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국익보다는 당익이 앞선다(7)

구름위 2013. 6. 19.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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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숙종에게 정면 도전하다


  숙종이 바라던 첫 아들을 낳았을 때 봉조하 송시열의 나이 82세였다... 송시열은 고향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었다... 임금에 버금가는 위세를 지닌 송시열이 이즈음 고향에서 몰두한 것은 주자학이었다... 간서잡록에서 송시열은 이렇게 말했다...
  "주자는 일찌기 '사서를 읽다가 모르는 곳이 있으면 적어 두었다가 사람에게 물어라', '책을 편찬할 때는 반드시 따로 초부를 작성해 그 항목을 표기하여 두라... 이렇게 하면 기억에서 잊혀질까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며 이는 또한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선생의 이 두 말씀을 보고는 곧 이 책자를 만들어두고 읽는대로 적어두고 오고가면서 보니 의심나던 것이 저절로 깨달아지고 생소하던 것도 저절로 익숙해져 마음을 낭비하지 않아도 항상 가슴속에 있으니 마음을 기르는 법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정말 나를 속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정국이 파란에 휩싸일 조짐이 보이는 순간에도 그는 고향에 은거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은거를 끝낼 때가 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간 배후에서 서인들을 움직여 왔으나 집권 서인은 국왕 숙종의 전광석화 같은 조치에 손 한번 쓰지 못하고 원자 정호라는 일격을 당한 뒤였다... 그는 이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했다...
  송시열은 이미 장희빈 소생의 아들이 원자로 정호되고 종묘에 고한 이후라도 시기적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종묘 고묘가 끝난 후인 숙종 15년 2월 1일 가인을 시켜 두 장의 봉한 상소문을 올렸다... 한 본은 이이와 성혼의 사이에 대해 말하며 박태보가 자신의 조부를 헐뜯었다며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다은 한 본의 상소문이 바로 그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문제으 그 글이었다... 이 상소는 숙종의 원자 정호와 종묘 고묘에 대한 정면 도전이기도 했다...
  "중국 송나라 신종은 나이 28세에 처음 철종을 낳았는데 그 어미는 후궁 주씨였습니다...
그러나 철종은 열 살이 넘도록 번왕으로 있다가 신종이 병이 난 다음에야 비로소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때는 신종의 동생들인 가왕과 기왕의 혐핍이 있었는데도 이처럼 천천히 한 것은 제왕은 큰일을 할 때 항상 여유있게 천천히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숙종이 원자 정호를 서두른 것은 중국 송나라의 고사에 비교해 잘못이라는 말이었다...
  "신하들이 정후(왕비)께서 '아들을 낳는 경사가 있을 때'라고 반대하는 것은 사전에 많은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중종 때에도 '아들을 낳는 경사가 있을 때'란 말이 있었으나 이는 억울하게 쫗겨난 신씨의 복위를 방해하고자 한 것이고 지금은 종사를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로 보더라도 인종에게 아들이 없었으니 왕위가 그 동생인 병종에게 돌아가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런데도 이기가 조정 신하들이 명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참소해 선비들을 도륙내는 사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전하께서는 오늘날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중종 때 '아들을 낳는 경사가 있을 때'라고 하여 사화를 엮어내던 마음이 아니라 진실로 종사를 걱정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송시열은 신하들이 원자 정호를 반대하는 이유가 종사를 위함이라고 말했다... 즉 인현왕후가 득남하기를 기다리라는 말이었다... 인현왕후가 끝내 득남하지 못하면 희빈 장씨 소생의왕자가 자연히 세자가 될 것이 아니냐는 뜻이다...
  송시열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이미 종묘에 고묘까지 마친 사안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설사 송시열의 말이 백 번 지당하다고 해도 숙종이 다시 종묘에 나가, "지난번 원자 정호한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라고 번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분노하는 숙종 - 마침내 몰락의 때가 오다


  숙종이 승지들로부터 송시열의 상소를 받아 읽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 있었다... 숙종은 승정원과 홍문관 춘추관 등의 입직 관료들을 희정전으로 불렀다... 숙종이 노기 띤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전에 제신들에게 물은 것은 종사의 큰 계책이었다... 그리고 명호가 이미 정해졌으니 임금과 신하의 분의 를 다시 논하는 것은 부당하거늘, 봉조하 송시열이 '송의 철종은 열 살이 되도록 번왕으로 있었다'면서 은연중에 오늘날의 일을 너무 이르다고 하였다... 하니만 명나라 황제도 황자를 낳은 지 넉달 만에 봉호한 일이 있었는데, 송시열이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무슨 뜻이냐?"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며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남인 승지 이현기가 입을 열었다...
  "신은 그 소를 자세히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이 송 신종에게 미쳤으면, 이는 너무 이르다는 뜻과 비슷합니다... 또 명호가 이미 정해져서 신민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데 누가 감히 이의를 세우겠습니까?"
  승지 윤빈도 어의가 없다고 말했으나 말이 분명하지 못했다... 이현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명사를 상고해 보건대, 영종은 탕생하자마자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으니, 오늘날의 일을 어찌 감히 너무 이르다고 의심하겠습니까?"
  숙종은 이 대답에 흡족했다...
  "일이 아직 정해지기 전에 말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일이 이미 정해졌는데도 말하는 것은 반드시 그 뜻의 소재가 있다... 제신들은 그것을 다 전달하여 숨김이 없도록 하라..."
  서인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남인 허적과 윤휴를 사사시킨 숙종이었다... 그 본노의 화살이 서인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또한 이번 일은 누가 보아도 송시열의 실수였다... 속종의 말대로 일이 정해지기 전에 말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지만 일은 이미 결정된 뒤였다...
  "열 살이 되도록 번왕에 있었다고 이르니, 그 말이 옳으냐?"
  역시 이현기가 답변에 나섰다...
  "신민의 소망을 어짜 답답하게 10년이나 늦출 수 있겠습니까?"
  숙종은 항상 한쪽을 공격할 때 다른 쪽을 끌어들여 세를 더하는 임금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가 끌어들인 인물은 윤증으로, 숙종 자신이 이미 송시열의 승리로 판정지은 일이었다...
  "송시열이 한번 윤증과 서로 반목하여 헤어진 뒤로 조정이 몇 년 동안 어지러웠는데, 이제 어찌 이러한 근심이 없겠느냐?"
  이현기가 아뢰었다...
  "윤선거의 강도 의 일은 진실로 죽여야 할 만한 의리가 없습니다... 더욱이 그는 문을 닫고 책만 읽으며 세상고 서로 절교하여 뜻을 세운 것이 굳고 확실했습니다... 그런데도 송시열이 의리를 잊고 몸을 욕되게 하였다고 배척하고, 각각 붕당을 나누어 서로 헐뜯었습니다..."
  한번 말문이 역리자 그간 대로라는 위세 때문에 움츠러들었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옥당의 남치훈도 가세했다...
  "이는 사가의 일인데도 조정에다 올려서 논의를 분열시켰으니, 신은 적이 개탄스럽게 생각합니다..."
  숙종이 화답했다...
  "송시열의 소가 이와 같으니, 그 문하의 제자가 반드시 이어서 일어날 것이다... 만일 윤증이 반드시 그르지 않다면 양문이 서로 싸우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니, 오늘날의 일 또한 어찌 두려운 거시 업겠느냐?"
  옥당의 이익수는 송시열의 본뜻은 다르다고 옹호했다...
  "원자의 명호가 정해지자 신밀들로서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만일 반역지신이 아니라면 어찌 감히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송시열의 행위는 변호로써 막기에는 이미 늦은 것이었다...
이현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윤증의 일은 온 세상이 원통하다고 합니다... 문자를 가지고 그 아비를 욕한다면 그 아들된 자가 어찌 그대로 가만히 있겠습니까..."
  옥당의 남치훈이 다시 윤증을 두둔했다...
  "윤증은 그 문도들에게 입을 봉하게 해서 송시열의 문도들과 서로 다투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숙종이 화답했다...
  "작은 일도 그러하거늘 큰 일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송시열은 산림의 영수라지만 그 분의로 말하면 지극히 한심하다..."
  수찬 이익수는 노론 계열이었다... 송시열이 일방적으로 성토되는데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송시열의 상소로 어찌 불안한 일이 생기겠습니까?"
  숙종은 즉각 이익수를 파직하고 전교를 내렸다...
  "슬픈 일이다... 후사를 이미 세워서 임금과 신하의 분의가 정해진 뒤에도 유림의 영수인 송시열이 이제 와서 감히 나라의 근본을 일찍 세웠다고 불만을 나타내는구나... 유위한의 상소 중 '성심으로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이야기가 아님을 알겠도다..."
  송시열에 대한 숙종의 대치는 강경했다...
  "송시열을 그대로 두면 그의 문도들이 반드시 뒤따라 일어날 것이다... 그는 마땅히 먼 곳에 유배 보내야겠지만 유신이므로 특별히 은혜를 베풀겠다... 삭탈관작하고 성밖으로 쫓아내라..."
  승지 윤빈이 반대하고 나섰다...
  "세 조정에서 예우하던 신하를 죄 준다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숙종은 강경했다...
  "송시열을 구하려는 자가 있으면 대신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송시열을 위하는 소를 올려 시끄러운 폐단이 생기면 장차사설이 함부로 행해져서 끝없는 근심거리가 될 것이니, 그를 구하는 상소문은 승정원에서 받지도 말라..."
  숙종은 상소 자체를 막아버림으로써 원자 정호 문제가 다시 공론으로 떠오르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송시열 문제가 상소를 막아버림으로써 끝날 문제가 아님을 숙종은 잘 알고 있었다... 정권 자체가 서인 정권인데다 대다수의 대신들이 송시열의 문인이었다... 숙종은 서인 정권, 즉 송시열의 정권을 갈아치워야만 원자의 앞날이 보장된다고 생각했다...
  서인들의 몰락, 송시열의 몰락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뒤바뀌는 정권과 인현왕후, 그리고 송시열


  숙종은 바로 그 다음날 영상 김수흥을 파직했다...
  "지난번 인대하였을 때 말하는 기색에 발끈 성내며 삼가는 태도가 없었으니, 인심이 임금을 섬기는 데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느냐?"
  그런데 숙종실록은 바로 그 전날 임금이 이미 김수흥의 파직을 결심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 있다... 파직 하루 전에 숙종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저번에 김수흥이 일을 주청하면서, '예로부터 임금의 무리들은 ..."이라고 말했는데, 무리라고 말한 것은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인신이 되어 그 임금에 대해서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 어띠 심히 교만한 것이 아니겠느냐? 내 이를 잣히 들었으므로,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김수흥은 송시열의 문인으로서 영상으로 있을 때 국사를 먼저 송시열과 상의해 재가를 받고 나서야 처리했다는 인물이었다... 영상이 먼저 재가를 청할 정도이니 사실상 조선의 국왕은 둘인 셈이었다...
  숙종은 김수흥이 쫓겨난 자리에 서인인 우의정 여성제를 임명했으나 명복뿐이었고 그나마 일주일도 가지 못해 쫓겨났다... 숙종은 자신이 직접 지중추부사 목내선을 좌의정, 예조 판서 김덕원을 우의정에 제배했는데, 이들은 모두 남인이었다...
  남인들의 세상이 도래하는 것이었다... 숙종은 서인 정권을 남인으로 갈아치우는 것만이 원자의 앞날을 보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서인들이 손쓸 틈을 주지 않고 전광석화처럼 정권교체를 단행했다... 송시열의 상소 다음날 송시열의 삭출 전지 작성을 거부한 도승지 이세백을 쫓아냈을 뿐만 아니라 김재현, 서문유, 조의정등 나머지 서인계 승지들을 축출했다... 유생 유위한의 상소 때 그의 국문을 요청했던 정언 김덕기와 유명홍도 내쫓았다... 남인들이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숙종의 공세는 계속되어 이조판서에 심재, 예조판서에 이관징등 남인들을 임명하고, 민암을 대사헌에 임명했으며 윤심을 공조판서, 민종도를 이조참판에 임명했다... 2월 10일에는 드디어 서인 영상 여성제를 갈고 남인 권대운을 임명했다... 삼정승이 모두 남인 차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조참판 민종도를 대사헌에 임명하고 민암은 좌참찬으로 승진시킴으로써 의정보, 육조, 삼사 모두가 남인들 차지가 되었다...
  그 중 삼사를 남인들이 차지한 사실은 의정부나 육조의 장악만큼이나 중요하다... 삼사에는 탄핵권이 있기 때문이다... 숙종이 삼사를 남인으로 갈아치운 것은 서인을 탄핵하라는 뜻이었다... 이들은 숙종의 예상대로 서인들을 탄핵했다... 숙종이 부추기지 않더라도 서인에 대한 남인의 원한은 뿌리 깊었다... 그들은 7년 전인 임술년(숙종 8)에 당한 원한을 잊지 않고 있었다...
  대사간 이항과 정언 목림일이 송시열에 대한 포문을 열었다...
  "송시열은 산림을 빙자하고 세력에 아부해 자신의 당파를 널리 배치해 놓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은 반드시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거나 가두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라 평생에 지은 죄는 이루 다 글로 적을 수 없습니다... 원자 정호를 반대한 상소의 원본이 내려오지 않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그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전하의 말씀으로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의 평소 행동을 왕법이 용서할 수 없으니 극변에 위리안치시켜야 합니다..."
  또 사헌부 장령 이윤수 지평 이제민도 송시열 공격에 가세했다... 숙종은 전지를 내렸다...
  "송시열이 인용한 송나라 철종의 고사는 신하로서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일이다... 송나라 철종은 여안왕에 봉해졌다가 신종이 병이 난 후 유언으로 황제에 책봉되었다... 오늘날 인심과 세도가 흉악하다 해도 어찌 송나라의 불행한 일은 오늘날에 비교해 나라의 근본(원자)을 동요시키려 하는가... 이런 무리를 어찌 징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제주에 유배보내고 엄하게 위리 하라..."
  그때 송시열의 나이 여든세 살이었다... 유배령이 내려졌다는 말을들은 송시열의 문인들이 집으로 몰려들었다...
  "놀랄 만한 일입니다..."
  우암이 대답했다...
  "이런 일이 있는 줄 알고 있은 지 오래인데 어찌 놀라겠는가..."
  그는 여전히 확신범이었다... 팔순의 송시열은 다시 머나먼 남쪽 섬으로 유배길을 떠났다... 그는 귀양을 떠나며 말했다...
  "내 젊은 시절 소원은 사신이되어 바닷길로 중국에 가게 되면 망망대해의 출렁거리는 풍랑에 흉금을 쾌할하게 하는 것이었다... 지금 망망대해를 보게 되었으니 다행이 아니겠는가... 한 번 한라산을 올라보는 것도 소원이었는데 가는 즉시 위리안치되어 오를 수 없겠으니 이것이 유감이다..."
 사신의 몸과 죄인의 몸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는 이렇게 위안하며 태연히 귀양길에 올랐다... 경신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부활할 것이라고 믿었을까? 그러나 다시 부활하기에는 숙종의 인내심이 그리 많지 못했다... 숙종 자신이 여러 차례 말했둣이 그는 칠정 가운데 성내는 것을 가장 못 참는 인물이었다...
  송시열이 송나라 고사를 인용해 원자 정호가 빠르다고 한 송시열의 주장이 일리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많기 때문에 적절한 비유는 아니었다... 유위한의 상소에도 송나라 철종과 반대되는 경우가 여럿 인용되어 있었다...
  "명나라 영종은 재위 2년에 황자가 태어나니 3년 2월에 태자로 삼았고, 무종은 재위 4년에 황자가 태어나니 5년에 태자로 책립했습니다..."
  장구한 중국 역사에 송나라 철종과 반대되는 사례도 얼마든지 있었다... 즉 이는 상황에 따라 변통할 수 있는 일이지 만고의 법칙은 아니었다...
  송시열은 귀양을 떠나며 문인 한 명을 충청도 연산에 있는 김장생으 묘소에 보냈다... 자신이 쓴 글과 함계였다... 이는 지하에 있는 스승 김장생에게 보내는 일종의 고유문이었다... 이 글에서 송시열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김장생)은 항상 '주자가 아니면 공자의 도가 밝혀지지 않았다... 도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해 비록 성인이 다시 일어나도 그 말씀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유배를 바라보는 송시열의 시각을 잘 말해 준다... 그는 현 상황을 주희에서 율곡, 그리고 김장생과 자신으로 내려오는 도통에 대한 탄압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즉 정에 대한 사의 공격으로 바라보았다...
  누가 정이고 누가 사인지, 아니면 모두가 정이고 모두가 사인지, 모두 일정 정도의 정과 사를 함께 지니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명확한 것은 지금 정권을 잡은 쪽은 자신의 정적인 남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숙종은 송시열에 그치지 않고 김수항까지 공격했다... 숙종이 김수항 공격의 재료로 삼은 것은 윤증의 편지였다...
  "저번 노론과 소론이 싸운 것은 윤증의 개인적인 편지를 실록청 제조 기수항이 공개했기 때문이다... 대신의 직책은 조정을 진정시키는 데 있는 것인데 도리어 풍파를 일으켜 조정 의논이 점점 분열되었으니 대신으 조정하는 의리가 어디에 있는가... 김수항을 파직하라..."
  그뿐 아니었다... 전 병조판서 이사명을 남해에, 공주유수 이익을 장흥에, 이순명을 영해로 귀양 보냈다... 8년 전 남인들에 대한 공작정치를 실행했던 전 어영대감 김익훈도 강계로 유배가는 신세가 되었다... 김수홍도 유배형에 떨어졌다...
  서인들이 몰락한 자리는 남인들의 것이었다... 남인 유혁연 이수경의 벼슬이 회복되었으며 억울하게 죽어간 윤휴의 관작도 복구시켰다... 그러나 남인들은 여기서 끝맺지 않고 서인들의 목을 요구했다... 그들은 먼저 김수항의 사형을 요구했다... 남인이 장악한 양사에서 먼저 들고 일어섰다...
  "절도에 안치한 죄인 김수항은 8년 동안이나 수상 노릇을 하면서 요소에 부하들을 박아놓고, 한 요망한 역적(허견)을 빙자해 온갖 방법으로 죄를 얽어서 선비인 윤휴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옥사가 무고로 밝혀진 뒤에도 김익훈을 감싸 안았으며, 후궁과 공주의 동향을 엿보아 유언비어의 단서를 만들었습니다... 김석주의 흉한 짓도 김수항 때문에 더욱 심해졌습니다... 죄인 김수항을 법에 의해 처단하소서..."
  법에 의해 처단하라는 말은 사형시키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김수항을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귀양 보내는 것과 죽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남인들은 서인들을 죽여버려야 재기의 기회를 봉쇄할 수 있지만 숙종으로선 서인들의 목숨이 붙어 있어야 훗날 남인을 견제할 수 있었다...
  숙종이 불륜하자 남인들은 연합상소(연수)를 올렸다... 육조판서 전원과 참찬 판윤, 그리고 각 조의 참판 참의와 대사성 등이 참여한 연합상소였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송시열과 김수항의 목이었다...
  숙종은 일단 김수항의 목숨을 남인에게 주었다... 숙종 15년 4월 9일 김수항은 유배지 진도에서 사약을 받고 말았다... 사실 김수항은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우의정 김덕원에게 이를 항의했다...
  "김수항을 죽이는 것은 부당합니다..."
  김덕원의 답은 이랬다...
  "우리 덕이에 대해 어찌할 수 있겠는가?"
  덕이는 청나라 사신들에게 '조선은 신하가 강하다'라는 등의 말을 했다는 이유로 경신환국 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전 우의정 오시수의 자였다... 숙종실록에서 김덕원의 이 말은 오시수의 죽음에 대한 '당연한 보복이라는 뜻'이라고 적고 있듯이 김수항의 죽음은 경신환국 후 서인들이 남인들을 죽음으로 몬 데 대한 보복이었다... 김수항은 송시열을 탄핵하다 귀양 간 나량좌의 자형이었으니 증오의 정치가 낳은 뫼비우스의 띠였다...
  영의정 김수항의 목숨을 가져간 남인들은 이제 송시열의 목을 요구했다... 김수향은 송시열의 문인이었으니 사실상 남인들의 최종 목표는 송시열이었다... 대사헌 목창명은 이렇게 주청했다...
  "송시열은 효묘의 죄인이니, 결단코 용서해서는 안됩니다..."
  4월 21일 숙종이 희정전에 나가 앉자 대사헌 목창명 등 삼사에서 청대했다...
  "요즘 양사에서 청한 일이 많으나 그 중 송시열의 죄악은 극도에 찼으니 결단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윤허하지 않으므로 신 등이 뵙기를 청한 것입니다... 오늘은 반드시 윤허를 얻은 후 물러가겠습니다..."
  이 주청에 대한 숙종의 대답은 이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중궁(왕비)이 귀인(김수항의 증손녀)과 한패가 되어 희빈 장씨를 투기한 진상은 실로 다 말할 수 없소... 중궁은 병인년(숙종 12년)에 내게, '꿈에 선왕 선후를 보았는데 저를 가리키며 복록이 많아 자손이 번창하겠지만, 숙원(장씨)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도 없어서 오랫동안 궁중에 있으면 반드시 경신년에 뜻을 잃은 사람들(남인)과 결탁하여 국가에 화를 끼칠 것입니다'라고 말했소... 옛날에도 혹 투기하는 자가 있기는 했지만 어찌 선왕 선후를 빙자하여 내 마음을 움직이는 계교를 꺼낼 수 있단 말인가? 과연 숙원에게 아들이 없다면 어떻게 원자를 낳았단 말인가?"
  이는 인현왕후를 폐출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이 놀라운 말에 우부승지 이시만이 이의를 제기했다...
  "놀랍고 황송해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신하들은 전하를 아버지 같이 섬기는데 이제 어머니로 섬기던 분에 대해 이 같은 하교를 들으니 어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사삿집으로 말하면 부모가 불화한데 자식이 어찌 편하겠습니까? 비록 불만이 있더라도 서서히 진정시킬 일이거늘 어찌 밖으로 드러내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나 마음을 이미 한 숙종은 계속 인현왕후를 비난했다...
  "원자가 탄생한 뒤에 더욱 불평하는 기색이 있어서, '여자 아이가 쓰는 모자를 만들었는데 남자 아이라니 뜻밖이다'라고 말했다... 또 궁인들 중에도 왕자 탄생이 의외라고 말하는 자가 몇 있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내가 나라의 근본을 일찍 정한 본마음이 바로 여기에 있다..."
  숙종은 이 자리에서 원자와 왕비 후궁, 그리고 송시열이 뒤얽힌 문제에 대해 고차원의 정치방정식을 제시한 셈이었다... 인현왕후는 노론 중진인 영돈녕부사 민유중의 딸이었다... 전 좌의정 민정중은 그녀의 큰아버지이기도 했다... 귀인 김씨는 김수항의 증손년였다... 왕비 문제를 푸는 해법은 당파간의 역학관계에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신하들이 왕비 폐출을 찬성할 수는 없었다... 연산군 때의 참사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교리 강선이 반대하고 나섰다...
  "중전께서 국모로 계신 지 10년 동안 무슨 실덕이 있기에 참으실 도리를 생각하시지 않고 이러십니까? 이는 실로 전하으 실덕이 되리니, 신이 어찌 제 한 몸을 아껴 전하를 버리겠습니까... 신은 중궁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하를 위해서 반대합니다..."
  숙종은 이시만의 반대에 강경히 대응했다...
  "이시만은 나가고 다른 승지를 들게 하라..."
  이시만 대신 들어온 인물은 좌부승지 김해일 이었다... 숙종은 김해일에게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송시열의 일은 윤허한다... 도사를 보내 잡아다 국문하라..."
  이는 송시열 문제와 인현왕후 문제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강한 시사였다... 박태보 등 86인이 상소해 왕비 폐출을 반대하자 숙종은 화를 내며 한밤중에 직접 국문했다... 그리고 왕비 폐출 문제를 꺼낸 다음날 김수항의 증손녀인 귀인 김씨의 작호를 삭탈하고 교지를 불태워 버렸다...
  그 다음날은 공교롭게도 인현왕후의 생일이었다... 전례에 따라 신하들이 물건을 바치는 단자와 하례하는 단자를 들이자 숙종은 모두 내보냈다... 또 왕비에게 들여간 물건은 모두 후원에 묻게 했다... 나아가 그는 음식을 들인 내사 주빈을 궁중 안의 내옥에 가두었다...
  드디어 숙종은 민비를 폐출하라는 전지를 내렸다... 민비에게 자신의 생일은 쫓겨나가는 날이 된 것이다... 대신들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하였으나 숙종은 전지를 거두지 않았다...
5월 4일 인현왕후 민씨는 하얀 옥교를 타고 경복궁 북쪽의 '금빛 나는 문'이란 뜻의 요금문을 나와 친정으로 돌아갔다... 서인계 유생 수백 명이 길가에 엎드려 곡했고 성균관 유생들은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그러나 숙종의 결단은 단호했다... 그는 민비가 쫓겨난 당일로 종묘에 행차해 이 사실을 고했다... 그리고 열흘 후에는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해 역시 종묘에 고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 시간에 서인들은 철저하게 당하고 있었다... 임술년(1682)에 남인들을 도륙 낸 서인들의 정치보복이 7년 후인 기사년(1689)에는 고스란히 서인들에게 돌아왔던 것이다... 화해의 정치는 간 데 없고 증오만이 판을 쳤다... 공존의 정치는 간 곳 없고 독존만이 횡행했다...
  김수항 홍치상 이사명 등 무려 18명이 사사되었다... 7년 전 공작정치를 집행했거나 가담했던 서인들은 남김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익훈 이입신 김환 김중하 이광한 남두북 박빈 이원성 등이 그들이었다... 7년 전 얻은 보사공신의 공훈록이 이제는 저승의 명부가 된 것이었다... 환관 김현은 척신 김석주에게 궁중의 정보를 제공했다는 죄로 사형당했으며, 궁녀 가을헌은 김익훈과 내통했다는 협의로 사형당했다... 살아 있는 대신들이 죽어나가는 판에 죽은 김석주라고 무사할 수는 없었다... 그는 삭탈관작되었다...
  목숨을 겨우 건졌지만 중도부처, 유배, 위리안치된 사람은 59명, 파직과 삭탈관작 등을 당한 사람은 26명으로 무두 103명에 달했다...
  남인들의 복수에는 예외가 없었다... 이이명은 송시열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귀양갔고, 김만채는 옛날에 아버지 김익훈을 변호하며 올린 상소가 문제되어 귀양갔다... 이기주나 박세휘 같은 송시열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려도 귀양행이었다...
  서인들이 모두 처리된 후 남인 인물은 송시열뿐이었다... 송시열은 국문을 위해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남인들은 송시열의 국문을 반대하고 나섰다... 숙종 15년 6월 숙종과 대신, 그리고 비변사 당상관들이 면대했을 때 송시열의 국문을 반대한 남인은 판의금 민암이었다... 물론 용서하자는 말이 아니었다...
  "송시열의 죄는 이미 드러났으니 굳이 국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조종조에서 대신을 국문한 일이 없습니다... 서열의 죄가 극악해도 대신의 반열에 있었으니 전하께서 대신들에게 물어 그냥 처분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국문할 것도 없이 그냥 죽여버리자는 말이었다... 남인들은 송시열의 국문을 겁냈다... 국문받을 경우 그가 죄를 시인할 리는 없었다... 그가 국문에서 자신이 옳음을 당당히 진술할 때 일어날 정치적 파장의 크기는 짐작할 수 없었다... 인조반정을 일으켜 임금을 갈아치운 세력이 서인이었다...
  영의정 권대운이 민암의 제안에 찬성하고 나섰다...
  "당초 국문을 청한 것은 신이 깨닫지 못하고 한 일입니다. 시열의 죄가 극악하지만 이미 80이 지났으니 굳이 국문할 필요없이 전하께서 참작하시어 처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좌의정 목래선과 우의정 김덕원도 권대운의 견해에 찬성하고 나섰다. '이미 80이 지난' 노인이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고 구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송시열이 9년 전 거제의 유배지에서 우뚝 재기했던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송시열이 살아 있는 한 서인들은 그를 중심으로 모일 것이라는 예측이 그들을 두렵게 했다. 남인들은 공작정치를 주도한 인물은 김석주와 김익훈이지 송시열이 아니며 그는 다만 그들이 저지른 공작정치를 크게 반대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굳이 모른 척했다.
  남인들은 송시열이 노론 영수라는 이유만으로 죽이려 했다. 남인들은 노론이 재기해 자신들을 제거하지 못하게 막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도륙 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같이 살 수 있는 화해라는 방법이 있음을 그들은 애써 모른 체했다.
  송시열을 국문하지 않으려는 본뜻을 실토한 사람은 유명천이었다.
  "근래에 죄인의 괴수 송시열을 구하려는 이른바 유소라는 것이 돌아다니는 해괴한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인심이 비릇되어졌으나 수습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는 대개 훗날(서인의 재집권)을 위한 계책입니다. 지금 시열이 국문받으러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맞으러 내려가는 사람들이 길가에 가득해 그치지 않으니 그 기상이 두렵습니다."
  남인은 송시열의 국문 도중에 발생할 비상사태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숙종이 결단을 내렸다. 남인과 같은 뜻이었다.
  "대신들의 뜻이 이와 같고 또 그의 죄악은 국문하지 않아도 여지없이 나타났으니 사사하라. 도사가 약을 가지고 가다가 그를 만나는 대로 사사하라."
  민암이 물었다.
  "전지는 어떻게 하리까?"
  "전지 속의 '국문'이란 두 자를 '사사'로 고치라."

 

대로의 최후


  송시열은 멀리 보이는 뭍을 바라보았다. 83세의 노구에 제주에서 뭍까지는 너무 먼 뱃길이었다. 뭍에는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의 제자,문인들과 서인 사대부들이었다. 대로 송시열이 뱃전에 나타나자 그들은 눈물을 흩뿌렸다. 물론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남인에 대한 증오의 눈물이며 원한의 눈물이었다.
  그의 문인들에게 송시열은 사표 그대로였다. 정치적인 삶이 아닌 개인적인 삶으로 볼 때 그는 자신들에게 가장 엄격한 인물이었다. [소학]은 바로 그의 평생에 걸친 수신 교과서였다. 어릴 때부터 주색을 멀리한 것은 물론이다. 또 그는 검소함을 으뜸으로 삼았다. 심지어는 조복도 비단이 아닌 무명을 사용할 정도였다. 망건에 금관자도 달지 않았다.
  그의 가정 생활도 [소학]의 실현이었다. 효도는 그에게 성인의 도, 그 자체였다. 효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부모께서 내게 성명의 온전함을 주셨으니 이 속에는 모든 선이 다 갖추어졌다. 하나의 선이라도 밝히지 않으면 그것이 곧 불효이고, 하나의 선이라도 행하지 않으면 역시 불효다."
  그는 부모가 생전에 가난하여 요도 없이 지낸 일이 있다고 하여 평생 요를 깔지 않았다고 전해질 정도로 효자였다. 부모가 돌아가자 중형을 아버지 섬기듯 하면서도 두 아우에게는 우애와 엄정함으로 가르쳤다. 그는 확고한 가부장제 지지자이지만 부인에 대한 예우는 깍듯했다. 집에서는 부인을 손님같이 대했다. 며칠 이상 바깥출입을 하러 나갈 때는 부부가 서로 절하고 귀가할때도 절하였다.
  그의 반대자들은 그가 세도로써 추종자들을 만들었다고 비난했지만 당심으로 뭉친 제자들에게 그는 존경과 추종의 대상이었다. 이런 인물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니 그 제자들의 심사가 어떨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송시열은 서울로 향했다. 마지막이 될 길이었다. 그가 가는 길마다 노론계 유생들이 나와 눈물을 흘렸다. 그들에게 인현왕후 폐출은 국모를 내쫓은 것으로서 남인 정권을 역당으로 부인할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그들은 왕비 폐출과 송시열의 국문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서울에 도착하면 수많은 인파들이 몰릴 것이었다. 그는 남인들이 자신을 중도에 죽여버릴지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또는 중종 때 조광조를 죽이려 하자 성균관과 사학 유생들이 대궐 안에 난입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사태가 재연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법도 하다.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송시열은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 것이 분명한 상소를 썼다.
  "엎드려 아뢰옵건대 신은 압송 명령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하늘보다 무궁하고 땅보다 지극히 원통함을 한 번 어전에 아뢰고 죽으려는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은 지난 겨울 섣달부터 위장병에 걸려 곡식을 끊은 지 이미 오래되었고, 귀양길에 나선 후 더위와 바람에 부딪혀 수토병에 걸려 이제 장차 명이 다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이 매우 가슴 아파하고 답답해하는 것은 종시 궐하에 나가 하소연하지 못할까 여겨지므로 신이 부득이 망극한 죄상을 생각하지 않고 이 같은 소를 올릴 계획을 했습니다.
  신을 탄핵하는 자가 또 한층 중한 죄안으로 더 논고할 줄 압니다. 신의 마음이 아프고 답답한 것은 우리 효종대왕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 좋은 기운이 끝나는 세상(명이 망하고 청이 선 것)을 당해 천지가 번복된 것을 아프게 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머리에 쓰는 갓과 발에 신는 신발이 서로 자리를 바꾼 것(명의 자리에 청이 선 것)을 분하게 여겨 춘추대의를 밝혀 위로는 황제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선왕의 수치를 씻으려 하셨습니다."
  송시열은 구구한 자기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이미 정권이 바뀌고 자신을 죽이려는 상황에서 자기 변명은 구차한 것이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상소에 남기고 싶은 것은 변명이 아니라 명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효종과 북벌대의를 상소의 주제로 택했다.
  "신은 경신년 이후 종적이 불안해 비록 명성왕후께서 언문 편지로 만류하셨지만 조정에 편안히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윤휴의 여당이 옆에서 엿보기를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에도 자신은 조정에 거의 있지 않았으니 무슨 죄냐는 항변이었다.
  "그래도 부르심을 받고 조정에 나왔을 때는 효종의 세실을 설치할 것을 주창했고 전하께서는 이를 즐겨 들으셨습니다. 그때 대신 김수항이 백관을 거느려서 드디어 백 대가 지나도 옮기지 않는 종호를 올렸습니다. 예전에 주자도 고종 때 출사해 섬기다가 고종이 죽은 후 세실을 설치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송나라 고종은 부모의 원수를 잊고 원수를 섬기던 임금이었습니다. 그래도 간고한 때 종사를 끊이지 않은 것을 공로라 하였는데 어찌 감히 우리 효종대왕께서 제후의 나라로 춘추대의를 밝히신 데 비교하겠습니까?
  신이 엎드려 가슴 아프게 여기며 반드시 진술하려는 것은 신을 효종대왕의 죄인으로 만들려 하는 것뿐입니다. 그 외에 신의 죄상을 나열한 것은 비록 지극히 원통하지만 신이 감히 한두 가지로 지껄여 스스로 변명하는 죄과를 더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은 단지 하늘과 해가 증명해 줄 것이오니 오직 성명께서는 굽어살피소서."
  송시열은 정읍에 도착했다. 숙종 15년(1689) 6월 7일이었다. 많은 문인들이 정읍까지 따라왔다.
  그날 밤 송시열을 찾는 사람이 있었다. 얼마 전 사사당한 김수항의 자손이었다. 김수항은 사약을 마시기 직전 이런 유언을 남겼다.
  "만일 우암 선생이 나보다 늦게 돌아가신다면 나의 묘지문은 우암 선생께 부탁하라."
  역시 죽으로 가는 팔순 노인에게 김수항의 자손은, "묘비명만 써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송시열은 마지막 길이라고 대강 쓰지는 않았다.
  "그럴 수 없네. 이는 후세에 큰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송시열은 김수항이 도를 지키려다 희생되었다는 내용으로 정성껏 묘비명을 작성했는데, 이는 송시열이 생전에 쓴 약 600여 편의 묘지문 중 백미로 손꼽힌다.
  그 다음날 아침 금부도사 권처경이 사약을 가지고 정읍으로 내려왔다. 석 달 전인 숙종 15년 3월 서인의 종주인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이 문묘에서 출향되었을 때 송시열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각오했던 터였다. 어쩌면 송시열은 자신의 죽음보다 율곡과 우계가 문묘에서 출향된 데 더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흑수(윤휴)는 공자도 부족하다고 말하고 주자도 배척했다. 또한 예송논쟁 때 아들이 왕이 되면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인현왕후를 모욕하였다. 심지어 양현(율곡과 우계)을 문묘에서 쫓아냈다."
  그는 이 모든 사태를 이단이 사문을 공격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는 사약을 마시기 전 문인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죽음을 앞둔 스승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듣고 적었다.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주로 할 것이며, 사업은 마땅히 효종이 하고자 했던 뜻을 위주로 할 것이다."
  주자의 뜻을 받들어 효종의 북벌대의를 수행하라는 말이었다. 이 두 가지의 수행을 자신의 삶으로 규정했다는 뜻도 된다. 그는 그만큼 나인들이 자신을 효종의 죄인으로 몬 것을 뼈아프게 생각했다.
  “내가 장기에서 완성한 '주자대전차의'의 미진한 점을 보완하기 바란다."
  주자를 주로 하는 자신의 학문을 후학들이 계속 수행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는 수제자 권상하의 손을 잡고 뒷일을 부탁했다.
  "상사에 무슨 예법을 써야 합니까?"
  "「주자가례」를 주로 하고 노선생(김장생)이 엮은 '상례비요'를 참고하라."
  "염할 때는 무슨 옷을 입여야 합니까?"
  "심의를 입히고 그 다음에 주자가 한가할 때 입던 야복을 입히고, 그 다음엔 명나라의 예법인 난삼을 입히라.“
  그는 주자로 시작해서 주자로 끝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관에 대해서는 달랐다.
  "나의 관은 덧붙인 널빤지를 사용하라."
  효종의 관이 덧붙인 널빤지였음을 미안하게 여긴다는 뜻이었다.
  송시열이 사약을 마실 ㅏ리에는 거적 한 장만이 깔려 있었다. 제자들이 자리가 추하니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자 송시열은 "우리 선인(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때 이만한 자리도 못까셨네“라며 거절했다.
  송시열은 사약을 들이켰다. 83세의 파란 많은 생애가 정읍에서 막을 내린 것이었다.
  1689년 6월 8일 아침이었다.

 

변화의 세상, 불변의 교의


  송시열이 살았던 16세기 말에서 17세기 말은 정치적인 격변기였다. 조선 전역사를 통틀어 이때만큼 정치적 변화가 격심했던 적은 없었다. 정권이 뒤바뀌는 환국이 거듭된 것은 정치적 격변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정치권만이 격변에 휩쓸린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다다르면 사회 경제 분야도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사회 경제의 변화가 정치권을 격변시킨 근본 요인인지도 모른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농업 기술은 크게 발전하였다. 조선 전기의 직파법이 이앙법으로 변해 갔다. 직파법이 논에 직접 파종해 벼를 기르는 방법이라면 이양법, 즉 '모내기 법‘은 못자리(묘판)에서 기른 묘를 논에다 옮겨 심는 방법이었다. 이앙법은 농업생산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직파법이 일년에 한 번밖에 농사를 지을 수 없는 '1년 1모작’이라면 이앙법은 두 배인 '1년 2모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앙법은 벼베기를 한 빈 논에 보리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즉 봄부터 가을까지는 '벼농사’, 가을부터 다음해 봄까지는 '보리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직파법은 일 년에 벼농사 한 번빡에 지을 수 없는 반면 이앙법은 벼와 보리 농사, 두 번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직파법에 비해 농업생산력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났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선 초기에는 이앙법을 법으로 엄격히 금지시켰다. 직파법은 가뭄이 들어도 그럭저럭 수확을 거둘 수 있는 반면에 이앙법은 봄에 가뭄이 들어 모내기를 못하면 1년 농사를 망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1년 2모작이 주는 이익 때문에 실농의 위험을 무릎쓰고 이앙법을 더욱 널리 사용했다. 이렇게 되니 정부와 농민들은 이앙법 아래에서도 실농하지 않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수리 시설의 확충이었다.
  방죽, 보, 저수지 등을 새로 만들거나 확충한 것은 이 때문이다. 송시열과 윤휴, 허목 사이의 제 1차 예송논쟁이 한창 벌어지던 현종 3년(1662년)에 제언사가 만들어진 것은 이런 농업 기술의 변화에 대응하려는 국가의 적극적인 의지였따. 또한 밭농사도 밭고랑(견)과 밭이랑(무)으로 나누어 종자를 밭고랑에다 파종하는 견종법이 발달했다. 이앙법과 견종법은 같은 면적의 토지를 경작하더라도 노동력을 크게 절감시켰다. 농민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토지 면적이 크게 확대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넓은 면적의 토지를 한 가구에서 경작할 수 있는 광작이 크게 보급되었다. 광작하는 농민들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다 팔기 위하여 생산하는 부농들이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일종의 상업농이었다. 잉여생산물을 판매함으로써 여유 자금이 생긴 부농들은 계속해서 농토를 매입했고 이런 농토들은 가족의 노동력뿐만 아니라 임금노동자를 고용해 농사를 지었다. 농촌 사회는 이렇게 계급분화가 이루어졌다. 즉 임금노동자를 고용해 농사짓는 부농과 자신의 토지에서 탈락해 이농하는 임금노동자와 유미들로 나위어졌던 것이다. 전통적인 농촌 사회는 해체의 길을 걷고 있었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은 전주와 전호 관계도 변화시켰다. 지대 납부가 타조법에서 도조법으로 바뀐 것이다. 타조법은 전호가 수확량의 2분의 1을 지대로 전주에게 냈다. 하지만 도조법은 전호가 미리 정한 양의 수확량을 내는 것이었다. 타조법 아래에서 전호는 농사 전반에 걸쳐 전주의 간섭을 받았다. 수확량이 많아야 전주의 수입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조법 아래에서 전주는 전체 생산량의 양에 상관할 필요가 없었다. 도지를 주기 전에 서로 합의한 양만 받으면 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한 결당 10석을 받기로 합의했다면 전체 생산량이 15석이든 30석이든 전주는 상관할 필요가 없었다. 합의한 10석만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조법 아래에서 전주는 전호의 영농에 간섭하지 않았다. 이는 타보법보다 전호의 신분을 보다 자유롭게 했다. 도조법은 또한 지대를 수확물이 아닌 화폐로 내는 도전법, 즉 금납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방식이기도 했다. 시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금납제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상공업의 발달


  농업의 발달은 상공업의 발달을 수반하였다. 농업생산력 발달에 따른 잉여생산물은 상업 행위에 의해 고환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상업의 발달은 필수적이었다. 농민들은 벼와 보리 등 곡물뿐이 아닌 상업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인삼, 담배, 목면 등이 광범위하게 재배된 것이다. 이 시기 상업활동의 중심은 대동법 실시에 따라 나타난 공인들이었다. 어용상인인 이들은 서울 종로 중심의 시전뿐만 아니라 지방 장시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물품값을 미리 받았으므로 특정 물품을 대량 취급할 수 있는 자금력이 있었다. 이는 공인들을 독점적 도매상인 도고로 성장시키는 기본적인 힘이 되었다. 이들은 물품에 따라 공동출자를 하는 계를 조직해 상권을 독점하기도 했다. 또한 영세한 수공업자들에게원료나 자금을 대주고 물품을 만들게 했다. 이것이 바로 선대제이다. 상인들이 원료나 자금으로 수공업자를 지배하는 선대제는 자본주의의 발전의 초기 형태, 즉 상업 자본주의의 한 모습이었다. 즉 조선 후기 공인은 일종의 상업자본가로 발전한 것이다. 이처럼 상업자본가가 나타날 정도로 조선 후기 상업의 발전은 급격했다. 어용상인인 공인들뿐 아니라 사상의 발전도 눈부셨다. 이들은 농산물 및 수공업 제품을 전국적으로 활발히 유통시켰다. 지방 곳곳에 객주, 여각이 생겼다. 상업 중심질의 이들 상인들도 도매상인 도고로 성장해갔다.
  한강의 수로를 이용해 경기 충청 일대에서 미곡, 어물, 소금 등을 판매한 서울의 경강상인과 황해 평안도는 물론 충청 경상도까지 송방이란 지점을 설치해 인삼을 판매했던 개성의 송상이 그들이었다. 또한 청나라와 국경지대인 의주의 만상은 중강후시나 책문후시에서 청나라 상인들과 사무역을 하였고 동래의 래상은 왜와 사무역을 하였다.
  즉 국제무역업으로 발전할 정도로 상업발달은 눈부셨던 것이다. 사상의 성장은 전국적인 장시의 발달에 토대를 두었다. 송시열이 사망할 무렵인 17세기 말에는 5일장으로 불리던 전국의 장시가 무려 1,000여 개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들 장시를 돌며 장사하는 전업적인 상인들이 보부상이었다. 이들은 전국적인 조직인 보부상단을 조직해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단결을 꾀했다. 상업의 이런 발달은 화폐 경제의 발달을 수반했다. 서인과 남인이 격렬하게 싸우던 숙종 4년(1678)에 상평통보가 만들어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심지어 숙종 때는 위조 화폐가 대량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숙종 22년 판서 이경중의 손주며느리가 화폐를 밀조하다 적발되기도 했으며 관리들이 위조지폐를 만들다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양반들이 더러운 물건으로 여겨 손으로 잡지도 않았다는 돈을 관리들이 몰래 마들 정도로 조선 사회는 급변하고 있었다.


  신분제의 변화


  농업생산의 발달과 상업의 발달, 그리고 수공업과 화폐 경제의 발달은 사회계층의 변화, 즉 신분제를 변화시켰다. 앞서 말했듯이 농민들은 전주와 전호, 그리고 임금노동자로 분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전주-전호 사이의 대립을 격화시켜 항조 운동이 일어나게 했으며, 때로는 민란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부농으로 성장한 일부 양민들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노비들은 양반이나 양인으로 신분 성장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공명첩, 납속책 등을 통해 양반고 양인의 신분을 획득했으며, 이 외에도 박지원의 양반전에 나오는 족보 매매 등으로 호적을 고쳐 조상을 바꾸거나 유학, 진사를 사칭하기도 했다. 서얼이나 중인들도 소통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들은 무관을 중심으로 관계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부모 양쪽 중 어느 한쪽이 천인이면 천인이 되던 야천제가 예송논쟁의 와중인 현종 10년에 어머니의 신분에 따르는 종모법으로 바꾼 것도 신분제 변화의 하나였다. 양반들도 이런 변화의 물결에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일부 양반들은 거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벌열이 되어 갔으나 다른 양반들은 몰락해 일반 농민들과 비슷한 처지에 떨어졌다. 농민 사회가 내부 분화한 것처럼 양반 사회도 내부 분화한 것이다. 이 모두가 급변하는 사회, 경제적 변화 때문이었다.


  새로운 사회를 향해


  이제 변화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였다. 송시열이 생애 내내 치열한 당쟁에 휩싸였던 것은 그가 바로 이런 변화의 한 가운데서 있었음을 뜻한다. 당시 조선은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사농공상으로 계서화된 조선의 신분질서로는 더 이상 이런 변화를 수용할 수 없었다. 양반의 특권적 지위는 폐지되어야 했다. 농민과 노비들에 대한 신분적 억압은 철폐되어야 했다. 주희가 주자학을 만든 것은 남송에서 수전농업의 발달로 성장한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였다. 즉 주자학의 성립에는 사대부 계급의 성장과 이익 추구라는 사회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송시열이 활동할 무렵 주자학은 조선에서 이미 그 순기능을 다한 학문이었다. 주자학은 절대적 위치에서 상대적 위치로 내려와야 했다. 사대부의 자리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주자학으로는 더 이상 사회를 유지해 나갈 수가 없었다. 이제는 농민의 자리, 백성의 자리에서 세상을 해석해야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주자학을 강화하는 역사의 반동으로 나아갔다. 조선초 중기 사회변혁의 사상이었던 조선 성리학은 인조반정 후 수구 사상인 예학으로 나갔다.
  그 예학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크게 붙은 것이 예송논쟁이었다. 예송논쟁은 신권 중심의 정치를 통해 양반 지주들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송시열 등 서인들과 군주권 강화를 통해 농민들의 이익을 보장하려는 윤휴 허목 등 남인들의 견해가 부딪친 것이었다.
  송시열은 “다행히 주자 뒤에 나서 학문이 어긋남이 없다”고까지 말했지만 그 주자학이 정치에 적용될 때 어긋남이 너무 컸던 것이 송시열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는 조선 전체의 비극이기도 했다. 송시열은 주희의 의리론을 조선으로 가져오는 것, 즉 소중화 사상을 주자학의 조선화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시대 착오적인 소중화란 명분론이 아니라 사회발전에 맞게 학문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유학의 진정한 조선화는 소중화가 아니라 양반 사대부 중심의 중세 유학을 농님을 포함하는 일반 양인 중심의 근세 유학으로 바꾸는 것이어야 했다. 그런 사고 속에서 신분제 철폐를 주장해야 했다. 왕가와 사대부가의 예가 같다는 의미의 천하동례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사대부와 일반 백성이 같다는 의미의 천하동례를 주장해야 했다.
  그러나 송시열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대부라는 계급의 이익이었고, 서인 노론이라는 당의 이익이었다. 이를 위해 농민과 여성들은 억압 받아야 했다. 심지어 송시열은 현종 10년 동성간에는 본관이 다르더라도 결혼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혼인할 때 동성을 아내로 취하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국가에서는 이미 예법을 준행하고 있는데 민속은 구습을 좇고 있습니다. 비록 본관은 같지 않더라도 성의 글자가 같으면 혼인하지 못하게 금하소서.” 송시열의 이 주청에 따라 본관이 다르더라도 성이 같으면 결혼이 금지되었다. 물론 모계는 성은 물론 본관이 같아도 상관없었다. 송시열의 예론은 이처럼 철저하게 사대부, 노론, 그리고 남성만을 위한 예론이었다.
  그는 이것을 정도로 생각하고 이에 반대하는 여타 생각들을 사도로 여겨 배격했다. 그는 이미 고묘까지 끝난 장희빈 소생의 왕자가 원자로 책봉되는 것을 막는 것이 정도라고 생각했으나 이에 동의하는 세력은 사대부 중에서도 그 자신의 당인 노론뿐이었다. 그는 남인 소생 여인의 아들이 원자가 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노론 당론에 목숨을 걸었고, 결국 그 때문에 죽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5년 후인 숙종 20년(1694)에 그의 당인 노론은 남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집권한다. 이른바 갑술환국이다. 이후 그의 당 노론은 소론의 도전을 물리친 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일당 전제를 계속한다. 송시열은 무덤 속에서 화려하게 부활해 그가 죽은 지 약 60여 년 후인 영조 31년(1755)에는 드디어 유학자 최대의 영예인 문묘에 종사되었다. 문묘 외에도 그는 전국 23개의 서원과 전국 9개의 사우에 제향되었다. 그중 경기도 여주의 대로사는 한강변에서 효종의 무덤을 마주 보고 서있다. 송시열이 효묘(효종)의 죄인이라는 남인들의 비난은 송시열뿐만 아니라 서인 모두에게 뼈아픈 것이었다.
  정조는 대로사의 비문을 써주고 국비로 '송자대전'도 간행했지만 이는 집권 노론을 회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노론이 재집권함에 따라 그는 국가적 차원에서 송자라는 서현의 일컬음을 받았지만 송자란 찬사는 공허하게 들린다. 송자라는 영예 또한 그의 당인 노론에서 바친 찬사에 불과했다. 사회변화를 실현시키는 데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면 송시열은 진정한 성인으로 많은 백성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익을 지키는 데 목숨을 걸었다. 결국 그의 당인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으나 이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나라에 불과했다.
  '논어' '위정편'의 한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을 대신 한다.
  공자가 말하였다.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지만 소인은 편벽되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