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① 고종의 오판

구름위 2013. 6. 21.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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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200만 대군 맹신한 고종, 일본 패배에 ‘베팅’

 

조선은 강제로 근대에 편입되었다.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이웃국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것이 더 뼈아픈 대목이었다. 일본은 많은 진통을 겪은 끝에 근대화에 성공했지만 조선은 진통만 겪고 실패했다. 그 결과 조선은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황성신문(皇城新聞) 1904년 1월 25일자는 “근일 각국의 보호병(保護兵)이 서울에 들어오고 일아(日俄:일본과 러시아) 개전론설이 유포되면서…곡식값이 뛰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러일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서울의 곡식값이 뛰었다는 보도다.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했고, 각국으로부터 중립국임을 인정받으려 노력했다.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명치(明治) 37년(1904) 2월 8일자는 육군 참령 현상건(玄尙健)이 고종의 명을 받아 각국으로부터 서울을 국외중립지대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하는데 서울의 곡식값이 뛰는 이유는 한국이 전쟁터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한국은 승전국의 전리품이 될 운명이었다.

 

이런 성격의 국제전에 국외중립 선언은 허망한 몸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황현이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고종은 자신의 웅대한 지략을 자부한 나머지 불세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고 쓴 데서 알 수 있듯이 고종은 외교적 수완으로 전제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일본군 선발대 2500여 명이 인천 외항에 도착한 1904년 2월 8일 일본 해군은 요동(遼東)반도 남단의 여순(旅順)항을 기습공격하는 것으로 러일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다음 날 일본 해군은 다시 인천 앞바다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해 순양함 바랴크(Varyag)함과 코리예츠(Koryeets)함을 가라앉혔고, 같은 날 중립선언을 무시하면서 서울에 입성했다. 정식 선전포고는 다음 날에야 발표했다.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고종은 러시아의 승리를 굳게 믿고 있었다.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되돌려주는 것을 보고 러시아의 힘을 실감한 고종이었다. 김홍집(金弘集)의 온건개화파 내각이 주도하는 갑오개혁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국 주둔 외국공사관으로 망명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란 희한한 사건도 러시아의 힘을 굳게 믿은 결과였다. 일본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2월 12일 주한 러시아공사 파블로프(A. Pavlow)는 러시아공사관 병사 80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을 빠져나갔고, 다음 날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노스케(林權助)는 외부대신 임시서리 겸 육군참장(陸軍參將) 이지용(李址鎔:대원군의 형 이최응의 손자, 합방 후 백작 수여)과 고종을 만나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을 강요했다.

 

한일의정서는 제3조에서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고 명기했다. 그러나 제4조에서 “대일본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하여 이용할 수 있다”며 한국 영토의 무제한 징발권을 명시했다. 속으로는 러시아의 승리를 바라면서도 겉으로는 일본의 강압에 굴복해 무제한 국토사용권을 주는 의정서를 체결한 데서 고종의 이중성이 다시 드러났다. 고종이 러일전쟁에 대해 중립을 선언한 데는 함경북도 명천의 서민 출신 이용익(李容翊) 등 친러파의 주청이 큰 영향을 끼쳤다. 같은 친러파였던 육군참장 이학균(李學均)은 현상건과 모의해 전(前) 러시아 주재 한국참서관(參書官) 곽광의(郭光義)를 여순(旅順)에 보내 러시아에 조선을 보호령으로 해 달라고 요청하려고도 했다. 이학균과 현상건은 일본의 납치를 피해 프랑스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미국 군함 신시내티호를 타고 상해(上海)로 망명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에 따르면 이학균과 현상건은 서울에서 탈출한 파블로프 러시아공사와 접촉한 후 고종에게 ‘러시아가 일본을 격퇴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이니 잠시 때를 기다리소서’라는 밀서를 보냈다. 고종도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난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상해로 보냈다.

 

고종이 러시아의 승리를 점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객관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우세했다. 그러나 일본은 러시아에 없는 다른 무기들을 갖고 있었다. 전 국민적인 단결과 군부의 뛰어난 전략전술이었다. 러시아군은 총 병력이 약 200만 명에 달하고 전함의 배수량은 약 51만t이었으나 일본은 상비군이 20만 명에 불과했고 배수량은 26만t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전쟁에 모두 108만 명을 동원할 정도로 총력전을 펼쳤다. 일본에도 전쟁폐지론을 주장했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같은 사상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세가 미약했다. 러시아는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 상륙해 북상할 것으로 예상하고 압록강 부근에 군대를 집결시켜 맞서 싸울 계획이었다. 이에 맞서 일본은 해군 제1함대와 제2함대로 여순의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섬멸하고, 제3함대로 대한해협(대마도 해협)을 장악해 제해권을 확보한다는 더 큰 전략을 세웠다. 또한 육군 제1군을 한반도에 상륙시켜 한국에 있는 러시아군을 구축하고, 제2군을 요동반도에 상륙시켜 여순을 고립시킨다는 전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