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조선 천주교의 수난(1)

구름위 2013. 6. 2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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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신앙이 조선에 전파돼 초기 서학으로서 학문의 범주에 머물러 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그 깊이가 더해가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1794년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북경 교구에서 조선으로 파견되면서, 그 동안 자의적 해석에 의해 시행했던 관습들이 로마 교황청의 교회법에 저촉됨을 알게 됐다. 이러한 현상은 다분히 교황청 교회법의 무지에서 온 것이지만, 한편 서구 사회의 관행과 천주교의 교리, 즉 서양 문화와 오랜 세월동안 영위해 온 전통적 유교문화로 대변되는 동양문화 사이의 이질성 때문이기도 했다.

초기 예수회가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하면서 많은 애로를 느낀 부분이 조상숭배사상(祖上崇拜思想)이었다. 이 문제는 예수회 신부들이 동양의 문화로 인정하여 초기 선교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나, 그 사실이 교황청에 알려지면서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 1742년 교황 베네딕도 14세에 의해 금지되었다. 이로서 초기에 시행됐던 영합주의적(迎合主義的) 전교는 불가능하게 됐으며, 조선 역시 천주교 활동이 1784년인 것을 감안한다면 당연히 교황청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 조의 천주교 박해 원인은 다양한 요인을 갖고 있었다. 첫째, 천주교 교리가 유교적 관습이 생활화된 사회문화에 크게 저촉되었고, 둘째, 유교이념을 국가통치이념으로 하는 국가 정체성에 도전적 행위로 간주되었으며, 셋째, 연속되는 국난과 부패정치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정신적 희망을 주어 빠르게 확산되어 가는 현상에 대한 경계심리가 작용했으며, 넷째, 정권장악을 위한 당파싸움에서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한 명분으로 악용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서학은 실학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받았는데, 특히 재야(在野)에 은거하며 정권 재창출을 노리는 남인 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다. 서학은 당시의 학술적 교류 방법이었던 각종 강학회를 통해 심도 있게 논의되었고, 그 과정에서 천주학의 만인평등사상이 평민들에게까지 확산됨으로써 절대 왕정체제와 유교적 사회계급주의를 기초로 하는 조선에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된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정부는 이런 현상이 학문적 차원에서 종교적 차원으로 전이되면서 집단화 되어 확산될 뿐만 아니라 사회기본질서를 파괴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을 초기에 차단하려는 구체적인 행위가 179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며, 이는 천주교 탄압정책으로 시작되었다.

1)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이 사건은 정조9년(1785) 봄에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의 사회적 배경으로 보면 정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상당한 원한을 가졌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 영조의 유언에 따라 이 문제를 거론할 수 없었거니와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老論)이 사도세자 사건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정조도 왕권 주변에 배치되어 있는 노론 세력을 쉽게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노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유능한 남인을 발탁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노론 세력이 영조의 유훈(遺勳)이란 핑계로 거론조차 금기시한 사도세자의 복원 노력을 실행에 옮겼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옮기고, 생존시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했다. 이 같은 조치는 왕권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정조는 이러한 사업을 남인 소장파의 정약용에게 명하여 추진토록 했다. 이는 정치적으로 노론의 전횡을 견제하려는 임금의 심중 표현이기도 했다. 정조는 한편, 당시 재야 남인 학자들 사이에서 심취·성행하고 있던 실학적 서학이 천주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형조(刑曹)의 금리(禁吏)들이 명례방(明禮坊:지금의 명동)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이상한 집회를 목격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금리들은 중인 김범우(金範禹) 집으로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놀음현장으로 의심하여 들이닥쳤다. 이 때 집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상한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고, 중앙에는 양반들이 정좌하고 있었다. 당시 의식을 집전하고 있었던 사람은 이벽이었고, 배석한 양반은 이승훈, 권일신, 권상학 부자, 정약전, 정약종 형제들이었다.
금리들은 현장에서 천주교 서적들을 압수해 형조에 보고했다. 이것이 당시 풍문으로만 들렸던 천주교의 실체가 정부기관에 의해 최초로 적발된,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인 것이다.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이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 양반은 모두 석방하고, 중인 출신인 김범우만 구속해 단양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성균관 태학생(太學生)들의 상소와 규탄이 이어졌고, 이 사건으로 위험을 느낀 일부 남인들도 동조하여 규탄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익의 제자이고 남인 학자였던 안정복은 그의 저서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에서 천주교를 사학이라 비판하였고,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도 천주교 서적을 불태웠으며,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도 아들의 배교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다분히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를 말해주고 있으며, 이들은 남인에 대한 집단적 보복을 우려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이벽은 두문불출하다가 1785년 6월에 사망했고, 김범우는 유배지에서 1년 만에 사망함으로써 천주교 박해로 인한 첫 사망자가 되었다. 이후에도 조정의 빗발치는 항의 상소가 있었으나, 정부는 정부 차원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당시의 여러 가지 기록에 의하면, 정조는 노론이 이번 사건을 남인들에 대한 철저한 응징기회로 삼으려는 것은, 임금의 남인학자 등용의지(登用意志)를 사전에 저지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다고 생각하고, 의중에 두었던 정약용, 이가환(李家煥) 등의 소장파 학자들이 남인으로서 노론의 제거 대상임을 알고 보호하려 했다고 본다.
이 사건은 이 정도로 마무리 되었으나, 사건의 내용을 살펴보면 장차 더 큰 사건의 발생을 예고하고 있다.
첫째, 정체성 문제로 노론은 일당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성리학을 교조화(敎條化) 하고, 모든 사상체계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둘째, 천주교를 신봉하는 대부분의 양반이 남인이었고 정조가 남인을 중용하려 들자, 노론은 천주교를 빌미하여 남인들을 견제하려 했다.
셋째, 당시 교황청의 경직된 교리해석과 강요로, 특히 제사와 장례문제에 대한 교황청의 경직된 해석과 강요는 대다수의 조선인들에게 거부감을 주었다.
이상과 같은 부작용을 그대로 남겨두고 사건은 봉합됐던 것이다.

2) 신해박해(辛亥迫害) : 정조15년 (1791년)


정조 15년(1791 신해년)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충격적인 소문이 조정에 보고되었다. 진사 윤지충(尹持忠)과 그의 내외종간인 권상연(權尙然)이 제사를 폐지하고, 부모의 위패(位牌)를 불태웠다는 내용으로,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의 장례 때 그랬다는 것이다. 윤지충은 정약용과 외재종간(外再從間)이었다.
이기경, 홍낙안(洪落安), 목만중(睦萬中) 등은 천주교와 연관된 남인들을 적극 공략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윤지충과 권상연의 가택수색과 체포를 요구했다. 또한 당시 남인의 총수이자 좌의정이었던 채제공(蔡濟恭)에게도 장서의 편지를 보내 엄중 조사토록 요구했다. 이 같은 그들의 행동은 정조 9년(1785) ‘을사추조적발사건’ 당시 정조의 미온적 처리결과가 재발되지 않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조사 결과 이러한 일들은 사실로 드러났다. 윤지충, 권상연은 공주감영으로 이송되어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관찰사 정민시가 윤지충에게 “네가 신주를 부모처럼 공경했다면 땅에 묻는 것은 혹 괜찮다 하더라도, 그것을 불사르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라고 물었다. 윤지충은 “만약 그것이 제 부모라고 믿는다면 어떻게 불사르겠습니까? 그러나 그 신주에는 제 부모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불사른 것입니다. 하기는 그것을 땅에 묻던 불사르던 먼지로 돌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대답하고 형틀에 묶였으며, 혹독한 고문과 배교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건은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사실로 밝혀진 이상 정조도 채제공도 더 이상 온건론을 펼 수가 없었다. 정조는 다음날인 11월 8일 ‘위정학(衛正學)’을 하명하면서 윤지충과 권상연을 사형에 처하도록 명하였다. 위정학은 성리학을 국가의 정체성으로 천명하고, 임금 본인도 성리학 주창자임을 공언한 것이다.
이로서 천주교 활동에 국가적 제동이 본격화됐다. 당시 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전라감사의 조사에 따르면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태워버린 사실을 자백했다 하니 어찌 이처럼 흉악하고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 있겠는가. 대저 경학으로 모범이 되는 선비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점차 물들어 이처럼 오도되기에 이른 것이니, 세도(世道)를 위하여 근심과 한탄을 금할 수 없다…. 대개 이번 일이 대부분 좌상(左相:채제공)이 아는 사람들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외간에서는 혹 내가 좌상의 얼굴을 보아준다고 말하는 듯 하다마는 이 일이야말로 위정벽사(衛正闢邪)에 관계되는 것인데, 내가 어찌 한 대신을 위하여 치죄를 소홀히 하겠느냐.』
윤지충과 권상연은 정조 15년(1791) 11월 13일,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당했다. 이로서 이들은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처형된, 처음의 사례가 되었다.

3) 신유박해(辛酉迫害) : 순조 1년(1801)


신유박해는 단순한 천주교 박해라기보다는 당파싸움의 희생물로써 천주교가 박해를 받은 사건이다.
정조가 재위 24년(1800), 나이 49세로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 1801년에 조선조 23대 순조(純祖)가 즉위했다. 이 때 순조의 나이가 겨우 11살로 직접 정사를 돌볼 수 없어, 궁중의 가장 어른인 경주 김씨 가문 출신인 정순왕후(貞純王后:영조의 계비)가 수렴정치(垂簾政治)를 하게 되었다. 그는 순조의 증조모였다.
정순왕후는 천주교에 악의를 갖고 있진 않았으나, 정조 원년(1776)에 그의 오빠 김구주를 비롯해 천주교를 빌미로 남인들을 견제하려 했던 노론 벽파들이 시파(時派) 홍봉한(洪鳳漢:사도세자의 장인) 등을 제거하기 위해 공작을 꾸미다가 오히려 화를 입어 김상로는 죽음을 당하고, 김구주는 흑산도로 귀양을 가 9년 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은사로 풀려나 나주(羅州)로 옮겼으나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게 됐다. 이 사건의 후유증은 정조 재위기간 동안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의 구원(舊怨)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벽파는 1762년 사도세자 사건 당시 세자의 실덕(失德)을 공격했던 부류로 김상로, 김구주 등이 주축이 되었고, 시파는 세자와 그의 아들을 감싸고 보호하려는 부류로 홍봉한 일파를 말한다. 이는 노론 내부의 분열이었으나, 남인들도 벽·시파로 분리되어 가담했고 많은 남인이 시파에 가담했다)

23년(1779) 남인의 보호막 역할을 했던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고, 그 이듬해 1800년 6월 정조마저 승하해 정조정권대세의 변화는 예고된 것이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는 이렇듯 예고된 수순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그 대상은 남인 시파를 포함한 전 남인들이었으며, 남인들이 관련된 천주교 박해가 표면적 명문으로 부각됐다.
당시 정조 때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 신해박해로 천주교가 사교로 규정, 금지령이 발표돼 공식적으로 금지되고 있었으나, 이미 천주교의 교세는 양반 위주의 전교활동에서 중인 이하의 평민계층에까지 확산되고 있었다.
영·정조시대는 선조 때의 임진왜란 후유증이 거의 치유되고, 영조의 탕평책과 정조의 개혁정치로 당파싸움이 수면 아래로 일시적으로 잠적해 평온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사도세자 사건으로 발생한 당파 간의 내면적인 갈등은 언제라도 재현될 수 있는 불씨를 갖고 있었다. 특히 정조 때 정계의 주 세력이었던 노론은 사도세자 사건의 주 세력이었고, 정조의 견제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세력의 배후세력이 바로 정순왕후와 외척인 경주 김씨 세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세력의 구도에서 정조는 계파 간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재임 기간 중 꾸준히 추진했고, 채제공을 위시한 정약용, 이가환 등의 남인학자 다수를 중용하려고 노력했다. 이 때문에 정조는 내심 이들 남인 소장학자들과 관계가 있는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견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의 노력도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정조 스스로가 정통한 성리학의 대가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 하게 되었다. 정치에서는 주체가 바뀌면 정계개편은 필연적이다. 정순왕후는 개인적인 원한과 시파에 대한 정치적 보복의 명분을 천주교에서 찾았다.
1801년천주교는 정조의 미온적 대처로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을사추조적발사건과 신해박해로 자치적 조선교회가 해산됐으나, 열성 교우들의 신부파견 요청은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북경주재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湯士選) 주교가 1791년(正祖 15년) 중국인 레메디오스(Johanne Dos Remedios, 吳 신부)를 파견했으나, 국경선의 삼엄한 경비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이듬해 병사(病死)해 실패로 돌아갔다. 2차로 1794년(정조 18년)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파견, 잠입에 성공했으나, 1791년 신해박해의 여파로 전국이 천주교로 인해 경직된 분위기였으며, 천주교 활동도 지하로 숨어 들어 은밀히 행해지고 있었다. 북경 교구에서 주 신부를 파견한 것은 조선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활동할 수 있는 신부는 중국인밖에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주 신부는 중인 출신인 지황과 윤유일의 안내로 서울에 잠입할 수 있었고, 도착 후 역관 출신인 최인길이 은신처를 마련해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냉담 신자인 한영익의 밀고로 주 신부 체포령이 내려졌고, 최인길의 기지로 주 신부는 피신할 수 있었으나, 최인길, 지황, 윤유일은 체포되어 혹심한 고문으로 모두 옥사했다. 주 신부는 양반 출신의 강완숙 집에 은신케 되었다. 강완숙은 충청도 예산의 양반집 규수로 덕산으로 출가했는데 천주교에 입교해 성실한 교인이 되었다. 강완숙은 신해박해 때 투옥된 교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면서 비 신자인 남편이 위험을 느껴 그와 헤어지고, 가족들과 한양에 올라와 생활하고 있었다. 당시 양반 집은 관가의 감시를 비교적 피하기 쉬웠고, 특히 과수(寡守) 집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수색이 불가능해 은밀히 활동할 수 있었다.
주 신부는 놀라울 만큼의 인내심과 근면함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낮에는 우리말을 공부하고 밤에는 성무를 집행했으며, 서적을 번역해 교리 전파에 노력하는 한편, 북경에 밀서를 보내 조선 교회의 실상을 보고했다. 주 신부의 활동으로 재임 6년 동안 초기 4천 명이었던 교인이 1800년에는 1만 명으로 증가했다.

국상기간이 끝나자마자 신유박해가 시작됐다. 1800년 11월 최필공의 체포를 시작으로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권철신, 홍락민, 이단원, 정약종 등 초기 천주교와 관련된 인사 및 수많은 사람을 연행해 주 신부의 행방을 묻고, 천주교 탄압을 위한 만행이 자행됐다. 주 신부는 이를 피해 북쪽 국경 가까이 피신하는데 성공했으나, 자신으로 인해 수많은 교인이 죽거나 고통 받을 것을 생각하고 마음을 바꿔 1801년 3월 12일 다시 돌아와 의금부에 자수했다. 주 신부는 청국인(淸國人)이 정조의 사형집행에 논란이 있었으나, 1801년 음력 4월 19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으로 순교했다. 이로 인해 중인 출신 최필공과 그의 종제(從弟) 최필제를 필두로 이승훈, 권철신, 이중배, 홍락민, 최창현, 홍필주 등의 교우들이 순교했고, 이가환은 교우는 아니었으나 정치적으로 천주교와 결부돼 옥사했고, 정약용의 형제 중 정약종은 참수형을, 정약전, 정약용은 유배형을 받았다. 그 외에도 전주지방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 유항검·유관검 형제와 노모를 포함한 6명의 전 가족, ‘황사영의 백서’ 작성자인 황사영(黃嗣永:정약현의 사위. 당시의 상황을 기록. 중국 교구에 보고하기 위해 백서를 작성했다)도 이 때에 순교했다. 또한 강완숙, 궁녀 출신인 강경복, 문영인, 김연이, 한신애 등이 주문모 신부와 같이 치명(致命)되었다. 지방에서는 동정녀 정순매, 윤점혜 등이 굳건한 신앙으로 순교했고, 왕족 중 은언군(恩彦君 : 철종의 조부)의 부인인 宋씨(마리아)와 며느리 申씨는 사약을 받고 일생을 마쳤다. 그 외에도 이 사건과 관련돼 희생된 사람은 약 300명에 달했을 정도로 대 박해였다.

당파싸움의 성격이 변질되면서 절충과 상호공존이라는 정치 행태는 없어지고, 철저하게 반대파를 제거하는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숙청으로 변했다.
당시 정치세력 교체에 대한 명분을 천주교 탄압으로 정당화했으나, 실제로 조선의 정체성인 성리학과 천주학은 양립할 수 없는 이념적 상반성을 가졌음은 물론, 만인 평등을 부르짖는 천주교 정신은 당시 계급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사회적 분위기는 영·정조 시대에 국정쇄신으로 다소 개선이 이루어졌으나, 그 후 임금들의 계속된 실정은 국가재정의 파탄과 기강의 문란을 초래했고, 신유박해는 이로 인해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됐다. 또한 양반과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극에 달해 많은 양민들이 생활터전을 잃고, 유랑민으로 전락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천주교의 평등적 천주 사랑은 이들에게 정신적 구원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고, 양식 있는 양반을 위시해 평민, 농민, 천민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으로 천주교가 전파됐다. 국가적 차원에서 이러한 변화는 국권수호에 절대적 위험요소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로써 정부는 토사교문(討邪敎文)을 발표하고 공식적으로 천주교 활동을 엄금했으나, 천주교의 전파를 막을 순 없었다.

4) 기해박해(己亥迫害) : 헌종 5년(1839)


기해박해는 신유박해의 피비린내 나는 천주교 박해사건이 일어난 지 39년 만의 천주교 탄압사건이다.
기해박해를 설명하기 전에 39년 동안 일어난 천주교 관련 사건들과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살펴보면, 정조(22대)가 즉위하면서 규장각을 설치해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고 문예부흥을 위한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기존세력인 노론 벽파의 상당한 저항을 받았으나 정조는 남인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시파의 양성으로 균형을 잡고 개혁정치를 순조롭게 진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하여,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됨에 따라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하여 처참한 살육 보복정치가 천주교박해라는 명분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어린 임금의 기억에 이 사건은 참혹한 사건으로 각인되어 친정이 이루어지면서 정치적으로 천주교의 활동에 대한 신하들의 건의가 있어도 심각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가 아닌 한 묵인 방관하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전혀 수수방관 하지는 않았다. 토사교문의 왕명은 항상 유효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다수의 지배계급의 이탈을 감수하여야 하였다.
초기교회의 중심적 역할이 양반계급의 인사로 이루어 졌으나, 신유박해 후 교회 중심세력은 중인계급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비온 후에 땅이 굳는다.’라는 말과 같이 지리멸열(支離滅裂)되고 지하로 잠입하였던 교우들이 정부의 방관한 틈을 타서 다시 활동을 은밀히 개시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33년간의 목자 없는 교회가 이어지게 된다.

교회재건과 신부영입운동


우리 교회가 유일의 성직자인 주문모 신부와 초기교회 건설의 초석이 되었던 지도자들을 잃어버리고 대부분의 신자들이 지하로 잠입, 은밀히 교회재건 활동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권철신의 조카 권요한과 최모루스는 교리서를 등사·반포해 교우들의 영적 양식을 공급하였고, 이여진(李如 眞), 신태보(申太甫)는 흩어진 교우들을 규합하고 복음을 전도하는데 힘썼으며, 정하상(丁夏祥)은 새로운 신부영입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이여진은 새로운 신부영입을 위하여 1811년(純祖 11년)에 동지사(冬至使) 일행의 종으로 변신하여 북경에 도착, 북경교구 총대리로 있던 리베리오(Riberio) 신부에게 조선 교회현황과 신부 파견요청 서한을 전하였다. 그동안 조선교회와 깊은 연관을 갖고 그 발전을 위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던 구베아(Gouvea) 북경주교께서는 이미 1808년에 돌아가시고 그 후임으로 임명된 스자 사라이바(Souza Saraiva)주교는 마카오에 체류 중에 있었던 관계로 리베리오 신부에게 전달하였던 것이다. 조선 교우들의 서한을 받고 깊은 감명을 받은 리베리오 신부는 조선 교우들의 간청을 즉각 해결할 수 없는 사정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당시는 1789년에 프랑스에 대혁명이 일어나 나폴레옹이 정권을 장악하고 천주교회의 교권이 제한받는 상황에서 선교신부의 증파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11년 11월 9일 다행히 이 서한은 교황 레오7세에게 전달되었다. 그 후에도 신부영입을 위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하였다.
정하상은 1816년 10월 직접 동지사 일행에 합류하여 북경교회와 접촉하였으며, 1820년에는 현석문(玄錫文)도 이경도(李景陶)와 더불어 신부 영입을 위한 노력을 재개하였다. 그 후 9차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면서 신부영입 및 교회발전을 위한 각종 문헌 반입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동참하였던 교우는 김방지거, 유진길, 조신철, 현석문 등이었다. 1823년에도 현석문은 역관(譯官) 유진길과 동행, 신부 파견을 간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825년에는 정하상이 교우들과 연서하여 로마교황청에 신부요청서를 직접 제출하였다. 이 청원서는 다행히 1827년 당시 교황 레오 12세에게 전달되었으며 교황은 감격하여 조선교구의 설립과 신부 파견에 대한 책임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위촉하였던 것이다. 연서내용은 다음과 같다.

『프란치스코와 다른 한국 교우들은 땅에 엎디어 가슴을 치며 지극히 높고 큰 아버지이신 온 성교회의 으뜸께 이글을 올리나이다. 간절히 청하고 열절히 구하옵느니 교황 성하께서는 신자(信子)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 마음에 가득하신 자비를 신자들에게 보여 주시며 구속(救贖)의 은혜를 하루 바삐 보내주소서. 신자들은 작은 나라에 사옵는데 처음에는 책으로, 10년 후에는 전교와 칠성사(七聖事)를 받음으로써 다행히 거룩한 교에 들어왔나이다. 7년 후에는 군란(窘難)이 일어나 한국에 왔던 전교 신부는 많은 교우들과 함께 치명(致命)했사옵고 나머지 교우들은 모두 근심과 공포에 억눌려 차차 흩어졌나이다. ‘지금은 제각기 숨어 있으므로 교회 예식을 행하기 위해서도 모이지 못하는 형편이로소이다.’ 신자들에게 남은 오직 하나의 바람은 지극히 크신 천주의 자비하심과 교황 성하의 지극히 크신 인자로 하루 바삐 신자들을 도와 주시고 구해 주시는 것이오며 이를 위해 신자들은 매일같이 기도하고 탄식하나이다. ‘10년동안 신자들은 고통과 근심 중에 눌려 왔사옵고 늙고 병들어 죽는 자 많사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사오며 남아있는 자들도 언제나 거룩한 교훈을 받게 될지 막연 하도 소이다.’ 이들은 이 은혜 원하기를 마치 목마른 자 물을 원하듯 하오며 이 은혜 청하기를 마치 가뭄에 비를 청하듯 하나이다. 그러하오나 하늘은 너무 높아 가히 올라갈 수 없사옵고 바다는 너무 넓어 신자들이 도움을 구하려 갈만한 다리도 없나이다. ‘우리 가련한 죄인들은 성하의 도움을 받기를 얼마나 진실히, 얼마나 열절히 원하는지 사뢸 길이 없나이다. 그러하오나 신자들의 나라는 작고 넓은 바다 한구석에 멀리 떨어져 있사와 성하의 가르침과 명령을 신자들에게 전해줄 배도 수레도 아니 오나이다.’ 이와 같은 간고(艱苦)가 신자들의 열성이 부족하고 죄가 많은 탓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신자들은 깊은 두려움과 진실한 통회(痛悔)로 가슴을 치며, 강생(降生)하사 십자가 위에 죽으시고 의인들보다도 죄인들을 더 보살피시는 천주와 천주의 대리자이자 모든 사람을 돌아보시며 죄인들을 참으로 구해주시는 교황 성하께 겸손되이 강구하나이다. 신자들은 구속되어 암흑 속에서 빠져 나왔나이다. ‘그러하오나 세속(世俗)이 신자들의 육신을 괴롭히며 죄와 악이 신자들의 영혼을 압박 하나이다’ 신자들의 눈물과 탄식과 근심은 값이 없사오나 다만 교황 성하의 인자하심은 무한하시고 무량하신 줄로 생각하오니 목자를 잃은 이 나라의 양들을 불쌍히 여기사, 구세주 예수의 은총과 공로가 전해지고 신자들의 영혼이 도움과 구함을 받으며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이 어디서나 또한 언제나 현양되기 위해 신자들에게 전교 신부를 보내 주실 줄로 믿나이다.』

새로운 조선 대목구 창설


위의 전문과 같이 목자 없는 조선교구 교인들의 절절한 염원을 전해들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순조31년) 9월 9일, 교칙에 의하여 새로운 조선 대목구 창설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초대교구장에 부르기엘(B. Bruguiere) 주교(蘇主敎)가 임명되고, 선발대로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가 1834년에 입국하게 되어 조선교회는 33년만에 다시금 성직자를 맞이하는 기쁨을 누렸던 것이다. 불행히도 초대 조선교구 주교로 임명되었던 부르기엘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아깝게도 만주에서 돌아가셨다. 그 유지를 받들어 모방(Maubant, 羅신부) 신부가 1836년 1월 2일 국경 잠입에 성공하여 1월 2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모방 신부는 그 동안 천주교 박해와 탄압에 시달려 위축된 조선교회 부흥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음은 물론 조선출신 성직자가 나와야 원활한 신앙활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도착 후 즉시 신학생을 간택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로서 최양업(崔良業), 최방지거, 김대건(金大建), 세 사람이 간택되었던 것이다. 모방 신부는 세 사람 중에 가장 나이가 어렸던 김대건 안드레아에게 가장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모방 신부가 간택한 3명의 신학생은 신부(神父)수업을 위하여 1836년 유방재 신부가 본국으로 귀국할 때 동행하여 마카오 신학교로 떠났다.
이들 중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도마 두 신학생은 신부가 되었고, 최방지거 신학생은 마카오에서 수학 중에 병사하였다.
그 후 두번째로 1837년 샤스땅(Chastan, 鄭신부) 신부가 합류하게 되었다. 초대 주교로 임명된 부르기엘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죽자, 1837년 5월에 제2대 주교로 로랑 엥베르(Laurant Marie Joseph Inbert; 범세형(范世亨)) 주교가 임명되어 1838년 정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3명의 불란서(France) 신부가 주재하면서 본격적인 전교활동을 전개, 그 동안 파괴되었던 교회조직을 부활하고 전교활동을 활발히 진행, 전국적으로 교우수가 7천에 육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분의 외국 신부들이 활동하는데 외모와 언어문제는 심각한 장해 요인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우리말 공부를 하였고, 활동을 위하여 당시 양반이 상중에 착용하였던 방갓(方笠)을 쓰고 상복을 입고 변장하여 전국을 순회, 전교활동을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기해박해(己亥迫害)를 설명하기 전에 순조 때에 일어났던 1815년 을해교난(乙亥敎難)과 1827년에 일어났던 정해교난(丁亥敎難)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을 하고 넘어가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