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② 을사늑약

구름위 2013. 6. 21.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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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세 깜깜한 고종, 러일전쟁 후 미국 믿다 발등 찍혀

 

 

일본은 러일전쟁 때 외교도 전투처럼 임했다. 개전 전부터 강화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했다. 미국과 사전 거래하고 한국을 완벽하게 봉쇄했다. 고종이 열강이 도울 것이란 환상에 젖어 있는 동안 일본은 냉정하게 영국 및 미국과 이권을 주고받고 러시아를 상대했다. 게임은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전쟁 과정에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어야 했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가자 고종은 미국으로 밀사를 파견했다. 이때 보낸 밀사가 이승만이었다. 일한외교자료집성(集成)은 고종이 이승만을 미국에 보내 강화회담을 조금이라도 한국에 유리하게 이끌려고 시도했다고 전하고 있다. 독립협회의 열혈 청년 이승만은 1899년 박영효 총리 추대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위기에 몰렸다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종신형으로 낙착되었다. 1904년 4월 특별사면을 받은 이승만은 그해 11월 4일 고종의 밀사로 도미(渡美)길에 올랐다. 무기수가 밀사로 극적 변신한 것이다. 이승만은 하와이 교민을 대표하는 목사 윤병구과 함께 미 본토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이 믿었던 주미 한국 대리공사 김윤정(金潤晶)은 밀사를 돕지 않았다. 김윤정은 한국 정부의 공식 훈령이 없다는 핑계를 댔다. 주미 일본 임시대리공사는 ‘작년에 (이승만·윤병구가) 미국 대통령을 회견하게 주선하라고 강청(强請)하다가 격론이 오갔고 폭행까지 했으나 대리공사(김윤정)는 정부 훈령이 아니면 결코 움직이지 않겠다고 강하게 주장했다(일본외교문서 명치(明治) 38년(1905) 8월 5일)’고 일본에 보고했다. 김윤정은 이미 일본을 선택했고 실제로 일제 때 충북도지사를 역임한다.

 

 
그러나 김윤정이 이승만의 활동을 도왔더라도 별 효과는 없었을 것이다. 1905년 8월 18일 미국 포츠머스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강화회담이 시작되었을 때 일본의 한국 지배는 이미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러시아의 만주 이권을 어느 정도 넘겨받을 것인지와 배상금이 문제였다. 일본 각의(閣議)는 강화회담이 열리기 4개월 전인 4월 8일 이미 한국에 대해 이른바 ‘보호권 확립’ 방침을 결정했다. 일본 외교 연표 및 주요 문서 명치 38년(1905) 4월 8일조에 따르면 ‘한국의 대외관계는 모두 일본에서 전담한다’는 것과 ‘한국은 직접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지 못한다’는 것, ‘일본은 한국에 주차관(駐箚官: 통감)을 두고 한국의 시정을 감독한다’는 것 등을 이미 결정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반 쪽짜리 독립국으로 전락시키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일본 각의는 ‘이 조약으로 한국과 열국(列國)과의 조약상 관계가 일변할 것이므로 열국의 태도 여하를 고려해 적당한 시기에 단행한다’며 외국의 반응에 마지막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한국의 반발은 이미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일본은 1902년 1월 이미 영·일동맹을 체결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영국으로부터 승인’ 받았다. 일본이 1904년 2월 귀족원 의원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를 미국에 특사로 보낸 것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하버드대 동창생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본이 루스벨트를 중재 당사자로 점 찍고 루스벨트가 중재를 자처하고 나선 것 자체가 일종의 사기였다. 포츠머스 강화회담이 열리기 직전인 1905년 7월 미국 대통령 특사인 육군장관 태프트(W. H. Taft)가 필리핀 방문 길에 일본을 찾고 밀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고 일본은 한국을 차지한다는 밀약이었다.


1924년까지 극비였던 세칭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며 극동 평화에 직접적으로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고 확인해 주고 필리핀을 차지했다. 1905년 9월 5일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한국은 물론 여순과 대련의 조차권과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樺太)까지 양도받았다. 일본과 거래 사실을 숨겼던 악덕 중개인 루스벨트는 포츠머스 강화조약 주선의 공으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한 약소국을 한 강대국이 확실히 차지하는 게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평화관이었다.

 

러시아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배상금 지불을 끝내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 내에서 거센 반발이 일었다. 승리하긴 했지만 일본의 희생도 막대했던 것이다. 1904년 8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벌어진 여순 공방전에서 일본은 전사자 1만1100여 명(러시아는 7400여 명)이 발생했다. 총 사상자는 5만9000명에 달했다. 1905년 3월 초의 봉천회전(奉天會戰)에서도 전사자 1만5000여 명(러시아 8700여 명)이 생겼다. 전비도 10년 전 청일전쟁 때의 2억48만 엔에 비해 8배나 많은 15억8400만 엔이나 들었으니 배상받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대러시아 강경파가 주축인 ‘강화(講和)문제동지연합회’ 등은 조약 체결 당일부터 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국민대회를 열었다. 9월 5일부터 7일까지 일본 각지에서 17명이 사망하고 2000여 명이 체포되는 소동까지 발생했다.

 

루스벨트가 이미 한국을 일본에 넘겨준 사실을 모르는 고종은 1905년 10월에도 미국인 헐버트(H. B. Hulbert)를 통해 루스벨트에게 친서를 전달했다. 고종은 이미 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패전국 러시아에도 매달렸다. 11월 하순 측근 이용익(李容翊)을 페테르부르크로 보내 주러시아 공사 이범진과 러시아 외무대신 람스도르프를 만나 “러시아에 한국의 이권을 주는 대신 보호를 요청한다”는 고종의 계자(啓字: 국왕의 결재 도장을 받은 공문) 공문을 전했다. 당시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은 이용익이 상해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과정을 자세히 적고 있을 정도로 고종의 특사 외교는 일본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고종은 1906년 1월에는 런던 트리뷴지 기자 스토리(D. Story)를 통해 북경 주재 영국 공사에게 5년간 열강의 보호를 요청하는 국서도 보냈지만 열강들은 이미 한국을 일본 몫으로 인정한 후였다.

 

1905년 11월 9일 일본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방한했다. 그런데 나흘 전인 11월 5일 친일파 송병준이 결성한 일진회에서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했다.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 정부에 위임하는 것이 국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영원히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란 내용으로 이토가 할 말을 대신한 것이다. 나중에 송병준과 이완용은 누가 한국 멸망에 더 공을 세우는지 경쟁하는 사이가 된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한국이 부강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아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인 통감(統監)에게 넘어 갔다.

 

그해 12월 21일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결정되는데, 외교 외에도 국정 전반을 관장하는 사실상의 준(準) 총독이었다. 외교권 강탈 사실이 알려지자 거센 반발이 일었다. 조약 체결 당시 외부대신이던 박제순을 비롯해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와 시위가 거세게 일었다. 황성신문은 조약 체결 다음 날(11월 18일) ‘수십 인의 군중이 학부대신 이완용 집에 돌입하여 불을 질렀다’고 보고하고 있다. 20일에는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이 ‘이날을 목놓아 통곡한다(是日也放聲大哭)’는 논설을 실어 항의했다. 전국 각지에서 오적 처단과 조약 파기를 외치며 의병이 봉기했다.

 

그러나 고종은 협상 체결 당사자였던 외부대신 박제순을 11월 22일자로 과거의 정승 격인 의정부 의정대신으로 승진시켜 정권을 맡겼다. 다음 날 전(前) 의정 조병세(趙秉世)가 고종에게 ‘박제순에게 방형(邦刑: 사형)을 실시하고 나머지 대신들도 매국(賣國)의 율(律)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청하고, 민종묵·윤두병·이상설·안병찬 등도 항의 상소를 올렸다. 자결항쟁도 뒤를 이었다. 1905년 11월 30일 시종부무관장 민영환이 자결하고, 다음 날에는 조병세가 음독 자살했다. 주영(駐英) 서리공사 이한응은 영국에서 음독 자살했다. 12월 4일에는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哲), 시위대(侍衛隊) 김봉학(金奉學)이 자결했다. 성토 대상이 된 을사오적은 12월 16일 공동으로 상소를 올려 “새 조약의 주지로 말하면, 독립(獨立)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帝國)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사는 안전하고 황실은 존엄한데, 다만 외교에 대한 한 가지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으니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면 도로 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궤변과 함께 사직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한편으로는 자결자들에게 시호와 훈장을 내려 표창하면서 을사오적의 공동 상소에도 “지금처럼 위태로운 때에는 오직 다같이 힘을 합쳐서 해 나가야 될 것”이라고 사직을 만류하는 이중적 정치 행보를 계속했다. 고종은 마지막 순간에도 목숨 걸고 저항하는 정치노선을 선택할 생각은 없었다. 열강들이 왕국을 이미 일본 몫으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줄타기 정치 수완과 외교적 방법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