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국익보다는 당익이 앞선다(5)

구름위 2013. 6. 19.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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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임금들이 효종의 뜻과 유업을 계승해야


  송시열이 제기한 또 하나의 문제는 효종의 세실문제였다. 세실이란 위패를 영원히 옮기지 않도록 종묘에 신실을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부조'라고도 하는데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모신다는 뜻이다. 종묘의 효종의 세실을 만들어 그이 신주를 영원히 옮기지 말자는 주장이다.
  "우리 효종대왕은 덕으로 말한 것도 없으며 공으로 보아 인의를 바르게 세웠으니 이를 추존하기 위해 묘의 의식을 더 높임으로써 백세에 신주를 옮기지 안하는 조종을 삼아서 임금들이 효종의 뜻과 유업을 계승하려 노력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숙종은 곧 비답을 내렸다.
  "소의 내용이 내 마음에 딱 맞다. 마땅히 널리 물어서 행하게 하겠다."
  송시열이 효종의 세실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자신이 효종에게 지극한 충심을 갖고 있음을 과시해 예송 논쟁의 여진에 쐐기를 박으려는 것이었다. 예송 논쟁 때 '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공격을 받고, 이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송시열로서는 효종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확실히 밝혀 둘 필요가 있었다.
  이는 또한 '춘추대의', 곧 '북벌대의'를 부르짖었던 효종의 선명성을 자신의 것으로 바꾸기 위한 계책이기도 했다. 남인들로부터 줄곧 '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공격을 받아온 서인들 중 이 문제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두 차례의 예송 논쟁으로 서인들은 효종의 '효'자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일 정도로 곤욕을 치렀던 터였다. 그러나 태조의 시호를 더하는 문제에 반대했던 박세채는 이번에도 완곡한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세실은 왕조의 예법중 가장 큰 것으로서 신하들이 일시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효종 대왕을 세실에 모시자는 것을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워낙 중대한 의논이니 마땅히 역대 조정의 예법과 선유들의 의견을 들은 다음 다시 대신들에게 물의시여 결단해야 세실을 받드는 대의에 유감이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는 사실상 반대라기보다는 널리 의견을 구하라는 건의였다. 반대가 없으므로 종묘에 고유할 준비를 하는 도중 형조판서 김덕원이 새로운 제안을 하고 나섰다. 효종뿐만 아니라 인조도 세실에 모시자는 주장이었다. 이 새로운 주장을 김수항,민정중,송시열,김수흥,정지화,이상진,박세채등 여려 대신.유신들의 의논에 부치니 아무도 대하는 이가 없었다. 아니 반대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중국 한나라 조정에서 태조와 태종을 함께 추존한 전례를 들어 주청했다.
  "함께 종묘에 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경위로 인조와 효종은 종묘에 자신들이 세실을 갖게 되었다. 이는 송시열이 자신에 대한 남인이 공세가 무고에 지나지 않음을 내외에 밝히기 위해 주장한 일이었다. 지난 세월 유배지를 전전하며 생명의 위협에,시달렸던 송시열의 자리에서 볼 때 이는 충분히 주장할 만한 정치적 행위였다. 하지만 이는 정국의 상당부분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이기도 했다.
  당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효종에 대한 충성심 과시가 아니라 김익훈 같은 공작 정치가의 처벌로 대표되는 사회정의의 실현이었다. 이는 또한 당시 정계의 가장 큰 현안이어야 할 남인과 정치적 화해를 실현하는 길이었다. 또한 변화하는 사회 체제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한 사회 개혁을 수행하는 일이 중요했다.
  남인들이 예론을 이용해 송시열을 역적으로 몰았던 일이 사라져야 할 구태였듯 김석주나 김익훈이 수행했던 공작정치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정치공작에 의한 정치보복은 피를 부르는 악순환에 불과한, 버려야 할 유산이었다. 다시 조정에 등장한 대로 송시열은 정치보복을 청산할 만한 위치에 있었다. 남인들과의 화해를 주도할 만한 위치에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남인들에게 박해받았던 그가 남인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면 그는 자신 어린 시절 그토록 되고자 갈망했던 '성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세월 유배지를 전전하며 쌓았던 남인들에 대한 증오는 그에게 화해의 손짓을 거부하게 했다. 이는 비단 서인과 남인 사이의 불행이 아니라 그 자신이 불행이기도 했다.

 

나를 죽일 자는 반드시 윤증이로구나


  송시열.박세채등 유현들과 함께 숙종의 부름을 받은 윤증은 다른 사람들보다 늦은 숙종 9년(1683)봄에 고향인 충청도 노성을 떠나 서울길에 나섰다. 그이 나이 55세때였다. 그동안 사헌부 장령을 비롯해 많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한 번도 벼슬길엔 나서지 않은 윤증이었다.
  숙종 8년에 제수된 관직은 정3품 호조참의였다. 중요한 것은 호조참의란 벼슬보다 윤증이란 이름이었다. 학문으로 천거되는 유신들에게는 관직의 높고 낮음도 중요했지만 학식과 덕망이 더욱 중요했다. 학자사회 조선 지배층의 여론을 이끌어가는 인물들은 바로 이들 유신들이기 때문이다.
  경신환국 후 조정을 이끌어가는 두 세력은 집권당인 서인과 척신계열이라고 볼수 있지만 어떤 구도는 척신 김석주 세력과 이들 유신 세력이라고 볼수도 있었다. 그런데 조정에 나와 있는 유신이 두 대표인 송시열과 박세채는 서로 갈라져 있었다.
  양자가 갈라진 근본적 이유는 김석주가 주도하는 척신정치.공작정치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박세채는 김석주의 공작정치에 반대했다. 이는 젊은 선비들의 향후 향배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젊은 선비들은 대로 송시열이 공작정치를 반대해 주기를 바랐고 또 그럴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출사한 송시열이 오히려 김익훈을 옹호하고 김석주와 한편이 되자 크게 실망했다.
  젊은 선비들은 송시열이 도의정치를 펼쳐주기를 회구했지만 송시열에게 5년간의 유배 생활은 뼈저린 것이었다. 언제 사약이 도착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탐독한 주회의 명분론은 남인을 이단으로 해석할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
  환국후 그는 윤휴, 허적 등 이미 죽은 남인 대신들을 '적신'이라고 불렀다. 남인들은 적이자 이단이었던 것이다. 그 이단을 무너뜨릴 수 있는 지략과 현실적 힘을 가진 인물이 김석주였다. 김석주 일가와는 과거의 구원이 있으나 어쨌든 서인 집안이었다.
  송시열은 과거의 원한을 잊고 김석주와 타협함으로써 둘은 결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결합은 다른 두 유현을 갈라서게 했다. 박세채와 윤증이었다. 송시열에 실망한 젊은 선비들은 그 실망을 박세채와 윤증에 대한 신망으로 옮겨갔다.
  송시열에 실망한 조지겸.오도일 같은 젊은 사류들은 직접 송시열을 비난하고 나섰다. 김석주는 이들의 처벌을 주청하고 나섰다. 김석주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는데, 이때 젊은 사류들을 옹호하고 나선 인물이 박세채였다. 박세채는 공자의 말을 인용해 김석주를 비판했다.
  "김석주는 굽은 자를 등용하고 곧은 자를 버린다(거왕착직)"
  이제 송시열에게 쏠렸던 신망은 박세채에게 향했다. 그리고 박세채는 윤증을 기다렸다. 윤증은 숙종9년 3월 김수항이 그를 다시 불러오도록 청하자, 숙종이 사관에게 특별히 수찰을 내려서 부를 정도로 명망이 있었다. 또한 부고리 오도일이 윤증에게 대사헌을 제수해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자고 청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숙종은 사관에게 보낸 수찰에 이렇게 적었다.
  "대로도 조정에 나왔고 유신들도 나와서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려 하는데 그만 나와서 슬프고 기쁜것을 나라와 함깨해야 할것이다."
  숙종은 이때 윤증에게 보내는 고신(임명장)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 산림 출신들은 청나라 연호를 쓰면 명나라에는 윤휴, 허적 등 이미 죽은 남인 대신들을 '적신'이라고 불렀다. 남인들은 적이자 이단이었던 것이다. 그 이단을 무너뜨릴 수 있는 지략과 현실적 힘을 가진 인물이 김석주였다.
  이제 송시열에게 쏠렸던 신망은 박세채에게 향했다. 그리고 박세채는 윤증을 기다렸다. 윤증은 숙종9년3월 김수항이 그를 다시 불러오도록 청하자, 숙종이 사관에게 특별히 수찰을 내려서 부를 정도로 명망이 있었다. 또한 부교리 오도일이 윤증에게 대사헌을 제수해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자고 청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숙종은 사관에게 보낸 수찰에 이렇게 적었다.
  "대로도 조정에 나왔고 유신들도 나와서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려 하는데 그대도 그만 나와서 슬프고 기쁜 것을 나라와 함께해야 할 것이다."
  숙종은 이때 윤증에게 보내는 고신(임명장)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 산림 출신들은 청나라 연호를 쓰면 명나라에 대한 지조를 지킨다는 빌미로 출사를 거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증은 보다 현실적인 산림이었다. 그는 나량좌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들의 출사는 자신의 능력이 일을 할 수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지 청나라 연호를 쓰고 안 쓰고를 가지고 조건을 삼을 수는 없는 일이오."
  윤증은 일단 병을 핑계로 출사를 거부했으나, 숙종이 사관에게 명하여 그를 기다렸다가 반드시 같이 올라오라고 하자 할 수 없이 서울길에 올랐던 것이다. 그는 그 아버지 윤선거처럼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제1차 예송논쟁 때도 서인이지만 남인의 3년설을 지지했다. 제1차 예송논쟁이 계속되자 그는 이렇게 비판했다.
  "3년복을 가지고 서로 싸운 지 10년이 되었는데 혹 이쪽이 옳고 저쪽이 그르다 한들 무슨 큰 해가 있겠는가. 내가 3년복이 옳다는 견해를 바꾸어 1년복을 따르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저 이 일은 이미 판정이 났는데도 서로 공격해 끝없는 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 발단을 살펴보면 별 문제도 안 되는 복제설 하나뿐이니 이 어찌 우습고 기괴한 일이 아니겠는가."
  윤증은 이처럼 서인이면서도 3년설이 옳다는 이론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복제가 1년복으로 결정났으면 그대로 따를 것이지 이를 두고 계속 싸울 것은 없다는 실제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윤증은 당시 이단으로 몰리던 양명학을 공공연히 신봉하던 자신의 제자 하곡 정제두와 평생 교유할 정도로 수용의 폭이 넓은 인물이기도 했다. 주자의 해석에 다른 이론을 보탠 윤휴와 박세당이 사문난적으로 몰리는 판에 양명학은 더욱 위험한 사상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윤증은 원래 송시열의 제자였다. 아버지 윤선거는 그를 송시열에게 보내 주자학을 배우게 하면서 이런 주의를 주었다 한다.
  "우암의 학문은 따르기 어려울 정도로 높지만 그 병통 또한 적지 않으니 잘 처신하여라."
  윤증은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의 남인에 대한 정치보복이 그른 처사라고 여겼다. 정치보복에 급급하던 집권 서인이 구원을 잊고 남인과 화해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이를 비판하고 나섰다.
  송시열이 마음만 먹으면 상대를 적으로 보는 공작정치를 청산하고 상대를 인정하는 대화정치의 길로 나갈 수 있다는 자신의 판단도 작용했다. 경신환국 후 송시열이 보인 정치형태를 비판적으로 바라 본 윤증은 송시열에게 편지를 썼다. 마음먹고 쓴 편지였던 만큼 그 내용이 준열했다.
  "문하(송시열)께서는 한결같이 주자를 종주로 하고 사업은 대의에 두었으나, 자신에게 찬동하는 자는 친밀하게 대하고 바른 말로 뜻을 어기는 자는 화를 당하니 이 때문에 문하의 큰 이름이 온 세상을 덮지만 진실한 덕은 안으로 병듭니다. 굳세다(강)는 것은 자신을 이기는 것을 말함인데 문하는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을 굳세다고 하니 이는 참된 굳셈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문하의 위력을 두려워해서 복종하는 것이지 덕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니 이는 완연한 부귀가의 모습일 뿐 유학자의 기상이 없습니다.
  문하의 문장에 이르러서는 주자를 인용하지 않으면 그 말을 믿을 수 없는 듯하지만 혹 주자라는 이름만 알고 뜻은 알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자신의 의견을 먼저 세워놓고 주자를 끌어내 거기에 빙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다시피 하니 사람들이 모두 겉으로는 대항하지 못하지만 속으로는 불복하는 것입니다.
  평생 춘추의 대의를 주창한다 하지만 말로만 하는 체하고 실제로는 하는 일이 없으니 안으로는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수치를 푸는 계획(북벌)이 조금도 진전된 것이 없이 다만 문하의 벼슬만 높아지고 이름만 널리 퍼진 것뿐입니다."
  이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절교를 결심한 편지였다. 송시열의 사상과 행동 자체를 부정하는 편지이기 때문이다. 윤증은 이 편지 말미에 이런 글도 썼다.
  "지금 만일 문하를 위한 계책을 말한다면 위나라 무공이 아흔살에 자신을 경계하였고 증자가 임종 때 자리를 바꾼 사실을 예로 들겠습니다. 문하께서 진실로 껍질을 벗어 버리고 냄새를 씻어 버리면 앞 현인들의 도통을 잇고 처음 뜻한 바를 이루는 것이 수월해질 것입니다."
  윤증은 이 편지를 송시열에게 보내기 전에 먼저 박세채에게 보였다. 박세채는 너무 심한 내용이라면서 보내지 말라고 충고했다. 강한 성격의 송시열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으니 둘 사이만 멀어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박세채의 충고를 받아들인 윤증은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 편지는 송시열에게 전달되고 말았다. 박세채의 사위가 장인의 집에서 이 편지를 훔쳐다 송시열에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박세채의 사위 송순석은 송시열의 손자였던 것이다. 편지를 본 송시열은 대노해서 소리쳤다.
  "나를 죽일 자는 반드시 윤증이로구나."
  편지 내용으로 보아 송시열의 이런 반응이 예외는 아니다.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한다는 말 등은 예송논쟁 때 임금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비난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상의 독립국인 조선에서 사대부가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한다는 혐의를 받으면 이는 역모로 몰릴 수밖에 없었으니 격렬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출사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무수한 사람들이 비명에 죽어갔지만 그 중에는 훌륭한 인재들도 많이 있었다. 훗날 남인이 재집권한 후 벽동에 귀양가 죽는 민정중도 그런 인물 중의 하나였다. 윤증을 힘써 천거한 민정중은 이렇게 말해 왔다.
  "내가 힘 있는 자리에 있으면 반드시 정암 조광조와 율곡 이이가 하려다 못한 일을 하겠다."
  이는 조광조와 이이가 하려다 못한 공납과 호포의 폐단을 해결하겠다는 말이었다. 공납의 폐단은 대동법이 계속 확대 실시되면서 상당 부분 해결이 되었으나 호포의 폐단은 여전하여 백성들이 이를 피해 유랑하는 등 그 부작용이 심각했다. 일종의 병역세인 호포는 양반들은 면제되고 가난한 서민들만 부담하는 폐단이 가장 컸다. 따라서 호포의 폐단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양반들의 호포 부담이었으나 이는 양반들의 커다란 저항을 받았다.
  경신환국으로 김수항이 영의정, 김석주가 우의정이 되고 민정중이 드디어 '힘 있는 자리'인 좌의정이 되었다. 김석주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이 민정중이 개혁정책을 펼치려고 하자 김수항이 반대하고 나섰다.
  "방금 큰 옥사를 치러 나라가 안정되지 못한 이런 때에는 조용히 국가의 명맥을 이어야지 섣불리 개혁에 손을 대 실패하면 안됩니다."
  효종 때 김육은 산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동법을 주장했지만 민정중은 그런 파문을 감수하면서까지 개혁정책을 수행할 여력과 소신은 없었다. 민정중이 주춤하자 개혁을 요구하던 젊은 선비들이 비웃었다.
  "민정중이 옛날 말한 것은 모두 허풍이었다. 지금 힘 있는 자리에 올랐는데 어째서 한 가지의 일도 하지 못하는가."
  처지가 곤란해진 민정중은 조정에 동지가 없음을 한탄했다.
  "개혁정책을 막는 사람은 영상이다. 산림 선비들이 조정에 있으면 어찌 이렇게 되겠는가."
  민정중이 산림의 선비들인 송시열.박세채.윤증 등의 출사를 거듭 요청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송시열과 박세채가 출사한 뒤에도 한참 뜸들이다 길에 나선 윤증은 그나마 곧바로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다. 윤증이 먼저 도착해 여장을 푼 곳은 과천 나량좌의 집이었다. 나량좌는 아버지 윤선거의 문인이었던 것이다. 숙종9년(1683) 5월의 일이다. 윤증은 이곳에서 정국을 관망하며 자신의 구상을 다듬을 뿐 선뜻 서울에 올라오지 않았다. 윤증이 과천에 다다르자 숙종은 승지를 보내 유시했다.
  "그대가 나를 멀리하여 버리지 않고 이미 서울 부근까지 왔으니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윤증은 관망만 할 뿐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박세채가 직접 과천까지 찾아갔다. 윤증은 박세채와 함께 정국 현안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윤증과 박세채는 3일동안 함께 숙식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 윤증은 박세채에게 자신이 출사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이른바 '3대 명분론'이 그것이다.
  "지금 잇다른 역옥으로 남인들이 원한을 가지고 있소. 이들의 원한을 풀고 함께 일하려면 역옥을 일으켜 공신이 된 자들을 삭제해야 하는데 그대가 그것을 할 수 있겠소?"
  이것이 첫 번째 명분론이었다. 허견의 옥사와 임술옥사 등으로 대거 살육당한 남인들은 서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옥사의 대가로 공신이 된 자들의 공신록 삭제가 남인과 화해하는 첫 단추란 이야기였다.
  한참을 생각하던 박세채는 힘없이 대답했다.
  "할 수 없소."
  윤증은 다시 두 번째 명분을 제시했다.
  "정치에 부당하게 간여하는 세 외척가의 세력을 제거할 수 있겠소?"
  이는 외척의 정치간여 금지에 대한 요구였다. 조선 초기 태종이 민무구 등 자신의 4처남들을 모두 처형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외척의 정치간여는 금기였다. 그러나 이 당시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세력은 외척들이었다. 삼척가란 숙종의 외삼촌인 청풍 김씨 김석주 가와 숙종의 장인인 광산 김씨 김만기 가, 그리고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의 숙부인 여홍 민씨 민정중 가를 뜻한다.
  민정중은 산림 유현들의 출사를 왕에게 거듭 요청하여 성사시키는 등 산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므로 윤증이 실제 문제 삼은 외척은 경신환국과 임술옥사의 주모자인 김석주와 김만기인 셈이었다. 실로 이 당시 외척의 정치간여는 국왕과 대신 중심인 조선의 정치체제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박세채는 두 번째 조건에 대해서도, "할 수 없소"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윤증은 세 번째 명분을 제시했다.
  "현재 집권한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자기 당 사람만 등용하고 반대당 사람은 무조건 배척하는데 이런 풍습을 시정한 후에야 일을 할 수 있겠소. 형이 이를 고칠 수 있겠소?"
  '숙종실록'은 이를 "우옹의 세도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하나이다"라고 적고 있는데, 우옹이란 송시열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송시열이 주도하는 정국 운용 방식을 고칠 수 있는지를 물은 것이었다. 보다 넓게 보면 서인과 남인을 떠나서 당색에 따라 등용하고 배척하는 붕당정치의 폐해를 시정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그의 세 번째 조건은 서인과 남인간의 화해를 주창한 것이었다.
  윤증은 서인이지만 남인과도 잘 통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남인 권시의 사위이고, 그 아우는 남인 거두 이유의 사위였으므로 서인과 남인을 두루 잘 알았다. 그가 보기엔 서인과 남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싸울 이유가 없었다. 피지배계급인 농민과 노비를 다스리는 같은 지배계급이었던 것이다.
  윤증은 상대 당인을 적으로 여기는 풍토를 극복하지 않고는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약 한 세기 전 율곡 이이가 제기했던 조제론의 재론으로서 아버지 윤선거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이 아버지 윤선거는 (기유의서)에서 율곡이 반대자를 등용한 사례를 들면서 남인과의 화해를 종용하기도 했다.
  박세채는 이 세 번째 조건에도 "할 수 없소"라고 힘없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김익훈의 처벌을 요구하는 젊은 서인들은 분명히 공작정치의 중지와 화해를 요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권력을 장악한 것은 이들 젊은 선비들이 아니라 송시열과 김석주였다. 이 둘의 자세가 변하지 않는 한 화해는 요원했다. 김석주는 남인들을 대거 살육한 후 생명의 위협을 느껴 서울 시내에 여러 채의 집을 두고 돌아가면서 숙박했다. 아무도 그가 자는 곳을 몰랐다. 대궐에 출입할 때는 항상 호위무사를 거느렸으니 공작정치의 말로란 항상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세 가지 조건이 무산되자 윤증은 출사하지 안기로 결심했다. 윤증은 숙종에게 회계를 올려 사의를 표했다.
  "거듭 전교를 내려 주시니 감읍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이 지금 온 이유는 출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죄를 받기 위함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관대히 여기셔서 죄를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빨리 시골집으로 돌아가 넓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전원에서 의를 지키다가 죽으려 합니다."
  윤증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윤증이 과천까지 왔다가 되돌아간 이 사건은 윤선거의 비문사건, 기유.신유의서 사건과 함께 서인을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송시열과 윤증을 중심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고 말았다. 나이 많은 송시열은 당연히 노론의 영수가 되고 윤증은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두 사람이 갈린 표면적 이유는 비문이나 의서사건 같은 개인적 차원의 일들이었으나 이것이 당파의 분열로 이어진 이유는 두 사람이 대표하는 정치세력들의 세계관이 다른 데 있었다. 분당 당시 노론의 중심인물은 영수 송시열을 필두로 척신 김석주와 민정중, 그리고 김익훈을 비롯해서 이선.이수연.이이명.이여 등의 훈신들과 김수항 같은 서인 중진들이었다. 반면 소론은 영수격인 윤증과 박세채를 비롯해서 조지겸.오도일.남구만.한태동.박태보.임영.이상진 등이었다.
  박세채는 윤증의 세 가지 명분이 모두 타당한 것임은 수긍했으나 자신에게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알았다. 홀로 서울로 온 박세채는 낙향을 결심하고, 송시열이 제기한 태조의 시호 문제에 대해 반대의 뜻을 밝힌 뒤 파주로 돌아갔다. 세 유현 중 둘이 조정을 버렸으니 송시열도 체면상 서울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에 송시열도 사직하고 서울을 떠나 고양을 거쳐 금강산에 들렀다가 화양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윤증은 스승을 배신했는가


  윤증이 과천까지 올라왔다 되돌아간 사건은 조야에 많은 화제를 낳았다. 명분이 우선시되는 조선 성리학 사회에서 송시열이 주도하는 정국의 변화를 요구하고 되돌아간 사건은 윤증의 명성을 한껏 드높여 놓았다. 반면 윤증이 돌아가고 박세채마저 떠남에 따라 할 수 없이 낙향한 송시열은 명분상 큰 타격을 입었다.
  송시열의 노론은 윤증과 박세채의 과천 회동에 대해서 많은 말을 만들어냈다. 윤증이 권시의 사위 이달삼과 이유의 아들 이기에게 들은 말을 박세채에게 전해 그의 마음을 돌려놨다는 내용이다. 이달삼과 이유에게 들은 말이란, "송시열과 함께 정치하다간 큰 화를 당할 것이요"이었다는 것이다. 송시열의 노론은 윤증을 공격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윤증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지 1년여가 지난 숙종 10년(1684) 4월, 송시열의 제자인 사옹원 직장 최신이 상소를 올려 윤증을 공격했다.
  "전 대사헌 윤증은 산림에 발붙여 선비라 자처하면서 속으로는 바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서, 송시열을 헐뜯는 데에 여력을 다했고, 이조참판 박세채에게 글을 보내어 방자하게 송시열을 욕하며 없는 것을 있다 하고 흰 것을 검다 하였는데, 그 글이 온 세상에 가득히 전파되었습니다."
  최신은 윤증을 격하게 비난했으며, 송시열이 써준 묘비문에 대해 말하면서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윤증의 아비 윤선거는 병자 호란 때에 강도에 들어갔는데, 강도가 함몰되었을 때에 아내 및 벗과 같이 죽기로 약속하여, 그 아내도 죽고 그 벗도 죽었으나 윤선거만이 죽지 않았으니, 그뒤로 문을 닫고서 학문하고 끝내 벼슬하지 않아서 대개 볼 만한 것이 많기는 하나, 완비하기를 책망한다면 어찌 비평할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이 상소가 나오자 소론에서는 헌납 김두명이 상소해 윤선거를 옹호하는 등 소론과 노론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소론은 송시열이 그 내용을 단속했으나 최신이 일방적으로 상소했다고 방어했다. 송시열이 배후에서 조종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노론 영수의 한 명인 민정중이 사주한 것은 사실이다. 최신의 상소문을 미리 본 사우들은 너무 날카롭다며 만류했고 그 중 이수실이란 인물이 좌의정 민정중을 만나 말려달라고 요청했는데, 민정중은 오히려 이수실을 꾸짖었다.
  이 상소가 나오자 사론들은 둘로 갈라졌으나 수세에 몰린 쪽은 윤증이었다.
  "윤증은 송시열에게 젊어서부터 배웠으므로 선생이라 칭하며 스승으로 섬긴 것이 수십 년인데, 하루아침에 잃은 것처럼 버리고 더러운 것처럼 꾸짖으니, 아! 험악합니다."
  최신의 상소처럼 노론에서는 윤증이 한때 송시열에게 배운 과거를 들추어 가지고 스승을 배신한 배사라고 공격했는데, 군사부가 하나로 인식되던 조선 사회에서 '배사'라는 말은 혐의 자체만으로도 치명적 약점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노론의 일방적인 정치공세였다. 윤증의 자리에서 보면 송시열은 스승이지만 윤선거는 아버지였다. 아무리 군사부 일체라지만 스승보다 아버지가 소중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게다가 윤선거는 학문적으로도 윤증에게 스승이기도 했다. 송시열에게 사사하기 전 오랫동안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웠기 때문이다.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와 송시열뿐만 아니라 장인 권시를 비롯, 유계 등에게 사사했는데 노론은 이런 관계는 도외시한 채 한때 송시열에게 배운 것만을 가지고 '배사'라고 몬 것이다. 최신이 상소를 올린 지 석달 후에는 옥천 유생 김엽이 다시 윤증을 공격하고 나섰다.
  "간사한 무리들이 봉조하(평생토록 녹을 받는 전직 대신) 송시열을 겉으로는 높이는 척하면서 뒤로는 공격하고 있습니다. 윤증이 송시열을 공격하는 것은 10여 년 전 그 아비의 묘비문 때문입니다. 그때는 가만히 있다가 송시열의 위세가 전만 못하자 간사한 무리들과 합세해 그를 죽일 계책을 꾸몄던 것입니다."
  윤증은 숙종 7년 (현종실록) 편찬을 맡은 김수항에게 편지를 보내 윤선거의 강화도 행적을 옹호한 적이 있었다.
  "율곡은 입산했던 실수가 있지만 선인(아버지)은 처음부터 죽어야 할 의리가 없었습니다."
  김수항에게 보낸 편지가 알려지면서 노론은 윤증이 아버지의 신원을 위해 성현인 이이를 모함했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송시열과 윤증의 논쟁은 고변사건 처리와 맞물려 이어지다가 숙종 13년 2월 송시열의 상소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송시열은 윤선거.윤증 부자와 자신이 다투게 된 이유는 모두 윤선거가 사문난적 윤휴를 따랐기 때문이라고 상소했던 것이다. 스승과 직접 다툴 수 없었던 윤증은 이 상소에 침묵했으나 윤증이 과천에 갔을 때 머물렀던 나량좌가 대신 상소를 올려 윤증을 옹호했다. 그는 윤선거가 윤휴 편을 든 것이 아니라 송시열과 윤휴를 화해시키려 한 것인데 양측 모두로부터 배척받았음을 설명하고, 강화도 사건에 대해서도 윤선거의 처신을 옹호하면서 송시열을 비난했다. 이는 윤증의 소론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설파하면서 송시열을 정면에서 비난하고 나선 최초의 상소였다.
  공론이 격화되자 그 시비의 판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천하의 두 유현이 붙은 논쟁이다 보니 그 판정은 국왕 숙종이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둘의 논쟁은 학문의 차원을 넘어 정치의 차원으로 전화했기 때문이다.
  당시 숙종은 불안한 상태였다. 숙종의 권력을 지탱해 주던 두 외척 김석기와 김만기는 모두 사망한 뒤였다. 그 중에서도 숙종 10년 9월 김석주의 사망은 숙종에게 큰 타격이었다. 그가 주도한 공작정치는 옳고 그름을 떠나 왕권강화에는 절대적 구실을 했다. 김석주가 배후에서 때로는 서인을 옹호해 남인을 쫓아내고, 때로는 남인을 편들어 서인을 쫓아내지 않았다면 어린 왕 숙종은 당쟁의 와중에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린 것이 숙종에게는 다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만약 서인이 송시열 1인 체제로 결집되어 있다면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이 될 것이었다.
  숙종은 송시열과 윤증 중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자신에게 힘이 되는가를 기준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기준에 따르면 두 외척의 빈 자리를 대신할 세력은 윤증의 소론이 아니라 송시열의 노론이었으므로 송시열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충청도 이성에 은거해 있는 윤증의 손을 들어줄 경우 송시열측 노론의 반발을 막기 곤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숙종은 송시열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나량좌를 극변으로 유배보냈다. 송시열은 윤선거.윤휴.윤선거 등과 관련된 일의 본말을 설명했음에 불과한데 스승 윤선거를 옹호한다는 구실로 원로대신인 송시열을 배척했다는 죄목이었다.
  소론 승지 오도일이 나량좌를 옹호하고 나서자 숙종은 그 역시 파직시켜 버렸다. 그 외에도 조정의 소론 대간들이 나량좌를 옹호하고 나섰을 때도 숙종은 송시열을 편들었다.
  "그대들은 윤선거가 있는 줄만 알고 원로대신(송시열)이 있는 줄은 모르는구나."
  이처럼 숙종은 양측의 싸움에서 송시열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나량좌처럼 송시열을 비난하면 극변으로 유배 보내기도 하고, 정언 최석항과 지평 권항처럼 나량좌를 옹호하면 벼슬을 갈아버릴 정도로 송시열의 권위를 세워주었다. 그것이 왕권 유지에 도움이 되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