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천주교의 한반도 진출

구름위 2013. 6. 20.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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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동양 진출과 이를 쉽게 수용한 일본


천주교가 동양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534년 예수회가 창설되고, 1540년 당시 교황 바오로 3세의 동방 전도를 인가하면서부터다.
1541년 프란시스코 사베리오(Saint Francois - Xavier) 신부가 최초로 인도, 마라카(Maraca), 세이론(Ceylon) 등 남아시아 해안을 따라 1549년 일본 가고시마에 도착해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리하여 1559년 신학교를 설립하고, 1605년에는 신도의 수가 75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지방 군주들이 제각기 지역을 관할·통치하면서 세력다툼을 하던 시기로 막부시대가 열리기 직전이고, 조선처럼 성리학이 국가이념으로 정착하지 않았음은 물론, 일본인 특유의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혼재했기 때문에 천주교 수용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섬으로 이루어진 해양국가라는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서구문화의 전래가 한반도보다 빨리 이루어진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천주교의 전파가 용이하고, 속도도 빨랐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1592년; 선조25부터 1598년까지), 소서행장(小西行長) 휘하 부하들 상당수가 나고야 지방 출신의 병사였고, 그 중 많은 수가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이 때 스페인 출신의 세스페데스(Cespedes) 신부가 소서행장 휘하의 군종신부로 우리나라에 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전란 당시 납치돼 일
본으로 가서 천주교 신자가 된 우리나라 사람이 있었으나, 실제로 조선 전교활동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천주교의 중국 안착과 우리나라에 서학 전래


한편 중국에는 명(明)나라 신종(神宗)때 마테오릿치(Matteo-Ricci, 利瑪實) 신부가 최초로 북경에 들어와 1601년 교회를 설립했다. 이 때 우리나라는 임진왜란이 끝났을 무렵이고, 선조때였다. 당시 중국과의 사신 왕래가 많아 서양문물이 자연스럽게 들어왔는데, 이 때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최초로 소개됐다.
당시 중국에 천주교가 들어와 안착했으나,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대한 선교활동은 고려되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관계 역시 임진왜란 후라서 왕래가 제한된 상태였다. 그러나 중국과의 외교와 교역은 종전보다 더욱 활발해져, 이런 과정에서 서학(西學)에 관한 서적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다. 서학은 서양의 선진기술과 문화, 그리고 천주학까지 포함된 내용으로, 성리학으로 획일화된 내면적 세계에 광명과 변화를 동시에 일으킬 수 있는 개명 역할을 했던 것이다.
당시 우리 나라의 사정은 임진왜란으로 국고가 바닥나 전국이 전란의 피해복구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고, 정계는 당파싸움으로 일관했으며, 벼슬아치의 가렴주구는 극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철저한 계급 사회로 구분돼 있었기 때문에 상민 이하의 생활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 북경으로부터 서학에 관한 서적이 들어오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은 1631년(인조9년)에 정두원이 들여온 화포, 천리경, 자명종, 서양풍속, 지리, 천문에 관한 일반 서적과 천주교 관계의 서적이었다. 또한 1645년 병자호란 때 인질로 북경에 간 소현세자가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아담 쉘(Adam Shall, 湯若望) 신부로부터 과학과 종교 서적을 얻어 귀국했다.

실권(失權)한 남인 학자들 사이에서 서학 활발히 논의


그 후 광해군부터 숙종까지는 국내에서 서학이 자연스럽게 논의됐는데, 서양 실학(實學) 쪽의 논의가 활발했고, 천주교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있었으나 실천적 종교활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시 서학과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지봉유설(芝峯類說)을 저서한 이수광 등이었으며, 이들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탐독하고 그것을 기록해 후진들에게 전파했다. 이러한 학문적 논의는 공허한 공리공론에 습관화되어 있는 주자학과 성리학에 염증을 느낀 선비들에게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영조 시대에 와서는 서학이 학문의 범주에 들 만큼 보편화됐으며, 특히 당시 실권(失權)한 남인 학자들 사이에서 활발히 연구·논의되었다. 대표적인 학자는 이익(李瀷 1672-1763)과 그의 제자였던 안정복(安鼎福 1712-1791)으로 이들은 모두 남인출신으로 실학 연구의 선구자였다.
서학에 대한 연구는 점차 실학의 범위를 넘어 천주학 탐구로 심화되었다. 영조와 정조 때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은 남인의 정권 참여를 철저히 봉쇄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남인출신 학자들은 지방에서 학문에 몰입했으며, 자연스럽게 서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강학회 모임과 초기 천주교 실질적 태동


영조 때는 근기(近畿) 여러 곳에서 강학회(講學會) 모임이 활발히 진행됐는데, 강학회 모임은 지금의 학술모임, 즉 포럼과 같은 성격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정조 3년(1779년) 천진암(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주어사에서 이루어졌던 <천진암주어사강학회(天眞庵走魚寺講學會)>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 강학회는 정기적으로 열렸는데, 주요인사는 권철신·권일신 형제,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이벽 등의 다수의 남인 학자들이었다. 초기논의는 서학 전반에 대한 학문 범주에 속했으나, 강학의 심도가 깊어지면서 천주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특히 이벽의 천주학에 대한 경지는 학문적 범주를 넘어선 종교적 영역에 들어 있었다(정약용의 녹암(綠巖) 권철신 묘지명). 그들의 논의는 초기 천주교의 실질적 태동의 기초가 된 것이다.
천주교가 서학이란 큰 학문의 포장 속에 섞여 전래되었을 때는 일반 서양문화에 가려 잘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벽을 위시한 <천진암주어사강학회>에 속한 남인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면서 서서히 껍질을 벗게 됐고, 그로 인한 호기심은 더욱 깊은 종교적 진수를 갈구하게 됐다. 하지만 실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 여러 가지 갈등요인이 생기게 되고, 기존의 성리학적 국가 정체성에 반하는 내용의 수용을 두고 개개인의 입장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열현상은 선조 이후 분열되기 시작한 각계 정파의 당쟁목표가 되기도 하고, 탄압을 위한 구실로 이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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