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열은 붓을 잡을 자격이 없다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은 즉위 당시 나이가 겨우 열넷이었다. 열넷의 어린 나이로 현종이 미완으로 남긴 예송논쟁을 마무리 지어야하는 유업을 이어야 했던 것이다. 나이에 비해 엄청나게 무거운 짐을 졌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결국 '체이부정'의 당사자 송시열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 어린아이에게 대로 송시열이 끝내 목숨을 잃게 될 줄은 아무도 상상 못했다. 숙종이 즉위 초 송시열을 극히 우대했기 때문이다. 숙종은 송시열을 원상으로 삼으려고 했다. 임금이 죽으면 그 장례기간 동안 새 임금과 함께 국정을 이끌어 나가는 전.현직 정승들이 원상인데, 이 원상들이 송시열도 원상으로 삼아달라고 요청한 것이 숙종과 송시열의 첫 교류였다. 숙종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송시열을 원상에 임명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를 거부했다.
"지은 죄가 아주 무거운데, 승하하신 대행대왕의 옥체가 다 식기도 전에 어찌 갑자기 죄가 없는 것처럼 자처하겠습니까."
송시열이 정말 현종에게 지은 죄가 많다고 생각해 사양했는지 아니면 어린 왕의 기세를 초반에 꺾기 위해 거절했는지는 그만이 알 일이다. 숙종은 다시 송시열에게 현종의 능지를 찬술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때 성복한 후에 시골로 돌아가 버린 뒤였고, 숙종이 가주서 이윤을 뒤쫓아 보내 타일렀음에도 능지 찬술을 거부했다. 그러자 숙종은 다시 송시열을 회유한다.
"고(숙종)가 어린 나이로, 하늘에 죄를 지어 이 망극한 슬픔을 당하니, 스스로 통곡할 따름이다. 이제 경의 상소를 보고 내가 매우 놀랐다. 경은 선조의 권우를 생각하여 속히 올라와서 지어 올리라."
그러나 송시열이 지어 바친 것은 능지 대신 왕의 부름을 사양하는 상소였다.
"지난날에 여러 신하들이 득죄한 것은 그 근원이 신에게서 나왔으므로 선왕께서 여러 신하를 죄줌에 있어, 신의 죄상이 여러 번 전교에 나왔지만, 특히 그 성명을 들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제 신이, 선왕께서 안 계신다 해서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한다면, 또한 선왕을 저버리되 기탄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신에게만 죄 주지 않을 분 아니라 도리어 거두어 부르고 일을 맡기는 은총이 있었으니, 이는 신이 다만 마음에 차마 하지 못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의리에도 감히 받들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송시열은 강 건너에 와서 도리어 벌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숙종은 송시열이 한강 가까이 온 것을 치하했다.
"경이 질병을 돌보지 않고 강 건너에 이르렀으니, 고는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다. 경은 속히 들어와서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라."
그러면서 송시열을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이때가 바로 현종 즉위년 9월 18일, 현종이 승하한 지 정확히 한 달만이었다. 현종의 시신이 땅에 채 묻히기 전에 다시 송시열의 세상이 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달 25일 남인들의 고장인 진주의 한 유생의 상소문 한 장이 전세를 바꾸어 놓았다. 바로 곽세건이란 유생이었다.
"대행대왕께서는 잘못된 예법을 바로잡고 적서를 분별하여 두 마음을 가졌던 신하들을 다스려서 전도되었던 국시가 거의 바로 잡히게 되었는데 불행히 승하하셔서 왕법을 끝까지 펼치지 못했으니 전하께서는 선왕의 뜻을 이어야 할 것입니다. 전하의 새로운 정치가 청명한데도 사람들의 불만이 큰 것은 판부사 송시열로 하여금 묘지문을 짓게 한 때문입니다. 근일 대공복이 옳다 하여 선왕이 말씀을 거역한 자들은 기해년(제1차 예송논쟁)에 효종대왕은 서자라는 주장을 되풀이한 것인데, 이 서자란 말은 실상 송시열이 주장한 것입니다.
선왕께서 사론에 따른 김수흥을 귀양보내면서 송시열은 빠뜨렸으며, 예관은 체포하면서 시열은 그냥 두었습니다. 이것은 시열을 용서해 준 것이 아니라 법을 다루는 순서가 그러한 것으로서 주범은 나중에 다루는 법입니다. 시열은 효종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현종의 죄인도 됩니다. 이런 두 조정의 죄인에게 어찌 함부로 붓을 잡게 하여 대행대왕의 성덕을 더럽히겠습니까.
아! 적통을 바로 잡은 것이 선왕의 가장 큰 업적인데, 시열로서는 이를 사실대로 적으면 자신의 죄를 자수하는 것이요, 만약 이를 은폐하려 하면 이는 선왕의 성덕을 매몰시키는 것이니 시열은 정말 이 붓을 잡기 어려울 것입니다. 시열은 국상에도 달려오지 아니하고 서울 근교를 방황하며 잠깐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임금의 특별한 대우를 바라 오로지 임금을 강요할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마음은 오직 감정과 원망으로 가득 차서 감히 '무능'이란 말을 은근히 선왕에게 써서 임금을 멸시한 죄를 스스로 지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송시열에게 묘지문을 지으라는 명을 빨리 거두시고, 나이 많고 예에 익숙하며 문학에 밝은 유신으로 하여금 선왕의 큰 업적을 찬술하게 하십시오."
일개 시골 유생이 서인 영수 송시열을 직접 비난한 이 상소는 즉각 정국에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송시열을 '두 조정의 죄인', '사실대로 적으면 자신의 죄를 자수하는 것', '시열은 정말 이 붓을 잡기 어려울 것'이라는 등 심한 풍자로 조롱한 데 대해 서인들은 분개했다.
서인 대사헌 민시중이 일개 시골 유생을 직접 탄핵하고 나선 것은 서인이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잘 보여준다. 서인은 현종의 죽음으로 자연히 소멸된 예론이 이 상소를 말미암아 다시 재연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곽세건은 흉인 곽우도의 손자로서 대대로 악한 짓을 물려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자인데 흉한 무리들을 위해 감히 소를 올렸습니다. 선왕의 전교 중에 한두 구절을 빙자하여 이리저리 꿰맞춰 농락하고 전하를 비방하고 대신을 논죄하면서 선조의 뜻이라고 돌려 남 해치는 데 거리낌없이 마음을 쓰니, 이는 비단 전하를 속이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혼령을 속이는 일입니다. 전하께서 그 죄를 다스리지 않으시면 앞으로 이런 무리가 연달아 일어날 것입니다. 청컨대 엄문하게 심문해 처단하십시오."
그러나 숙종은 어렸지만 자기 주관이 뚜렷한 인물이었다. 송시열이 조부 효종과 현종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몰라서 그를 판중추부사로 임명한 것은 아니었다. 숙종이 예송의 시말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대사헌의 주청에 화를 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대사헌은 무슨 말을 하는가. 유생 곽세건의 소를 쓰든지 안쓰든지 이는 내가 알아서 할 일이요, 예론의 시말은 이미 선왕 때에 다 드러난 일이 아닌가."
숙종이 곽세건을 감싸고 돌자 서인은 긴장했다. 숙종이 현종처럼 서인과 대립하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였다. 하지만 숙종은 들어갈 때와 나아갈 때를 아는 현명함이 있었다. 좌의정 김수항이 이를 인책해 사직하는 상소를 내자 그를 만류했다.
"한 시골 유생의 말을 가지고 혐의할 필요가 없다. 경은 어찌 이처럼 지나치게 생각하는가."
숙종은 또 다른 유생 조감이 상장제례가 잘못되었다고 상소하였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현종이 죽기 직전 영의정 김수흥을 귀양보낸 뒤 영의정으로 삼은 남인 허적은 온건한 인물이었다. 그는 곽세건에게 유벌을 내리라는 절충안을 숙종에게 제시했다. 유벌이란 과거 응시 자격을 제한하거나 유생들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는 등의 벌을 말한다. 숙종은 허적의 건의를 받아들어 곽세건의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했다. 하지만 곽세건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상소를 올렸다.
"대사헌이 신의 조부라고 지목한 곽유도가 어떤 사람인지 저는 모릅니다. 신의 증조부는 관찰사 월이요, 조부는 재기이며, 부는 전적 융으로서 대대로 아름다움을 물려받은 집입니다. 송시열의 사설로써 선왕을 저버린 것을 온 나라 사람이 분노하는 바인데, 송시열 도당들이 앞장서서 그를 비호하고 신에게 이런 흉하고 추하기 그지없는 모함을 하고 있으니, 대사헌 민시중은 스스로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는 죄악에 빠지는 줄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신의 아버지와 민시중의 아버지는 함께 과거에 붙였고, 시중이 신에게 일찌기 세형이라고 불렀는데 일시의 감정을 풀기 위해 10년 정의를 저버리니 어찌 이렇게 심합니까. 민시중의 선조 대사헌 제인은 전에 을사사화를 얽어 만들었는데, 지금 시중이 다시 대사헌으로서 이런 거짓말을 만들어 대대로 간악한 짓을 하니, 악은 역시 종자가 따로 있는 모양입니다."
'대대로 악한 종자'로 지목받은 민시중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상소를 올려 자신을 변호했다.
"곽세건이 원한을 풀기 위해 함부로 버젓이 소를 올려 신을 모욕하고 선조까지 미치게 하니, 이런 흉패한 말을 차마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승정원에서는 곽세건의 상소를 다시 돌려주었으나 조정의 서인과 성균관 유생들은 계속해서 곽세건을 탄핵했다. 하지만 숙종은 이미 곽세건의 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은 뒤였다. 사헌부.사간원에서 곽세건을 탄핵하자 숙종은 오히려 곽세건의 유벌을 해제시켰다.
"지금 곽세건 사건은 그동안 쌓인 원한에서 나온 것이니, 전일 과거 응시 자격이 금지된 자들과, 유벌을 당한 자들을 모두 해제시키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서 숙종은 다시 송시열에게 현종의 지문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숙종이 보낸 가주서 신학에게 서계를 주는 방식을 택했다.
"영인(영남인)이 신의 죄를 극언하고 또 근기(경기지역)를 방황함을 가지고 크게 질책하므로, 신은 감히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돋 물러나 돌아와 짚자리를 깔고 엎드려 명을 기다립니다. 또 지문을 짓는 일은, 영인이 분명히 천거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참으로 그 사람을 얻었으니, 더욱 무엇 때문에 이를 대신 짓겠습니까?"
'영남인이 천거한 그 사람' 이란 곽세건의 상소에서 '나이 많고 예에 익숙하며 문학에 밝은 유신' 을 뜻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송시열과 예송을 다투었던 허목과 윤휴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했다. 영남인이 천거한 사람에게 묘지문을 짓게 하라는 송시열의 말은 곽세건의 풍자에 대한 역풍자였다. 효종과 현종의 충신으로 자처한 이들 남인들을 시키면 되지 않느냐는 빈정댐이었던 것이다.
숙종은 김만기에게 능지를 맡겼다가, 김만기도 예론에 가담했던 인물이란 이유로 결국 김석주에게 짓도록 했다. 그러면서 숙종은 의외의 한 인물을 전격적으로 대사헌에 발탁해 서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바로 남인 허목이었다. 허목은 제 1차 예송논쟁 당시 송시열의 기년복설을 공박하다가 늙은 나이에 삼척부사로 좌천된 그 인물이었다. 그런 허목을 15년 만에 (숙종실록)의 기록대로 '특별히' 대사헌에 임명한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예송논쟁의 또 한 당사자 윤휴를 사헌부 장령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송시열과 예론을 벌이다가 죄를 입은 인물들을 모두 신원하였다.
스승만 알고 임금은 알지 못하는구나
숙종은 이런 처사에 서인들은 경악했다. 서인들은 경기도 유생 이필익에게 곽세건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곽세건이 어진 이를 시기하고 나라를 어지럽혔으니, 그 죄를 다스리고 유현을 초빙하여 좌우에 두십시오."
이필익이 초빙하라는 '유현' 이란 바로 송시열이었다. 그러나 숙종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상소를 올려 예법을 논하는 자는 중법으로 다스리겠다고 이미 전교했는데도 다시 소를 올렸으니 이 유생을 단단히 징계하여 훗날의 폐단을 막아야겠다."
숙종은 이필익을 함경도 경흥에 유배 보냈다. 대사간 정석과 부수찬 윤지완이 명을 철회해 달라고 청했으나 숙종은 거부했다. 성균관과 사학 유생 이윤악등이 상소를 올려 곽세건을 비난하고 이필익을 옹호하자 숙종은 이들을 꾸짖었다.
"곽세건의 충언과 올바른 논의는 흉한 상소라고 배척하고, 이필익의 간사한 말은 유현 (송시열) 을 위하는 말이라고 하니 이는 무슨 심사인가. 이렇게 군부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은 임금을 어리게 보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 내가 심히 통분스럽고 해괴해 차마 바라보지 못하겠도다."
숙종의 반응이 거꾸로 나오자 성균관 유생들은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 버렸다. 요즘말로 하면 동맹휴학을 한 셈이다. 숙종이 여러번 들어오라고 권하였으나 유생들은 계속 거부했다.
"여러 번 타일러도 들어오지 않음은 임금에게 공갈할 계책이 있는 것이다. 선비의 풍습이 어찌 이렇게 되었는가. 참으로 통탄스럽고 해괴하구나."
숙종은 상소에 참여하지 않은 유생들만 불러들이도록 명했다. 이번에도 중재에 사선 인물은 남인 영의정 허적이었다.
"경흥은 먼 변방입니다. 들으니 이필익이 귀양갈 때 정한 날짜 때문에 엷은 옷을 입은 채로 도촉해 갔다 하니, 엄동설한에 동사하는 일이 생기면 밝은 조정에서 선비를 죽였다는 누명을 들을까 염려됩니다. 유배지를 가까운 곳에 옮겨주십시오."
숙종은 이필익의 유배지를 강원도 안변으로 옮겨주었다. 경흥보다는 덜하겠지만 안변도 추가령을 넘어야 하는 오지이긴 마찬가지였다.
이때 현종의 행장을 지은 대제학 이단하가 송시열의 문인이었던 것이 또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그도 곽세건의 풍자대로 '붓을 잡기 어려운' 사정에 있는 인물이었다. 현종의 행장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예송논쟁인데 송시열의 문인인 그로서는 이 부분을 제대로 다루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가 쓴 현종의 행장 중 몇 구절의 내용이 불분명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현종이 '복제를 바로 다스렸다(복제이정)' 는 구절과 '영상 김수흥이 대답을 잘못했기 때문에 죄 주었다'는 구절 등이 그예였다.
숙종은 '복제를 바로 다스렸다' 는 말의 어의가 분명치 못하며 제 1차 예송논쟁 때 예를 의논한 사람(송시열)의 이름을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단하에게 고쳐 지으라고 명했다. 또 영상이 죄 받은 것도 대답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당한 예론을 두고 다른 이 (송시열)의 예론에 따랐기 때문이라며 이것도 고쳐 적으라고 명했다. 이단하로서는 스승 송시열의 오류를 적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변명할 수 밖에 없었다.
"양 조정의 스승이기 때문에 차마 지목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단하는 송시열이 자신의 스승이기 때문에 안 쓴 것이 아니라 양 조정, 즉 효종과 현종의 스승이기 때문에 쓰지 못한 것이라는 논리로 빠져나가려 하였다. 하지만 숙종이 이런 편법을 받아 들이지 않고 거듭 재촉하자 이단하는 묘수를 생각해 냈다.
"송시열의 예론을 이끌었다.(송시열소인례)"
송시열의 이름은 지목하면서도 그가 기년복을 주장한 사실은 적시하지 않고 다만 '이끌었다' 는 사실만 적어 빠져나가려 한 것이다.
그러나 숙종은 이미 자신의 논리가 선 인물이었다.
"내가 나이가 어려 글을 잘 알지 못하고 또 예론도 잘 알지 못하지만 반드시 송시열이 예를 그르쳤다고 적어야 선왕이 처분한 뜻이 분명해질 것이니 '예론을 이끌었다(소인례)는 구절을' 예론을 잘못 이끌었다(오인례)' 고 고쳐 올려라."
임금이 직접 '소'자를 '오'자로 고치라고 명하는 데 신하가 거부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소자를 오자로 고친 이단하는 물러 나와 당인들에게 변명할 수 밖에 없었다.
"엄한 하교 때문에 할 수 없이 오자를 썼습니다."
군.사.부가 하나로 생각되던 조선 사회에서 이단하의 처지는 궁색했다. 임금과 스승 중 어느 한쪽 편을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숙종은 이단하의 변명에 분개했다.
"너는 스승만 알고 임금은 알지 못하는 구나."
열네살 어린 숙종이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거침없이 몰아 붙이자 서인들은 떨 수 밖에 없었다. 당쟁으로 점철된 파란의 숙종 시대는 이처럼 예송논쟁의 여진 속에서 문을 열었다.
숙종과 송시열, 그 닮은 꼴의 충돌
숙종과 송시열은 서로 부딪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숙종은 할아버지 효종과 할머니 인선왕후 국상 때 증조할머니 자의대비의 복제를 둘러싸고 아버지 현종과 송시열이 크게 나뉘었음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송시열은 어머니 명성황후 김씨와도 구원이 있을 있던 사이였다.
숙종은 모후 명성왕후는 대동법을 두고 송시열과 심하게 부딪쳤던 김육의 손녀였다. 그녀의 사촌인 김석주가 서인이면서도 제2차 예종논쟁 때 사실상 남인을 지지한 것도 그가 왕실의 외척이기도 했지만 송시열과 구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명성왕후는 효종 2년인 1651년 10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되어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10여 년 가까이 아들을 낳지 모했다. 그녀가 바라던 외아들 숙종을 낳은 것은 현종 2년(1661) 8월 15일이었다. 드디어 원자가 태어나자 조정에서는 경축하지 않는 인물이 없었다. 조정의 백관들은 모두 나아가 진하했다. 하지만 송시열은 예외였다. 진하에 참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왜 진하에 참여 하지 않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이를 비난의 재료로 삼았다.
"상중에 낳은 아들이라 불만을 가지고 진하하지 않았다."
숙종이 효종의 대상이 겨우 지난 현종 2년에 태어난 것을 겨냥한 말이었다. 즉 대상 중에 관계를 가져 낳은 아이이기 때문에 진하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송시열은 나중에 상소를 올려 사실이 아니라고 변명했다.
"원자 탄생을 온 나라 식민이 경축하는데 신이 어찌 홀로 경축하지 않아 진하하지 않았겠습니까 ? 때마침 탄핵을 당해 대죄를 하던 중이므로 진하에 참례치 못했습니다."
진실이 어떻든 숙종의 자리에서 볼 때 송시열의 이런 처신이 좋게 받아 들여질 리는 없었다. 일설에는 숙종이 원자 시절 이런 말을 듣고, "송시열이 어떤 자인지 이 다음에 반드시 죽이겠다" 고 말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새 임금 숙종이 송시열에게 강경한 자세를 취하자 현종의 급서로 낙담했던 남인들은 기뻐했다. 다시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서였다. 숙종의 강경한 태도로 조정 의견이 갈라져 조정 내 남인들이 소리 내기 시작했다. 송시열에 대한 탄핵을 둘러싸고 사간원의 의견도 둘로 갈렸다. 헌납 이우정과 정언 목창명은 송시열을 탄핵하자고 주장한 반면 사간 심유는 반대했다. 남인 이우정과 목창명이 송시열의 탄핵을 위해 모이자는 간통을 돌리자 서인 심유가 반대하고 나섰다.
"송시열이 효종에게 마음을 다한 것은 천지신명에게 물어 보아도 다 알 것이다."
심유가 송시열의 처벌을 반대하자 이우정. 목창명 등은 물러나서 집무를 거부했다. 급기야 장령 남천한등 사헌부에서 조사에 나서게 되었다. 사헌부는 조사 결과 이우정 등 남인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우정. 목창명은 나와서 공무를 보게 하고 정석. 심유 등의 벼슬을 갈으십시오."
숙종은 이에 따라 심유를 삭직하고 며칠 후에는 문외송출시켰다. 송시열을 옹호하는 심유를 쫓아낸 것은 송시열을 처벌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합계를 올려 드디어 송시열을 탄핵하고 나선 것은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영부사 송시열은 효종의 국상 때 억지로 '체이부정' 을 끌어들여 자의대비에게 서자의 복인 1년복을 입게하고, '효종을 인조의 서자 라고 해도 된다' , '차자를 장자로 이름하여 3년복을 입으면 적통이 엄하지 않게 된다' 라는 말로 임금을 폄하했습니다. 또한 인선왕후 상사 때도 대왕대비의 복제를 중자부의 대공복으로 정했는데, 그는 비록 명나라 예법을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핑계에 불과하고 그 본심은 '체이부정' 에 있었습니다. 다행이 선왕 (현종)께서 그 그름을 바르게 하셨고 전하께서 다시 선왕의 뜻을 이어 올바른 법을 만드셨으나 처음 예법을 그릇되게 주장한 사람을 벌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송시열을 파직하소서."
숙종은 이 주청을 받아들여 송시열을 파직했다. 이에 서인계 사학 유생 이세필등 95명이 상소하여 송시열을 옹호했다.
"지금 시사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밤낮 모여 사림을 몰살할 것을 도모하는 것이 기묘사화 때 사림을 모해난 남곤. 심정, 무오사화 때의 유지광과 같습니다. 만약 송시열에게 끝내 예론을 그르쳤다는 죄명을 씌워 효종대왕을 폄하했다고 한다면 송시열이 훗날 죽은 후에라도 눈을 감지 못할 뿐 아니라 효종의 혼령도 저승에서 서러워할 것입니다."
숙종은 이 상소를 보고 화를 내면서 연명 상소의 대표자인 소두는 귀양을 보내고 나머지는 과거 응시를 금지시켰으며, 상소를 받아들인 승정원 승지는 그 경위를 조사하게 했다. 또한 즉위 다음 해 1월 한밤중에 신하들을 야대한 자리에서 검토관 임상원이 송시열이 나이 70의대신인데 효종이 예우한 신하라며 엄하게 죄주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자 이렇게 반문한다.
"송시열은 효종의 예우를 입었는데도 보답하려고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서자라는 폄칭을 가하였으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숙종은 그 해 1월 12일 송시열을 귀양보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즉위한 지 불과 4개월 만이었다. 송시열은 드디어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자신의 유배 소식을 길상사에서 듣고 태연히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청풍 김씨의 참소가 드디어 실행되는구나. 지금까지 더뎌진 것은 임금께서 많이 참으신 것이다."
청풍 김씨란 명성왕후의 친정인 김우명의 집안, 즉 김육의 집안을 말하는 것이다. 송시열은 진천 읍내에 가서 의금부의 금오랑을 기다려 귀양길에 올랐다. 그때 문인 김창협. 나량좌 등이 서울에서 내려오자 송시열이 입을 열었다.
"광해조 때 장령 연평부원군 이귀와 장령 조속이 서로 농담하기를, '백악산의 왕기가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나라 형편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라고 한탄하더니, 과연 계해년(1623년, 인조반정 나던 해)에 선비들의 기세가 다시 떨쳐졌네. 이제 김군(김창협)을 보니 막힌 사람이 아니니 차후에 그대들이 다시 일어나는 일이 왜 없겠는가."
송시열은 태연했으나 그의 문인들은 눈물을 흘렸다. 이런 눈물들은 뼛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당쟁의 싹에 거름을 주는 자양분이었다. 귀양길에 오른 송시열의 나이 만 67세였다. 노구의 스승이 살아 돌아올 기약 없는 귀양길을 떠나는 것을 보고 서인들은 남인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송시열은 유배지로 가는 도중 철령에 올라 시 한 수를 지었다.
행함으로 철령 마루턱에 올랐네
내 마음도 또한 철과 같도다.
행등철령령
아심환여철
송시열은 자신의 유배를 정도를 걷는 자신에 대한 사도, 즉 이단들의 탄압으로 여겼다. 도을 펼치다 시세가 불리해 철령 높은 곳에 올랐지만 자신은 철과 같이 굳세게 싸워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서인들은 송시열의 유배에 반발했다. 병조판서 이상진은 효종과 송시열의 사이의 일화를 들어 송시열을 옹호했다.
"지난 무술년(효종 9년)겨울에 효종대왕이 송시열에게 갖옷 ( 표구 ) 을 하사하셨습니다. 송시열이 사양하자 효종은 '경은 내 뜻을 모르는가. 조만간 요동의 풍설 속에서 원수를 칠 때 함께 입을 것이오' 라고 하교하셨으니 군신간의 의리가 이처럼 금석을 뚫고 귀신을 울릴 만했습니다. 비록 도중에 효종께서 돌아가셔서 북벌에 쓰지는 못했으나 그 갖옷이 어찌 오늘날 추운 풍설에 고개를 넘어 귀양길에 쓰이리라고 생각하셨겠습니까."
송시열을 효종의 충신으로 묘사한 이 상소를 숙종은 엄한 비답으로 물리쳤다. 그외에도 좌장 정치화. 풍양군 장선징. 사예 김익렴. 교리 윤지과 부사과 이담 외 104명 등의 문인들이 송시열을 옹호하고 나섰으나 모두 거부되었다.
서인에 대한 숙종의 거부감이 컸던 만큼 남인들이 대거 조정에 등용되기 시작했다. 허적이 영의정이 된 데 이어 허목이 대사헌, 권대운이 병조판서, 목래선이 한성부 우윤에 임명되는 남인들이 조정에 진출했다. 더구나 권대운은 판서가 된 지 한 달이 채 못 되어 우의정으로 승진하고 그 자리는 숙종의 오른팔인 김석주가 차지했으며, 민암은 형조판서가 되었다. 제1차 예송논쟁때 송시열의 1년설에 가장 먼저 이의를 제기했던 윤휴는 승지가 되었으며, 송시열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던 유학 곽세건도 과거를 거치지 않고 사옹원 봉사에 제수되었다.
드디어 남인들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인조반정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데 놀란 서인들이 그들을 관제야당으로 끌어들인 지 52년 만에 마침내 정권을 빼앗는 상대로 등장한 것이다. 서인들은 이에 태업으로 맞섰다. 송시열의 유배에 항의해 정사를 거부한 것이다. 숙종은 이에 자신에 대한 노골적 반감으로 여겨 꾸짖었다.
"송시열이 죄를 받은 이래 조신들이 까닭없이 벼슬하지 않는 이가 많으니 슬프도다. 아비가 죄를 입어도 아들은 벼슬을 하는 법인데 스승이 죄를 얻었다고 배우는 이가 어찌 벼슬을 하지 않는가. 근일에 이상진. 민유중. 민정중. 남구만 같은 사람들이 시골에 물러가 앉아서 여러 번 불러도 올라오지 않으니 이들은 시열의 위엄이 중한 것만 알고 국사는 돌보지 않는 것이다. 지극히 한심한 일이니 이들을 중하게 추고하라."
송시열의 유배를 둘러싸고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송시열의 문인들은 거듭 상소를 올려 송시열을 옹호했다. 양송의 제자인 전 교관 황세정이 허목과 윤휴를 비판하고 나섰다.
"허목이 당초 올린 예에 관한 상소는 평심이었는데 이제 다시 발탁되자 종통설로 몰아 바른 사람(송시열)을 해롭게 하고 있습니다. 왜 당초 평심이었던 예론이 지금은 달라졌습니까. 윤휴 또한 위험한 말은 하여도 바른 사람을 해치는 마음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오늘날 사화가 크게 일어났는데도 구할 생각은 않고 빙그레 웃으면서 방관하니 예전에 그가 남에게 중상을 입히려 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을 어떻게 변명하겠습니까. "
당초 학문 논쟁으로 시작되었던 예론이 정치 논쟁으로 비화했다는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 진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세정에게 돌아온 것은 송시열과는 반대 방향인 진도 유배였다.
허적이 비교적 온건론을 편 데 비해 윤휴는 송시열처럼 직설적인 성격이므로 서인 공격에 앞장섰다. 그는 서인들이 정사를 거부하고 시골에 내려가는 현상을 비난하고 나섰다.
"여러 신하들은 전하께서 부르시는 은혜를 생각하여 황송히 달러 나와 국사에 전념하든지, 아니면 대궐 밖에 거적을 펴고 석고대죄해야 마땅한데, 지금 이런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모두 시골로 물러나 집안에 편안히 드러누워 여러 번 전교를 내리게 하고, 또 멀리 수고롭게 승지를 보내어 효유하게 하니 조정의 체통이 말이 아닙니다."
윤휴는 서인들에 대한 처벌을 확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말하자면 남인 강경파였다. 이를 반대한 허적은 남인 온건파가 되는데, 당시에는 이를 각각 청남과 탁남으로 불렀다.
"김수항이 시골에 물러가 있는 것은 사세가 부득이해 그런 것으로서 집안에 편안히 드러누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숙종은 강경론의 손을 들어주었다. 윤휴의 주청에 따라 서인 중진 민유중을 삭탈관직하고 도성 밖으로 내쫓은 것이다.
종묘 고묘, 그 위험한 길
처음으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서인 영수 송시열을 제거하려 했다. 그 방안의 하나로 남인들이 고안한 것이 송시열의 종묘 고묘론이었다. 고묘론이란 송시열이 예론을 잘못 이끌어 처벌당했음을 종묘에 고하자는 주장이었다. 역적 이외에 신하의 죄는 종묘에 고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신하의 죄를 종묘에 고하면 죽이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 종묘에 죄인으로 고해지고도 살아남은 신하는 없었다. 남인들은 송시열을 죽이자는 말을 하지 않고도 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이 고묘임을 고안해 낸 것이다. 남인들은 송시열을 죽여버려야 자신들의 정권이 오래 유지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서인의 중심인 송시열이 살아 있는 한 언제든지 다시 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죽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송시열의 문인인 교리 윤지선이 상소를 올려 송시열을 구원한 것도 그런 움직임의 하나였다.
"시열이 추위에 몸이 상하여 밖에서 죽는다면 비록 대간 (대사헌 윤휴 등 남인들)의 마음은 유쾌할지 모르나, 선왕의 사부를 죽였다는 이름은 결국 전하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종묘 고묘론을 처음 공론화한 인물은 문의의 시골 유생 황창이었다. 대신보다는 일개 유생의 선택은 의도적이다. 개령의 생원이었던 설거일이 종묘 고묘론의 뒤를 이었다.
"자의대비의 복제가 장자부의 복으로 바르게 됐는데도 아직까지 예를 그르쳤던 사유를 종묘에 고한 일이 없으니 빨리 종묘에 고하고 온 천하에 반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고묘론은 간단하게 실행할 일이 아니었다. 이는 서인들에 대한 전면전 선포와 같았기 때문이다. 숙종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지만 남인 정권은 아직 서인을 제거하고 홀로 정국을 이끌어가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광해군을 갈아치운 당파가 서인이었다. 그후 50여 년 이상 정권을 독점해 오면서 뿌린 씨앗이 사방에서 왕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고묘를 강행하면 서인들이 극단적으로 나올지도 몰랐으므로 조정의 남인들은 섣불리 이를 몰아 붙일 수 없었다. 남인 영상 허적이 반대한 진정한 이유도 여기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상 허적 은 "송시열의 죄가 죽을 죄까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라며 고묘를 반대했던 것이다.
숙종 1년 윤5월 장령 조사기가 송시열을 극형으로 다스리자는 상소를 올리는 등 조정에서도 송시열을 극형으로 다스리는 상소를 올리는 등 조정에서도 송시열을 죽이자는 의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로 박헌과 같은 재야 유생들이 앞장섰다. 남인 유생들은 줄기차게 송시열의 소묘론을 제기했다. 고묘론이 나왔다가 잠잠해진 숙종 3년 봄부터 약속이나 했다는 듯이 일제히 송시열의 고묘론을 다시 들고 나왔다. 숙종 3년 충청도 진천 유생 박지헌이 송시열의 고묘를 주장했으며 다음달에는 성주 유생 이잠이 송시열의 고묘를 주장하고 나섰다.
재야의 고묘론에 대사간 정지호가 호응하고 나섰다. 드디어 조정의 공론이 된 것이다. 이데 대간의 의견이 갈라졌다. 정언 이후정이 "4년이 지난 지금 재시행은 시기가 너무 늦었다" 라고 반대한 반면, 지평 김총과 권환은 찬성하고 나섰다.
사헌부의 의견이 엇갈리자 김총과 권환은 임금에게 주청했다.
"복제와 종통을 바로잡았다는 뜻을 종묘에 고하고 중외에 반포하십시오."
숙종은 이 주청을 거절했다.
"전에 이잠이란 유생이 이미 시기가 지난 일 (고묘론)을 가지고 소란을 피우므로 내가 미웠는데, 오늘 그대들이 또다시 이를 거론하니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고묘론에 새로운 이론을 제공한 사람은 남인 대사간 이원정이었다. 이원정은 숙종에게 말했다.
"고묘는 시열에게는 죄를 더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론이 바로 잡혔음을 종묘에 고하자는 것 뿐입니다. 예전에 윤원형도 종묘에 고했지만 죄는 더하지 않았습니다."
숙종은 종묘에만 고할 뿐 죄는 더하지 않는다는 말을 그럴듯하게 여겼다. 숙종은 송시열을 죽이는 부담을 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선대왕의 스승이었던 인물이다.
서인 판부사 정치화가 상소를 올려 '고묘하되 죄는 더하지 않는다'는 이원정의 고묘론이 지닌 헛점을 통렬히 공박했다.
"윤원형을 종묘에 고한 것은 선조 초년으로 그때는 이미 그가 죽은 뒤였습니다. 이원저의 의논은 임금을 속이는 것입니다. 인신으로서 종묘에 고하는 죄를 짓고도 어찌 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송시열 고묘론의 재등장은 당연히 서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낳았다. 서인들이 이에 반발하는 상소를 올리려고 사람들을 모으자 무려 7백여 명의 선비들이 모이기도 했다. 검토관 임상원이 숙종 1년 송시열의 유배를 반대하면서 '나이 70세의 대신을 먼 곳에 귀양 보냈다가 불행한 일이 있게 되면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라면 '편의대로 전리에 가서 남은 나이를 마치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 이라고 말했으나 묵살되었다. 송시열은 끝내 머나먼 덕원으로 유배 보내졌으나 남인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70 노구의 목숨을 끊어 놓으려 하는 것이니 스스로의 증오의 싹을 키우는 것이었다.
집권 남인의 이런 증오 속에서 송시열은 유배지를 전전했다. 처음 송시열의 유배지가 덕원으로 결정된 것은 장기(풍토병)가 없는 곳이라는 이유였으니 최소한 예우는 한 셈이었다. 그의 배소는 숙종 1년 윤5월 15일 충청도 웅천으로 옮겨지는데, 서인들이 기록한 (숙종실록) 은 "웅천은 장기가 가장 심한 곳이기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즉 풍토병에 걸려 죽게 하기 위해 웅천으로 이배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송시열의 유배지는 영일만 근처인 경상도 장기로 결정되었다. 웅천으로 결정한 이틀 후에 영상 허적이 웅천은 장기가 심한 곳이라며 장기가 없는 경상도로 옮겨 줄 것을 청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해 7월 윤휴는 송시열에게 위리, 즉 집 둘레에 친 가시울타리를 걷어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청한다. 숙종이 윤휴를 똑바로 보며 "송시열은 죽을 죄를 면한 것만도 다행이다" 라고 거절하자 윤휴는 이렇게 말한다.
"웅천에는 토질(풍토병)이 있어서 장기로 옮겨주었다면, 위리를 가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위리하지 않으려는 것이 신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숙종은 단호히 거부한다.
"효종의 죄인을 너그럽게 처치하면 비가 오지 아니할 것이다."
그래서 송시열은 함경도 덕원에서 경상도 장기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서인들은 (숙종실록)에서 윤휴가 위리를 풀자고 요청한 것은 "책임을 면하기 위한 것이지 본래 성심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고 강하게 비판하지만 그 의도야 어찌되었든 혹한의 함경도에서 경상도 장기로 옮겨준 것은 하나의 관용이었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칠순 노구로 함경도로 경상도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송시열이 남인들에게 쌓았을 원한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사람인 이상 집 둘레에 가시울타리가 쳐진 집에서 사랑을 키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고난을 정도에 대한 사도의 탄압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가 가시울타리가 쳐진 장기의 유배지에서 (주자대전차의) 를 찬술한 것은 자신이 옳다는 신념의 소산이자 꺾이지 않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그는 이 책을 숙종 1년(1675) 저술하기 시작해 숙종 4년(1678) 완성했다. 예송논쟁으로 비롯된 이 위기의 시절 그는 주희를 구원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을 추스려 나갔다. 남인도 그랬지만 그 자신도 화해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주희에게 받아들인 것은 바로 '명분'이었던 것이다.
소현세자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자
이처럼 몇 년 동안 논란을 계속하던 송시열의 고묘론은 숙종 5년 벌어진 두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에 접어들었다. '강화흉서사건' 과 송시열의 제자인 송상민 상소사건이 그것이다. 두 사건은 외견상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강화흉서사건은 숙종 5년 3월 강화축성장 이우가 한 투서를 받아 병조판서 김석주에게 보고함으로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김석주는 좌의정 권대운, 훈련대장 유혁연과 상의한 후 숙종의 대면을 요청해 이 투서를 올렸다.
"당화가 심해진 이유가 종통이 질서을 잃음에 있다. 소현세자의 손자인 임천군은 참 성인이요 나라의 종통이다. 이 분을 임금으로 추대해 국통을 바르게 하고 당파를 없애야 한다."
임천군은 바로 소현세자의 3남으로 효종 10년 경안군에 봉해진 이회, 즉 석견의 아들이었으니 곧 소현세자의 손자였다. 경안군은 인조 재위때 두 형이 제주도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할 때도 살아 남았으나 그 역시 현종 6년 9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러므로 임천군은 소현세자의 유일한 핏줄인 셈이다. 투서의 내용도 역시 이를 노리고 있었다. 투서는 소현세자가 죽은 뒤 종법에 어긋나는 효종의 즉위에 따라 종통이 어긋나고 당쟁이 심해졌으므로 소현세자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해 어그러진 국통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나라의 정통을 세우는 것이 첫 번째 의리요, 조정의 붕당을 제거하는 것이 두 번째 의리이다."
이런 내용이 담긴 투서 사건으로 투서자 이유정이 복주 (형벌에 복종하여 죽음)되고 이우도 형을 받았지만 끝내 자백을 거부하고 옥사하고 말았다. 숙종은 "이우는 형적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끝내 실토하지 않고 죽었으니, 매우 통탄스럽다" 라고 말했는데 이는 이우가 자백을 거부함으로써 그 배후 세력을 캐는 데 실패했음을 한탄하는 말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남인들은 서인들을 의심했지만 반대로 서인들은 남인들의 자작극이 아닌가 의심했다. 의리를 중시했던 사대부 중심의 정치체제가 당쟁이 격화되면서 공작 정치체제로 전환한 것이었다.
병조판서 김석주가 이른바 강화흉서에 관한 내용을 '극비' 라며 좌우를 물리치고 숙종에게 알린 날은 3월 12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송시열의 고향 회덕에 사는 생원 송상민이 송시열을 옹호하는 책자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숙종의 분노와 공포에 불을 질렀다. 송상민은 물론 같은 시각 소현세자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자는 이른바 강화흉서가 숙종에게 보고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상소에서 소현세자 문제를 거론한 것이 사건을 그의 의중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몰고갔다.
"듣건대 전하께서 윤선도의 예론을 옥당 신하들에게 해석하게 했다는 데 혹시 송시열을 모함하는 말을 깊이 믿어서 그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하신 것 아닙니까. 윤선도의 예론은 모함이 아닌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 가장 심한 것은 송시열이 소현세자의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고자 한다는 말로 사실상 고변 한 것입니다. 오늘날 조정 신하는 모두 윤선도의 무리들인데 이로써 또 모함을 받으면 송시열을 구할 길이 없으므로 신이 이 상소를 올리는 것입니다. 윤선도의 상소를 파헤친 것은 신의 상소만큼 상세한 것이 없으므로 책자를 만든 것을 가지고 상소와 함께 올리니 이는 대개 주자가 하던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강화흉서 사건으로 심장이 떨리던 숙종은 이 상소를 보고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례가 이미 정해졌고 큰 흉악인들이 도망치고 내쫓긴 뒤인데, 송시열의 혈당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씩씩대며 원망과 독기를 더욱 풍기며, 다만 송시열이 있는 줄만 알고 군신 간에 정해진 의리는 아랑곳없이 말을 조작하고 날이 갈수록 심한 비방을 일삼더니, 이번에 변변챦은 송상민이 소책(책으로 된 상소문)을 올려, 위로는 선왕을 언급하고 아래로는 조정 신하들을 모함하니 나의 분함이 끝이 없다. 마땅히 역률로 논단하여 국법을 바로잡으라."
공개적인 상소문이 역률로 논단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강화흉서사건과 본의 아니게 맞물린 이 상소문이 역률로 논단되는 데 아무도 저항할 수 없었다. 즉각 국청이 열려서 대신들이 국문했으나 송상민은 다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확신범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확신은 최소한 택일에서 잘못되었다. 그의 국문이 한창 진행되던 3월 16일은 겸제주 윤휴가 궁성의 호위를 정해 숙종이 대신들을 급히 불러 이를 의논할 정도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영상 허적이 한 말은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요즈음 인심이 극도로 악화되어 이혼과 이엽이 영웅이라느니 종통을 가졌느니 하면서 그를 추대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혼은 임창군이고 이엽은 임성군으로 모두 소현세자 손자였다. 송시열이 펼친 체이부정은 그 본심이 무엇이든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종통을 흔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송상민과 관련 있는 이담. 조근 등 송시열의 문인들이 속속 잡혀 들어와 고문을 당했다. 이런 와중에 고문받던 송상민이 갑자기 죽어버렸다. 상소문을 베꼈다가 잡혀온 박세징이 단 한 차례 형신 끝에 죽어버린 것은 고문의 강도를 알려준다. 그나마 나머지 연루자들을 역률로 다스리지 않고 한 등급 감하여 유배 보내는 데서 처리를 끝 마친 것이 다행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송시열의 문인이 역률로 처단된 이 사건이 유배지의 송시열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인 유생들은 이 사건을 고묘의 근거로 이용했다. 숙종 5년 양성의 진사 조이호가 상소를 올려 송시열의 고묘를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시열의 말투를 그대로 쓰면서 역적 강녀(소현세자 빈 강씨)의 손자에게 마음을 두어 왕위를 위태롭게 하려고 한 이유정의행적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 강화흉서사건입니다. 비록 이유정의 형벌을 집행하였으나 빨리 송시열의 죄를 종묘에 고해야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숙종은, "조정에서 처분할 일을 네가 알 바 아닌데 왜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가" 라고 윤허하지 않는 듯했으나, 이미 고묘할 결심을 굳힌 터였다. 재위 5년 5월 송시열의 죄는 종묘에 고해졌다. 권해가 지은 고묘문은 '지난 기해년(효종이 승하한 해)부터 죄신(송시열)이 왕통을 어지럽혔습니다.' 라는 말로 시작했는데, 그 끝맺는 말이 무시무시했다.
"지금 이유정은 곧 그 우익입니다."
강화흉서사건으로 복주된 이유정을 송시열의 우익으로 지모했으니 그 본류로 지목받은 송시열이 살아남을 재간이 없었다. 이제 송시열의 목숨은 풍전등화였다. 송시열에 대한 공세는 다시 시작되어, 사건 직후인 3월 25일 대사간 권대재 등은 장기에 위리 안치된 송시열을 절도로 옮겨 위리안치하자고 청했다. 절해 고도로 옮김으로써 외부와 모든 접촉을 끊자는 뜻이었다. 이는 또한 죽음으로 가는 전 단계 조치이기도 했다. 숙종은 주청 당일 즉각 이를 수락해 송시열을 거제도에 위리안치했다. 위기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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