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조선 천주교의 수난(2)

구름위 2013. 6. 2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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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교난(乙亥敎難)


을해교난은 1815년 을해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사건이다.
1801년 신유박해 후 비교적 조용한 10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동안 잠복했던 천주교인들의 활동이 서서히 시작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을 간파한 집권세력은 다시 탄압의 손길을 뻗쳤다.
1811년 3월 3일, 왕명에 의해 전국적인 천주교 실태파악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1812년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이여삼(李汝三) 바오로가 형리들의 난장으로 순교했고, 1813년 공주(公州)에서 서원 베드로, 황 바오로, 장 마지아 등도 순교하였다. 그 이듬해 10월에는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金震厚) 비오가 10년의 옥중생활 끝에 76세로 순교하였다.
이러한 탄압의 증후가 나타나면서 1815년에 경상, 강원, 충청지역에 천주교인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이때 수백 명의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었다. 경상도에서 22명, 충청도에서 20명이 옥사했고, 고성대(高聖大) 베드로, 고성운(高聖雲) 요셉 형제, 김경서 방지거,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 김화춘 야고보, 최성열(崔性悅) 발바라, 이시임(李時任) 안나 등 7명이 대구감영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동기는 배교자 전치수의 고발에 의한 것이었으나 실제 이유는 따로 있었다. 1814년 여름, 홍수와 재해로 극심한 식량난이 닥쳤다. 그런데 신유박해시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든 천주교인들이 그곳에서 화전을 만들어 생활했고, 다행히 이들은 홍수 피해를 입지않아 식량이 비교적 넉넉한 편이였다. 배교자의 정보로 이를 알게 된 지방 관리들이 토사교문(討邪敎文 또는 척사윤음(斥邪綸音)이라고도 함. 1839년(헌종 5) 조선 헌종이 가톨릭교를 배척하기 위해 전국의 백성에게 내린 문서)을 핑계로 이들을 체포하고 식량을 탈취했던 것이다. 또한, 식량난을 겪으면서 흉흉해진 민심을 천주교인 탄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이를 면하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지방의 분위기를 조정에서는 알면서 수수방관했던 것이다.

정해교난(丁亥敎難)


1815년 을해교난이 일어난 지 12년이 지난 1827년 2월에 정해교난이 다시 일어났다.
10여 년 동안 천주교에 대한 집중적인 박해는 없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언제든지 천주교 탄압이 일어날 수 있는 정황에 처해 있었다.
1804년 순조가 15세가 되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정치는 막을 내렸다. 이후 1805년 노론 벽파의 보호자인 정순왕후가 사망하자 정계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실권을 장악, 벽파 세력을 제거하고 시파 세력으로 대치됐다. 그러나 정권의 핵심은 대부분 안동 김씨 일족이 독차지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됐다. 세도정치의 폐해는 곧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정한 인사문제는 정계의 부패로 이어지고, 국정이 총체적으로 문란해졌다. 또한, 그 기간동안 계속된 천재지변으로 농촌은 피폐해지고, 많은 유랑민이 발생하면서 수많은 민란이 일어났는데, 그 중 1811년의 홍경래의 난은 서북부 지방을 휩쓴 대규모의 난이었다. 홍경래의 난은 1812년 관군에 의하여 진압됐지만, 이로 인해 민심은 흉흉해지고 정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1821년에는 서부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십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국정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명분으로 토사교문이 거론되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가동되었다. 어수선한 국가 분위기 속에서 지방 관리들의 한건주의 심리가 팽배했고, 여기에 직접적인 탄압 요인을 만든 것이 배교자의 고발이었던 것이다.
전라도 곡성에서 한 신자에 의한 밀고사건이 발생했다. 전라도는 신유박해 이후 비교적 조용했기 때문에 타 지역에 비해 신자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그러던 중 곡성 신자마을에 신자들이 공동으로 도요지를 건설하고, 이를 자축하기 위한 자축연에서 사소한 다툼이 일어났다. 이에 불만을 가진 신자 한백겸이 이를 관가에 밀고했던 것이다.
마침 1826년에 일본에서도 천주교의 탄압이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6명의 수배교인이 조선으로 탈주하였다. 일본정부는 조선에 이들을 잡아줄 것을 요구하는 의뢰서를 보냈고, 이것이 지방 관가에 통달돼 천주교도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배교자의 고발을 계기로 관가에서는 천주교도 일제 검거령이 내려졌다.
지방에서는 각종 민란에 흉년까지 겹쳐 사회의 기강이 해이해진 상태였다. 그리하여 국면 전환을 위한 계기를 마련하려던 차에 국가에서 공인된 천주교인 색출 작업은 지방 관리들의 한건주의 사건으로 적격이었다. 이 사건으로 전라도 지방에서만 검거된 천주교인이 5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때 조정에서는 순조가 건강이 좋지 않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로서 30년 동안 계속됐던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물러나고, 세자의 장인 조만영(趙萬永)이 정권을 장악, 풍양 조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정국의 변동으로 중앙 조정에서는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토사교문, 천주교 탄압사건을 수수방관한 채 적극적 개입을 하지 않았다. 이런 조정의 분위기 때문에 대부분이 석방되고, 배교를 거부한 교인 240명 만이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었으나, 당시 전라감사 이광문(李光文)의 악랄한 배교 강요로 거의 대부분이 석방되고 3개월 후에는 10여 명만이 남아 있었다. 많은 인원이 체포·수감되었으나, 대부분의 인원이 석방되고 최후로 10여 명만 희생된 것은 전라감사의 적극적 배교 강요도 주효 했지만, 체포 구금된 인원의 대부분이 예비자였으며, 그 동안 전라도 지역에는 거센 박해의 영향을 받지 않아 신자들의 정신적 무장이 되지 않았다는 점도 이유가 될 것이다.
이 때 전라도 지역에서 경상도·충청도 지역으로 사건이 확대된 것은 배교를 강요당하는 과정에서 신자들이 타 지역에 이주 정착한 신자들까지 고발하여 인접지역까지 확대됐기 때문이다.
정해교난으로 희생된 대표적 인물은 신태보 베드로다. 그는 신유박해로 와해된 천주교회를 재건하고, 성직자 영입운동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다. 그는 교회재건을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활동했기 때문에 전국 교우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전라도 교우의 밀고로 1827년 음력 4월 22일에 경상도 상주군에서 체포돼 전라 감영에 압송·구금되었다. 그러나 신태보 베드로는 각종 고문에 굴하지 않고 신앙심을 고수함은 물론, 오히려 박해자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놀라운 신념을 보여 주었다.
그 외에도 이 막달레나, 김도명 안드레아, 이성치 요한·이성삼 요한 형제, 정만포 바오로, 이일언 요바, 김대권 베드로, 이선화 베드로 등이 전라도 감영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전라도 감영에서 파견된 포교들에 의해 신태보가 체포·압송되자 이제 자극받은 상주 포교들이 이 곳의 천주교 신자들을 다시 검거하여 대구 감영으로 이송하였다. 그들 중 끝까지 배교하지 않은 사람은 박경화 바오로와 그의 아들 박사심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 안군삼 리샬, 이종일 안드레아, 김군미 암부로시오 등 6명이었으며, 이 중에 박경화 바로오만 석방되고 나머지 5명은 옥중 순교하였다.
이 외에도 신유박해시 서울에서 체포된 왕족출신 이경도 가롤로의 동생 이 바오로, 충청도에서 검거된 유 노랜조 등이 순교하였다.
1832년(순조 32) 여름에 전국적으로 대홍수가 나서 농작물의 피해는 물론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에 흉흉해진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 정부에서는 전국적으로 대 사면령을 내렸다. 이로서 정해교란으로 체포됐던 신자들이 전원 석방되었다.
1815년의 을해교난과 1827년의 정해교난은 중앙정부 지시에 의한 전국차원의 천주교 탄압사건이 아니고, 지방 관료들에 의해 이루어진 탄압 사건이었다. 물론 중앙정부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으나, 신유박해처럼 정치적 이해관계에 연루된 처절한 사건은 아니었다. 다만 토사교문의 기본정책에 의해 저질러진 지방 관료들의 횡포였다.

순조 초기에 일어났던 신유박해는 당파싸움, 개인의 원한 등이 원인이 되면서 다수의 천주교 신자들이 속해있던 남인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명분으로 시작된 박해였다. 물론, 성리학을 정체이념으로 이루어진 절대왕정에 만인평등을 신앙의 근본으로 생각하는 천주사상은 분명 체제의 위협적 존재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보건대 이러한 주장은 과대 포장된 정략적 수단에 불과했다.
천주교 박해를 통해 세도정치는 기반을 공고히 다졌고, 이런 과정에서 사도세자사건으로 등장한 벽파와 시파도 확실하게 개편됐다.
순조 친정체제로 들어서면서 천주교 박해는 소강상태를 맞는다. 이것은 다분히 순조의 성품이 문학을 좋아하고 과격한 행위를 싫어했던 것도 있지만, 신유박해의 여파가 너무 커서 천주교 전파가 위축되고 지하로 잠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외세의 침략으로 국난을 치루고, 잦은 천재지변으로 국민의 생활이 극도로 궁핍해졌으며, 세도정치로 인한 정치적 부패로 공직사회의 기강은 무너지고, 사회신분제도로 인한 양반과 관리들이 평민과 소작 농민들을 수탈하는 것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지하로 숨어 든 천주교는 극비리에 활동이 재개됐고, 만인평등사상은 큰 호응을 얻어 급속하게 세력이 팽창됐다. 그리하여 세력팽창으로 천주교 활동이 수면 위로 부각되면서 을해교난과 정해교난이라는 과정의 부작용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난을 겪으면서도 천주교의 전파는 급속도로 확대된다.

기해박해(己亥迫害)의 직접적인 원인과 피해


기해박해는 1839년 기해년에 일어난 천주교 대박해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기해 당해년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1838년부터 1840년까지 3년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1839년(헌종5) 이지연(李止淵)이 집권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순조는 재위27년(1827)에 효명 세자에게 대리 청정을 명하고, 후견의 위치로 물러났다. 건강문제와 세자의 후계수업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효명 세자는 대리청정 4년 만인 1830년, 22세의 나이로 죽었다. 순조는 1830년 세손 환(효명 세자의 아들, 1827)을 왕세손에 책봉하고, 1834년 재위 34년,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헌종(환)의 나이가 8세였다. 왕의 나이가 어려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순원왕후는 안동(安東) 김씨 세도정치의 시조인 영안 부원군 김조순의 딸이다. 그녀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확고한 자리를 잡는데 공헌했다. 1840년(헌종6) 12월에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친정체제로 들어가면서, 헌종의 모후 조대비(효명세자비)의 부친 조만영을 위시한 풍양(豊壤) 조(趙)씨의 세력이 안동 김씨 세력을 대신하게 됐다.
기해박해는 안동 김씨 세력과 풍양 조씨 세력의 다툼 시기에 일어났으나, 1801년에 일어났던 신유박해처럼 정치적 요인에 의한 천주교 박해 상황은 아니었다. 정계는 세도정치의 시작으로 사색당파의 파당적 정치도 소멸되면서, 세도정치의 세력권에 흡수되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외척 세력은 정권 쟁탈에만 주력하고 민생정치에는 수수방관하였다. 당시 천주교에 대한 순조의 관대한 정책으로 인해 신유박해 후 지하로 잠입했던 천주교 활동이 서서히 활성화되고 있었다. 이후 을해교난, 정해교난 등 지방에서 부분적인 박해사건이 발생했으나, 1834년 유방제 신부, 1836년 모방(Maubant, 나신부) 신부, 1838년 로랑 앙베르(Laurant Marie Joseph Inbert, 범세형) 주교가 입국하면서 천주교는 급속하게 활성화되었다.

민생은 순조 이후 잦은 천재지변과 전염병으로 어려워졌으며, 세도정치로 인한 총제적 부패로 더욱 궁핍해졌다. 이로 인해 홍경래의 난을 비롯, 전국적으로 각종 민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로써 왕권은 서서히 무너지고, 사회의 계급제도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천주교가 위치했던 것이다. 조선왕조의 절대 통치이념인 성리학이 시대의 변화에 밀려 한낱 이상으로 물러나고, 자유평등사상을 기초로 한 서구 천주교사상이 서민들 속에 급속히 전파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체제 속에 안주하려는 양반계급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된 것은 매우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지연(李止淵) 세력이 집권하면서 천주교 탄압정책을 강력히 추진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당시 토사교문(討邪敎文),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의 천주교탄압정책은 유효했고, 특히 헌종 5년에 영의정 이지연이 묘당회의(廟堂會議)에서 좌포장(左捕將) 남헌교(南憲敎)를 시켜 천주교 금압을 역설했다. 이에 순원왕후는 ‘그들을 널리 찾아내어 철저히 벌하고,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없애버리지 아니하면, 우리나라가 위태할 뿐만 아니라 온 일류가 멸망할 일이 있을 것이오’라고 영을 내렸다. 이들은 1839년 4월 20일, 이를 근거로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에 나서게 되었다.
이 때 희생된 교인이 서울 경기 일대만 참수(斬首) 70명, 고문에 의한 옥사가 60명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땅 신부가 포함되어 있었고, 그 중 70명의 순교복자(殉敎福者, 가톨릭 순교자 가운데 그 행적이 뚜렷하여 모든 신자의 공경을 받을 사람으로 교회에서 인준한 순교자)가 탄생했다. 그리고 1846년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 외 8명을 포함해 79명의 순교복자가 탄생했다. 물론 이들이 순교복자가 된 것은 1924년 7월 5일 교황 비오2세의 집전으로 장엄한 시복식(諡福式)이 거행되어 이루어졌으니 한참 후의 일이다.
당시의 기록을 간추려 보면 첫 희생자는 1838년의 이호영(李鎬永) 베드로이다. 그는 1835년에 손위 누이 아가다와 함께 체포돼 4년 동안 모진 고문을 견디다가 1838년 11월에 순교했다. 이 사건이 기해박해의 신호탄이 된 셈이다.
1839년 4월에 정 쁘로따시오가 체포됐는데, 갖은 고문에 못 이겨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뉘우치고 관가에 가서 배교선언을 취소한다고 고했다. 관가에서는 광인으로 취급하여 들어주지 않자, 3일간 계속 청원하여 혹심한 고문으로 5월에 옥중 순교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남자 3명 여자 6명 도합 9명이 참수당했다. 이들 가운데 이광헌(李光獻) 아우스팅,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는 양반 출신이고, 박희순(朴喜順) 루시아는 궁녀출신이었다. 박 루시아는 천주신앙을 가지면서 궁녀생활을 그만두었으나, 과거 신분 때문에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심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근심하는 이들을 위로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순교했다 한다. 그 외 이소사(李召史, 소사는 과부를 지칭) 아가다(이호영의 누나), 박아기 안나, 김아기 아가다, 한아기 바르바라, 김업이(金業伊) 막달레나, 권득인(權得仁) 베드로 등 모두 9명이다.

그 해 5월 11일, 형조에서 정부에 사형을 주청한 내용을 소개한다.
『서울에 투옥된 사교의 각 죄인에 대해 거듭 문초하고, 깊이 사핵(실정을 자세히 조사함)한 결과 아래와 같은 사실이 드러났나이다. 즉 남명혁은 사서(邪書)에 온전히 탐독해서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존경하고, 더구나 사특한 관과 사특한 옷(祭衣와 主敎冠)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가 사교의 스승임이 틀림없으며, 제 아내와 장인 장모에게 이 교를 가르친 증거는 절대로 확실하고, 제사는 헛된 일이라 해서 부모의 은덕을 갚아야 하는 본분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며, 혼인에 관해서도 배우자는 동 교인이라야 한다 해서 인륜을 깨뜨리나이다. 권득인은 성교에 관해 변론하는데 있어 조학파(趙學派)의 문인으로서 위패를 땅속에 파묻고 제사를 폐지했고,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천국에 간다 하니 이보다 더 탐혹함이 없을지며, 마님이라 불리우는 박여(朴女)는 사서를 읽는 것으로 집안일을 삼고, 추한 그림을 신같이 공경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며, 뒤로 물러나지 않으리라고 맹세했나이다. 위에 말한 세 죄인은 확증을 얻은 후 사형을 선고했으니 재가하심을 청하나이다.』
내용 중에서 주교제의(主敎祭衣)는 남명혁이 보관 중이던 앵베르 주교의 제의와 관이었으나, 주교를 보호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본인의 것이라 증언했다. 당시 천주교인들의 신앙심은 확고했으며, 관혼상제의식은 지배계층에 용서받을 수 없는 비윤리적 행위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39년 5월27일에 순교한 3명의 복자(準聖人, Blessed) 중에 15세의 소녀 이정희(李貞喜) 발바라가 있었다. 그는 부모를 여읜 고아로, 그의 아주머니의 인도로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그녀는 열렬한 활동을 하다가 피검돼 투옥되었는데, 어떠한 회유와 고문도 이겨냄으로써 여러 사람들을 경탄케 했다. 그녀는 옥중에서 병이 들어 순교했다.
순교자 중에는 스스로 관가에 자수해 순교한 사람도 있었다. 1839년 6월 말, 박해령이 재 확인되고 천주교인 색출이 강화되었다. 이때 이정희(李貞喜) 막달레나, 이매임(李梅任) 데레사, 김성진 말따, 김 루시아 등 4명의 여인이 자신들이 천주교 교인이라고 밝혔다. 그들의 열렬한 신앙심이 그들을 자수하게 하였으며, 그것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길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그들은 1939년 7월20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斬首致命)되었다.
1939년 9월에 옥사한 복자 김 루시아는 무식한 여 교우였다. 자기 신앙심을 고수하기 위해 남편과 헤어지고, 열렬한 신앙심으로 많은 사람을 개종?입교시켰다.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지옥은 좁다고 하는데, 어떻게 많은 사람들을 집어넣을 수 있겠는가?’라고 질문했다. 그녀는 ‘당신의 그 작은 마음은 비록 만 권의 책을 품고 있어도 그것 때문에 좁다고 생각지는 않겠지요!’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에서 6명이 참수치명됐고, 9월 11일 최경환(崔京煥) 방지거가 옥사했다. 최경환은 최양업(崔良業) 신부의 부친이자 당시 신도회장으로서 열렬한 교인으로 교우들의 추앙을 받는 분이다. 그가 체포되어 관가로 호송되었을 때 많은 교우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동행 자수했다고 하니, 그의 지도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그는 호송 중에도 사람들의 야유와 삼복 더위로 지친 교우들을 격려하기 위해 교우들에게 외쳤다. “형제들아 용기로 분발하라. 주의 천신이 금자(金尺)로 너희 걸음을 세고 있음을 생각하라. 너희들의 앞장을 서서 갈바리아로 올라가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는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몸을 가눌 수 없는 지경에도 옥쇠장이 교리책를 읽어달라는 청을 하자 벌떡 일어나 웅변으로 교리를 설명했다고 한다.
그는 9월 11일, 마지막 고문을 당하고 운명하기 직전에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 날에 목이 잘리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내가 옥중에서 죽는 것을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聖意)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고 몇 시간 후에 운명하였다.

 

1839년 9월 21일,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땅 신부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 선고를 받고 치명(致命)하였다. 교우들은 20일 후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그들의 주검을 수습하여 노고산(老姑山)에 모셨다가 1843년 삼성산(三聖山)으로 이장하고, 1901년 명동성당 지하 묘지에 모셨다가 지금은 양화진 성당에 모셔졌다.
1839년 9월 22일,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유진길(劉進吉) 아오스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하였다. 정하상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의 둘째 아들이었다. 신유박해 당시 큰형 철상(哲祥)은 아버지와 같이 순교하였으나, 정하상은 당시 7세라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살아 남았다. 이후 그는 조선천주교회의 핵심인물이 되어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후 33년의 공백기간 동안 새로운 신부를 영입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그의 해박한 교리지식과 문장력으로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저술하여 천주의 존재, 영혼불멸, 사후심판 등의 교리를 간결하게 정리하였고, 십계를 지켜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 책자는 초대교회의 신앙의 순수성과 심도를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유진길 또한 중인 출신 역관으로 정하상과 함께 신부영입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지도인사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두 사람은 혹독한 고문과 함께 참수형을 받았다. 유진길의 아들 유대철(劉大喆)은 13살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최연소 복자가 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부친인 김제준(金濟俊) 이나시오도 사흘 후인 9월 26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치명하였다. 그도 최양업 신부의 부친과 같이 아들을 신부로 보낸 죄로 처형된 것이다. 그날 김제준을 포함한 남자 교인 3명과 여자 교인 6명 등 도합 9명이 교수·치명하였다. 남자 교인은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와 남이관(南履灌) 세바스띠아노로, 조신철은 평민출신으로 부연사(赴燕使)의 수행종복(隨行從僕)으로 북경에 왕래하던 중 정하상이 그의 사람 됨을 보고 입교시켰다. 그는 북경교회와의 연락 임무를 수행하며 지대한 공헌을 세웠으며, 모방신부 입국 후 그를 도와 전도사업의 보조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남이관은 양반출신으로 부모님이 신유박해 때 유배되었는데, 부모님의 신앙심을 계승해 열심히 신자생활을 했으며, 유방제 신부 영입 때 정하상과 함께 의주까지 동행해 그를 서울로 안내, 자기집에 숨겨 보호하였다.
6명의 여자 신자는 허계임(許季任) 박달레나, 박봉손(朴鳳孫) 막달레나, 전경협(全敬俠) 아가다, 홍금주(洪今珠) 베로뻬뚜아, 김효임(金孝任) 콜롬바, 김 유리엣다였다. 이 외에도 수많은 교우들이 희생된, 천주교 대박해사건이었다.
기해박해에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신부의 기록을 소개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방신부는 그의 기록에서 『서울에서 140 내지 150리 가량 되는 양근(陽根)이라는 마을로 내려가 그곳 교우의 집에, 더 정확히 말하면 움막에 거처하였다. 그 초가의 지붕의 높이가 서너 자 가량 밖에 되지 않아 허리를 굽혀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열심히 한국말을 배우며 한 달 동안 머물러 있었다. 음식이라고는 가난한 교우들과 마찬가지로 풀 뿌리와 야채를 넣어 끓인 죽뿐이었다.』
앵베르 주교는 순교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내 몸은 고달프고 시시각각으로 큰 위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 두 시 반에 일어나서 세 시에는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기도 드리고, 예비 교우가 있으면 세례를 주거나 견진성사를 주고, 그 다음에는 미사성제와 성체배령과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열 다섯 내지 스무 명 가량의 교우가 성사를 받고 날이 밝기 전에 물러갑니다. 나는 허기가 져서 대단히 고생합니다. 왜냐하면 새벽 두 시 반에 일어나 일을 하고 오정 때가 되어서야 별로 영양가도 없는 음식을 먹게 되니, 한국과 같이 춥고 메마른 지방에서는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쉰 다음에 학생들에게 신학 강의를 하고, 그 다음에는 다시 밤까지 고백을 듣습니다. 밤 아홉 시에야 방바닥에 자리를 깔고 몽고의 양털로 만든 담요를 덮고 잡니다. 한국에서는 침대도 없고 담요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약하고 병든 몸으로 늘 수고스럽고 바쁜 생활을 해왔습니다. 지금은 일의 최고 한계에 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곤란한 생활을 하는 우리가 그것을 마치게 해줄 칼에 목이 떨어지는 것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이해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상의 기록에서 당시의 사회상과 천주교 교우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읽을 수 있다. 기득권 세력은 순조 때 세도정치를 시작하면서 세력확장의 정당화 명분으로 천주교 말살을 선택했고, 그리하여 피비린내 나는 신유박해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수많은 교인들이 희생되었고, 천행으로 연명한 교인들은 인적이 드문 산중에 깊이 숨어살게 되었다. 그러나 만인평등의 천주사상은 철저한 계급사회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천민들의 삶의 희망이 되었다. 그들의 현세의 삶은 고통이었으나, 내세의 희망이 삶의 전부를 지배했던 것이다. 양반 기득권 세력에게는 한없이 증가하는 이들이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5) 병오박해 : 헌종 12년(1846) :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

병오박해는 기해박해(헌종 5년(1839))의 연장선상의 사건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헌종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이루어지고, 15세가 되던 1841년에 비로소 친정체제로 전환됐다. 비록 헌종의 천정체제로 전환됐다고 하나, 왕의 천성이 나약하고 경륜이 부족해 당시 족벌 세력인 안동 김씨 세력과 풍양 조씨 세력 때문에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15년의 재위기간(1834~1849) 중, 9년의 수재, 역병 등 천재지변과 세도정치의 폐해로 삼정(三政 : 조선 후기 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었던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을 일컫는 말)이 문란해지고, 백성의 생업이 무너져 많은 유랑민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헌종 2년(1836) 남응중의 역모사건, 10년(1844) 민진용의 역모사건 등의 정치사건이 발생했고, 11년(1845) 영국군함 사마랑호가 제주도와 서해안에 출현해 불법측량을 하고 돌아갔으며, 12년(1846) 프랑스 제독 세실이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외연도에 들어와 국서를 왕에게 전하고 가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은 조선정치의 버팀목이 됐던 신분제도의 붕괴를 초래했고, 양반중심의 정치세력에 위기감을 조성하게 됐다. 천주교가 지향하는 만인평등사상이 이러한 정국에 양반 세도정치 세력에 위험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음은 매우 당연해 보인다.
기해박해로 인해 조선천주교회는 풍비박산이 나고, 와해직전 상황에 직면했다. 화를 면한 신자들은 자연히 지하로 잠입하고, 활동은 정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은 일시적이었고, 지하의 조직은 재정비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화를 면한 현석문 갈롤로, 이재의 도마, 정 베드로 3명이 주축이 되어 고난으로 신음하는 신자들을 격려하고, 신앙조직을 재건하는 한편, 북경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1840년에 파견된 연락원은 도중에서 동사하여 실패로 돌아갔고, 1841년에도 북경에 연락원을 파견했으나 접촉에 실패했다. 마침내 1842년 연락원이 페레올 주교의 연락원과 접촉에 성공, 조선교회의 박해 참상이 중국교회당국에 상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페레올 주교는 1838년 8월 14일, 주교로 임명을 받음과 동시에 조선교구 주교보좌로 임명 받았으며, 기해박해로 순교한 앵베르 주교 뒤를 어어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으로 승품(陞品)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초에 입국했지만 그 당시 부제였으며, 조선교구의 재건을 위해 활동하다가 1845년 8월 페레올 주교를 모시러 중국에 가서 상해 근교의 킹가항(金家港)에서 서품을 받았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기 전 1842년 2월, 그는 프랑스 군함 에리공(Erigone) 호를 타고 마카오에서 양자강 하구에 도착, 민간 선박을 이용해 그 해 10월 요동 땅에 도착했다. 그 후 남만주 팔가자(八家子)에 거주하면서 조선 입국통로 개척을 위해 노력했다. 김대건 안드레아는 12월, 1차로 의주변문을 통과·입국했으나, 위험을 느끼고 팔가자로 돌아갔다. 1844년 2차로 동북부 통로를 개척하기 위한 시도를 했으나 역시 불가능하여 팔가자로 철수, 1844년 12월 17일 그곳에서 부제 서품을 받고, 1845년 1월 의주 국경을 통과해 서울 잠입에 성공했다.
그 동안 수 차례에 걸쳐 국내 입국통로를 개척하려 시도한 것은 페레올 주교 영입을 위함이었으나, 당시 국경 경계가 삼엄해 외국 신부를 대동하는 것이 불가능해 안전한 통로를 모색했던 것이다. 그는 국내 잠입 후 페레올 주교 영입을 위한 기초작업을 마치고, 4월에 해로(海路)를 통해 상해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1845년 8월 17일 상해 근교 킹가항에서 신부서품을 받고, 8월 24일 이곳 왕담 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다. 그는 8월 31일 페레올 주교, 다불뤼 신부와 함께 상해에서 해로로 출발,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 제주도까지 표류하였으나, 간신히 충청도 강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46년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메스뜨르 신부와 최양업 도마의 입국을 돕기 위해 백령도(白翎島)로 가서 중국어선에 서신을 전달하고 돌아오는 중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돼 해주감영으로 이송됐다가 서울로 압송됐다.
김 신부는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굳건한 신앙의 자세를 견지했고, 천주교 교리를 조리 있게 설명함으로써 모든 이를 놀라게 했다. 또한 세계지도를 번역·복사했고, 그 과정에서 뛰어난 외국어 능력과 학식, 고매한 인격으로 관료들이 탄복하여 구명을 상신(上申)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기해박해의 후유증이 가시질 않아 조정에서는 천주교 탄압의 기운이 상존한데다, 때마침 프랑스 세실 제독이 이끄는 동양함대가 충청도 홍주(洪州)에 나타나 기해박해 때 학살된 3인의 성직자에 대한 문책을 하여 당국의 태도가 돌변했다.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주청(奏請)으로 김 신부에게 1846년 9월 15일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이 언도되고, 다음날 새남터에서 형이 집행됐다. 9월 19일에는 김대건 신부과 관련된 현석문(玄錫文) 갈월로가, 그 다음날에는 임치백(林致白) 요셉, 우술임(禹述任) 스산나, 김임이(金任伊) 테레사, 정철염(鄭鐵艶) 아가다, 남경문(南景文) 베드로, 한이형(韓履亨) 로렌시오 등 8명의 신자가 순교했다.
현석문은 앵베르 주교를 영입하고, 여러 성직자를 도와 조선교회 발전에 공을 세웠다. 기해박해로 조선천주교회가 큰 타격을 받아 기존이 조직이 와해됐으나, 그는 박해의 선풍(旋風)이 주춤해지자 교회조직 재건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며, 당시의 사정을 기록한 기해일기(己亥日記)를 제작해 교회사에 소중한 사료를 남겼다.
임치백은 비 신자였으나, 그의 가족들이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에 신자로 오인·검거돼 김대건 신부와 함께 수감됐다. 그는 그 곳에서 김 신부에게 교화되어 옥중 영세를 받고, 석방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 신부와 함께 영광된 순교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로써 기해박해 이후 79인의 복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병오박해는 피해인원은 적지만, 조선천주교회의 첫 신부를 잃었다는 점에서, 마치 자생하려는 연약한 싹을 베어 천주교회의 발전에 타격을 주었음은 물론, 조선 최초로 외국에서 유학해 선진문물을 터득한 선각자를 잃었다는 점에서 큰 국가적 손실로 지적되고 있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기 전,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한다.
『교우들 볼지어다.
우리 벗들이여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시로부터 만물을 내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사 세상에 두신 위자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같이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낳은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 은으로 세상에 나고 주 은으로 영세 입교해 주의 제자가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이며 세상에 나 입교한 보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배은 배주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오. 밭을 삼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를 돌보지 않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 이르러 곡식이 잘되고 영글면 마음에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고 춤추며 흡족할 것이요, 곡식이 영글지 않고 밭 거둘 때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을 내고 들인 공부로서 그 밭을 학대하느니, 이같이 주 땅으로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해 피로 우리에게 물을 주사 자라고 영글도록 해주시니, 심판 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영근 자 되었으면 주의 의자로서 원수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 세상에 내려오사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움 중에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나 계신지라.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며 예수 승천 후 사도 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되 성교 두루 무수 간난 중에 자라니 이제 우리 한국에 성교 들어온지 50, 60년에 여러 번 고난으로 교우들이 이제까지 이르고 또 오늘날 고난이 치성해 여러 교우와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제형들까지 환란을 당하니 우리 한 몸이 되어 애통지심이 없으며 육정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 돌보신다 하고 모르심이 없이 돌보신다 했으니 어찌 이렇듯한 고난이 주명 아니면 주상 주벌 아니랴. 천주 성의를 따르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 대장의 편을 들어 이미 항복 받은 속세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 시절을 당해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해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 같이 해서 싸워 이길 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도우며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해서 위주 광영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할지어다. 여기 있는 스무 명은 아직 주 은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제형들이 그들의 가족을 부디 잊지 말라.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로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으로 나갈 것이니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마음 사랑해서 잊지 못하는 신자 제형들은 이런 난시를 당해 부디 마음을 허실하게 먹지 말고 주야로 주우를 빌어 삼구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 광영하고 여등의 영혼 대사를 경영하라.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 구령사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 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취해서 성교회의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됨을 증거하며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 한 몸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말은 무수하나 거처가 타당치 못해 못 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서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제형들 입에 사랑을 친구하노라.』
- 김 안드레아

분명 그는 죽음을 예감하고 교우들에게 지극한 천주 사랑의 확신을 심어 주고 떠났다.
사육신 성삼문은 죽음을 앞두고 『해는 서산에 지려고 하며, 북은 형의 집행을 재촉하는구나. 황천길에 객사도 없다는데, 나의 혼은 오늘 저녁 어느 곳에 머무를까.』라는 시를 읊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죽음을 앞두고 『바야흐로 내 앞에 영생의 길이 열리노라.』 라고 하였다. 전자는 슬픔과 절망의 표현이고, 후자는 희망과 환희의 표현이다. 이것이 신앙의 힘임을 보여 준 것이다.

6) 병인박해 : 高宗3년~8년 : 1866년~1871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丙午迫害 헌종12, 1846)후 20년은 비교적 평온한 세월이었다. 헌종은 유약한 임금이었고, 안동 김씨,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에 왕권확립이 불가능하였다. 세도정치의 주체에게는 정치세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기존의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우선적인 문제였다.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 만인평등사상을 전파하는 천주교회의 확산이 기존의 주체세력에 위협적 존재로 부각되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 외세의 조선 개방요구는 폐쇄적 정권에 위협적 상황으로 인식되었다.

1839년(헌종5)의 기해박해, 1846년(헌종12)의 병오박해는 이러한 국내외 정치상황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사건이다. 1849년 6월, 헌종은 재위 14년 7개월 스물 셋의 나이로 후사 없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는 재위기간 내내 세도 권력정치에 희생된 임금이었다.
안동 김씨세력은 당시 왕실의 어른인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純祖의 妃)로 하여금 헌종의 7촌 숙(叔)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을 왕으로 추대, 25대 철종으로 등극시켰다. 이는 헌종의 6촌 이내에 혈육이 없었고, 재종숙(再從叔)이 가장 근접한 육친(肉親)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강화도에 유배되어 농군으로 자란 원범은 세도정치 지속을 위한 적합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철종(哲宗)은 사도세자의 증손(曾孫)이자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孫子)다. 사도세자는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정조가 큰아들이었고, 이복형제(異腹兄弟)로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이 있었다. 사도세자가 죽고 정조가 세손(世孫)이 되자 사도세자의 죽음에 연루되었던 세력이 보복이 두려워 새 왕자를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전에 발각되어 은전군은 자결하고, 은언군과 은신군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은신군은 제주도에서 죽고, 은언군만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기게 된다. 은언군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상계군(담)은 정조3년(1779) 홍국영의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자살하였고, 은언군과 아내 송씨, 큰아들 상계군의 처(큰 며느리) 신씨는 천주교 교인으로 순조1년(180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사사(賜死)되었고, 은언군도 이 사건으로 사사되었다.
은언군의 둘째 아들 전계군(李珖)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이 바로 원경, 경응, 원범이다. 그러나 첫째 원경은‘민경옥의 옥’사건에 연루되어 죽고, 경응, 원범 형제는 강화도에 유배되어 농민으로 전락하였다.
그런 가운데 원범이 19세 되던 해에 갑자기 임금으로 발탁되어 즉위하게 된 것이다. 철종은 농군으로 아무런 경륜과 학문도 없이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꼭두각시로 변신하였다. 그는 1863년 12월, 재위 14년만인 33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가 재위했던 기간은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해 왕권은 무너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기존의 국가정치 이념인 성리학으로 이루어진 국가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붕괴의 조짐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였다. 도처에서 각종 민란이 일어났고, 서학으로 시작한 천주교의 교세 확장은 수 차례의 박해와 고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확대일로에 있었다.
철종 재위기간 중 정부의 천주교 탄압이 없었던 것은 철종 개인적으로 천주교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이 작용했을 것이고, 집권 주체세력은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내외정세를 타개하기에 급급해 천주교 탄압정책은 우선 순위가 밀려 났던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증후는 1866년(고종3)에 일어난 대 병인박해를 예고하는 전주곡이 되었다.
고종은 1852년 남연군(仁祖의 셋째 아들 麟坪大君의 6대손으로, 正祖의 庶子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감)의 아들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 아명은 명복, 자는 성암이다. 그는 헌종의 모후 조대비에 의해 익성군에 봉해지고, 1863년 12월 제26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고종의 나이 12살이었다.
60년 동안의 막강한 김씨 세도정치 상황에서 흥선군 이하응의 아들이 왕이 되기까지는 배후에 극비리의 공작이 있었다. 당시의 정치상황은 왕권은 없고 오로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만 있었기에 그 폐해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하응은 궁중의 가장 어른이었던 헌종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翼宗)의 부인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와 극비리에 접촉하여, 둘째 아들 명복을 익종의 양자로 만들어 철종의 사후를 대비하는 공작을 추진했다.
이는 안동 김씨의 왕권지명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조치였으며,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위압에 눌려있던 왕권을 회복하려는 조치였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뒤를 잇게 하여 왕에 등극시키고 자신은 수렴청정으로, 흥선군 이하응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봉하여 그에게 섭정의 대권을 위임하였다. 이는 명분이 있는 조치였고, 또한 일사불란하고 신속하게 처리돼 집권세력의 반발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다.
섭정의 대권을 거머쥔 흥선대원군은 쇠락한 왕권을 되살리기 위하여 최우선적으로 안동 김씨세력 타파에 총력을 기울였다. 또한, 문란한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시시각각으로 밀려드는 외세에 대처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병인박해(丙寅迫害)는 고종3년(1866) 일어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고종8년(1871)까지 6년 간에 걸쳐 일어난 사건으로 순교자만 2천 여명이고, 비공식적으로 살육당한 인원을 합하면 8천 여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사건은 흥선대원군의 지시로 이루어졌다. 초기 흥선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승지(承旨:비서) 남종삼(南鍾三)이 천주교 신자였고, 그를 통해 천주교의 교리를 듣고 호의적 반응을 보였던 점과, 대원군의 부인(閔 府大夫人)이 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 후일 영세 입교 마리아로 세례명을 받았던 점(1896년 10월), 고종의 유모가 천주교 교인이었던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사건은 1860년(철종11) 우리와 제정 러시아가 두만강을 경계로 접경하게 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들은 당시 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하기 위해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난 후에 고종원년(1863)부터 고종2년까지 지속적으로 국경을 월경하여 군사적 위협을 가해 왔다. 대원군에게는 대내문제가 산적한 시기에 외세의 위협을 받는다는 것이 위험하게 느껴졌다. 이 문제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천주교 교인 홍봉주(洪鳳周), 김면호(金勉浩), 남종삼(南鍾三) 등이 주동이 되어 한·영·불 삼국동맹을 제의, 러시아 세력에 대처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정책(防我政策)을 건의하였다. 이들은 이 사건이 그간의 천주교 탄압을 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여, 국내에서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는 프랑스 신부들을 이용하려는 계획이었다.
대원군은 이를 수용하여 당시 조선에 체류하는 프랑스 신부들을 접견하도록 주선할 것을 하명하였다. 그런데 당시 전국 각지에 산재하여 포교활동 중인 프랑스 신부들과의 연결이 용이하지 않았다. 또한, 이를 추진하는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못해 면접의 시기가 지연되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대원군은 교회 측의 무성의한 조치에 매우 분개하였다.
이러한 대원군의 의중이 알려지면서 배외사상(排外思想)을 갖거나 천주교 반대입장에 있는 주변 인사들에 의해 극렬한 반대여론이 조성되고, 오히려 쇄국양이(鎖國攘夷)와 사교금압(邪敎禁壓)의 강한 압력을 받게 되었다. 때마침 대원군은 청국에서 돌아온 사신의 보고로 당시 청국에서도 양이정책(攘夷政策)과 서교탄압(西敎彈壓)을 강행하여 많은 외국인을 처단했다는 보고를 접하게 됐다. 그 동안 2년 간의 러시아 도발이 이 즈음에 조용하였던 점도 대원군의 생각에 변화를 갖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한 대원군은 산적한 국내정치의 척결을 위해 주변의 강력한 여론을 수렴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철종 시대 천주교 탄압의 소극적 대처에 힘입어 당시 12명의 프랑스인 신부가 국내에 잠입·활동 중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頓伊) 부주교가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은 변방에서 활동하다가 대원군 면접의 연락을 접하여 1866년 1월 25일 다블뤼 부주교가 서울에 도착하였고, 1월 29일에 베르뇌 주교가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돌변한 상황을 감지한 교인들이 긴급히 주교들의 피신을 종용하였으나, 주교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만약 피신하게 되면, 자신들을 색출하기 위하여 보다 많은 교인들이 피해를 볼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병인년(고종3, 1866년) 2월 19일, 베르뇌 최형(崔炯)과 요한 전장운(全長雲) 두 교인의 체포로 병인박해가 시작되었다. 2월 23일 태평동 소재 홍봉주 집을 급습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가 체포되고, 2월 25일에는 전국적으로 외국신부 체포령이 내려졌다. 25일 브르트니에르 신부(白 神父)가 체포되고, 27일에는 경기도 광주에서 보뤼 신부(徐 神父)가, 용인에서 도리 신부(金 神父)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대원군은 그의 평소 성격대로 외국인 신부들의 처형을 속전속결로 처리하였다. 3월 8일, 체포된 신부들을 새남터에서 참수하고, 홍봉진, 남종삼은 서대문 밖에서 참수당했다. 3월 10일에는 최형(崔炯), 전장운(全長雲)이 처형되었고, 3월 11일에는 프르티 신부(申 神父), 프티니코라 신부(朴 神父)와 정의배(丁義培), 우세영(禹世英)등이 새남터에서, 3월 30일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黃錫斗)이 같이 충남 보령에서 처형되었고, 오메뜨르 신부(吳 神父), 유앙 신부(閔 神父)또한 충청도 보령에서 참수되었다. 이로써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12명의 프랑스 신부 중 베르니 주교를 포함한 9명이 참수를 당했다. 이 때 신부들과 같이 처형된 교인들은 모두 대표적인 교인들이었고, 특히 전장운과 최형은 <서교공과(聖敎工課)>, <성찰기략(省察記略)>을 저술하여 교회발전에 크게 기여한 교인이었다.

정부는 차제에 날로 번창하는 천주교 세력을 발본색원(拔本塞源) 하겠다는 의지로 강력한 금압령(禁壓領)을 지방에 시달하여 대대적인 전국적 색출작업을 실시하였다. 당시 하달된 내용을 살펴보면, 천주교 서적을 색출하여 태워버리고, 오가작통(五家作統) 구법(舊法)을 시행하여 이를 어기는 자는 교인들과 같이 엄벌에 처하고 고발자에게는 상금을 지급하며, 외국세력과 내통하는 자는 선참후계(先斬後啓)하도록 했다. 이러한 탄압은 6년 내내 이어졌다.
병인박해가 시작된지 수개월 내에 2천 여명이 학살되고, 이를 피해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어 병사(病死), 아사(餓死)자를 포함하면 8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로마제국의 그리스도인 박해사건과 더불어 세계적인 종교박해 사건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충청도 목천(木川:현재 천안))에서 활동하던 페롱 신부(權 神父), 충청도 진밭(長田:현재 공주)에서 활동 중이던 리델 신부(李 神父), 충청도 진천에서 활동 중이던 까레 신부(姜 神父) 3명이 생존했다. 그들은 1866년 6월 15일 상봉하여 페롱 신부를 조선 임시 책임자로 선임하고, 리델 신부를 청국 주재 프랑스 외교기관에 참상을 보고, 구원을 요청하는 밀사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리델 신부는 11명의 조선교인을 대동하여 작은 배로 천신만고 끝에 7월 7일 산동성(山東省) 지프(芝)에 당도하여 프랑스 함대 사령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866년 8월과 9월에 프랑스는 2차에 걸쳐 강화도에 군사를 파견하여 위협을 했으나 완강한 저항에 패퇴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병인양요(丙寅洋擾)다. 이때 리델 신부는 조선에 남아 있는 페롱, 까레 신부를 구하기 위해 동행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두 신부는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강화로 잠입하였으나 이미 퇴각한 후였다.
낙심한 그들은 자력으로 해로로 탈출을 시도, 그 해 10월 26일 탈출에 성공하여 산동성 지프에 도착하였다. 이로서 조선에는 또 다시 한 명의 성직자도 없는 시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의기양양하여, 강화도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강화함은 물론, 천주교 탄압정책을 강화하였다. 그 해 6월 26일, 영국배 엠페러호(Emperor)가 충청도 해미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고, 7월 11일에는 미국상선 제네랄 셔먼호(General Sherman)가 대동강을 따라 평양에 나타났다가 승선요원이 살해되고 방화된 사건이 일어났다. 대원군은 이러한 사건들이 동시다발로 일어난 것은 천주교도들이 외세와 내통하였기 때문이라 여겼고, 이로 인해 6년에 걸쳐 수천명의 천주교인이 살해되는 참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장기간에 걸쳐 일어난 대 참사극은 결국 외국세력으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는 빌미가 되었고, 당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어두운 그의 무지와 이로 인한 실정이 1873년 그가 정계에서 물러나는 결과가 되었음은 물론, 장차 국가가 멸망하는 직접적 단초(端初)를 만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