력을 기른다"는 명분으로 적병의 시체에서 잘라낸 간을 휴대하고 있었다는 말도 있으며, 결국 과달카날에서 중증의 말라리아에 걸린 그는 구축함으로 전투 도중 후송되었다.

이후, 중국대륙과 미얀마를 전전하였고, 미얀마에서 "군은 용릉 방면의 적에 대해 공세를 취해야 한다" "바모, 캔 지구의 방위는 미완" "현지 사령관은 미이트 카나를 사수할 것 "등 미트키나 수비대인 겐조 소장 개인에게 사수 명령을 발령하였으나 사령관은 부하를 구하기 위하여 츠지 마사노부의 명령을 발설하지 않고, 수비대의 잔존 장병은 남방으로 후퇴하여 생명을 보존하라고 명령한 뒤, 부대가 도하한 뒤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그 결과 그의 부대 일부는 포위망을 돌파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츠지 마사노부는 상황보고를 위하여 그에게 온 겐조 소장의 부관을 "사수하라고 말했는데 염치없에 살아 돌아온 비겁자"라고 구타했다.
이 후, 이라와디 작전을 입안하여 이미 괴멸한 제 15군의 잔존병력을 주축으로 영-미-중국 연합군에 대한 전투작전을 입안하여 더욱 손해를 늘리게 되었다. 이 작전 이후, 인도 국민 의용군은 완전 소멸했고 대부분의 미얀마 방면군은 타이등지로 패주하여 종전을 맞이했고 츠지 마사노부 자신은 작전 지휘 중 미얀마 군에 기습을 당해 부상당한 후 후송되었다.

종전

방콕에서 패전을 알게 된 츠지 마사노부는 "물러나 사과하는 것이 길이긴 하나 아시아에서 민족의 재건을 도모하기 위한다"라는 명분으로 승려로 변장해서 도망했다. 윌리엄 스티븐슨의 저작 혁명의 왕(원제는 The revolutionary King)에 의하면 당시의 타이 국왕 라마 8세의 급사 사건에도 관여했다고 하며 이 탈출은 장개석의 특무기관 소속원의 가족을 과거에 도운적이 있어서 성공했었다는 말이 있다.
아무튼, 츠지 마사노부는 귀국후에 도주중의 기록을 "잠입 3천리"라는 제목으로 출간했고 이 책이 1950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15대1"이라는 그의 저서도 베스트 10에 포함되고 있다.)

전후

구일본군 출신자들과의 인맥으로 반공진영에 참가한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지명도와 구일본군의 참모였다는 등의 유명세로 1952년 구이시카와 1구에서 중의원에 당선되었고 자유당을 거치며 이시바시 단잔 파에 소속, 중의원에 4번 당선되었고 1959년에는 참의원(전국구 의원)이 되었다.
한편 CIA의 자료에 의하면 핫토리 다쿠시로 등 구일본군의 간부진 일부가 1952년 국수세력에 적대적인 당시의 수상 요시다 시게루를 암살하려고 계획하고 있을때 츠지 마사노부가 계획의 중지를 설득했다고 한다.

실종

츠지 마사노부는 1961년 참의원으로 동남아 시찰을 목적으로 40일간의 휴가를 신청하여 4월 4일에 공용여권으로 일본을 출발했다. 1개월 정도의 여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5월 중순에도 귀국하지 않아 가족의 의뢰로 일본 외무성이 현지 공관에 조사를 지시했고, 그 후의 조사로는 불교 승려로 분장해서 라오스 북부의 자르 평원에 단신으로 향한것까지는 확인되었으나 그 이후의 일에 관해서는 현재에도 알려진 바가 없다.
언론에는 몇개의 억측기사가 실렸고, 개 중에는 호랑이에 물려 사망했다던지,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군이 암살했다거나 아시아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염려한 CIA가 암살했다던지, 또는 현지에 잔류한 일본군 패잔병에게 살해되었다거나 현지의 공산세력 파테트라오가 처형했다는 등 의견이 분분했지만 모두 증거는 없었다.
현재로는 1962년 1월에 스파이로 라오스 해방군에 붙잡혀서 3사람의 병사에 의해 총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 이런 사망설과는 달리 베트남의 반공의용군에서 싸웠다던지,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에게 고문을 맡았다는 등의 소문도 있었고, 아무튼 1965년까지 그의 의석은 참의원에서 유지되었으나 1969년 6월 28일 가족의 실종선고 청구로 1968년 7월 20일자로 사망이 선고되었다.
1979년에는 그의 고향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기타 사항

- 그의 딸은 통상대신 겸 중의원 의원인 호리우치 미츠오에게 시집갔다.
- 하급 장교 시절에는 모범적인 인물로, 전장의 야영시에 지네 퇴치에 필사적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 "주간 신쵸"는 2006/02/23일자로 츠지가 실종 직전에 남겼다는 수기를 발견했다고 하고 잇으며 그의 수기에는 육군 참모본부나 관동군의 생활 등, 자신의 반생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연구중에 있다.
- 1946년 9월, 당시 타이의 국왕 라마 8세가 의심스러운 "사고사"를 당했다. 이 사건은 총의 폭발에 의한 것이라고 하나 당시의 수사에 참가했던 영국의 작가 윌리엄 스티븐슨은 츠지 마사노부가 국왕을 살해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확신을 가지고 있다. 아무튼, 아직까지 진상은 수수께끼인 채로 남아있다.
- 배포가 큰 인물로 통하고 있으며 자신의 의견은 상사에게도 큰소리로 직언했다고 한다. 돈이나 여자문제에는 결벽하고, 여색을 밝히는 인물은 누구든지 규탄했다. 동기나 친한 사람들은 친지처럼 살갑게 대하여 후배들에게도 평이 매우 좋았다. 타인에게는 엄격하게 대했지만 자신에게도 엄격하게 대했다.
또, 고급 참모인 경우 일반적으로는 현지 시찰을 우선시 하지 않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지만 츠지 마사노부의 경우는 적극적으로 현장에서 대화를 나누었고 이것이 평이 좋았다.
당시로서는 그가 행동하는 "군인으로서는 당연히 이래야 한다"라는 규범적인 면에 철저한 면 등은 엄격하게 지키고 있으므로 그에 대한 비난과는 별개로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 변장의 명수로, 만주에서는 현지인의 모습으로 각지를 시찰했다. 전범재판에 기소되지 않을때에도 그의 변장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 미국립 공문서관에서 2005~2006년에 해금된 CIA극비 문서에 의하면 미국의 정보기관이 2차세계대전 이후 그에게 접근했었다고 한다. 츠지 마사노부에게 연합군 총사령부(GHQ)의 정보부문이 대 중국공작을 지휘시키려고 했으나 반대로 이를 기화로 일본의 재군비를 위해 미국을 이용하려고 했다고 분석했으며 그를 "제3차세계대전"을 일으킬 수도 있는 사람(1954년의 문서)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 1952년 10월 31일의 CIA문서에 의하면 원래 참모본부 작전과장이었던 핫토리 다쿠시로 들은 자유당의 요시다 시게루 수상이 공직에서 추방된 사람들이나 국수주의자들에게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여 그를 암살하고 민주당의 하토야마 이치로를 수상에 앉힐 계획을 세웠으나 그의 전 부하 츠지 마사노부가 "지금은 시기가 아니다"라고 설득해서 쿠데타를 단념하게 했으나 그 후에도 정부 고관의 암살을 검토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