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왕위에 올랐다고 가통까지 이은 것은 아니다 - 예송논쟁(4)

구름위 2013. 6. 19.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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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에 유학자들이 모인 이유


  현종에 의해 예론이 금법이 되기 한 해 전인 현종 6년(1665) 송시열과 윤선거를 비롯한 이유태.송주석 등 서인중진들은 계룡산 자락의 동학사에서 만났다.  이들이 모인 목적은 율곡 이이의 '연보'찬을 위해서였으나 송시열의 기년복 주장에 대한 남인의 공세가 그치지 않은 시점이었으므로 남인들에 대한 송시열의 감정은 예전보다도 악화되어 있었다.
  송시열의 1년복설을 제일 먼저 공격한 인물이 사문난적의 당사자 윤휴였으니 송시열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송시열은 이 모임에서 다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았고, 윤선거는 12년 전 그랬던 것 처럼 재차 윤휴를 옹호했다. 송시열을 역적으로 모는 윤선도의 상소로 서인들이 분노하는 판국에 윤선거는 윤휴를 옹호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런 윤선거의 태도에 송시열은 분개했다. 하지만 윤선거는 송시열과 윤휴 두 사람 사이의 화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서로를 적이 아니라 같은 유학자, 사대부로 보는 자세가 시급하다는 생각이었다. 송시열과 윤선거는 승려들의 시중을 받으며 날이 저물도록 언성을 높여 다투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송시열은 결론을 짓자는 태도로 말했다.
  "이렇게 한가로운 언쟁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옳습니다. 공은 시험삼아 말한다면 주자가 옳겠습니까, 윤휴가 옳겠습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윤선거의 말문이 막혔다. 주자와 윤휴 둘 중의 한 명을 선택하라는 말이었다. 윤휴가 옳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 순간 자신 역시 사문난적으로 몰릴 것이기 때문이다. 가슴속에 갈들이 인 윤선거는 한참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흑백으로 따진다면 윤휴가 흑이고 음양으로 따진다면 윤휴가 음이겠습니다."
  "공이 지금에야 비로소 깨달았군요.  이는 사문의 다행이며 붕우의 다행입니다."
  송시열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럼 윤휴와 절교하시겠소?"
  윤휴를 흑이고 음이라고까지 말했는데 송시열이 계속 다그치자 윤선거는 발끈했다.
  "흑과 음이라고 말한 이상 절교하지 않겠소?"
  이 대답에 송시열은 득의양양했지만 윤선거는 마음이 크게 상했다. 윤선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이 있어서 먼저 가겠습니다."
  윤휴를 음이라고 대답한 것은 윤선거 자신이 사문난적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 한 대답이었지 마음속에서 나온 대답은 아니었다. 얼마후 윤선거는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냈다.
  "황산서원에서 흑백음양설로 말한 것은 윤휴의 사소한 부분을 가리킨 말이지 그 사람의 전체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윤선거는 죽음을 앞둔 현종 10년(1669) 송시열에게 남인과의 화해를 종용하는 편지를 썼으나 보내지는 않았다. 그해가 기유년이므로 이를 '기유의서'라 하는데, 이 편지는 도리어 훗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는 한 구실을 한다.

 

온양 행궁에서 벌어진 싸움 - 송시열의 정적들-한때의 주인이었던 이경석


  현종은 재위 10년 3월 왕대비 인선왕후 장씨와 부인 명성왕후 김씨, 그리고 네 공주와 함께 온양으로 향했다. 명성왕후 김씨가 괴증을 앓고 있어 이를 치료하기 위한 행차였다.  어의을 비롯 대부분의 신하들이 중궁의 온양 행차를 반대했지만 현종이 이를 강행한 것이었다.  현종은 그만큼 부인을 사랑한 인자한 임금이었다.
  또한 조선의 임금 중 아주 드물게 오직 한 명의 부인에게만 정을 주었던 임금이기도 하다.  그는 15년 간의 재위 기간 중에도 김육의 손녀이자 김우명의 딸인 명성왕후 김씨만을 가까이 했고 그녀에게서 숙종을 비롯한 1남 3녀를 낳았다.
  그런데 현종은 온양의 행궁으로 행차하면서 군복인 홍융의에다 궁전을 차고 깃털을 꽂고 수레를 탄 차림으로 나타났다. 중궁의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군복 차림에 수많은 군사들을 대동하고 온궁행을 강행한 것이었다. 그는 3월 15일에 서울을 출발해 이틀 후인 17일 온양에 도착했는데 이곳에서 송시열과 이경석의 싸움이 벌어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다음달 3일 영부사 이경석은 현종에게 유행병이 창궐하고 재이가 연달아 나타난다며 조속히 수레를 돌려 서울로 올라가라는 상차를 올리면서 신하들이 행궁에 문안하지 않는 것을 비판했다.
  "지난날 조정에는 급히 물러나려는 신하들이 이어지더니, 오늘날 행궁에는 달려가 문안한신하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군부가 병이 있어 궁을 떠나 멀리 초야에 있으면 사고가 있거나 늙고 병들었거나 먼 곳에 있는 자가 아니라면 도리에 있어서 이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나라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된 것입니다."
  '현종실록'의 사관은 이 기사에 "당시에 지방에 있는 여러 신하들 중에 한 명도 행궁에 나아온 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경석이 이처럼 말한 것이다" 라고 부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상차에 대해 송시열이 자신을 지목한 것이라고 반발하고 나서면서 사건은 이상하게 전개되었다. '현종실록'은 이경석의 상차에 대해 이렇게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으나 이경석의 문집인 '백헌집'에는 보다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혹시 옛말에 '자기가 잘난 척하는 기색이 사람을 천 리 밖에서 거절한다"고 했는데 지금 그와 근사한 것인지요.  이 점은 전하께서 깨쳐 생각하셔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잘난 척하는 기색이 사람을 천 리 밖에서 거절한다'는 구절은 임금이 신하 대접을 박하게 하여 신하를 오지 못하게 거절한 것이 아니냐는 뜻으로서 임금을 은근히 꾸짖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이 상차를 받고 발끈할 사람은 국왕 현종이어야 했다. 그러나 발끈하고 나선 인물은 송시열이었다.
  "신이 병을 무릅쓰고 길을 떠났으나 몸이 이상하여 길가로 물러나 엎드려 조양하면서 다시 길을 떠나려 하였습니다. 때마침 도성에 머물러 있는 대신의 차자를 얻어 볼 수 있었는데 논척한 바가 매우 준엄하여 비록 곧바로 신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어찌 다른 사람을 지적하는 것이겠습니까."
  송시열은 상차의 내용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지적하는 것으로 단정했다.  송시열이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판부사 송시열도 마침 병이 나서 현종이 부르는데 나아가지 못하고 전의에 머물러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이경석의 상차가 자신을 비유해 배척하는 것으로 단정짓고 상소를 올렸다.
  "신이 삼가 생각해 보니 옛날 송나라 손종신같은 이는 '오래 살고 강녕하여(수이강)' 한때의 존숭을 크게 받기는 하였지만,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시켯다는 일컬음은 받을 수없었으니, 도리어 어떤 이는 그를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매우 용렬하고 비루한 자가 있어서 행실이 보잘 것 없기 때문에 도리어 그 사람에게 비난을 받았으니, 뭇 사람들이 얼마나 비난하며 비웃었겠습니까. 지금 신이 당한 일이 불행히도 이와 비슷합니다."
  송시열이 예로 들은 송나라 손종신은 손적을 말하는 것으로서 바로 이경석을 빗대어 비난하기 위해 끌어들이 인물이었다. 금나라의 침략을 당한 송나라는 황제 흠종이 포로로 잡혀가는 정강의변을 맞게 되는데, 이때 금나라로 잡혀갔던 송나라의 대신이 손적이었다. '오래 살고 강녕하여'란 말은 송시열이 만든 말이 아니라 '주자대전'에 나오는 표현응로서 주희가 손적이 금나라의 비위에 맞는 글을 써준 것을 비판하며 사용한 말이다. 송시열이 손적을 빗대 '오래 살고 강녕하여'란 표현을 쓴것은 이경석이 삼전도비문을 지은 데 대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이경석이 삼전도비문을 썻다는 비난은 서인족에서 편찬한 '현종개수실록'의 사관도 "경석이 일찌기 인조 대에 대제학으로서 명에 따라 삼전도의 비문을 지었기 대문에 시열이 소에서 언급한 것이었는데, 말이 너무 박절했으므로 논자들이 병되어 여겼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삼전도비문을 둘러싼 시비


  현재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는 삼전도비는 지금으로부터 약 350여 년 전인 1637년(인조 15: 정축년) 병자호란 패전의 표시로 세워졌다. 그 해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열고 항복의 상징인 남융복 차림으로 소현세자와 대신들을 거느리고 삼전도록 내려왔다.  인조는 청 태종이 앉아 항복을 받는 자리인 수항단을 향해 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복, 즉 삼배구고두의 항복례를 치렀다. 청나라는 수항단 자리에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울 것을 요청했는데, 세자와 왕자를 볼모로 보내는 모욕을 감수하면서까지 항복한 조선의 처지로서는 청나라가 공덕비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해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비 축조의 감독이 청나라 사신이었던 것은 이 당시 청과 조선의 위상을 명확히 보여주는 한 예일 뿐이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 중에 비문을 짓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이는 송시열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외교문서는 예문관 대제학이 짓게 되어 있었으나 마침 대제학이 결원이었으므로 인조는 예문관 제학 이경석을 비롯해 몇몇 문장가들에게 찬술의 임무를 주었다. 이경석 외에 장유. 이경전. 조희일 등 4명이 그들이었다. 이경전은 와병중이어서 나머지 3명이 비문을 지어 바쳤는데 그중 조희일은 자신의 것이 채택되지 않도록 일부러 조잡하게 짓는 수를 부려 제외되고 이경석과 장유의 문장을 가지고 검토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장유의 글에는 잘못된 비유가 있다는 이유로 배제하고 이경석의 글을 지목하면서 내용이 너무 소략하니 개찬하라고 요구해 왔다. 이때 이경석에게 비문의 개찬을 요구한 인물은 다름 아닌 국왕 인조였다.
  "지금 나라의 존망이 이것에 달려 있다. 춘추시대 월 임금 구천이 오나라의 신하 노릇을 했지만 끝내 오나라를 멸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훗날 나라가 일어서는 것은 오직 비문으로 저들의 마음을 움직여 사세가 더욱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다."
  인조의 간곡한 청을 뿌리칠 수 없었던 이경석은 청나라의 구미에 맞게 비문의 내용을 고쳐 지었다. 
  '오직 상제의 법칙만이 위엄과 덕을 함께 펴도다. 황제께서 동을 정벌하시니 그 군사 10만이로다'라는 등 청 태종을 극구 찬양하는 구절은 이런 이유 때문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찬양이 이경석의 본심이 아님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경석은 송시열 못지 않은 반청인사였다.

 

오래 살고 강녕하여


  이경석은 효종 1년 청나라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효종이 즉위 후 왜구 창궐을 빌미로 성지를 보수하고 무기를 정비하려 한 것과, 조서에 표류한 한인들을 명나라에 돌려보낸 것이 조약 위반이란 이유로 청 사신 6명이 한꺼번에 조선에 온 것이었다.  청나라가 국경 근처에 군사를 주둔시켜 무력 시위를 병행하면서 전쟁이 목전에 닥친 상황이었다.  효종은 크게 놀라 밤새 자지 못하고 여러 신하를 인견해 의논했는데, 당시 조야에 "장차 청나라 군사가 닥쳐오면 머리를 깎이는 욕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는 말이 횡행하면서 사대부 집안에서는 이삿짐을 싸는 등 인심이 흉흉했다.
  이때 영의정으로 있던 이경석이 해결을 자청하며 나섰다.
  "저들이 만일 무리한 일로 힐책할 경우 신이 직접 담당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무사하다면 신이 어찌 감히 몸 하나를 아끼겠습니까."
  이에 효종이 감탄했다.
  "경의 나라를 위한 정성이 간절하다 할 만하다."
  이경석은 청나라 사신을 맞기 위해 청천강을 건너던 중 시 한 수를 읊었다.
  한밤에 충신한 마음으로 강을 건너니
  이 마음 오직 귀신만 알 뿐이로다.
  청의 사문사는 영의정 이경석과 여러 중신들을 남별궁에 세워놓고 북벌계획을 사문했다.  이 자리에서 이경석은 끝까지 국왕 효종의 입장을 두호하고 다른 관련자들을 감싸주면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려고 하였다. 이에 청나라 사신은 이경석을 '대국을 속인 죄'로 몰아 극형에 처하려 했다. 효종이 그의 구명을 간청하며 통역 정명수를 통해 막대한 뇌물을 사신들에게 전달하지 않았다면 이경석은 이때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것이다.  이경석은 겨우 목숨은 부지했으나 의주의 백마산성에 위리 안치되어 앞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1년을 백마산성에 갇혀 지낸 이경석은 조건부로 겨우 석방되었다. 청 황제가 내건 그의 석방 조건은,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 였으니 청나라가 그를 얼마나 증오했는지를 알 만하다.
  이런 이경석을 삼전도비문 찬술자로 손적에 비유해 비난하고 나섰으니 뜻 있는 선비들이 혀를 차는 것은 당연했다. 다투기 1년 전만 해도 송시열은 이경석을 비판하지 못했다.  훗날 윤선거의 강화도 사건을 비판할 때도 그랬듯이 송시열은 사건 당시에는 가만히 있다가 자신과 사이가 틀어지면 공격하는 성향을 자주 보여 빈축을 샀던 것이다.
  송시열과 다투기 1년 전인 현종 9년에 이경석은 현종에게 인신의 최고 영예인 안석과 지팡이, 즉 궤장을 하사 받았다. 선조 때 남인 명재상 이원익이 받은 이래 처음의 영광이었다.  현종은 궤장연에 풍악을 내렸고 영상 정치화 등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참여하여 축문을 지어 이를 축하했다. 이대 축문을 지은 대신 중에 송시열도 있었다. '궤장연서'가 바로 그 글이다.
  "경인년(효종1년) 나라의 존망이 당장 판가름나게 되었는데, 이해에 밝은 자들은 팔짱을 끼고 물러서서 월나라 사람이 진나라 사람의 말라감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 공만이 홀로 생사를 돌아보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으며, 도용하지 않아 나라가 무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임금의 대우가 더욱 융숭하고 선비들의 마음도 따랐으며, 하늘의 도움을 받아 '오래 살고 강년하여' 끝내 성상의 은혜와 예를 입었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궤장연에 참석한 그 누구도 송시열의 '궤상연서']가 이경석의 삼전도비문 찬술을 은근히 비난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이경석을 비난하는 상소에 잉 구절이 있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송시열이 '오래 살고 강녕하여'란 말로 이경석을 송나라 손적에 풍자했음을 이때야 비로소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송시열의 이경석 비판은 어느 측면으로 보아도 그의 실수였다. '현종실록' 사관의 말처럼 이경석은 송시열이 아니라 "이상진 등 몇몇 사람 때문에 차자를 올린 것" 인데 송시열은 자기를 공격하는 줄 알고 크게 노해 이경석을 즉각 비난한 것이었다. 이는 송시열 특유의 결벽증이겠지만 그가 한미한 산림 처사였을때 여러 차례 이경석을 찾은 전격 때문에 더욱 비난을 받았다. 선조 28년 (1595)생으로서 선조 40년(1607) 생인 송시열보다 열두 살 많았던 이경석은 송시열을 조정에 나오도록 여러 차례 이끌어준 장본인임이 잘 알려져 있었으므로 송시열의 비난 상소는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송시열과 송준길, 즉 양송은 한미하던 시절 이경석을 주인으로 삼아 서울에 오면 베옷과 짚신을 신은 초라한 차림으로 그의 집을 찾았다.  이때 이경석은 한 나라의 정권을 장악한 신분임에도 일개 산림처사에 불과한 이들에게 자신을 낮추어 선비를 속으로는 송시열의 처사가 지나침을 불평하면서도 그의 위세에 눌려 감히 겉으로 드러내고 말하지는 못했다.
  송시열이 자신을 공격하는 차자를 올린 뒤에도 이경석은 송시열을 직접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차자를 올려 자신의 처지를 해명하면서 송시열에게 배척당한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다.
  "신이 망령되어 올린 차자를 송 판부사는 자신을 지목한 것으로 오인한 것 같습니다. 차자 중에 '지난날 조정에는 급히 물러나려는 신하들이 이어지더니, 오늘날 행궁에는 달려가 문안한 신하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라고 한 구절이 어찌 송 판부사를 지목한 것이겠습니까, 신의 마음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심히 불행한 일입니다" 이경석이 원래의 차자가 송시열을 지목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나오자 송시열의 처지는 더욱 궁색해졌다. 공공연하게 말은 못해도 송시열이 지나쳤다는 비난이 일었다. 송시열은 물론 이런 비난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판서 송규렴에게 편지를 보내 이경석과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강하게 공박했다.
  "오늘날 나의 상소를 보고 이경석을 따르던 사람들이 나를 꾸짖고 분하게 여겨 배척하지만, 그 사람이야 시골에서 군자 소리 듣는 위선자(향원)의 심리로 청인의 세력을 끼고 일생을 행세합니다. 만약 경인년(이경석이 백마산성에 갇힌 해)의 일이 아니면 개도 그의 똥을 먹지 않을 것입니다."

 

송시열을 비난하는 박세당


  그러나 이경석은 송시열의 이런 비난에 직접 대응하지 않았다. 이런 대응이 결과적으로 사대부들 사이에 이경석의 품위만 더욱 높여 준 것이 사실이다. 이경석이 무대응으로 일관함으로써 사건은 수그러들었지만 약30여 년 후인 숙종 29년(1703) 논쟁은 재연된다. 이경석은 이 사건 2년 후인 현종 12년(1671) 사망했는데 후에 소론인 서계 박세당이 이경석의 신도비문을 지으면서 이경석의 생애를 극찬하고 송시열을 비난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때는 송시열도 숙종 15년(1689) 이미 사망한 후였으므로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과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경석 신도비문은 '색경'의 저자 박세당의 마지막 저술이기도 했다. 마음먹고 쓴 글이었으므로 박세당의 송시열 비판은 강력했다. 박세당은 이경석을 '노성인', 송시열을 '상서롭지 못한 인간(불상인)'으로 비유했다. 박세당은 이경석의 삼전도비문 찬술을 인조의 간곡한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옹호하면서, 그럼에도 이경석은 사촌형 이경직에게 편지를 보내 '글을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고 자괴했음을 부기하기도 했다.
  박세당은 나아가 이경석을 '봉황', 송시열을 '올빼미'에 비유하여 풍자하기도 했다. 이경석 신도비문의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자 송시열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노론은 벌떼같이 들고 일어섰다. 노론은 신도비문 자체를 없애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박세당의 유배를 청했다.
  김상헌의 손자이자 노론인 김창흡은 이경석을 이렇게 비난했다.
  "그의 기개와 절개가 못난 것으로 따지면 삼전도비문에서는 청인들을 극력 칭찬하였으며, 그의 의견이 허술한 것으로 따지면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부묘(남편의 묘 옆에 무덤을 쓰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성균관 관학 유생 180여 명은 김창흡의 논리를 그대로 따 박세당을 비판하고 나섰다.
  "박세당은 위로 주자를 능멸하고, 아래로 송시열을 욕하였으며 주자를 부족한 곳에 두고 스스로 높은 자리에 서고자 했으니 이 어찌 유학의 변괴와 오도의 난적이 아니겠습니까."
  박세당이 '사변록'에서 주희의 '사서집주'를 비판하고 새로운 해석을 가했다는 빌미로 사문난적으로 모는 것이다. 비록 사문난적으로 몰린 것이 직접적 계기는 아니지만 이미 25년 전쯤인 숙종6년(1680)에 윤휴가 사형당한 전례가 있으므로 사문난적으로 몰리면 일단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사변록'은 아직 간행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사변'에 지나지 않는 글이었다. 노론 예조판서 김진구, 부제학 정호 등은 이경석 비문과 '사변록'을 말살시켜야 한다고 주청하여 [사변록]을 수거해 말살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박세당의 삭탈관직과 유배를 청하여 그를 전라도 옥과현에 유배 보내라는 명령을 받아냈다. 현종 초년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한 박세당은 이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역량을 인정받았으나 송시열 등 노론의 배척을 받자 관직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한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이 송시열을 비판한 비문 하나로 유배에 처해지게 됐는데, 박세당의 문인들이 극력 구원에 나서 유배만은 겨우 면할 수 있었다. 삭탈관직되어 집으로 돌아온 박세당은 다음해인 1704년 8월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경석 신도비문과 '사변록'은 수장되고 불에 태워지는 등 박세당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다. 박세당 같은 전직 고위관료이자 유명 학자가 송시열을 비판한 몇 글자 때문에 비참한 처지에 처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대부들은 두려움을 느꼈고, 노론의 반대당 소론은 분개하였다. 이경석의 손자인 임파현령 이하성이 논쟁에 가세했다. 그는 이경석의 산전도비문 찬술을 이렇게 변호했다.
  "임금의 욕됨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한 몸을 돌아볼 수 없다 하여 꾹 참고 비문을 지으라는 명을 받들었습니다." 또한 송시열이 여러 번 이경석의 은혜를 입었음을 밝혔다.
  "신의 조부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 산림에 숨어 있는 어진 선비를 등용하는 데 힘썼습니다. 송시열은 이때 전 참봉으로서 학문과 행실로 이름이 었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추천하여 좋은 벼슬을 시켰으며, 그 후에도 글을 올리거나 경연에 나오면 항상 임금에게 송시열을 불러 예로써 대우하시라고 아뢰었습니다. 효종대왕께서 왕위를 이으시고 신의 조부가 영상이 되었을 때에도 송시열과 당시의 명사들을 등용하여 새 정치를 여는 데 돕게 하였으며, 송시열 역시 신의 조부를 주인으로 섬겨 서울에 들어오면 예고도 없이 베옷과 짚신 차림으로 찾았는데, 신의 조부는 대등하게 대우하여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는 예를 다하였습니다."
  이하성이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송시열이 이경석에게 여러 번 은혜를 입었음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심지어 송준길마저도 송시열의 이경석 비판 소식을 듣고 섭섭한 기색을 나타냈을 정도였다. 이하성은 송시열의 처신이 앞뒤가 다르다며 비판했다.
  "송시열이 신의 조부가 삼전도비문을 지었을 당시부터 비평과 논란을 같이 하고 서로 사귀지 않았다면 신의 조부를 비난한 것이 바른 의견은 아닐지라도 산림처사로서 고결한 의논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송시열은 신의 조부가 삼전도비문을 지은 수 년 후에 천거를 하자 서로 사모하고 좋아했습니다. 송시열이 베옷 입은 선비의 차림으로 대신의 집을 찾은 것은 도를 즐겨하여 선배를 스스로 따른 것이 아닙니까? 이때 시열이 신의 조부에 대하여 높여서 예우하고 칭찬하는 말이 자자했는데 이는 그의 마음이 심중에서 따랐던 것이 아닙니까?"
  이하성은 송시열이 큰 인물로 성장한 다음에 이경석을 배척했다고 비난했다.
  "송시열의 명망과 지위가 신의 조부와 같게 되고 기세가 성해지자 서로 논란할 때 감정이 생기고, 알력하는 데서 틈이 일어나 점점 의심하고 갈리게 되었으며, 투기하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이하성은 송시열이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아! 춘추대의는 원래 송시열이 자처한 것입니다. 춘추대의의 중한 점은 오랑캐를 물리치는 데 있으므로 대의를 붙들고 대의 아닌 것을 배척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경인년의 변(이경석이 백마산성에 갇힌 일) 때 이만이 청인의 위협에 겁내어 임금을 잊어버렸으니 왕법으로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청인이 그가 정직하다고 칭찬하면서 그를 쓰라고 했기 때문에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시열이 신의 조부와 대립하려고 다시 이만의 벼슬길을 열어주고 좌우로 주선하여 주었습니다. 이만이 정직하다는 청인들의 말을 시열이 받들어 따른 것이 이처럼 지극하였으니 춘추대의가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만은 효종 즉위 초 경상감사로서 왜의 정세가 의심스럽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런데 조선은 이 보고를 빌미로 성지와 무기 수선을 청했다. 청나라가 이를 북벌의 증거로 삼아 사신을 파견하여 조사하자, 이만은 표류한 한인들을 명나라로 돌려보낸 사실을 조정의 책임으로 돌려 청 사신에게 정직하다는 칭찬을 받은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이만은 청 사신이 돌아간 후 조정으로부터 추고를 받았던 인물인데 이하성은 이런 이만을 추천한 인물이 송시열임을 비꼼으로써 송시열의 춘추대의가 상황에 따라 달라짐을 비꼬았던 것이다.
  "아! 전에 시열과 좋아하다가 끝까지 잘 보전한 이가 몇 사람이나 됩니까. 오늘날 사대부 중에서도 그에게 욕을 먹지 않은 이가 드물지만 다만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이하성은 송시열이 효종의 능비인 영릉 비문을 지으며 굳이 온 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북벌의 일을 적어 화를 초래했다고 비난하는 등 송시열의 여러 일들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나섰다. 송시열의 문인들과 노론 당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송시열의 수제자인 찬선 권상하와 부제학 정호 등은 물론 노론 생원 윤양래 등 94명의 태학생들은 송시열을 옹호하는 상소를 오리고, 소론 나량좌는 박세당을 옹호하는 나서 또다시 조정 공론이 둘러 갈라졌다.
  영의정을 역임한 소론 남구만은 사건이 발생한 7~8년 뒤인 숙종37년(1711) 이경석을 지지하는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소신을 피력한 것이다.
  "이경석의 처지로서 삼전도비문을 지은 것이 불가한 일은 아니다. 혹 과실이 있다 하더라도 장유만큼은 아니다. 그런데 송시열이 장유는 극히 칭찬하면서 이경석은 끝내 용서하지 않았으니 이는 사심 때문이다."
  남구만은 박세당의 '사변록'을 둘러싼 시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사변록'은 상자 속에 넣어둔 초고에 불과한 것으로서 박세당이 죄를 얻은 근원은 아니다. 그의 옳고 그름은 이경석 신도비문으로 한정해야 할 뿐, '사변록'은 공중을 나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다. 대저 그를 죄 주려는 까닭은 신도비문에 있으면서 엉뚱한 '사변록'을 들고나오니, 이야말로 '뜻은 동쪽에 있으면서 말은 서쪽에 있다'는 것이다. '사변록'시비는 원래 한번 웃고 말 정도이니 어찌 여러 말로 변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며느리 장사 때 시어머니의 상복은?


  1674년(현종 15)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났다. 만 56세의 나이였으나 당시 만 50세의 자의대비 조씨가 아직도 살아 있었던 것이 제2차 예송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5년 전의 제1차 예송논쟁이 아들 효종이 죽었을 때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기간을 둘러싼 논란이었다면 제2차 예송논쟁은 며느리 인선왕후가 죽었을 대 역시 자의대비의 상복기간을 둘러싼 논란이었다. 이는 15년 전에 벌어졌던 제1차 예송논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문제였다.
  즉 효종을 큰아들로 보면 인선왕후도 큰며느리이므로 기년복을 입어야 하지만 효종을 둘째 아들로 보면 둘째 며느리이므로 대공복(9개월복)을 입어야 했던 것이다. 처음 예조에서 1년복으로 결정했던 것이 문제를 더욱 불거지게 했다. 예조판서 조형과 참판 김익경은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으로 의정한 다음날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신 등이 어제 상복에 관한 절목 중에서 대와대비의 복제를 1년으로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가례복도'와 명나라 제도를 보니 큰며느리의 상복은 기년이고, 그외 며느리의 복은 대공(9개월)으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효종대왕 국상 때 대왕대비께서 이미 중자의 상복인 기년복을 입으셨으니 지금의 복제는 9개월이 맞는데 경황이 없어 경솔하게 1년으로 아뢰었으니 황공합니다."
 예조는 대공으로 절목을 고쳐 바쳤다.
 현종이 대답했다.
  "알았다. 성복 때에도 이런 잘못이 있을지 염려되니 담당자인 예조정랑을 잡아다가 죄를 정하라."
  일견 사소해 보이는 이 사건이 현종의 명령으로 금지되었던 예송 논쟁을 되살리며 급기야 정권이 뒤바뀌는 미증유의 사태로 발전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따라 자의대비의 복제는 대공으로 결정되어 시행되고 있었는데, 인선왕후 사후 5개월 만인 그 해 7월 대구 유생 도신징이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섬으로써 논쟁이 재연되었다.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충정 때문에 어리석고 미천한 신분을 헤아려 보지도 않은 채 천리길을 달려와 엄한 질책을 받게 되더라도 신의 소견을 말씀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이 60이 넘어 근력이 쇠약한 데다 불꽃 같은 더위를 무릅쓰고 오다가 중도에서 병이나 지체하는 바람에 집에서 떠난 지 한 달이 넘어서야 간신히 도성으로 들어와 보니, 말씀드릴 기회는 벌써 지나 이미 발인한 뒤였습니다. ...대왕대비께서 인선왕후를 위해 입는 복에 대해 처음에는 기년복으로 정하였다가 나중에 대공복으로 고쳤는데 이는 어떤 전례를 따라 한 것입니까? 대체로 큰아들이나 큰며느리를 위해 입는 복은 모두 기년복으로 되어 있으니 이는 국조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바입니다. 그리고 기해년(효종 사망 해) 국상 때에 대왕대비께서 입은 기년복의 제도에 대해서 이미 '국조 전례에 따라 거행한다'고 해 놓고, 오늘날 정한 대공복은 또 국조 전례에 벗어났으니, 왜 이렇게 전후가 다르단 말입니까."
  일개 유생인 도신징이 이미 시행중인 대왕대비의 복제가 잘못되었다고 반박하고 나선 것이었다. 효종의 국상 때 <체이부정>의 위험성 때문에 장자나 중자 모두 1년복으로 되어 있는 경국대전을 인용해 1년복으로 정한 편법을 공격한 것이다. 그때는 효종을 장자로 대우해 자의대비가 1년복을 입은 것이라고 하더니 지금은 왜 효종비를 차자부로 대우해 9개월복을 입느냐는 반론이 도신징 상소의 핵심이었다. 그의 주장은 서인의 이론적 모순을 지적한 것이었고 이 점이 의문스럽기는 현종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예송이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현종도 이제 서른네 살의 장년이었고 그동안 예론에 대해서도 연구를 계속해 스스로의 의견을 지니게 되었다. 현종의 생각에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복으로 정했다가 다시 9개월복으로 고치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이는 서인들이 모후를 차자부로 여기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는 나아가 15년 전에도 서인들이 부왕 효종의 종통을 부인한 것인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했다.
  바로 이런 논리적 약점 때문에 당초 서인들이 장악한 승정원이 도신징의 이 상소를 봉입하지 않으려 했다. 그만큼 이 상소가 지닌 폭발성을 우려했던 것이다.
  "신이 대궐문 앞에서 이마를 조아린 지 반 달이 지났는데도 시종 기각을 당하기만 하였으니, 국가의 언로가 막혔으며 백성의 목숨이 장차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신이 말하려 하는 것은 오늘날 복을 낮추어 입은 잘못에 대한 것일 뿐인데, 정원이 금령을 어기고 예를 논한다는 말로 억압하면서 받아주지 않고 물리쳤습니다. 아, 기해년의 기년복에 대해서는 경상도 선비들이 올린 소로 인해 이미 교서를 반포하고 금령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공복에 대해서는 금령을 만들지도 않았는데 지레 막아버리니 승정원의 의도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어찌 앞뒤가 서로 틀린가


  이 상소를 본 현종은 좌부승지 김석주를 불렀다. 김석주는 현종의 장인 김우명의 조카였으니 현종과는 외사촌 관계였다. 김석주는 대동법 논쟁 때 송시열과 치열하게 싸운 김육의 손자였다. 김육의 청풍 김씨와 송시열의 은진 송씨는 대동법 논쟁뿐만 아니라 김육의 묘지에 수도를 쓴 문제로 다시 논쟁이 벌어져 사이가 크게 벌어져 있었다.
  김육의 두 아들인 김우명과 김좌명은 부친의 묘지에 수도를 썼는데, 수도는 석실을 만들거나 산허리를 잘라 길을 내는 것으로 왕실 외에는 사용하지 못하는 형식이었다. 이를 송시열이 공격하고 나섬으로써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는 대동법 논쟁 때 한당과 산당으로 갈라졌던 두 세력을 더욱 멀어지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김석주는 서인이면서도 남인과 가깝게 지냈다. 정확히 말하면 남인보다는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 김씨가 사촌이었으므로 왕실과 가깝게 지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김석주는 현종에게 허목의 상소와 유세철, 1,400여 명의 연명 상소, 그리고 <의례주소>의 <참최장>등 논란이 되었던 부분을 정리해 보고하는데, 이는 모두 남인들의 주장이었으므로 사실상 제1차 예송 때 3년설이 맞다는 보고나 마찬가지였다. 현종의 입장에서는 3년설의 지지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왕조국가에서 왕통의 계승은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가치이자 질서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종은 도신징의 상소와 김석주의 보고를 검토했다. 현종은 이 사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후 대신들을 불러 물었다.
  "대왕대비의 복제를 기년복에서 갑자기 대공복으로 바꾼 데는 무슨 곡절이 있는가?"
  "기해년에 이미 기년복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이야기를 다 기억은 못하지만 <고례>(주례등 중국 고대의 예법)가 아닌 <국제>를 써서 1년복으로 정했다고 기억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대공복도 또한 <국제>에 따라 정한 것인가?"
  김수홍이 대답했다.
  "그때 송시열의 의견은 '<고례>는 마땅히 이렇지만 당시는 <국제>를 써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종은 김수홍의 대답이 지닌 모순을 놓치지 않았다. 고례의 기년복은 장자가 아니라 중자의 복이었다. 반면 '국제'는 장자와 중자의 구분없이 기년복으로 되어 있었다. 제1차 예송논쟁 때 <고례>를 사용한 것이라면 기년복은 장자가 아닌 차자, 즉 중자의 복이 되는 것이다.
  "기해년에 항상 정태화가 '마땅히 <국제>를 써야 한다.'고 하여 판중추부사 송시열과 의논해 기년복으로 결정했었다. 이번 국상에 <고례>를 쓰면 대왕대비의 복제는 무엇이 되겠는가?"
  답변이 궁색해진 김수홍이 겨우 대답했다.
  "<고례>로 하면 대공복입니다."
  "기해년에는 <국제>를 쓰고 지금은 <고례>를 쓰니 어찌 앞뒤가 서로 틀린가?"
  "기해년에도 고금의 예법을 참고했고 지금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지 않다. 그때는 <국제>를 썼는데 그 뒤 문제가 되어 다툰 것은 <고례>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현종은 김석주가 제공한 자료를 통해 이미 15년 전의 기억을 살리고 있었다. 민유중이 나섰다.
  "기해년에는 고례와 국제를 참고해 인용했습니다."
  현종이 다시 물었다.
  "이번 복제를 국제대로 하면 어떤 복이 되겠는가?"
  김수홍이 대답했다.
  "국제에 장자부의 복은 기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종의 추궁이 점점 날카로와졌다.
  "그렇다면 오늘의 복제가 <국제>와는 어떤 관계에 있단 말인가? 이 점은 놀랄 만한 일이다. 기해년의 복제는 <국제>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민유중이 대답했다.
  "<국제>가 우연히 그러했습니다. 기해년에 대신들이 의논할 때도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시행한 것은 <고례>였을 뿐입니다."
  민유중의 대답은 자기 모순이었다. 기해년에는 <국제>라면서 기년복으로 정한 것이었다. 현종이 이 모순을 놓칠 리가 없었다. "기해년에 조정에서 결정한 것은 <국제>를 좇은 것이다."
  김수홍도 모순된 의견에 가세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례>로 결정했으므로 다투는 사람이 저렇게 많았습니다."
  현종은 김수홍의 이 말을 놓치지 않았다.
  "<고례>대로 한다면 장자의 복은 어떠한가?"
  김수홍은 아차 싶었으나 이왕 내친걸음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
  "참최 3년복입니다."
  이 대답은 제1차 예송논쟁 때 서인들이 겉으로는 <국제>대로 장자의 기년복으로 했다면서 실상은 <고례>에 따라 차자의 기년복으로 정했다는 자인에 다름 아니었다.
  현종은 비로소 도신징의 상소를 김수흥에게 내보였다. 도신징이 상소를 올린 지 13일 만이었다. 현종은 말했다.
  "나는 기해년(제1차 예송논쟁)의 복제는 <국제>를 쓴 것으로 안다. 지금 논란이 있으니 금번의 복제가 기해년 복제와 어떻게 닮았고 다른지를 의논하되 원임대신은 물론 육경(6판서).삼사 장관을 모두 불러 의논해 보고하라."
  서인들은 미로에 빠진 격이었다. 현종이 원하는 대답은 '<국제>에 따르면 기년복'이라는 것이었다. 이 경우 과거 3년복이 아닌 1년복을 정한 것이 잘못이라는 남인의 공세가 따르겠지만 집권당이므로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인들은 결코 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영의정 김수흥.판중추 김수항.이조판서 홍처량.병조판사 김만기.호조판서 민유중 등이 의논한 후 올린 계사는 분명하지 않았다.
  "기해년 복제를 정할 때의 대신들이 전후 순서를 실록에서 상고해보니 정희왕후(세조의 비)는 덕종과 예종에게 모두 기년복을 입었으나 문정왕후(중종의 비)는 기록이 없었습니다.
  <국제>에는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지 않고 '기년복'으로 되어 있으며 기해년에 처음 복제를 의논할 때도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3년복이란 반론이 나오면서 논의가 분분해졌으나 여러 번 회의한 끝에 <국제>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장자와 중자를 구별해 장자에게는 참최복을 입고 중자에게는 기년복을 입는 것은 중국의 <고례>요, 장자와 중자를 구별 않고 모두 기년복을 입는 것은 우리나라의 <국제>입니다. 기해년에 처음부터 <국제>를 쓰기로 했는데 후에 <고례>를 주장하는 신하들이 있었지만 역시 <국제>대로 기년복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서인 대신들의 결정은 15년 전의 기년복은 <국제>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자의대비가 무슨 근거로 대공복을 입어야 하는지였는데 그 부분이 빠져 있었다. 15년 전처럼 <국제>를 인용했다면 이는 둘째 며느리의 복이었다. <고례>를 인용했다면 기해년에는 <국제>를 인용했는데 지금은 왜 <고례>를 인용하느냐는 물음이 뒤따를 것이다. 서인 대신들은 곤혹스러웠다.

 

급서하는 현종


  현종은 서인들이 의정한 대공복을 기년복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집권당 서인에게는 국왕의 명령보다 당론이 더 중요했다. 현종은 서인들이 임금이 아니라 자기 당의 영수인 송시열을 더 따르는 정당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들이 반격하기 전에 신속한 후속 조치를 취했다. 예론의 주무 부서인 예조의 판서, 참판, 참의, 정랑 모두를 하옥했으며, 9개월설을 주장한 영의정 김수흥을 춘천에 부처하였다. 신중한 성품의 현종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신속하고 단호한 조치였으나, 그렇다고 물러날 서인들은 아니었다. 근 50여 년 이상을 집권한 정당이었던 것이다. 즉각 서인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서인 승지 이단석과 교리 조근이 입대를 청하자 그 이유를 짐작한 현종이 꾸짖었다.
  "내 심기가 매우 불편한데 대면을 청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이가. 대신을 위해서가 아닌가. 군신의 의리가 매우 엄한데 너희들은 이 점을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단 말인가."
  국왕의 손발이 되어야 할 승정원의 승지와 홍문관 교리가 국왕이 아닌 자당을 위해 국왕을 압박하는 지경이었다. 현종이 입대를 거부하는데도 이들은 물러서지 않고 차자를 올려 노론 영수 김수흥을 구하면서 현종을 비난했다.
  "장자와 중자에 관한 의논은 오늘 처음 나온 말이 아니고, 또 이 말이 옳지 않으면 채용하지 않으시면 그만인데 이로써 대신을 귀양 보내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자신을 보좌해야 할 승지와 교리가 임금보다 당론을 좇는 현상에 현종은 분노했다.
  "차자의 말은 내가 매우 놀랍게 여긴다. 기해년에 갑과 을이 다투어 변론할 때 조정에서 <국제>를 사용하였으나 장자와 중자의 구별이 없으므로 그렇게 처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해년에 갑과 을이 변론한 것들을 주워 모아 대왕대비의 복제를 강등하려고 꾀하였다."
  그래도 서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승지와 교리의 차자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번에는 양사(사헌부.사간원)가 나서 현종을 압박했다. 장령 이광적과 지평 유지발이 예조에 대한 심문과 김수흥의 중도부처를 취소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에 현종은 더욱 분노했다.
  "너희들의 계사에 내가 심히 놀랐다. 양사의 대간은 마땅히 엄한 말로 예론을 그릇 이끈 자들을 죄 주기를 청해야 하는데도 도리어 죄인을 구하려고 하는구나. 지금의 양사는 직책을 다하지 못한 자들인데 어찌 낯 들고 길거리를 다닐 수 있겠느냐. 이들을 함께 삭직해서 내쫓으라."
  현종이 이처럼 강력히 나가는데도 서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에는 좌의정 정지화가 직접 나서 김수홍을 옹호했다. 지금껏 배후에서 젊은 서인들을 움직이다가 현종이 듣지 않자 중진들이 직접 나선 것이다. 현종이 정지화의 청도 거부하자 판중추 민유중, 좌참찬 이상진, 김만기 등 서인 중진들이 줄줄이 나서 김수흥을 옹호했다. '임금에게 박하고 어느 누구에게 후하게 한단 말인가'란 현종의 힐난이 이유 있는 비난임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 와중에 서인 대사간 남이성이 현종에게 직접 도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예론에 있어 을의 설(1년설)을 주장하는 자가 모두 나라에 충성스러운 것도 아니고, 갑의 설(9개월설)을 주장하는 자가 모두 임금에게 박한 것도 아닙니다. 만일 전하께서 노여움을 잊고 용서하신다면 지금 대신들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남이성은 '사종지설'을 인용하며 자의대비는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효종과 인선왕후의 적통을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조정을 장악한 서인들이 모두 당론에 따르면서 현종은 고립되었다. 왕권에 도전한 대신들을 탄핵해야 할 대간의 장관이 대신들을 편들고 국왕에게 대드는 판이었다.
  현종이나 서인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선왕의 적통을 부인하는 세력들에게 국왕이 양보할 수는 없었다. 그럴 경우 현종 자신은 물론 이제 겨우 열다섯 살밖에 안되는 어린 세자에게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몰랐다. 자신을 내쫓고 소현세자의 아들을 세울수도 있는 일이었다. 현종은 대사간 남이성의 맹점을 공박했다.
  "갑과 을의 설이 절충되지 못했을 때에는 그 후한 의논(1년복)을 좇는 것이 옳겠는가? 박한 의논(대공복)을 좇는 것이 옳겠는가? 감히 박한 의논을 좇아 대신에게 아부하였으니 이는 임금이 없는 자의 말이다. 멀리 절도로 귀양보내라."
  현종이 남이성을 진도로 귀양보내자 삼사는 일제히 들고일어나 남이성을 옹호했다. 15년 전 윤선도가 "나라의 권력이 신하(송시열)에게 있고 위의 임금에게 있지 않습니다"라고 주장한 것이 현실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또한 서인들을 데리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현종은 정권을 갈아치우기로 했다. 현종이 향리인 충주에 있던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은 것은 집권당을 교체하겠다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남인을 영상으로 삼은 이 조치에 서인들은 놀랐다. 다른 자리도 아닌 영의정 자리를 남인이 차지한 것이었다. 국왕 현종이 서인들에게 반감을 갖고있는 터에 정권마저 남인에게 넘어간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몰랐다. '체이부정'이 역모의 논리로 사용될 수도 있었다. 서인들의 공포에 휩싸인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때 이변이 발생했다. 서인을 내쫓고 남인을 등용하던 현종이 갑자기 급서한 것이다. 제2차 예송논쟁 와중인 재위 15년 8월 18일이었다. 현종의 처음 병명은 복통에 불과했으나 점점 심해져 8월 10일 이후에는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현종은 조금만 기운을 차리면 영상 허적이 언제 충주에서 오는지를 물을 정도로 정권교체에 집요한 관심을 보였다. 드디어 8월 16일 허적이 서울에 올라오자 현종은 거의 혼수상태에서도 관복을 갖추고 만나는 예의를 갖추었다. 그때가 8월 17일로서 부왕 효종처럼 못다한 일을 남기고 승하하기 하루 전이었다.
  허적이 증세가 좀 덜하시냐고 묻자 현종은 덜한 것 같지 않다고 답한다. 그날 약방에서 시약청을 개설하자고 청하니 현종은 약방이 가까운 곳으로 옮겨왔으니 시약청까지 개설할 필요는 없다며 거절하다가 재차 아뢰자 허락했다. 허적은 약방 도제조를 겸하게 되자마자 승전색을 시켜 왕비에게 병상을 지키는 사람들을 갈아 치울 것을 권한다.
  "상의 병세가 저런데도 곁에서 모시는 자가 환관들뿐이어서 증세의 경중도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청풍부원군 김우명, 예조판서 장선징, 청평위 심익현이 오늘부터 좌우에서 모시게 하소서."
  현종의 장인 김우명과 매제 심익현, 그리고 남인 장선징으로 하여금 병실을 지키게 하자는 요청이었다. 허적은 분명 현종의 급작스런 와병에 인위적인 요소가 작용하지 않았는지를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현종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끝내 세상을 떴다. 재위 15년 34세의 한창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