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국익보다는 당익이 앞선다(6)

구름위 2013. 6. 1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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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을 그리던 주자의 저서


  이 무렵 송시열은 꿈에도 그리던 책을 구하게 된다. 주희가 해석한 (논맹정의)란 책이다. 당시 조선에도 주희의 (논어혹문), (맹자혹문)은 간행되어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쓴 (논맹정의)는 아직 입수되지 않은 터였다. 송시열은 이 책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 나라에서 (논어혹문), (맹자혹문)을 간행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진실로 (논맹정의)가 없으면 (혹문)의 내용들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이는 마치 저울은 있되 가볍고 무거운 것을 달 수 없는 것과 같고, 자는 있되 그 길고 짧은 것을 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송시열은 (논맹정의)를 구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청나라에 사신이 갈 때마다 역관에게 부탁했으나 그 뜻이 번번이 무산되면 지 40여 년이었다. 그러던 중 그의 제자인 이선이 동지사로 북경에 다녀오면서 드디어 (논맹정의)를 구해왔던 것이다. 숙종 13년(1687)의 일이었다.
  송시열은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기뻐했다. 송시열은 이선이 구해온 (논맹정의)의 내용을 (논어혹문)과 (맹자혹문)의 해당 조목아래 차례대로 인용해 편리하게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편집해 출간했다. 그 과정이 무려 2년여를 끌었다. 그는 이렇게 정성을 들인 책을 (논맹혹문정의통교)라 이름 붙이고 서문을 썼다. 그리고는 제자인 권상하에게 나머지 작업을 맡겼다. 그가 이 책의 서문을 서둘러 쓴 때는 다시 정권이 남인으로 바뀌어 비참한 죽음을 맞기 석 달 전인 숙종 15년 3월이었다. 아마도 송시열은 자신의 비참한 미래를 예측하고 제자에게 나머지 일을 맡겼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40여 년간 희구하던 (논맹정의)를 구한 이 시기가 송시열의 인생에서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절정기였다. 어쩌면 그는 정권보다 (논맹정의)를 얻은 데 더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정치 대신에 학문만을 닦았다면 많은 비극을 피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신봉했던 주자학은 당시 조선에서 이미 학문이 아닌 정치적 도그마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비극은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절대성의 비극이자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도 파괴하는 전체성의 비극이었다.
  그 비극이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건, 바로 장희빈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정호하는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장희빈을 둘러싼 조정의 역학 관계


  숙종에게는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바로 후사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김만기의 딸인 인경왕후와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 두 왕비를 두었다. 인경왕후는 경신환국이 이루어지던 숙종6년(1680) 천연두로 사망하고 그녀가 낳은 세 딸도 모두 일찍 죽고 말았다. 다음해인 1681년 숙종은 15세의 인현왕후를 맞이했으나 그녀는 20세가 다 되도록 왕자는 물론 공주도 낳지 못했다.
  이즈음 숙종은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장옥정이란 궁녀 출신의 여인이다. 훗날 장희빈이라 불리는 그 여인이다.
  희빈 장씨는 중인 역관 장형의 서녀였다. 명문대가들이 득세하던 당시에 중인은 행세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중인의 적녀도 아닌 서녀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훗날 우의정이 되는 조사석 처가의 여종(비)이었다.
  조선의 신분제는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천인이면 그 자손도 무조건 천인이 되는 양천제였다가 현종 10년(1669)에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자손의 신분이 정해지는 종모법으로 바뀌었다. 종모법에 따른다 해도 장옥정은 천인에 불과했다. 자의대비궁 소속의 궁녀로 궁궐에 들어온 장옥정은 곧 숙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의 반대로 궁에서 쫓겨났다. 그녀가 다시 궁궐에 들어온 때는 명성왕후가 세상을 뜬 숙종9년(1683)이었다.
  숙종은 다시 궁궐에 들어온 장옥정을 총애했다. 하지만 이 총애는 곧 서인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장옥정의 집안이 남인가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숙종 12년 7월 부교리 이징명은 상소를 올려 장옥정을 쫓아낼 것을 주청했다.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는 궁인 중의 한 사람은 역관 장현의 친척입니다. 현 부자는 허견의 옥사 때 사사당한 복창군 정에게 붙었던 자인데 이제 전하께서 그 친족을 가까이 하다가는 차후 말할 수 없는 우려가 있을 것입니다. 성상께서 장녀를 내쫓아서 맑고 밝은 정치에 누를 끼치지 말게 하소서."
  서인들이 장씨를 보는 눈은 이 상소에서 잘 드러난다. 즉 국왕 숙종의 개인적인 애정문제가 아니라 서인과 남인의 역학관계라는 정치적 시각이었다. 역관 장현은 장옥정의 종숙이었다. 서인들은 그녀가 복창군 형제와 관계있던 한 역관의 종서녀라는 이유만으로 숙종과 그녀의 교제를 극력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숙종은 자신의 애정문제에 신하들이 끼어든 데 분개했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의 여성편력은 단순한 애정문제를 넘어 후손의 번창을 위한 정치행위이기도 했다. 더구나 그는 아직 왕자가 없었다.
  숙종이 이징명을 파직하자 옥당과 여러 신하들이 거듭 나서 이징명을 옹호했다. 그러자 숙종은 소리를 버럭 지르기까지 했다.
  "너희들이 이처럼 방자하기 때문에 북인(청나라 사람)이 군주는 약하고 신하가 강하다는 말을 한다."
  숙종은 나아가 이정명의 상소와는 반대로 그때까지 궁녀로 있던 장옥정을 내명부 종4품 숙원에 봉하려 하였다. 내명부 정5품 상궁까지는 궁녀지만 숙원부터는 궁녀가 아닌 후궁이었다. 후궁은 국왕의 합법적인 부인 중의 한 명으로서 신분 자체의 변화였다.
  그러자 정언 한성우는 '색', '총애' 같은 원색적 말들을 담은 상소로 반대했다. 숙종은 한성우의 벼슬을 버렸다.
  "이는 궁인 중에 음흉한 것들이 사대부와 짜고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임금을 모함하는 것이다. 앞으로 비방하는 말을 만드는 궁인은 바로 목을 베는 것을 내명부의 으뜸가는 법령으로 삼으라."
  이처럼 장옥정을 총애하는 숙종의 의지는 단호했다.
  숙종은 불안했다. 서인들이 장옥정을 반대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인들은 장옥정을 남인 당인으로 바라보고 반대하는 것이었다. 숙종은 궁중에 장옥정의 세력이 없는 데 불안을 느껴 장씨의 세력을 궁중에 심으려 했다.
  그 중 한 명이 승선군의 아들인 동평군 항이었다. 숙종이 동평군 항을 혜민서 제조에 임명한 것은 동왕 13년 6월이었다. 혜민서란 의약에 관한 사항과 백성들의 구호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는 한직의 부서였다. 종6품 주부가 실무의 최고책임자로 있는 하위 관청이었고, 제조는 종1품이나 정2품으로서 직급은 높았으나 겸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서인들은 동평군을 한직인 혜민서 제조에 임명한 데 대해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이조에서는 명을 받기를 거부했다.
  "사옹원과 종부시를 제외하면 종친이 제조에 제수된 예가 없으므로 감히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숙종도 물러나지 않았다.
  "사옹원에 종친이 제수된 것도 법전에는 없는 일이니 지금 종친이 혜민서에 제수된 것도 불가한 일이 아니다."
  혜민서라는 하위 관청 하나를 명목상 관리하게 하는 데 신하들이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이유 중의 하나도 숙원 장씨와 관련이 있었다. 동평군의 어머니 신씨는 장옥정이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에게 쫓겨났을 때 그녀를 돌봐주었던 인물이었다. 궁녀 장옥정은 동평군의 집에 머물다가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궁중에 들어왔던 것이다. 이 일은 동평군에 대한 숙종의 신임을 굳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서인들이 그의 혜민서 제조 임명을 반대했던 것이다.
  조사석의 우의정 제수를 반대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었다. 우의정 이단하가 좌의정으로 전보해 우의정 자리가 비자 숙종은 영의정 김수항과 좌의정 이단하에게 우의정을 추천하라고 말했다. 그들은 처음 이상을 추천했으나 숙종이 윤허하지 않자 이민서, 신정, 여성제를 차례로 추천했다. 그러나 숙종은 이들을 모두 거부했다.
  이는 숙종이 따로 심중에 둔 인물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뜻을 읽은 김수항과 이단하가 청대하자 숙종은 드디어 의중의 인물을 댔다.
  "조사석은 어떤가?"
  숙종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데 신하들이 반대할 수는 없었다. 숙종 13년 5월의 일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조사석이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지사 김만중이 경연에서 이를 거론했다.
  "세상에서 조사석이 우상이 된 것에 대해 '귀인 장씨의 외가댁과 친하기 때문에 청탁으로 정승이 되었다' 라고 말합니다."
  김만중의 말은 귀인 장씨의 어머니가 조사석 처가의 여종이었던 이런 인연으로 조사석이 정승이 되었다는 말이었다. 이 말을 들은 숙종은 크게 화를 냈다.
  "내가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한 여자에게 혹하여 뇌물을 받고 정승을 시켰다는 말까지 듣게 되었으니 참으로 면목이 없다. 오늘 안으로 그 말의 출처를 캐어 자수하게 하라."
  김만중은 체포당해 세 번이나 엄히 문초를 받았으나 그 말의 출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대지 않았다. 숙종은 김만중을 평안도 선천으로 귀양 보냈다. 그는 기사년에 서인들이 몰락한 후 이 말 때문에 다시 세 차례의 엄한 형벌을 받게 된다.
  서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는 동평군과 조사석 문제 모두 희빈 장씨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음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조사석과 동평군 문제에는 소론 이조판서 박세채도 강하게 반박하고 나섰다.
  "김만중의 행위는 모두 괘씸히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 말이 항간에서 파다하게 돌아다니는데 전하 혼자만 듣지 못했기 때문에 전해드린 것이라면 어찌 김만중의 죄가 되겠습니까? 또 어느 사람에게만 사랑이 유별나서 봉작을 높여주었거나, 대궐에 들어가 전하를 뵙는 것이 다른 사람과 달리 자주 있다면 이는 삼가해야 할 일입니다."
  '어느 사람에게만 사랑이 유별나서 봉작을 높여주었다'는 말은 장옥정이 1년도 안 되어 내명부 종4품 숙원에서 종1품 귀인으로 승진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또 '대궐에 들어가 전하를 뵙는 것이 다른 사람과 달리 자주 있다'는 말은 동평군을 두고 한 말이었다. 숙종은 동평군을 총애해 자주 궁궐에 불러 물건을 하사하곤 했던 것이다.
  노론, 소론 할 것 없이 서인들이 모두 귀인 장씨와 동평군을 반대하고 나서는 이유는 이 문제가 숙종의 후사, 즉 다음 왕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박세채는 위의 상소에서 장씨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남자는 밖에서 그 위치를 바르게 하고 여자는 안에서 그 위치를 바르게 하는 부부의 분별이 엄하므로 집안이 가지런한 것입니다. 처는 위로서 남편과 동등하며 첩은 아래로서 명령에 복종하는 적서의 분별이 정해져야 집안이 가지런히 정비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사삿집이나 나라의 근심이 됩니다."
  박세체가 우려하는 바는 숙종의 '처'인 인현왕후와 '첩'인 귀인 장씨의 분별이 없어지거나 그 처지가 뒤바뀌는 것이었다.
  숙종은 유현의 상소에는 이례적이라 할 정도의 엄한 전교를 내렸다. 숙종은 재위 14년 7월 '괴물'이란 용어를 써가며 하교했다.
  "내가 변변치 못하여 한 괴물을 조정에 불러들였기 때문에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불효의 죄에서 진실로 벗어날 수가 없다. 차라리 갑자기 세상을 떠나서 모르는 체하고자 한다"
  '괴물'이란 박세채를 지적한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숙종에게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서인들은 심지어 숙종의 후사와 관련하여 동평군을 둘러싼 소문이 퍼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동평군이 궁을 자주 드나들자 후사없는 숙종이 사망하면 동평군이 뒤를 이으리라는 소문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동평군 문제를 정면에서 제기한 인물은 영의정 남구만이었다. 남구만은 숙종 14년 7월 우의정 여성제와 청대하여 이 문제를 제기한다.
  "현종대왕이 인평대군의 아들들을 동기처럼 대했기 때문에 복창군 형제들이 점점 교만해져 역모가 일어났습니다.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10년 넘도록 후사가 없으셔서 인심이 안정되지 못한 판국에 가까운 종친을 자주 궁중에 출입시키시니 박세채가 차자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동평군의 혜민서 제조를 해임하시면 그것이 곧 박세채의 사직을 만류하는 길이 됩니다."
  이는 종친 동평군의 총애가 숙종의 후사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이 주청에 숙종은 화를 냈다.
  "이는 역모를 고변한 것과 같소. 복창군 형제의 일과 결부해 과인의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동평군을 의심하려면 직접 국문을 요청할 일이지 어찌 혜민서 제조의 직만 갈라고 하는가?"
  숙종은 남구만을 경홍, 여성제를 경원에 위리안치시켰다.
  그러나 서인들이 진정 우려하는 것은 동평군이 아니라 후궁 장씨의 뱃속에 들어 있는 아이였다. 남구만이 문제를 제기할 당시 귀인 장씨는 임신 7개월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녀가 아들을 낳는다면 조정은 격변에 휩싸일 것이었다...

 

즉위 15년 만에 태어난 왕자에 대한 논란


  숙종 14년(1688) 10월 27일, 조정은 긴장에 휩싸였다.
  소의 장씨가 진통에 들어간 것이다. 숙종은 그때까지 자식이 없었다... 인경왕후가 낳은 세 딸마저 모두 죽어버려 천지에 숙종의 핏줄이라고는 없는 상황이었다... 장옥정이 아들을
낳을 경우 조정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올 것이었다... 숙종은 왕자이기를 바랐고 서인들은 옹주이기를 바랐다...
  이런 양립된 긴장을 뚫고 탄생한 아기는 왕자였다... 숙종은 기뻐 마지않았고 서인들은 탄식해 마지않았다... 즉위한 지 15년 만에 태어난 갓난 왕자를 두고 숙종과 서인이 보인 상반된 감정은 중립지대 없는 양측의 충돌이라는 비극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서인들은 어린 왕자에 대해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그 한 예가 사헌부 지평 이익수 이언기가 사헌부 금리와 조례들을 시켜 산후 몸조리를 돕기 위해 궁궐에 들어오던 귀인 장씨의 어머니를 옥교에서 끌어내리고 옥교를 빼앗아 버린 사건이었다... 이익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옥교를 때려부수고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사헌부 금리를 시켜 가마를 메고 온 노비들을 치죄하게 했다... 천인이 무엄하게 옥교를 탔다는 구실이었으나 그녀는 단순한 천인이 아니라 하나뿐인 왕자의 외할머니이자 종1품 귀인의 어머니였으므로 그런 잣대로 처리할 수는 없는 터였다... 숙종이 분개한 것은 당연했다...
  "후궁의 산실을 설치하는 것은 궁중의 관례이다... 귀인의 본가에서 간호하러 궁중에 들어올 때 옥교를 타도록 허락한 것은 바로 과인이며 이 또한 전례에 있는 일이다... 궁녀들도 천인이지만 상궁이 되면 법에 따라 가마를 타는데, 하물며 왕자의 외가에서 전교를 받고 출입하는 것을 어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숙종은 내수사에 명해 이익수를 다스리게 했으나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숙종은 내수사 환관에게 시켜 가마를 불태운 사헌부 금리를 다스리게 했다... 임금의 명령을 받은 환관들은 금리둘을 장살하고 말았다... 이에 교리 유득일이 상소를 올려 반발하고 나섰다...
  "전하의 오늘 행동은 실로 천고에 없는 것입니다. 헌관(사헌부 관리)은 법을 집행했을 뿐인데 금리를 옥에 가두고, 환관에게 다스리게 하여 심한 고문으로 죄 없는 사람이 연달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보고 듣는 이가 모두 놀라서, '후궁을 두둔해서 죄 없는 사람을 억울하게 죽인다'고 합니다..."
  숙종도 사람이 죽어나간 데 당황해 한발 물러섰다...
  "칠정(사람의 일곱가지 감정... 유가에서는 희 노 애 구 애 오 욕을, 불가에서는 희 노 우 구 애 증 욕을 든다) 가운데 발동하기는 쉽고 억제하기는 어려운 것이 성내는 것인데 나의 병통이 항상 그 속에 있다. 한때의 분함을 참지 못해 일을 저질렀으니 이는 실로 나의 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죽은 두 사람을 구휼하라..."

 

원자의 이름을 둘러싼 논란


  이처럼 한발 물러서기는 했지만 숙종은 왕자에 대한 서인들의 반응에 불만이 많았다... 사헌부 관리가 왕자의 외할머니를 끌어내린 사건은 숙종에게 왕자의 미래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게 했다... 숙종은 왕자와 장씨의 지위를 튼튼히 해놓지 않으면 장래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신할 수 없었다. 이런 위기 의식이 숙종에게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게 했다...
  숙종은 왕자가 태어난 지 3개월이 채 안 된 동왕 15년 1월 10일 긴급한 지시를 내렸다... 먼저 시 원임대신, 6조 판서, 삼사 장관을 긴급 소집했다...
  "일이 매우 중요하니 정오가 지나도록 오지 않는 신하가 있을 경우 해당 승지를 중죄롤 다스리겠다..."
  긴급 명령을 받고 영의정 김수항과 이조판서 남용익등 아홉 명이 황급히 모였다... 이 자리에서 숙종은 대신들에게 통보했다...
  "나라의 근본(국본, 세자를 뜻함)이 정해지지 않아 나라의 형세가 고단하며 민심이 의지할 데가 없다... 현재의 가장 큰 계책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왕자의 명호를 정하는 일이다... 만일 머뭇거리거나 다른 의도가 있는 사람은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는 것이 좋다..."
  왕자의 명호를 짓는 것은 당연한 일 같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는 단순한 명호가 아니라 원자의 명호를 짓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원자의 다음 수순은 세자이므로 원자 정호 문제는 왕위 계승과 관련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비록 정비가 아닌 후궁의 소생이라 하더라도 원자로서 정호되면 자연히 다음 세자가 되는 것이었다... 훗날 정비가 왕자를 낳더라도 원자로 먼저 정호된 왕자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후궁 장씨 소생의 왕자가 원호로 정호된다면 다음 왕위는 그의 것이었다... 장씨가 궁녀로 숙종과 교제할 때부터 사사건건 방해하던 서인 정권에게는 목숨을 걸고 막아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송시열과 서인들은 여기에 정권의 운명을 걸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인물 중 먼저 반대하고 인물은 이조판서 남용익 이었다...
  "왕자 탄생은 신민의 경사지만 오늘의 말씀은 의외이며, 지금 중전께서 춘추 한창이시니 왕자의 명호를 짓는 일은 너무 빠른 감이있습니다... 반대하려면 물러가라 하시니 물러가겠습니다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남용익의 말대로 인현왕후 민씨의 나이는 23세의 한창 나이였다... 대신들이 기를 쓰고 반대하는 근저에는 서인가의 여인인 인현황후 민씨가 있었던 것이다...
  호조판서 유상운도 반대였다.
  "앞으로 왕비께서 아들을 낳는 경사가 없으면, 나라의 근본은 자연히 현 왕자에게 돌아갈 것인데 오늘날 명호를 정하거나 정하지 않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병조판서 윤지완도 반대였다...
  "남용익의 '빠르다'는 말은 참으로 옳습니다. 한나라 명제는 황후가 아들 낳을 희망이 없어진 뒤에야 비로소 장제를 아들로 삼았으니 정비의 맏아들을 제일 중하게 여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완비께서 아들을 낳는 경사가 없으면 자연히 나라의 근본이 정해질 것입니다..."
  대사간 최규서도 마찬가지였다...
  "전하의 춘추 아직 한창이시고 왕자가 탄생한 지 겨우 두어 달밖에 안됐는데 어찌 이리 서둘러 정호하려 하십니까? 또 오늘 일은 중요한 일로서 조용히 의논해야 할 일인데 벼슬을 가지고 아랫사람들을 위협해서 물러가라는 말씀까지 하시니, 신하를 대우함이 너무 야박할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도 실언하셨다는 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신하들이 원자 정호를 반대했다... 남인인 공조판서 심재만이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전하의 분부도 일리가 있지만 신하들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널리 물어서 처리함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널리 물을 경우 대부분이 서인인 신하들이 찬성할 리 없었다... 심재는 비록 남인이지만 서인 정권 속에서 굳이 원자 정호에 찬성해 물의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숙종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꿈 이야기를 동원했다...
  "작년 5월에 내가 꿈속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내가 언제 아들을 낳겠느냐?'고 물으니, 그 사람이 '이미 잉태하고 계신데 남자입니다' 하였다... 내가 듣고서 스스로 기뻐하였는데 아들을 낳게 되어서는 내 마음에 믿는 바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숙종의 꿈과 서인이 꿈은 다른 것이었다... 드디어 입을 연 영상 김수흥도 서인이었다...
  "왕자 탄생을 온 나라 신민이 좋아하니, 만일 왕비께서 아들을 낳는 경사가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지금 탄생한지 두어 달 만에 갑자기 정호하자고 하시니 서두르신다는 말씀을 안들으실 수 없습니다. 옛 사람들은 태자에 대해 교양의 함양을 급선무로  하였지 정호를 서둘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또 왕자가 많다면 모르지만 한 분뿐이니 교양을 함양한 뒤엔들 나라의 근본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오늘 여러 신하들의 의사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왕자가 아직 포대기 속에 있기 때문이니 잘 생각해서 처리하십시오..."
  하지만 숙종에게 대신들의 반대는 이미 각오했던 바였다...
  "내 나이 30이 되도록 아들이 없다가 작년에야 왕자를 낳았는데 원자로 정호함이 어찌 빠르다고 하는가... 국세는 외롭고 옆에는 강한 이웃이 있으니 종사의 중대한 계책을 더 미룰 수 없다... 여러 말할 것 없이 예조에 원자 정호를 예조에 분부하라..."
  그러나 예조에서도 "원자 정호는 함부로 결단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널리 대신들과 의논해 결정하기를 바랍니다"라며 사실상 명을 받들기를 거부했다... 숙종은 다시 명령했다...
  "원자로 정호하라..."
  조정에서는 아무도 원자 정호에 찬성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숙종을 지지하고 나선 인물은 조정 중신이 아니라 남인 유생 유위한이었다... 그는 원자 정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원자 정호는 직접 세자로 정하는 것만 못하오니 전하께서 빨리 결단하여 세자로 정하십시오..."
  그는 원자 정호를 넘어 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한 것이었다... 유위한은 또한 서인들을 비난했다...
  "왕자가 탄생하자 온 나라 신민들이 성심으로 기뻐하였으나, 수상을 비롯한 일부 신하들은 성심으로 기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또 "권대운 이옥 권해를 풀어주소서"라면서 경신환국 후 귀양간 남인 대신들의 석방을 요청했다...
  서인들이 이 상소를 그냥 둘 리 없었다... 도승지 이언강이 숙종을 청대해 유위한의 처벌을 요구했다...
  "상소 중의 '때가 변하면 일이 달라진다'는 말은 역적을 고변할 때 쓰는 말로서 이는 대신을 모함한 것입니다... 중히 치죄해야 합니다..."
  숙종이 유적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자, 이언강이 다시 반발했다... 이는 유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일단 유위한을 절도인 해남에 유배 보내는 것으로 서인들의 마음을 달랬다... 유위한의 상소 문제는 장씨 소생의 왕자를 보는 각 당파의 시각을 명확히 드러낸 것이었다...
  하지만 숙종의 생각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숙종은 결심을 실행하는 데는 주저함이 없는 성격의 인물이었으므로,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호 문제를 거론한 지 5일 후에 장씨가 낳은 아들을 원자로 봉하고 종묘사직에 고했다... 아울러 귀인 장씨를 내명부 정 1품 회빈으로 책봉했다...
  왕조국가에서 어떤 조치를 종묘사직에 고했다는 것은 입법조치가 완료되었다는 뜻이었다... 현대국가로 말하면 국회에서 통과된 법에 대한 공포 절차가 끝나 효력을 발생하고 있는 헌행법임을 의미했다... 이제 후궁 장씨 소생의 왕자는 원자가 되었고, 남인 유생 유위한의 말처럼 '때가 변해 일이 달라지는' 일이 없는 한 원자가 세자가 되어 왕위를 잇게 되었다...
  그러나 입법 조치가 완료된 원자 정호에 다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다... 바고 서인 노론 영수 우암 송시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