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국익보다는 당익이 앞선다(3)

구름위 2013. 6. 19.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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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합형의 정치가 허적, 사사되다


  허적의 연시연에 허견이 무사들을 모아 정변을 일으킬 거라는 소문은 서인들이 퍼뜨린 것이었다. 허적이 정변을 일으킬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 소문은 숙종의 위구심을 증폭시키기 위해 서인들이 만들어 조직적으로 유포시킨 것이었다. 경신환국은 서인 외척 김석주가 배후에서 움직인 결과였다.
  환국 7일 만에 발생하는 '허견의 옥사'는 경신환국이 국왕 숙종과 김석주 등 서인들이 오래 전부터 공모한 한 편의 정치 드라마임을 말해 주는 유력한 증거이다. '허견의 옥사'는 정원로의 고변으로 시작되었다.
  "허견이 인조의 손자이자 인평대군의 아들인 복선군에게 '전하의 춘추가 왕성하지만 자주 편찮으시고 또 세자가 없는데 만약 주상께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대감은 사양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하고 말하자 복선군은 부인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는 주상께서 견의 부친인 허적을 각별히 신임하셨으므로 이 사실을 말했다가는 도리어 무고죄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아뢰지 못하다가 이제야 상변합니다."
  허적의 유일한 아들인 허견이 복선군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이다. 허견을 지목했지만 사실상 허적을 표적으로 삼은 고변이었다. 숙종은 곧바로 병조에 국청을 설치하고 훈련대장과 어영대장에게 대권의 수비를 튼튼히 하여 위기감을 조성한 다음 국문에 들어갔다.
  숙종은 잔병이 많고 후사가 없는 데 늘 신경을 쓰던 터였다. 허적이 영의정이 되자 복선군은 허견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주상께서 불행한 일을 당하시면 나를 추대하라. 내 너에게 병조판서를 시켜주겠다."
  허견은 이 말을 듣고 하늘에 제사하면서 맹세했다는 것이다. 서인들은 복선군이 남인들과 친한 점을 이용해 역모를 엮은 것이었다. 그만큼 서인들은 복선군을 미워했는데, 그 이유는 복선군이 과거 발언 때문이었다. 서인 집권 시절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복선군은 이렇게 보고했다.
  "청나라 사람들이 '전하께서 강한 신하들의 제재를 받았다(수제강신)'고 했습니다."
  '강한 신하'란 ㄴ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을 뜻함은 물론이다. 허적은 서자 견의 옥사가 표적으로 삼는 것이 자신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한강의 우거에서 대죄하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상소를 올리는 것밖에 없었다.
  "신은 극히 높은 지위에 있었고 목숨이 다할 날이 눈앞에 다가왔으나, 아직 가문을 계승할 적자도 없고 높은 관직에 있는 친척도 없습니다. 이런 제가 다시 무엇을 바라서 국가를 저버리겠습니까. 신은 조정에 있은 지 44년 동안 나라의 높은 은혜를 물방울만큼도 갚지 못했으나 오직 편당을 없애는 한 가지 일만큼은 한결같이 해 왔습니다. 그런데 편당에 치우쳤다고 죄를 입으면 장차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하늘에 계신 선왕을 뵙겠습니까. 황량한 강변, 쓸쓸한 우사에서 밤이 새도록 '첫째도 신의 죄이며, 둘째도 신의 죄입니다'라고 자책하고 있습니다."
  당시 허적의 나이 71세였다. 적자도, 높은 친척도 없는 판에 누구에게 물려주려고 반역을 하겠느냐는 허적의 항변은 이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척신 김석주가 바라는 바느 허적이 실제 역모를 꾸몄는가의 여부에 상관없이 그의 권력을 빼앗는 것이었다. 이런 판국에 허적의 말썽 많은 서자 허견이 무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은 좋은 핑계거리였다. 고변자 정원로는 척신 김석주가 심어놓은 간자였으니 이들은 말하자면 함정수사에 걸린 셈이었다.
  허견과 복선군이 국문을 받으며 임금에게 불행한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하려 했다고 자백함에 따라 이는 역모로 굳어졌다. 비록 현 임금을 죽이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추대할 임금을 정해두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움직일 수 없는 역모의 증거였다. 남인과 친밀했던 복선군과 남인의 영수 허적의 아들이 관련된 이 사건은 남인을 향한 숙청의 피바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김석주가 미리 쳐 놓은 그물에 걸려든 남인들의 피해는 컸다. 게다가 그 동안 남인들에게 당하고 있던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으니 그 여파가 남인게게 미칠 여파는 심각했다.
  허견은 군기사 앞에서 처형되고 복선군 남은 당고개에서 교살되었다. 나머지 역모사건 관련자들인 이천둔별 강만철, 유학 이경의 등은 처형당하고 복선군의 형제 복창군은 사사되었으며, 참교 이태서, 홍유하, 강윤석, 최서린, 채부서원 신후징, 정언구 등은 장하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외에 예조판서 오정창, 훈련대장 유혁연, 부제학 민종도, 호조판서 오정위, 이조판서 이원정, 판서 홍우원, 승지 조사기, 병사 이집, 참판 권대재, 헌납 윤의제, 좌참찬 이상립, 강화유수 정유악등 남인들은 역모사건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데도 연좌되거나 정유악처럼 허견의 비행사실을 잘못 처리했다는 죄로 유배되기도 했으며, 민종도처럼 여색과 재물을 탐했다는 등의 온갖 죄목으로 처벌되었다. 전 우의정 오시수는 청나라 사신들에게 '조선은 신하가 강하다'라는 등의 말을 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했다.
  그러나 숙종과 김석주의 진짜 표적은 이들이 아니라 남인 정권의 실세였던 허적과 윤휴였다. 숙종은 허적이 강변에서 올린 상소를 보고 일단 관직만을 빼앗았다가 다시 채포해 국문했다.
  하지만 국문으로 허적의 혐의를 입증할 수는 없었다. 허적은 국문에서 이렇게 항변했다.
  "신이 만일 역모를 미리 알았다면 어찌해서 병진년(숙종2년)에 밀주를 올렸겠습니까?"
  허적이 말하는 병진년의 밀주란 병진년에 숙종에게 비밀히 아뢴것을 말한다.
  "전하께서 병이 많으시고 강한 종친들이 좌우에 늘어서 있으니 기거와 음식을 신중히 하셔야 합니다."
  종친을 주의하라고 밀계한 자신이 종친과 같이 일을 꾸미겠느냐는 항변이다. 면복이 없어진 숙종은 그의 벼슬을 깎아 평민으로 전리에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차피 시한부 목숨 연장일 수밖에 없었다. 서인이 잡은 대간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양사가 즉간 허적을 죽여야 한다고 주청했다.
  "설령 허적 자신은 역모에 관여한 바 없다 하더라도 자식이 대역인데 그 아비된 자가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역적 남(복선군)이 허적이 아니라면 어찌 허견 한 사람을 믿고 흉역을 꾸몄겠습니까. 국법에 따라 허적을 처단해야 합니다."
  이것은 숙종의 속마음이기도 했다. 하지만 숙종은 일단 허적을 처형하자는 양사의 주청을 거부했다.
  허적의 처형 여부를 놓고 권력을 장악한 서인은 둘로 갈라져, 허적을 처형하자는 쪽과 목숨만은 살려주자는 쪽으로 나뉘었다. 6년전 남인들이 집권했을 때 송시열의 처형 여부를 놓고 둘로 갈라졌던 현상과 같았다. 정치보복은 또 다른 정치보복을 낳는 법이다.
  영상 김수항과 좌상 정지화는 허적의 구명론을 폈다. 허적이 고명대신으로 여러 왕조를 섬긴 공로를 참작해 법을 굽혀 살려줌이 임금의 덕이라는 논리였다. 어차피 그의 나이 70인 이상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고려도 있었을 것이다.
  숙종은 김수항 같은 서인 원로들의 말에 따라 허적을 석방한 반면 그의 처형을 요구하는 주청은 계속 거부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김석주가 숙종에게 차자를 올려 '차옥 겁탈사건' 재조사를 요청했는데, 이는 분명 허적을 겨냥한 행위였다. 숙종은 포도청에 사건 재조사를 명했다. [숙종실록] 재위 6년 5울 5일자에 실린 재조사 결과는 이렇다.
  "차옥은 역관 서효남의 며느리였다. 허견은 그녀가 자색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차옥의 외삼촌인 박찬영에게 계책을 물으니, 박찬영이 '아무날 차옥은 그의 외사촌 혼례에 갈 것이니, 말을 보내 거짓말로 시집에 급한 병환이 있으니 속히 돌아오라고 한다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허견이 크게 기뻐하며 그말과 같이 하였다. 차옥은 시집의 인마가 아님을 괴이하게 생각하고 물으니, 위급한 김에 다른 집 것을 빌려 보냈다고 대답하였다. 말 위에 오르자 나는 듯이 달려갔으므로 수행하던 여종(여노)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허견의 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속은 줄을 알았지만, 어찌할 수 없이 강제로 잠자리를 같이하며 3일 밤을 지나고서야 놓여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사건은 숙종 5년 발생 당시 서인 남구만이 이미 탄핵했으나 무고로 처리된 사건이었다. 영상 허적의 눈치를 보고 무혐의 처리한 것이다. 제조사 결과 허적이 수사기관에 압력을 넣어 허견을 옹호하고 임금을 속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정권이 바뀌자 수사결과도 바뀐 것이니 수사기관의 권력지향성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닌 듯하다.
  이 일은 허적을 죽일 수 있는 명분을 찾던 숙종에게 좋은 소재였다. 결국 허적은 백성으로 강등되어 전리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은지 채 한 달이 못된 숙종 6년 5월 사사되고 말았다. 남인 강경파인 청남에 맞서 정치보복을 자제하고 송시열을 살리려 노력하던 한 화합형의 정치가가 정치보복에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허목의 탄핵을 받고 낙향할 때 숙종이 세 번씩이나 자신을 보내 만류하고 예조판서를 충주까지 보내 조정에 나오라고 간청하던 때가 불과 8개월 전이었다. 정치란 고금을 막론하고 이처럼 냉혹하고 무상한 것인지도 모른다. 서인들이 허적을 죽인 정치적 사건은 서인과 남인을 화해할 수 없는 원수로 만들었다. 이제 도의라는 낱말은 사치였다. 사대부의 체면 따위의 낱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극도의 정치공작이고 보복이었다.

 

안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는가


  시종 온건론을 펼쳤던 허적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판국에 송시열과 치열하게 맞섰던 윤휴가 안전할 리 없었다. 윤휴를 탁핵하고나선 인물은 사헌부 장령 심유였다.
  "좌찬성 윤휴는 장삿군에게 뇌물을 받는 등 부패했습니다. 또 흉한 꾀를 내어 감히 자상(대비)의 동정을 살펴서 단속하라는(조관) 말을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남의 신하로서 마음속으로나마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까. 윤휴를 극변으로 귀양 보내십시오."
  '자성의 동정을 살펴서 단속하라는 말'은 숙종 1년에 일어난 복선군 형제와 궁녀 사이에 벌어졌던 '궁중 스캔들 사건' 때 윤휴가 숙종에게 한 말이다. 숙종의 모후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김우명이 차자를 올려 복선군 형제들이 궁녀들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고 폭로함으로써 촉발된 사건이 '궁중 스캔들 사건' 이었다. 그러나 조사 결과 무고로 밝혀져 김우명이 오히려 무고죄로 몰릴 처지에 빠졌다. 정청에서 김우명의 무고죄를 논의하려는데 명성왕후가 갑자기 나타나 통곡함으로써 사건이 유야무야 처리된 적이 있었다. 이는 대비가 국정에 관여한 것이었다. 대비의 국정 관여는 불법이었다.
  이 사건 직후 이조참으로 있던 윤휴가 숙종에게 문제의 '조관'이란 말을 한다.
  "이는 임금께서 대비의 동정을 잘 살펴서 단속하지 못하신 탓(조관불능)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 안되겠습니다."
  대비가 국정에 관여할 수 없는 것이 조선의 국법이었으니 말인즉 맞는 말이었으나 당시는 남인 정권이었고 지금은 서인 정권이었던 점이 틀렸다. 정권이 바뀌자 5년 전에 했던 말 한 마디가 다시 그를 죽음으로 모는 재료로 사용된 것이었다. 복선군 형제와 친했던 사실과 도체찰사부의 복설을 주장하고 자신이 부체찰사가 되기를 원했으나 김석주가 임명되자 어전에서 현저히 불쾌한 기색을 나타냈다는 혐의까지 추가되었다. 그리고 정권이 서인으로 바뀌어 국문 받을때 남교가두에 걸린 한 장의 방서의 내용을 가지고 비밀차자를 올렸다는 것과 송시열 등이 성인으로 모시는 주희를 모욕했다는 것 등이 죄목으로 추가되었다.
  윤휴는 이런 물증없는 여러 혐의들이 복합되어 국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두 차례 형신에도 굴하지 않았다. 숙종은 6월 5일 14일 다시 유배지로 내려가 위리 안치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다음날 다시 사사를 명했다.
  윤휴는 사약을 마시기 직전 이렇게 항변했다.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숙종과 서인정권이 끝내 윤휴를 죽여버린 데에는 윤휴에 대한 반감과 함께 외교적 이유도 존재한다. 줄기차게 북벌을 주장하던 윤휴를 죽여버림으로써 청나라와 외교적 분쟁을 만들지 않으려는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윤휴가 죽기 직전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라고 말한 것은 바로 '북벌론'을 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숙종과 서인정권은 북벌론자 윤휴를 죽여버림으로써 청나라의 오해(?)를 사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행 중,고교 국사교과서는 북벌에 대해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중학교[국사]교과서 194쪽은 북벌운동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조선은 왜란에 이어 다시 북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친 침략을 받아 큰 피해를 당하게 되자, 청에 대한 적개심이 컸다. 당시 우리 민족은 여진족에 대하여 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반감은 더욱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을 치자는 북벌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를 양성하는 등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으나, 끝내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말았다."
  마치 송시열이 북벌주창자인 것처럼 기술함으로써 학생들의 역사 인식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192쪽도 마찬가지의 내용이다.
  "조정에서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반청의 정치적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북벌론이 제기되었다. 북벌론은, 청을 정벌하여, 문화가 높은 조선이 문화가 낮은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를 씻고, 나아가서는 조선의 오랜 우방으로서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명에 대하여 의리를 지키자는 주장이었다. 송시열, 송준길, 이완, 임경업 등은 북벌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들로서, 군대를 양성하는 등 여러 가지의 계획을 세웠으나,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우리 나라는 국사와 국어 교과서에 한해서는 국정 교과서 체제이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은 '북벌=송시열' 이라는 조작된 도식을 그대로 외워야만 하는 것이다. 실제적 북벌론자 윤휴가 죽은 후 송시열의 당인 노론은 윤휴가 아닌 송시영를 북벌론자로 추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음에 따라, 그리고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에도 상당한 세력을 온존함에 따라 '송시열=북벌'이라는 진실과 동떨어진 논리를 반복적으로 주입시킨 것이고, 여기에 일부 역사학자들이 놀아남에 따라 오늘날 국사교과서에까지 실린 '역사적 진실'이 된 것이다. 이를 두고 역사가가 선택해 기술하는 사실이 격사가 된다는 서양의 역사가 카(E.H.Carr)의 말이 실현된 것이라고 한다면 합당한 해석일지 모르겠다.
  허적과 윤휴의 죽음은 사대부들이 주도하던 조선 역사에 커다란 문제를 던져준다. 이는 조선 사대부들이 상대를 사문난적이라고 비난하던 데서 상대를 죽이는 살육의 경지에 떨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를 사사하는 전지에 사문난적 혐의가 적혀 잇는 것은 특정 사상이 도그마로 변할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글 보여준다.
  "경전을 배척하여 장구를 마을대로 옮겨 바꾸었다." 이는 윤휴가 주자의 '중용주'를 고친 것을 비난하는 말이었다.
  윤휴가 억울하게 죽은 것은 분명하다. 이는 분명 정치보복이었다. 그러나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게 한 데는 그의 책임도 있었다. 남인이 집권했을때 그에게는 정치보복을 중지시킬 책임이 있었다. 즉 상대당을 공존의 대상으로 인정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책임을 외면하고 송시열의 가죄에 가세했다. 그 자신의 정치보복에 나섰고, 그 정치보복이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다.
  허견의 옥사가 마무리되자 숙종은 이를 종묘에 고하면서 대신들으 ㄹ불러 김석주를 원훈으로 높이고 공신을 책봉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자 사간원에서 반대하고 나섰다.
  "고변서가 사전에 올라와 역적들이 잡혔고 심문하기도 전에 괴수가 혐의를 자복했는데 신하들이 무슨 공이 있기에 공신으로 책봉합니까?"
  그러나 숙종은 직접 비망기를 내려 공신 책봉을 독려했다. 윤휴를 사사한 다음날이었다.
  "이번 허견과 이남의 역변에 만약 이입신등이 나라를 위해 기찰해서 고발하지 않았더라면, 정원로 반드시 고변할 이치가 없었을 것이나, 그이 공은 고변자보다 더 중하다. 별군직,이입신, 충장장, 남두복, 박빈 등을 모두 녹훈에 참여시키라."
  이 비망기는 허견과 복선군의 옥사가 숙종과 김석주의 치밀한 사전 계획 아래 이루어진 정치공작임을 말해 주는 좋은 증거이다. 별군직이나 충장장 등의 하급 무사들의 이름을 숙종이 직접 거론한 것은 수종 자신이 김석주가 남인 사이에 심어놓은 간자인 이입신.남두북 등의 동향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임금이 이들 하위 무사들의 이름을 알고 있을리 만무했다.
  이처럼 숙종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김만기,김석주를 일등, 이입신을 이등, 남두북 정원로 박빈을 삼등으로 하는 보사공신이 책복되었다. 반면 무려 1백여멸에 달하는 남인들은 어육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끝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