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천진암주어사강학회(天眞庵走魚寺講學會)

구름위 2013. 6. 20.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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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한 국정 속, 실천학문 연구 활발히 진행


중국에서 발간된 최신 서적과 과학 발명품들은 17세기 초부터 명(明), 청(淸)을 왕래한 사신들에 의해 국내에 반입돼 연구대상이 됐다.
그 중에서 새롭게 전래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가 재야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있었던 남인계 소장학파에게 널리 보급돼 연구되기 시작했다. 당시 광범위하게 반입되기 시작한 서학 서적 중에서도 천주학이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서양 정신세계의 기초를 이루는 신앙세계를 접하면서 유교적 사고에 고착돼 있었던 학계에 파문이 일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시 성리학에 기초한 나라의 정체성과 고식화(古式化)된 정계의 사고가 논리와 이론에만 너무 몰입함으로써 실천적 의지와 노력이 결여돼 국력이 쇠퇴되고, 외국의 침략에 무방비로 노출돼 임진왜란의 국난을 맞기도 했다. 전란과 내치(內治)의 부재로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정부는 민생구제를 위한 노력은 전혀 하지않고 공리공론에만 치중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실권(失權)한 학자들은 비판적 입장에서 서학의 실천적 학문경향을 가진 실학과 서양문화의 정신적 기초가 되는 천주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하여 서학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고, 특히 관심의 대상이 됐던 천주학 연구를 통해 천주신앙을 확신하게 됐으며, 그것의 실천의지를 굳히는 집단합의에 도달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한 것이 이른바 천진암주어사강학회 모임이다.

천주신앙 확신 굳히게 된 대표 모임, 천진암주어사강학회


천주학의 본격적인 전래는 1601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實) 신부가 중국 천주교회를 개교한 이후 서학자료가 조선에 반입되기 시작 하면서부터다. 이를 입증하는 기록은 지봉(芝峰) 이수광(李 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이다.
당시 이수광은 그의 저서에서 세계지도와 한역서학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에 관한 논평을 기록하고 있다. 서학자료는 유교문화의식에 침잠(沈潛)됐던 지식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일부 선각 관료들은 이로 인해 실용 의욕을 진작케 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 시기는 호기심에 의한 접촉과 열람이었을 따름이다.
18세기 중엽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학문적 탐구의 경지에 진입함으로써 서학 연구가 본격화됐다. 서학에 대한 이익의 학문적 의욕은 매우 왕성해, 그는 당시 유입된 거의 모든 한역서학서를 열독하고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저서했다.
그 후 이익 학통을 계승해 안정복(安鼎福)·정약용(丁若鏞)을 중심으로 18세기 후반 근기학파(近畿學派) 학인들 사이에서 매우 활발하게 서학 연구가 진행됐다. 당시 이들 중 3개 부류의 학파가 존재했는데 이는 ①천주학의 전면부정, ②일부부정·일부수용, ③전면수용으로 분류됐으며,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쓴 안정복은 첫째 부류에 속하고,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 북학파 학인들은 둘째 부류, 셋째 부류는 남인계 소장 학자들로 천주신앙 실천운동을 일으키게 되고, 서구과학과 기술에 대한 개방 자세를 취하게 됐다.
그들 중에서도 학문적 정진에 기여한 대표적인 학자는 다산(茶山) 정약용이었다. 그는 정조 19년 온양에 소재한 봉곡사(鳳谷寺)에서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외 12명 유학자들과 함께 <서암강학(西巖講學)> 모임을 결성해 서학 연구에 몰입했으며, 그의 형제들과 천진암주어사강학회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모임은 개인적으로 한역서학서를 탐독하면서 서학에 심취됐던 남인계나, 서학을 연구하는 학도들이 공동의 학문마당으로 모여 학문체계와 종교신앙을 집단적으로 검토하고, 특히 천주신앙의 확신을 굳히게 된 역사적 계기를 만들었다. 천진암주어사강학회는 이를 대표하는 모임이었다.
천진암주어사강학회는 정조1년(1777년)에 처음으로 집회를 열었으며, 주요 참석자는 좌장격인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43세), 이벽(李檗, 26세), 이승훈(李承薰, 24세)과 정약전(丁若銓, 24세, 정약용의 형), 정약종(丁若鐘, 21세, 정약용의 형), 정약용(丁若鏞, 18세)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남인계 소장 학자들이었으며, 학통으로는 이익의 서학열을 받은 근기학파의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집회 장소는 천진암과 주어사였다. 천진암과 주어사는 경기도 광주군, 여주군의 군 경계상에 위치한 산인 앙자산(鴦子山, 676m)의 동쪽과 서쪽에 존재했던 산사(山寺)다. 전자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에, 후자는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하풍리에 위치했다.
신부 달레(Dallet)의 기록에 의하면 이는 서학연구가 천주신앙에 도달하는 결과를 갖게 하는 강학(講學) 모임이었고, 이벽(李檗)이 주도한 것이며, 천진암은 5년간 천주학 논증과 천주신앙 봉운동(奉運動)의 본산이고, 주어사는 학자 권일신이 칩거하던 휴양처라고 기재돼 있다. 그는 ‘이벽은 기해년(1779년 12월) 주어사에서 천주공경가를 지었고, 그의 동지인 정약종은 십계명가를 작사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만들어진 몽천유고(夢川遺稿)는 정약용이 수집한 이승훈의 유문(遺文) 모음이며, 그 속에는 이승훈의 천주학에 대한 유고(遺稿)와 그와 관계되는 천주가사 및 수편의 기록이 수록돼 있다.

유학의 한계 벗어나지 못한 실학자들과 초기 천주교


천진암주어사강학회의 시작으로부터 그 후 5년간에 걸쳐 새로운 신앙과 가치관에 도달하게 된 것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비록 회합기간은 짧았고 회동인사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에 앞서 150년 이상의 한역서학과의 접촉이 있었고, 이익(李瀷) 이후 30여년을 두고 서학 이해의 학문적인 성과가 있었기에 천주신앙 실천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의 주자학과 성리학적 유학은 해석학·사장학(詞章學)으로 고질화됐던 고려유학의 허(虛)에 대한 실(實)의 이념으로 조선 유교양반사회에 기능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왜란·호란의 국란과 벌족의 횡포와 당파다툼으로, 국정이 문란해지고 사회기강이 해이해져 유교사회의 주체에 성리학은 ‘허(虛)의학’으로 이를 기초로 한 성리사상(性理思想)도 허의 개념으로 화하여, 조선사회에 역기능으로 작용하게 됐다. 이에 반(反)하여 실증(實證)·실정(實正)이론에 대한 실리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에 의해 실학운동이 일어났다. 조선 후기사회의 이른바 실학운동은 이러한 사회적·사상적 배경에서 태동해 자라온 것이다. 그리하여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제도와 산업활동, 기술도입이 모색됐다.
그러나 영·정조 때 활동한 실학자들의 역사의식이나 사상적 구조는 유교적 왕권국가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학자의 실학적 목표는, 다만 사서(四書)에 치중하고 이학(理學)에 치우치는 정주학적(程朱學的) 성리 인식에서, 오경(五經)을 중심으로 한 근본유학으로 회기, 이른바 유학적 신개혁 활동을 통한 왕도사회(王道社會)의 추구와 구현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실학자들의 활동은 유학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실례로 다산 정약용의 실학적 노력은 이기(理氣)의 송유(宋儒)의 학설에 회의를 품고, 선유(先儒)와 공맹(孔孟)의 경학사상(經學思想)의 원점에 돌아가 진유(眞儒)의 실(實)을 찾고자 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학문 과정에서 유신론적 세계관으로 기울어졌으며, 실학사상은 서학의 천주수용과 새로운 가치관을 수용하도록 했다. 이에 따른 기능적 역할을 강학회가 담당했던 것이다.
이들은 태생적 학문인 주자학과 성리학의 학문적 범위와 실천적 범위 사이에서, 실천을 강요하는 천주학의 역할을 극복하지 못하고 중도에 변형 또는 회귀하게 되는데, 이는 천주학의 순탄치 못한 행로를 예측케 한다.

혼란한 국정 속, 실천학문 연구 활발히 진행


중국에서 발간된 최신 서적과 과학 발명품들은 17세기 초부터 명(明), 청(淸)을 왕래한 사신들에 의해 국내에 반입돼 연구대상이 됐다.
그 중에서 새롭게 전래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가 재야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있었던 남인계 소장학파에게 널리 보급돼 연구되기 시작했다. 당시 광범위하게 반입되기 시작한 서학 서적 중에서도 천주학이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서양 정신세계의 기초를 이루는 신앙세계를 접하면서 유교적 사고에 고착돼 있었던 학계에 파문이 일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시 성리학에 기초한 나라의 정체성과 고식화(古式化)된 정계의 사고가 논리와 이론에만 너무 몰입함으로써 실천적 의지와 노력이 결여돼 국력이 쇠퇴되고, 외국의 침략에 무방비로 노출돼 임진왜란의 국난을 맞기도 했다. 전란과 내치(內治)의 부재로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정부는 민생구제를 위한 노력은 전혀 하지않고 공리공론에만 치중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실권(失權)한 학자들은 비판적 입장에서 서학의 실천적 학문경향을 가진 실학과 서양문화의 정신적 기초가 되는 천주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하여 서학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고, 특히 관심의 대상이 됐던 천주학 연구를 통해 천주신앙을 확신하게 됐으며, 그것의 실천의지를 굳히는 집단합의에 도달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한 것이 이른바 천진암주어사강학회 모임이다.

천주신앙 확신 굳히게 된 대표 모임, 천진암주어사강학회


천주학의 본격적인 전래는 1601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實) 신부가 중국 천주교회를 개교한 이후 서학자료가 조선에 반입되기 시작 하면서부터다. 이를 입증하는 기록은 지봉(芝峰) 이수광(李 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이다.
당시 이수광은 그의 저서에서 세계지도와 한역서학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에 관한 논평을 기록하고 있다. 서학자료는 유교문화의식에 침잠(沈潛)됐던 지식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일부 선각 관료들은 이로 인해 실용 의욕을 진작케 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 시기는 호기심에 의한 접촉과 열람이었을 따름이다.
18세기 중엽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학문적 탐구의 경지에 진입함으로써 서학 연구가 본격화됐다. 서학에 대한 이익의 학문적 의욕은 매우 왕성해, 그는 당시 유입된 거의 모든 한역서학서를 열독하고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저서했다.
그 후 이익 학통을 계승해 안정복(安鼎福)·정약용(丁若鏞)을 중심으로 18세기 후반 근기학파(近畿學派) 학인들 사이에서 매우 활발하게 서학 연구가 진행됐다. 당시 이들 중 3개 부류의 학파가 존재했는데 이는 ①천주학의 전면부정, ②일부부정·일부수용, ③전면수용으로 분류됐으며,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쓴 안정복은 첫째 부류에 속하고,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 북학파 학인들은 둘째 부류, 셋째 부류는 남인계 소장 학자들로 천주신앙 실천운동을 일으키게 되고, 서구과학과 기술에 대한 개방 자세를 취하게 됐다.
그들 중에서도 학문적 정진에 기여한 대표적인 학자는 다산(茶山) 정약용이었다. 그는 정조 19년 온양에 소재한 봉곡사(鳳谷寺)에서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외 12명 유학자들과 함께 <서암강학(西巖講學)> 모임을 결성해 서학 연구에 몰입했으며, 그의 형제들과 천진암주어사강학회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모임은 개인적으로 한역서학서를 탐독하면서 서학에 심취됐던 남인계나, 서학을 연구하는 학도들이 공동의 학문마당으로 모여 학문체계와 종교신앙을 집단적으로 검토하고, 특히 천주신앙의 확신을 굳히게 된 역사적 계기를 만들었다. 천진암주어사강학회는 이를 대표하는 모임이었다.
천진암주어사강학회는 정조1년(1777년)에 처음으로 집회를 열었으며, 주요 참석자는 좌장격인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43세), 이벽(李檗, 26세), 이승훈(李承薰, 24세)과 정약전(丁若銓, 24세, 정약용의 형), 정약종(丁若鐘, 21세, 정약용의 형), 정약용(丁若鏞, 18세)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남인계 소장 학자들이었으며, 학통으로는 이익의 서학열을 받은 근기학파의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집회 장소는 천진암과 주어사였다. 천진암과 주어사는 경기도 광주군, 여주군의 군 경계상에 위치한 산인 앙자산(鴦子山, 676m)의 동쪽과 서쪽에 존재했던 산사(山寺)다. 전자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에, 후자는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하풍리에 위치했다.
신부 달레(Dallet)의 기록에 의하면 이는 서학연구가 천주신앙에 도달하는 결과를 갖게 하는 강학(講學) 모임이었고, 이벽(李檗)이 주도한 것이며, 천진암은 5년간 천주학 논증과 천주신앙 봉운동(奉運動)의 본산이고, 주어사는 학자 권일신이 칩거하던 휴양처라고 기재돼 있다. 그는 ‘이벽은 기해년(1779년 12월) 주어사에서 천주공경가를 지었고, 그의 동지인 정약종은 십계명가를 작사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만들어진 몽천유고(夢川遺稿)는 정약용이 수집한 이승훈의 유문(遺文) 모음이며, 그 속에는 이승훈의 천주학에 대한 유고(遺稿)와 그와 관계되는 천주가사 및 수편의 기록이 수록돼 있다.

유학의 한계 벗어나지 못한 실학자들과 초기 천주교


천진암주어사강학회의 시작으로부터 그 후 5년간에 걸쳐 새로운 신앙과 가치관에 도달하게 된 것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비록 회합기간은 짧았고 회동인사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에 앞서 150년 이상의 한역서학과의 접촉이 있었고, 이익(李瀷) 이후 30여년을 두고 서학 이해의 학문적인 성과가 있었기에 천주신앙 실천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의 주자학과 성리학적 유학은 해석학·사장학(詞章學)으로 고질화됐던 고려유학의 허(虛)에 대한 실(實)의 이념으로 조선 유교양반사회에 기능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왜란·호란의 국란과 벌족의 횡포와 당파다툼으로, 국정이 문란해지고 사회기강이 해이해져 유교사회의 주체에 성리학은 ‘허(虛)의학’으로 이를 기초로 한 성리사상(性理思想)도 허의 개념으로 화하여, 조선사회에 역기능으로 작용하게 됐다. 이에 반(反)하여 실증(實證)·실정(實正)이론에 대한 실리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에 의해 실학운동이 일어났다. 조선 후기사회의 이른바 실학운동은 이러한 사회적·사상적 배경에서 태동해 자라온 것이다. 그리하여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제도와 산업활동, 기술도입이 모색됐다.
그러나 영·정조 때 활동한 실학자들의 역사의식이나 사상적 구조는 유교적 왕권국가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학자의 실학적 목표는, 다만 사서(四書)에 치중하고 이학(理學)에 치우치는 정주학적(程朱學的) 성리 인식에서, 오경(五經)을 중심으로 한 근본유학으로 회기, 이른바 유학적 신개혁 활동을 통한 왕도사회(王道社會)의 추구와 구현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실학자들의 활동은 유학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실례로 다산 정약용의 실학적 노력은 이기(理氣)의 송유(宋儒)의 학설에 회의를 품고, 선유(先儒)와 공맹(孔孟)의 경학사상(經學思想)의 원점에 돌아가 진유(眞儒)의 실(實)을 찾고자 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학문 과정에서 유신론적 세계관으로 기울어졌으며, 실학사상은 서학의 천주수용과 새로운 가치관을 수용하도록 했다. 이에 따른 기능적 역할을 강학회가 담당했던 것이다.
이들은 태생적 학문인 주자학과 성리학의 학문적 범위와 실천적 범위 사이에서, 실천을 강요하는 천주학의 역할을 극복하지 못하고 중도에 변형 또는 회귀하게 되는데, 이는 천주학의 순탄치 못한 행로를 예측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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