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국익보다는 당익이 앞선다(4)

구름위 2013. 6. 1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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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정치의 시대


  남인 영수 허적과 윤휴가 죽고 남인들이 몰락한 빈자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송시열이었다. 서인들이 정권을 잡은 이상 송시열의 재기는 불 보듯 환한 일이었다.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즉각 송시열을 옹호하고 나섰다. 부호군 이유태가 상소를 올려 송시열을 변호했디.
  "예송논쟁 때 송시열과 저를 헐뜯는 자들의 의견은 송시열이 '호종은 적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이 시열에게 '송나라 영종이 방계 자손으로서 들어와 대통을 이었는데 정자가 적자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호종께서는 다음 적자 로서 롤라서 적자가 되었는데 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묻자 제 말이 맞다고 했습니다."
  송시열이 효종의 종통과 적통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변명이다. 숙종은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에게 정권을 준 이상 송시열의 신원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숙종은 당일 이에 화답했다.
  "이유태의 상소와 송시열의 '효종을 두고 적통이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가'라고 한 말은 서로 같았으니 그 가시나무 두른것(위리안치)을 풀어서 유배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
  송시열은 거제도에서 청풍으로 옮겨젔다. 이곳은 바로 송시열이 귀양갈때 '청풍 김씨의 참소가 드디어 실행되는구나'라구 한 김육 일기의 본관이었다.
  송시열을 석방시킨 것은 형식상 가뭄이었다. 가뭄이 들다 영의정 김수항이 송시열의 석방을 청했던 것이다. 드디어 송시열은 만5년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숙종 6년 5월 24일이었다.
  5년여의 귀양 생활 동안 쌓은 것은 가슴속의 원한이었다. 그 원한은 비단 송시열만의 것이 아니였다. 남인 정권 아래에서 거듭 당했던 정치 보복의 크기보다 더한 원한이 서인들의 가슴속에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서인들이 '허견의 옥사'에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옥사를 만들어낸 배경에는 바로 그 원한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인의 재집권 2년후 후인 숙종8년(1682)10월 21일 전 병사 김환과 출신 이회 및 패관 한수만 등이 남인 허새,허영등이 역모를 꾸며 복평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고변한 사건이 옥사의 시작이었다. 이 사건으로 조정은 발칵 뒤집히고 숙종의 명으로 즉각 국청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이틀 후 김중하란 인물이 또다시 역모를 고변했다. 이번에는 전 정승인 남인 민암이 사생계를 조직해 김석주 등을 제거하려 한다는 고변이었다.
  불과 이틀 사이에 발생한 두 사건 모두 남인의 역모 고변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김중하의 고변4일 후에는 어영대장이자 척신 김석주의 심복인 김익훈이 또다시 역모를 고변했다. 김익훈은 정원로아 김중하의 고변 사건이 자신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자 아방에서 임금 숙종에게 그 시말을 밀계했다. 김익훈의 밀께까지 합쳐 불과 일주일도 안되는 사이에 무려 세 건의 고변사건이 발생했다. 이 고변들이 발생한 숙종8년(1682)이 임술년이므로 임술고변이라 부른다.
  그 내막은 대단히 복잡하지만 목적은 단 한, 남인들을 도륙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정치 드라마의 사나리오와 연출을 맡은 인물은 척신 김석주였고 김익훈과 김환, 김중하 등 고변자들은 주연, 또는 조연 배우였다. 김석주는 전 병사 김환이 서인이면서도 남인들과 사이가 좋은 점을 이용해 그를 간자로 만들기로 해싿. 김환이 거부하자 김석주는 죽이겠다고 위협해 그를 간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김석주는 김환을 남인 허새와 허영의 집 근처로 이사시켜 그들을 유인하는 동시에 김환에게 남인들을 역모로 모는 구체적인 방법을 지시했다.
  "남인 허새,허영과 장기를 두다가 대국 중에 상대편의 왕을 잡으면서 '나라를 빼앗는 일도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그의 기색을 살펴라. 허새 등이 해기하게 여기지 않거든 같이 잠을 자면서 거사하자고 말하라. 이렇게 하면 남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남인들이 역모를 꾀하는지 아닌지를 감시하라는 지시가 아니라 그들을 역모로 유인하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김환은 이 방법을 거절했다. 그들에게 역심이 없으면 자신이 역모롤 몰릴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이에 대해 김석주는, "내가 다 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면서 거사 자금을 주었다.
  그러나 남인을 역모로 모는 일이 마무리되기 전에 김석주가 청나라에 사은사로 가면서 계획이 어긋났다. 김석주가 없는 사이에 김환이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나돈 것이다. 남인들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한 말들이 시중에 유포되고 말았다. 김석주는 청나라에 가면서 심복인 훈련대장 김익훈에게 이 임무를 맡겼는데, 김환이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돌자 다급해진 김익훈은 서둘러 김환에게 고변하도록 시켰다.
  임술고변의 서막인 김환의 고변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즉각 국청이 설치되고 역모의 주모자로 지목된 허새에 대한 국문이 시작되었다. 허새는 세 차례의 형벌에도 굴복하지 않았으나 계속되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조작된 혐의를 시인하였다. 허새의 서종제인 허영 역시 세 차례의 형벌에도 굴하지 않다가 결국 살기를 포기하고 혐의를 시인하였다. 허새의 서종제인 허영 역시 세 차례의 형벌에도 굴하지 않다가 결국 살기를 포기하고 혐의를 시인하였다. 허새는 대궐을 침범하여 양 대장을 제거하고 수원에 가짜 도사를 보내 유수를 잡아들인 후 다른 사람으로 바꾸려 하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런 모사를 모두 이덕주가 꾸몄다고 토로했으나 이덕주는 구문과 대질심문에서 모든 혐의 사실을 부인하고 허새의 자백이 가진 모순점을 반박하다가 고문을 당해 죽고 말았다.
  하지만 주모자로 몰린 허새가 자백했으니 김환의 고변은 사실로 굳어져 가싿. 고변이 잇다르다 보니 혼선이 발생했다. 김석주와 김익훈이 고변을 통해 노린 인물은 복평군이었으나, 허새와 허영이 자신들이 혐의는 인정하면서 복평군의 관련 사실은 끝내 부인한 데서 차질이 생긴 것이었다.
  고변자 김환으로서는 복평군이 제거되는 말든 자신이 공신으로 책봉되기만 하면 족했다. 굳이 복평군을 끌고 들어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김환은 복평군을 물고 들어가지않았다. 복평군이 빠져나갈 조짐이 보이자 다급해진 김익훈은 위관 김수항에겍 복평군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수항응 이를 거절했다.
  "역모에 대한 국청은 어명과 죄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거론하지 못하는 법이오."
  이런 상황에서 김석주가 청나라에서 돌아오자 김익훈은 김석주를 찾아 사건의 시말을 설명했다. 보고의 핵심은 복평군이 빠져나갈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김석주는 복평군을 끌어들일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알려주었다. 궁굴에 있는 장신들이 숙소인 아방에 들어가 임금에게 밀계하라는 것이었다. 아방에서 이루어진 김익훈의 3차 고변은 이런 경로로 이루어졌다.
  혼란은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김중하의 2차 고변은 민암 등과 대질 신문까지 했으나 말이 맞지 않는 데다 증거도 없어서 무고로 드러나고 있었다.
  김익훈의 밀계 결과 김환의 고변 제의를 거절한 전익대가 잡혀왔는데, 그는 김환이 곧 공신에 책봉될 기색이 보이자 남인 유명견이 역모를 꾸몄다며 김익훈과 시나리오에 가세했다.
  이처럼 세 차례의 고변 사건은 얽히고 설켜 그 진상이 모호해졌다. 세 고변들이 독립적인 고변인지 하나로 연결된 고변인지도 불분명해졌다. 이 사건은 대부분이 서인인 위관들이 문제를 제기할 정도로 그 진상에 많은 의문이 일었다. 서인 위관들이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기위해 당사자들을 대질 심문한 데서도 고변들의 문제점이 명확하게 나타났다. 대질 심문결과 허구성이 속소 드러났다. 김중하와 전익대의 무고가 밝혀져 역모의 주모자라는 민암과 유명견이 무혐의로 석방된 것이다.
  그러나 김환의고변은 허새가 고문에 못 이겼기 때문이긴 해도 어쨌든 자백이었기 때문에 사실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이 사건은 신속하게 처리되어 허새가 자백한 다음날 결안이작성되고 허영의 결안도 이틀 후에 처리되었다. 김환은 자헌대부를, 같이 고변했던 이회와 한수만은 각각 가선대부를 제수받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영의정 김수항이 숙종에게 "외간에서의 물정이 간혼 '역옥 사건이 명백하지도 못한데 고한 사람들에 대한 상전이 분수에 너무 지나쳤다'고 합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여론이 들끓었다. 물론 공작 정치에 의한 조작이란 여론이었다.

 

공작 정치에 대한 서인들의 반발


  세 차례의 고변 사건이 정국에 미친 파장은 심각했다. 어느 정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 의문을 제기했다. 이른바 조작설이 제기된 것이다.
  비슷한 내용의 고변에다, 김환과 전익대가 함께 모의했는데 김환은 공신이 되고 전익대는 무고죄로 몰린 것도 의문을 증폭시켰다. 김환은 공신이 되고 전익대는 유배가는 것으로 처리되었으나 공론이 들끓었다. 공론이 계속되자 조정은 할 수 없이 전익대를 잡아 다시 국문했다.
  국문결과 전익대는 다시잡혀와 4차례의 형벌을 받은 후 자백했다. 그 내용이 김환을 더욱 곤란하게 했다.
  "김환은 고변하기 하루 전에 저를 불러 술을 마셨습니다. 그후 강제로 그이 숙부집으로 끌고가 고변서를 보이며, '네 이름도 고변서에 들어있다.'는 위협으로 같이 고변하자고 했습니다.제가 고변한 내용은 실상 모두 만들어낸 말입니다."
  즉 무고의 주범은 김환이고 자신은 종범이란 말이었다. 엄동설한에 국문을 받은 전익대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위중해졌다. 국문의 위관은 숙종에게 물었다.
  "결안 죄인이 옥중에서 죽는다면 형을 집행하지 못하는 결과가 되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처형하라."
  공신의 지위를 탐했던 전익대는 드디어 망나니의 칼에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숙종 9년 1월29일이었다.
  김환도 국문하려 했으나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김환을 국문하면 김석주와 김익훈이 사건을 조작한 사실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서인 정권은 김환을 국문도 없이 귀양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덫으려 하였다. 종범인 전익대는 처형하고 주범인 김환은 귀양보낸 사실은 양식있는 선비들의 분노를 샀다. 이른바 공작 정치에 대한 반발이 심화된 것이었다. 대사성 조지겸이 상소를 올려 불공평한 처사에 대해 항의 했다.
  "무고할 생각이 없던 전익대를 김환이 여러 가지 수단으로 위협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남의 꾀임에 빠져 무고한 것과 남을 꼬여 무고케 한 것이 얼마나 차이가 있기에 김환은 국문도 하지 않고 귀양 보내는 가벼운 벌만 줍니까. 어찌 익대가 홀로 죽은 것을 억울해하지 않겠스니까. 전하께서는 형정을 엄숙하게 하십시오."
  남구만도 차자를 올려 고변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요구했다.
  "고변은 구체적으로 역모한 사람에 국한되어야 합니다. 만약 조정을 원망하고 비방하는 사람을 모두 역모로 고변한다면 앞으로 온나라 사람이 두려워 발을 뻗지 못할 것이 이는 옛 성인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가 아닙니다. 이 옥사가 이처럼 의문이 많으므로 안심이 불평하여 거리의 뒷공론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 옥사는 다시 처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숙종의 생각은 달랐다. 숙종은 그해(숙종9년) 10월 조야의 공론과는 반대의 명령을 내렸다.
  "내 병환이 빨리 나은 것은 실로 천지와 종사의 도움이다. 이때에 비상한 은혜를 베풀어 8도의 인심을 위로해야 하겠다.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 이외에는 모두 석방하라."
  이 대사면령에 김환이 석방되었던 것이다. 숙종이 이렇게 김환을 싸고돌자 인심은 진정될리 없었다. 대간에서는 김익훈의 삭출을 요구하고 나섰다. 대간과 젊은 선비들이 마음속으로 지목한 수괴는 김석주였다. 하지만 국왕의 외척이자 거물인 그를 거론하기 어려웠으므로 그이 심복인 김익훈을 지목하고 나선것이다. 숙종이 계속 허락하지 않자 사헌부 지평 박태유.유득일이 가세 했다.
  "김익훈은 공을 탐하여 사람을 협박해 남을 무고하게 했으니 마땅히 먼 곳으로 귀양 보내야 합니다."
  숙종은 이 주청에 화를 내면서 박태유는 거제현령으로, 유득일은 진도군수로 좌천시켰다. 숙종은 이들에게 당일로 서울을 떠나 부임하라고 명했다. 이는 명백한 언론 탄압이었으므로 대신들과 삼사.승정원에서 나서 무마했다.
  김익훈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들의 의견은 강경론과 온건론으로 갈라졌다. 사건이 김석주의 심복인 김익순에게까지 번지자 서인 중진들은 무무에 나선 반면 젊은 서인들은 김익훈을 공격하고 나섰다. 서인 중진인 영의정 김수항은 김익훈을 옹호했다. 김익훈의 아방 밀계가 무고라는 것이 젊은 서인들의 주장이었는데, 김수한은 김익훈의 밀계는 자신과 좌의정 민정중, 우의정 김석주가 상의한 결과라고 옹호하고 나섰던 것이다. 반면 사헌부 집이 한태동은 김익훈을 격렬하게 탄핵하고 나섰다.
  "김익훈의 행적 중 심한 것만 말하겠습니다. 그는 건달이면서도 문벌을 빙자하여 출세했는데 착한 행위는 한 가지도 기록할 것이 없으나 악한 행위는 빠지는 것이 없습니다. 역적집 재산에 침을 흘리고 그 부녀를 데리고 살며, 손으로는 문사의 초고를 움켜쥐어 집에 감추고, 백성들에게 감해 준 세금을 사사롭게 받아 자기 집에 실어 들였습니다. 기타 간음한 행동과 비루한 태도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두 귀를 더럽히지 않으려 듣지 않고자 합니다. 그중에 더욱 통분한 일은 남인들이 정권을 잡았을때 익훈은 허적에게 붙어서 노예보다 더 아첨하더니, 기회를 엿봐서 허적과 갈라져 공신이 되었습니다. 어찌 이런 자를 장수로 삼아 삼군의 군사를 지휘하게 하십니까?"
  문벌을 빙지하여 출세했다는 말은 그의 조부가 서인의 여서이자 송시열.송준길의 스승이었던 김장생임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런 비난들이 사방에서 일어 이제 김익훈 처리 문제는 숙종도 어쩔 수 없는 현안이 되어갔다.

 

지금은 무슨 책을 강하시고 계십니까?


  대신들은 김익훈을 옹호하는 반면 대간에서는 그를 탄핵하고 나서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영의정 김수항은 사직을 청했고 숙종도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정권의지주이자 핵심인 김석주의 심복을 처벌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대간들이 이유 있는 항변을 계속 물리칠 경우 국왕의 총치권마저 위협받을 소지가 있었다.
  숙종은 부담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위기를 탈출하려 하였다. 숙종이 부담을 넘기기로 한 사람이 바로 송시열이었다. 대신과 대간이 서로 다투자 숙종은 이렇게 말했다.
  "대로의 결정대로 따르겠다."
  이즈음 송시열은 대로라는 경칭으로 불릴 정도의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에게 김익훈 처리를 맡김으로써 자신은 이 사건에서 발을 빼려고 한 것이다. 송시열의 말이라면 서인들도 따르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숙종은 여러 차례 사관과 승지를 송시열에게 보내 처리 방침을 물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쉽게 말려들지 않았다.
  "신은 병들고 흔미하여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았으므로 이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하니 대답할수 없습니다.".
  임금이 물을 때마다 송시열의 대답은 같았다.
  송시열은 숙종이 자신에게 공을 넘긴 까닭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을 귀양 보낸 숙종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는지도 몰랐다. 송시열이 계속 답변을 거부하자 영의정 김수항은 처남이 나량좌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임금께서 지성으로 물으시는데도 우암이 지극히 냉담하게 대답하지 않으니 옆에서 보는 내개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소. 우암의 뜻을 모르겠소."
  하지만 김수항이라고 정말 송시열의 속마음을 몰라 이런 말을 한것은 아니었다. 김익훈의 공작 정치를 대의에 따라 처벌하자고 주장하면 서인 중진들이 원망할 것이고, 당론에 따라 용서하자고 하면 젊은 선비들이 원망할 것이었다. 당론을 버리고 대의에 따르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더구나 김익훈이 공작의 대상으로 삼은 정치대상은 다름 아닌 남인들이었다.
  송시열은 임금의 거듭된 간청을 계속 거부하면서 향리를 떠나지 않았다. 경신환국이 일어난 숙종 6년 10월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자 잠깐 조정에 나와 숙종을 만난 적은 있었다. 그해 10월12일 도성에 입성한 송시열은 이미 영웅이었다. 도성의 백성들은 선대왕을 서자라고 말하고도 다시 정권을 장악한 이 노인을 보기 위해 부눚하게 모여들어 구경했으며, 대궐 문에 이르자 이서등이 모두 빙둘러 서서 그를 기다렸다. 임금을 인견할 때 송시열은 이렇게 말한다.
  "성상께서 춘궁(동궁)에 계실 때에 잠깐 입시한 이후 여러해 동안 천안(임금의 얼굴)을 뵙지 못하였으니, 원컨대 쳐다 볼수 있게 하여 주소서."
  이를 허락한 숙종은 그를 도타운 말로 위로했다.
  "춘궁에 있을 때 한두 차례 경을 보았는데 지금 경의 수염과 머리가 임 쇠잔하여 희었구나."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 누구도 이 모습에서 훗날 죽고 죽이는 비극이 연출될 줄 예상 못했을 것이다. 송시열은 비록 가운데 엎드렸으나 이미 스승이 자세였다.
  "전하께서 춘궁에 계실 때에는 소학을 강 하셨었는데, 그뒤에 경연에서 몇책이나 끝마쳤으며, 지금은 무슨 책을 강하시고 계십니까?"
  마치 선생님은 같은 질문일지라도 숙종은 답변할 수밖에 없었다.
  "논어 중용을 읽었고, 겨우 서전을 끝마쳤으며, 시전을 읽으려 하고 있다."
  "입으로만 읽으면 아무런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예부터 인신이 군상에게 권하는 것은 언제나 체험할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성상께서 과연 체험하시는지 아니면 격식만 갖출 따름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비록 불민하지만 하고자 하는 바는 체험하여 할 뿐이다." 이 말을 들은 송시열은 일어나서 절을 한 후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동방 사직의 다행입니다. 경연에서는 몇 편을 진강 하시며 몇 차례나 되풀이 하여 읽으십니까?"
  "소편이면 다 진강하고, 대편이면 반을 나누는데, 읽는 것은 많이 할 경우 80차례한다."
  마치 선생님이 숙제 검사하는 투였다. 재이(재난과 이변)를 없앨 방도를 묻자 송시열은 '춘추를 보면, 인군이 덕을 닦는 것이 재이를 없애는 근본이라 했다'며 임금이 덕을 닦을 것을 요청했다. 송시열은 자신에게 정치가 아니라 학문을 물어달라고 요청했다.
   "성상께서 비록 다른 말을 물어보신다고 하더라도 사무는 신이 아는 바가 아닙니다. 학문상에 의심스러운 곳이 있어서 하문하신다면 신이 아는 것을 아뢰고자 합니다. 경전 중에서 어떤 말이 의심스럽습니까?"
  "경전이 심오하여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후일 조용히 입시할 때에 마땅히 어려운 것을 논하여야 할 것이다."
  남인 정권을 갈아친 숙종에게 필요한 것은 학문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정권을 안정시킬 계책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숙종의 이런 바람을 모른 체하면서 숙종이 바른 자세를 갖도록 역설했다.
  "이미 진강하였겠지만, 그 중에서 신독(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것)공부가 가장 절실한 일입니다. 신하와 상대할 때에는 성심에 잡념을 없애시고...,심지어 내전에 들어가 편히 거처하며 환관과 빈첩(후궁들)이 앞에서 모실 때에도 여러 신하들을 대하는 것과 같이 하시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만약 안팎의 행동을 능히 하나같이 할수가 없다면, 비록 날마다 경연에 나오시더라고 형식일 뿐입니다."
  송시열은 대신이 자신이 임금을 만날때 엎드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신료들을 접견할 때 대신들로 하여금 앉아서 정사를 논하게 하십니까? 진나라 이후부터 군신 사이가 너무 엄격해져서 정의가 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스승 김장생이 인묘(인조)께 '옛 제도에는 신료가 임금 앞에서 부복(엎드림)하는 예가 없었으니, 청컨대 엤날의 의례대로 하소서'라고 고했더니, 인조계서 이를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대신들이 황공하여 감히 예를 바꾸지 못하였으므로 김장생 또한 혼자서 이를 행할수가 없었으므로 물러 나와서 이를 한탄하였습니다. 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대개 군신이 반드시 서로 얼굴과 정이 익숙해진 다음이라야 말을 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임금의 정통을 부인했다는 이유로 공격당했던 인물이 쉽게 할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숙종은 "어찌 좋지 아니하겠는가?"라고 답했으나, 좋을리가 없었다. 면대 첫날 이미 대결의 싹은 튼 것이었다.
  그러나 그뿐 송시열은 죽은 아내의 천장을 이유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숙종이 여러 차례 승지를 보내서 사직하지 말 것을 청했으나 소용없었다. 송시열이 돌아온 것은 왕대비 명성왕후 김씨의 하교를 받은 후였다. 왕대비 김씨는 송시열이 귀양 소식을 듣고 '청풍김씨의 참소가 드디어 실행되는구나'라고 말했다는 바로 그 집안 사람이었다.
  이렇게 다시 조정에 나온 송시열은 그러나 이듬해인 숙종 7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병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때도 숙종이 승지와 잇달아 보내 효유했으니 끝내 되돌아가고 말았다.

 

출사하는 세학자


  사실상 송시열은 굳이 조정에 나올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고향 회덕에 은거해서도 얼마든지 정국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거듭 승지와 사관을 보내 그의 의견을 묻는 판에 그의 문인.제자들인 서인들이 그이 뜻을 무시할 수 없음은 자명했다. 심지어 영의정까지도 사람을 보내 그의 의견을 들은 후 시행할정도였다. 송시열은 이미 조정에 있든 향리에 있든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닌 절대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 새롭게 성장하는 또 다른 학자들이 있었는데, 박세채와 윤증이 대표적인 학자였다.
  김익훈 처리 문제로 파문이 계속되자 숙종은 이들 학자들을 불러 사건을 처리하려 했다. 이들을 숙종에게 거듭 천거한 인물은 위의정 민정중이었다.
  "산림에서 독서한 선비들을 맞이해서 경연에 참석시키면 임금을 계발하는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이것이 가장 급한 일입니다.
  숙종 또한 산림의 명망가를 초빙하는 것이 사대부들의 지지를 획득하는 한 방법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신이 입시하여 경학에 밝은 선비를 천거하는 것이 좋겠다."
  송시열은 이미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는 대학자였다. 굳이 천거하지 않아도 그 필요성을 모두가 인정하는 인물이었다. 김수항은 송시열 외에 윤증을 천거했고, 민정중은 박세채를 천거했다.
  "박세채는 일찌기 민신의 예론때 의논에 참여해 죄를 입었으나 이미 서용되었습니다."
  민신의 예론이란 현종 14년(1673)민신의 할아버지인 전 교관 민업의 상례에 관한 사건을 말한다. 그 아들 민세익에게 정신병이 있자 아들 민신이 아버지 대신 참최복을 입었다. 이때 송시열과 박세채는 아버지가 폐질이 있으면 아들이 대신 참최복을 입는 것이 주자의 설에 합당하다고 판정했다. 이에 대해 남인들은 이 예론이 틀렸다고 논박했다. 말하자면 사대부판 예송논쟁이었다.
  송시열은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출사하기로 한것이다. 박세채도 출사를 결정했다. 윤증을 제외한 명망 있는 재야 학자들이 오랜만에 조정에 나오는 것이었다. 송시열의 출사 소식은 조정과 사대부들을 흥분시켰다. 특히 김익훈 처벌을 주장했더 젊은 선비들은 대로 송시열의 출사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춘추 대의'를 주장했던 강직한 송시열이 무고자 김익훈을 법대로 처리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고향 회덕을 떠나 다시 서울길에 오른 송시열은 그러나 쉽게 서울에 들어오지 않았다. 숙종 8년11월 송시열은 수원에서 한강 교외에 도착해 돌아가겠다는 의례적인 상소를 올렸다. 숙종이 승지 조지겸을 보내 달랬으나 그는 명에 응하지 않고 그대로 여주로 떠났다. 여주에는 바로 효종의 무덤인 영릉이 있었으므로, 송시열의 여주행은 자신이 효종에 대한 충신임을 대외에 보이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였다. 숙종은 다소 조지겸을 보내 기필코 함께 올라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송시열에게는 영부사란 영예로운 직책이 내려졌다. 하나하나가 국가 원로에 대한 파격적인 예우였다. 사약을 마시고 죽은 윤휴의 고향에서 승지의 영접을 위해 나온 승지는 조지겸이었다. 조지겸은 송시열과 며칠을 묵으면서 정국 현안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대사성으로 있을때 김익훈을 탄핵한 인물이었으므로 당연히 김익훈이 유죄라고 말했다. 김익훈이 허새를 역모로 꾀어낸 설명이었다. 조지겸은 또한 김익훈이 부정 축재한 진상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조지겸의 설명을 들은 송시열은 대답했다.
  "고약한 위인이다. 그런 자는 비록 죽여도 애석하지 않다."
  이소식을 듣고 김익훈의 처벌을 주장하던 젊은 선비들은 환호했다.
  "대로.장자의 견해도 우리들과 같다." 이런 경로를 거쳐 송시열은 숙종 9년초에 조정에 들어왔다. 김익훈 처벌을 주장하던 젊은 사류는 물론 김익훈을 옹호하던 대신들과 임금 숙종도 송시열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제각기 송시열이 자신들이 편을 들어주리라고 기대했다. 그 중에세도 조지겸으로부터 송시열의 견해가 같음을 확인한 젊은 사류들의 기대는 상당했다.
  그러나 송시열과 정치적 영욕을 같이 했던 인물들은 젊은 사류가 아니라 김수항.민정중 같은 대신들이었다. 제2차 예송논쟁 때 남인의 편을 들었던 김석주도 남인 정권을 축출하는데 앞장섬으로써 송시열과 옛 감정이 풀린 상태였다. 또한 김석주는 현 정권 최대의 실세였으므로 송시열로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서울에 온 송시열은 김수항.민정중.김석수 등 서인 정권의 실세들을 차례로 만났다. 이들은 서인과 남인의 권력투쟁이란 측면에서 김익훈 사건을 설명하며 김익훈을 옹호하고 나섰다. 송시열은 이들 서인 중진들의 설명을 들은 후 조지겸에게 한 말을 뒤집었다.
  "일이 그렇다면 김익훈의 죄가 아니로군."
  숙종  9년 1월 19일 주강에 나간 송시열은 젊은 사류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신이 죄를 기다리는 일이 있습니다. 문순공 이황의 문인이었던 조목은 이황이 죽은뒤에 그이 자손을 마치 동기같이 대했습니다. 그가 관직에 있을 적에 지성으로 경계하여 과실을 면하게 하여 주었으므로, 당시나 후세 모두 조목이 그의 스승을 위하여 도리를 다했다고 일컬었습니다. 신은 문원공 김장생에게서 수학 하엿으므로, 그이 손자 김익훈과 산이 서로 친한 것은 다른 사람과 자연히 다릅니다. 근일에 김익훈이 죄를 얻을 것이 매우 중한데, 신이 평소에 경계하지 못하여서 그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ㅇ 신은 실지로 조목의 죄인입니다."
  김익훈을 처벌해야 한다는 젊은 사류들은 송시열이 김익훈을 옹호하자 실망해 마지 않았다. 이 실망이 끝내 서인을 소론과 노론으로 나뉘게 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이 대의인 이유


  그러나 송시열의 관심은 정작 다른 데 있었다. 송시열이 조종에 제기한 것은 공납의 폐단 등 시사에 민감한 문제들도 있었으나 정작 그가 관심을 쏟은 문제는 태조 이성계의 시호를 더하자는 것과 효종의 세실을 짓자는 것으로, 두 가지 모두 현안과는 동떨어진 문제였다. 두 문제 모두 엉뚱하게 튀어나온 것 같지만 송시열로서는 치밀한 계산 아래 나온 말이었다.
  태조 이성계의 시호는 여러 번 변하였다. 이성계는 살아 있을 때인 정종 2년(1400)에 계운신무란 존호를 받았다. '나라의 운명을 연 신 같은 무공'이란 뜻의 시호이다. 그가 죽은 후 명나라에서는 강현이란 시호를 내려주었다. 따라서 그의 시호는 '태조계운신무강헌대왕'이 되었다. 송시열은 여기에 '소의정륜'이란 네 글자를 더하자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의를 밝히고 윤리를 바로잡았다'는 뜻을 더하자는 것이다.
  "우리 태조(이성계)께서 새로 나라를 세워 지금까지 3백년동안 공고하게 유지한 것은 실로 위화도 회군에 기초하였던 것으로, 대의를 해와 별처럼 환히 밝힌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존호에는 이 뜻이 모두 빠졌기에 신이 매번 이를 서운하게 생각합니다... '소의정륜'을 덧붙이면 정자가 말한 뜻에 맞게 되고..."
  소의 저윤 역시 송시열의 숭명 사대사상에 바탕한 것이엇다. 여기에서 밝혔다는 의리란 명나라를 섬기는 대의를 말한다. '윤리를 바로 잡았다'는 것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윤리를 바로잡았다'는 뜻이었다. '의를 밝히고 윤리를 바로잡았다'는 시호를 올리려는 송시열의 뜻은 태조의 비 신이 왕후 한씨와 태종 비 원경왕후 민씨의 위패의 글자를 고치려는 데서도 드러난다.
  송시열은 차자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신의.원경 두 왕후의 위패는 왕태우라고 쓰여져 있으니 태자는 삭제해야 합니다."
  태자는 왕후에게나 쓰는 말이지 제후구의 임긍이 부인에게는 쓸수 없는 말이란 뜻이었다. 숙종은 오랜 신주를 긁어내고 다시 고쳐 쓰는 것은 중대한 일이라는 신중론으로 이에 반대했다. 또한 우의정 김석주도 위패를 깎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반대했다. 박세채도 처음에는 "신의왕후.원경 왕후를 모두 왕태후라 일컫는 것은 바로 고려의 옛 제도이니,고려 역사를 상고해 보면 반드시 증거가 있습니다."라며 신중히 처리할 것을 주청했다가 다시 고쳐야 한다고 주청했다.
  "태후의 태자는 비록 태상궁에 있을때 붙인 것이나, 또한 전조(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니, 그명의 도리로 보아 결코 구차하게 그대로 두고 고쳐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찌 단지 사체가 중대하다 하여 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려에서는 왕의 어머니를 태후라고 썼다. 숙종은 두 왕비의 격을 낮추자는 이 주장에 오래된 위패를 깎는 것은 미안한 일이 라면서 반대하다가 박세채마저 동조하고 나오자 그해 5월말 수락하고 말았다.
  태조의 시호를 더하자는 의견이 사대주의에서 나왔든 충성심에서 나왔든 신하들이 드러내놓고 반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굳이 반대하는 신하들은 태조를 높여 받드는 극진한 도리가 시호 글자 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고 우회적인 반론을 폈을 뿐이다. 송시열이 제기한 태조의 시호 문제에 정면에서 반박한 유일한 인물은 두 왕후의 위판을 깎는 데 찬성했던 유신 박세채였다.
  "제왕이 시호는 마땅히 개국 창업과 수덕 수성으로써 해야 합니다. 회군한 일은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므로 따로 칭송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태조께서 회군한 일은 '화가위국(집을 변화시켜 나라로 만드는 것, 즉 신하가 임금이 되는 것)'을 위한 것이지 반드시 명나라를 높이자는 성심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송시열은 박세채에게 편지를 보내 동의를 구하였으나 박세채는 끝내 반대 의사를 철회하지 않았다. 두 유신의 의견이 엇갈리자 김석주가 절충안을 내놓았다. 시호는 더하되 위화도 회군에 대해서는 용비어천가 등에 자새히 나와 있으므로 꼭 '소의정륜'으로 더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로를 거쳐 대신과 6조의 2품이상 신하들, 그리고 대체학이 모여 '정의광덕'으로 태조의 시호를 더해 올렸다. '의를 바르게 하고 덕을 밝혔다'는 뜻이다. 송시열이 태조의 시호 문제를 제게한 데는 여러 가지 정치적 포석이 깔려 있었다. 그 하나는 태조의 시호를 높임으로써 명나라와 조선 왕실에 대한 자신이 충성심을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김익훈 사건에 대한 세간의 간심을 돌리려는 것도 그가 시호 문제를 거론한 배경의 하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