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조선천주교의 탄생

구름위 2013. 6. 2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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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석학들, 서학과 천주교 탐독


남인 학자들이 모여 각 지역 강학회를 통해 당시의 신학문이자 실학이라는 서학을 열심히 탐독하고 토의했다는 설명은 이미 했다. 남인들은 정계진출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주자학과 성리학이 이론에 치우치고 공리공론으로 일관하는 정체성 때문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진암주어사강학회가 가장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게 된 것은 여기에 참석한 학자들이 당대의 석학들이었고, 그 활동의 범위와 깊이가 상당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초기모임에서는 중국에서 전래된 서학의 총체적 범위가 토론 대상이 됐으며, 천주학의 논의 또한 학문의 범위를 넘지 못했다.
이벽(李蘗)이 천주교를 접하게 된 것은 그의 고조부 이상경(李尙敬)이 선양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셨을 때 획득하여 가져온 천주서적을 접하면서 부터다. 이벽이 스스로 천주서적을 접했다고는 하나 당시는 천주사상이 금기가 아니었고, 스스로도 유교의 충효사상에 배치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는 그가 지은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를 보면 알 수 있다.

「집안에 어른이 있고 나라에는 임금이 있네
내 몸에 영혼이 있고 하늘에는 천주가 있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네
삼강오륜 지켜가자 천주공경 으뜸일세

아비 없는 자식 봤나 양지 없는 음지 있나
임금용안 못 뵈었다 나라백성 아니련가
천당지옥 가보았나 세상사람 시비마소
있는 천당 모른 선비 천당 없다 어이 아노.」

이벽 뿐만 아니라 당시 천주학을 접했던 선비들의 인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선 교회의 창설과 자발적 활동


초기 천주교가 천진암주어사강학회의 구성원에 의해 시작됐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천진암주어사강학회가 당시의 수많은 강학회보다 유명했던 것은 지리적 조건과 우수한 인적 구성원 때문이었다.
천진암은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퇴촌에 위치했다. 지금은 팔당댐이 건설돼 이 일대가 거대한 호수로 변해 왕래가 불편하지만, 옛날에는 갈수기에 여울목을 건너기도 하고, 작은 나룻배로 간단히 왕래할 수 있을 만큼 수량과 강폭이 넓지 않은 곳이었다. 또한 가까운 거리에 용문사도 있어서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면서 정기적으로 학문적 토의를 하기에 적합하기도 했다. 이 지역에 당시 걸출한 석학이 많았던 것은 한양과의 거리가 지척이고 산수가 수려하여, 벼슬길에서 물러난 선비들이 이 곳에 정착해 생활했기 때문이다. 정약현•약전•약종•약용 형제들과 권철신•일신 형제들, 이 벽 등도 당시 그러한 여건으로 이곳에 살고 있었다.
천진암주어사강학회가 유명해지게 된 것은 천주교의 태동이 이곳에서 이루어졌고, 정약종 형제들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의 시원뿐만 아니라, 근대화를 위한 개혁인 정약용의 학문도 이곳에서 출발했다. 당시의 인적 구성과 상호관계를 보면 이벽은 정약현의 처남이고, 이승훈은 정약종의 매형이다. 황사성은 정약현의 사위고, 정하상은 정약종의 아들이다.
이벽은 천주학에 가장 심취했고, 이승훈은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지식을 전수 받았다. 이승훈은 이벽의 권유로 북경에 가게 됐고, 북경북당(天主敎會)에 찾아가 그라몽(Grammont 梁棟林) 신부에게 교리를 배우고, 1784년 영세를 받았다.
이승훈의 세례명은 베드로였으며, 그는 세례를 받고 그 동안 학문적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의 천주학을 종교적 신앙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이승훈이 귀국하면서 천주교 전파는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이승훈은 이벽을 영세하고 본명을 요한이라 하였으며, 권일신을 프란치스코라 했다.
이들의 각오와 역할은 세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승훈은 교회의 반석이요, 이벽은 세례자 요한을 뜻하여 한반도에 예수님의 오심을 예고하였다. 권일신의 프란치스코는 사도 프란치스코처럼 새로운 땅에 천주교를 전파한다는 뜻을 의미했다.
그들은 천주신앙의 전파를 결의하고 실천에 옮겼다. 이벽은 중인들에게도 천주교를 전파해 역관•의관이었던 최창현(崔昌顯), 최인길(崔麟吉), 김종교(金宗敎), 김범우(金範禹), 지황(池 璜)등을 참여시켰고, 권일신은 충청도 일원에서 전교해 기틀을 세웠고, 이단원(李團元), 이존창(李存昌), 유항검(柳恒儉) 등을 입교시켰다. 그들의 활동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왕성하였음은 물론 활동 범위는 경향 각지로 전파됐으며, 양반, 중인, 상민 등 계급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참여시켰다. 이러한 종교활동이 확대되고 집단화 됨으로써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던 것이다.
이는 당시 강학회의 학술적 범위를 이미 넘어선 종교적 활동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1785년 당시 명예동(明禮洞 지금의 明洞)의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 집에서 교우들이 집회를 정기적으로 가졌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관가에서 급습해 교우 10여 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 동안 은밀하게 이루어지던 천주교 활동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도마 김범우는 옥고로 인해 1785년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이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며, 최초의 천주교 탄압 사건이라 하겠다.
이 사건으로 당국은 천주교의 실태를 알게 됐고, 짧은 기간에 천주교 전파가 급속도로 이루어졌음에 당황했다. 당국은 초기에 발본색원(拔本塞源) 하려는 의지를 보였으나, 이로 인해 교인들은 더욱 단합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이 사건으로 소집단 활동은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어, 보다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게 됐다.
이승훈은 권일신, 정약종 등과 논의하여 조선 교회를 조직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권일신을 주교로, 이승훈,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등 수 명을 신부로 정해 교회 성무를 맡아 보고, 신품권(神品權)을 행사하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물론 이들은 이러한 행동들이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것을 당시는 알지 못했다. 활동은 약 1년 간 계속됐으며, 교세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됐다.
이러한 활동 소식이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알려지고, 그는 조선의 자발적 신앙활동에 감동했으나, 이는 교회법에 어긋나는 행동임을 지적하고 중지할 것을 명했다. 이로서 신앙활동에 큰 차질이 생기게 됐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부의 파견을 청원하게 됐다.
청원을 접수한 북경교구에서는 1791년 레메디오스(Johanne 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파견했으나 진입에 실패하고, 1794년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다시 파견, 입국에 성공했다. 당시 주문모 신부가 파견된 것은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인지하고, 조선사람과 외모가 비슷한 중국인 신부를 파견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조선 땅에 처음으로 신부가 파견됐던 것이다.
조선 자생교회는 1784년 이승훈의 영세로부터 시작했고, 조선 교회의 창설은 1785년 당시 명예동 김범우 집에서 집단적 교회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이를 천주교회의 원년이라 한다. 1794년 주신부가 파견될 때까지 10년의 기간에 이르는 자발적 활동은 천주교 사상 유례가 없는 일로, 1797년 구베아 주교가 교황 비오6세에게 보고하여 교황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당시 교우 수가 4천 여 명에 달했다고 하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정조 임금과 실학자들의 성장


이 시기는 이조 22대 정조 임금이 재위하던 시기다. 정조는 영조의 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조선이 탄생하면서 태동한 당쟁은 선조 대를 거치면서 본격화돼 사색 당파로 변모하면서, 정치적 쟁점을 위한 당쟁의 범위를 넘어 지역적•학문적 패거리 당쟁으로 변모돼 그로 인한 국가적 폐해가 극심하게 됐다.
영조 임금 때 이러한 폐해를 막기 위해 탕평책을 강력히 추진했으나, 아버지 영조가 당쟁에 연루돼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이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를 보면서 자란 정조는 임금에 재위하면서 정치적 • 사회적 개혁을 시도하게 된다.
정조는 임금에 즉위하면서 서인 세력이 주도하는 정권을 약화시키고, 남인 세력으로 대치하려는 노력을 진행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남인 세력을 기용하려고 해도 인재가 없었다. 따라서 정조는 재야의 남인 소장 학자들을 양성해 이들을 활용코자 했다. 이 때 발탁된 남인 소장학자의 대표적 인물이 이가환, 정약용이었고, 임금은 이들을 매우 사랑했다. 이들은 당시 남인 소장 학자로서 서학연구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정조는 서학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 묵인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이러한 분위기 덕분에 초기 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으나, 천주학의 내용이 성리학을 국가 정체성으로 삼고 통치해 온 국가의 이념에 배치됨으로써 야기되는 정치적 쟁점에 정조도 보호의 한계를 맞게 된다. 이로서 천주교는 험난한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