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왕위에 올랐다고 가통까지 이은 것은 아니다 - 예송논쟁(1)

구름위 2013. 6. 1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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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죽었을 때 어머니의 상복은?


  효종의 시신을 둘러싼 이런 소동들은 모두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소동을 겪고도 효종의 시신은 조용히 땅속에 묻히지 못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북벌의 한이 너무 커서 그를 조용히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장장 전후 15년에 걸친 예송논쟁이 일어나는데, 그의 사후 15년째는 중국 남쪽에서 오삼계가 청나라 타도를 기치로 군사를 일으킨 해란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효종의 뒤를 이은 인물은 만 18세의 외아들 현종이었다. 그는 효종 사후 4일 만에 예조에서 새 왕의 즉위절목을 올리니 화를 내며 물리쳤다.
  "지금이 어떤 때이고 이것이 어떠한 거조인데 분명히 계품하지 않은 채 감히 택일하여 들인단 말인가."
  백관과 삼사에서 "성복하는 날 뒤를 잇는 것은 조종께서 이미 행해온 예법"이라고 주장하자 다시 사양했다.
   "예법이 중대하기는 하지만 정 또한 폐할 수 없는 것이다. 경들은 어찌하여 나의 망극한 회포를 돌아보지 않는가. 결코 억지로 정리를 억제하면서 이를 거행할 수는 없다."
  이런 실랑이를 거쳐 세자는 드디어 즉위하지만 그가 정작 싸워야 할 일은 선왕의 빈전 앞에서 즉위할 수 있느냐 여부가 아니라 예송논쟁이란 거대한 암운이라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효종이 승하했을 때 효종의 계모의 자의대비 조씨가 살아 있었던 것이 제1차 예송논쟁의 시발이었다. 그녀의 상복 착용 기간이 문제가 된 사건이 바로 제1차 예송논쟁이다. 인조는 반정을 일으키기 13년 전인 1610년 영돈녕부사 한준겸의 딸과 결혼했으니 그녀가 인렬왕후 한씨였다. 그녀는 소현,봉림,인평,용성대군 등 4남을 낳고 인조 13년(1635) 사망했고, 인조는 그 3년 후인 영돈녕부사 양주 조씨 창원의 딸과 재혼했다. 그녀가 바로 장렬왕후 조씨이다.
  인조의 나이는 만43세였고 그녀의 나이는 만14세였다. 인조가 사망함으로써 대비가 된 그녀는 효종2년 자의라는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가 되었다. 자의대비는 효종보다 5살이나 어렸다. 만30세의 효종이 즉위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만25세였다. 10년을 재위한 효종이 죽었을 때 겨우 만 35세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인조와 국혼을 올렸으니 효종에게 법적인 어머니였다. 이 법적인 어머니 자의대비 조씨가 아들인 효종의 국상 때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 제1차 예송논쟁이었다. 1659년인 기해년에 벌어졌다 해서 기해예송, 상복문제로 논쟁했다 하여 기해복제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이 예송논쟁 자체에 대해 냉소적 인식을 갖고 있는 현대인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식민지 시대 일인 학자들이 이를 당파싸움 망국론의 중요한 전거로 사용한 데 큰 요인이 있다.
  현재의 잣대로 보아 상복을 얼마 동안 입든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사회에서 종법은 현대국가의 헌법과 같고, 예는 현대국가의 공법과 같은 것이라고 해도, 예송논쟁이 국가의 부강이나 백성들의 민생을 둘러싼 논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예론이 정권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게 대두한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임진,병자 양란 이후 신분제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에 위기감을 느낀 사대부들이 수구적인 예론으로 지배질서를 계속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이 그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억울하게 비명에 간 소현세자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왕가의 왕통은 일반 사대부가의 종통과 다른 차원의 질서인가 아니면 같은 성격의 질서인가 하는 서인과 남인이 시각차가 있었는데, 바로 이 점이 예송을 정권 차원의 논쟁으로 격상시킨 주된 요인이기도 하다.

 

예송논쟁이 지닌 정치적 폭발력


  조선의 예법은 조선의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 그리고 중국의 '주례', '주자가례' 등 중국의 예론을 복합해 만든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상복에는 다섯 종류가 있는데 3년복인 참최와 3년 또는 1년복인 재최, 9개월복인 대공, 5개월복인 소공, 그리고 3개월복인 시마가 그것이었다. 부모상에 자식은 장자(맏아들), 중자(맏아들 이외의 여러 아들)를 막론하고 무조건 3년복이었으므로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자식이 죽었을 때 부모가 상복을 입는 기간은 장자와 중자의 경우 달랐고, 바로 이 점이 논쟁의 발단이었다.
  맏아들인 장자상에는 부모도 3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으나 차자 이하는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통을 잇는 장자를 그만큼 우대한 것이다. 며느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장자부(맏며느리)의 상에는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으나 중자부(기타 며느리)의 상에는 9개월복을 입는 것이 예법이었다.
  퇴계 이황이 '퇴계가훈'에서 이 문제를 간단히 정리해 놓은 것이 있으니 이를 보자.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상장을 짚고 한 해 동안 재최복(1년복)을 입고, 맏아들의 경우는 참최 3년을 입고, 맏며느리의 복은 한해 동안 재최복을 입으며, 다른 아들의 경우는 1년복, 다른 며느리의 경우 9개월복을 입는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제1차 예송논쟁은 간단하게 말해 효종이 승하했을 때 모후 자의대비가 장자의 예를 따라 3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아니면 차자의 예를 따라 1년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었다.
  15년 후의 제2차 예송논쟁은 효종비 인선왕후가 승하 했을 때 역시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자의대비가 장자부의 예에 따라 1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차자부의 예에 따라 9개월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었던 것이다.

 

임금이지만 장자가 아니니


  효종이 승하했을 때 장례를 주관하는 예조판서 윤강과 참판 윤순지는 현종에게 자의대비의 복제 기간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이 물음이 장장 15년 간에 걸친 예송논쟁의 시발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의 질문은 소박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자의대비의 상복 착용 기간에 대해서 '국조오례의'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지 않습니다. 혹은 3년복이라고 하고 혹은 1년복이라고 하는데, 결정할 만한 예문이 없으니, 대신과 유신들에게 의논케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당시 만 열여덟 살의 현종으로서는 갑작스런 부왕의 죽음에 경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만큼 예론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신과 유신들에게 의논해 아뢰라고 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명령에 따라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영돈녕부사 이경석, 연양부원군 이시백, 완남부원군 이후원, 영중추 원두표 등의 대신들이 복제 문제를 상의한 후 헌의했다.
  "신 등이 옛 예법에 능통하지는 못하지만 시왕의 제도로 상고해 보니 대왕대비께서는 1년복을 입으시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자의대비의 복제는 3년이 아니라 1년복이 맞다는 주장이었다. 현종은 국왕이 승하했는데 3년복이 아니라 1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대신들의 현의에 불만을 가졌다. 왕조국가에서 임금이 승하했는데 어째서 3년복이 아니라 1년복이냐는 생각이었다. 현종이 1년복으로 결정하기 전에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다시 의논하게 한 것은 이런 불만 때문이었다.
  현종이 생각하기에 양송은 유학으로 발탁된 유신자 예학의 계승자로서의 학문적 권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선왕으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은 인물들이기 때문에 3년설을 지지할까 해서 묻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양송에 대한 현종의 소박한 믿음일 뿐이었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현종의 하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여러 대신들이 이미 시왕의 제도로 결정하기로 의논했으니 신 등은 감히 다른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1년복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의례'의 (상복소)에 '비록 승중한 아들이라도 그 아들이 죽었을 때 3년복을 입을 수 없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따라서 대행대왕(효종)이 비록 왕통을 이었으나 다음 적자 서열이니 이번 국상에 대왕대비께서 입으실 복제는 1년을 넘을 수 없습니다."
  증중이란 조상의 제사 받드는 중임을 이어받거나 장손으로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을 말하는데, 양송이 여기에서 쓴 승중이란 전자를 뜻한다. 즉 효종이 소현세자의 뒤를 이은 차자지만 역대 선왕 등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중임을 이어받은 임금이란 뜻이다. 그러나 결국 장자가 아니니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자의대비 복제는 3년복이 아닌 1년복이라는 의미였다.
  송시열.송준길의 견해는 비록 임금이라 해도 예법에 초월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남인들의 공세와 송시열의 사종지설


  서인대신들은 물론 양송 같은 유신들도 1년설을 주장하자 자의 대비의 복제는 1년으로 결정되는 분위기였다. 대신들의 견해에 예학의 정통 대가들이 가세했으니 그 견해를 반박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쟁쟁한 대신들과 양송의 견해를 정면에서 반박하는 인물이 있었다. 남인의 논객 전 지평 윤휴였다. 그는 '의례주소'와 '상복참최장'의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 상복 입는 기간'에 대한 가씨의 주를 인용해 송시열의 논리를 반박하고 나섰다. 이를 가소라 하는데 이는 '의례'정현의 주에 붙인 당나라 가공언의 소를 말한다.
  윤휴는 처음부터 상소로 의견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서인 이시백에게 편지를 보내 1년설을 반박했다.
  "가씨 주에 '장자가 죽으면 적처소생의 둘째 아들을 대신 세워 역시 장자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대왕대비께서는 당연히 3년복을 입으셔야 마땅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상 정태화는 송시열을 불러 의논했다. 송시열은 역시 윤휴가 인용한 '의례주소' '상복참최장'의 가씨 주를 들어 윤휴의 논의를 반박했다.
  "'의례주소'에 그런 말이 있는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그 아래에 '적처가 낳은 둘째 아들도 역시 서자라고 칭한다'는 말이 있소. 즉 '서자"란 첩의 아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장자가 아닌 모든 아들을 뜻하는 말이오."
  송시열은 이어서 '부모가 3년복을 입지 못하는 네가지 경우(사종지설)이 있다고 말했다. 그 유명한 사종지설로서 훗날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구절이다.
  "첫 번째는 정체이나 승중(제사를 받드는 것)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즉 장자가 병이 있어 제사를 받들 수 없는 경우입니다."
  장자가 병이나 기타 사유로 제사를 받들지 못하고 차자나 손자가 제사를 승중했을 경우 장자가 죽었어도 부모는 3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여기에서 '정'이란 적자와 적손을 뜻하는 말이고 '체"란 직접 혈통을 이은 것을 뜻하는 말이다.
  "두 번째는 승중하였으나 정체가 아닌 경우를 말합니다. 서손이 후사를 이은 경우가 이에 해당됩니다."
  송시열은 문제의 세 번째 경우에 대해서 설명했다.
  "세 번째는 체이부정이니 서자를 내세워 후사를 삼은 경우입니다."
  바로 이 체이부정이 효종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선왕이자 현왕의 아버지인 효종을 '서자'나 '부정'으로 표현하는 것은 왕조국가에서 지극히 민감한 문제이고 그만큼 위험한 일 일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남인들은 바로 이 체이부정을 문제 삼아 송시열을 공격하게 된다. 송시열이 서슴없이 '체이부정'이란 말을 입에 담는 데 정태화는 경악했다. 이런 정태화의 놀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시열은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네 번째 경에 대해 설명했다.
  "네 번째는 '정이불체'로서 적손이 후사를 이은 경우를 뜻합니다. 즉 할아버지가 손자의 상에 3년복을 입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남인들이 편찬한 '현종실록'은 이때 송시열이 이런 말까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조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소현의 아들은 바로 '정이불체'이고 대행대왕(효종)은 '체이부정'인 셈입니다."
  그러자 정태화가 깜짝 놀라 손을 흔들며 말을 못하게 하고 말한다.
  "예는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소현에게 아들이 있는데, 누가 감히 그 설을 인용하여 지금 논의하는 예의 증거로 삼겠습니까? '예경'의 깊은 뜻은 나는 깜깜합니다만, 국조 이래로는 아버지가 아들 상에 모두 1년복을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내 뜻은 '국제'을 쓰고 싶습니다."
  정태화가 손사래를 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정태화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예로부터 왕가의 일은 처음에는 아주 작은 데서 비롯되더라도 나중에는 큰 화를 이룬 것이 한 둘이 아니오. 만일 훗날에 간사한 자가 나타나 '체이부정'이란 말을 가지고 화단을 만든다면, 우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가 화를 당한 후에도 나라 일이 어디에 이를지 알 수 없소."
  예송논쟁의 폭발성이 바로 소현세자의 아들과 효종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이 기해독대 때 소현세자 빈 강빈의 신원 문제를 강력하게 요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진행형 사건이었다. 이 당시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석견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종법에는 장자가 죽었을 경우 동생이 아닌 장손이 종통을 잇게 되어 있었다. 적장손을 낳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에도 적장자의 동생이 종통을 잇지 않고 양자를 들여 종통을 잇는 것이 조선의 종법이었다. 이는 비단 일반 사대부가만이 아니라 왕가에도 적용되는 왕위 계승의 법칙이기도 했다.  이에 따르면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동생인 봉림대군이 아니라 소현의 맏아들인 석철이 종통을 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인조는 소현세자를 죽인 지 6개월도 안된 1645년(인조23) 9월 봉립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그 4년 후인 인조 27년(1649)에는 봉림대군의 아들을 왕세손으로 책봉했다.
  이는 자신이 죽은 후 종통 시비가 일어날 것에 대비한 사전 포석이었으나 그만큼 봉림대군의 종통계승이 궁색했음을 말해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송시열과 송준길이 대표하는 살림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구나 이 뒤에 벌어진 강빈 사건은 산림이 볼 때 명백한 위법이었다.
  송준길이 인조 23년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을 때 병을 청탁해 나아가지는 않으면서 상소를 올려 소현세자와 원손 석철의 문제를 거론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소현세자의 장례는 예법에 어긋났습니다. 또한 원손을 보양하여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해야 합니다."
  이는 인조의 수하는 봉림대군이 아니라 소현세자의 큰아들인 석철이 이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인조는 이 상소에 격분해 송준길에게 제수한 관직을 거두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다시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아마 송준길이 산림의 영수가 아니었으면 호되게 처벌당했을 것이다.
  앞서 소현세자의 사망을 이야기하면서 이미 설명했듯이 인조는 소현세자 상사 때 대신들이 1년으로 의정한 것을 역월법을 적용해 12일 만에 복제를 마치려 하다가 한 등급 더 감해 7일만에 상례를 마침으로써 송준길에게 뼈아픈 상소를 받았다.
  송시열이 예로 든 인조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소현세자의 아들을 '체이부정'이라는 말은 민감하기 그지없는 사안이었다. 남인 장령 허목이 현종 1년 3월 올린 상소문에서 말한 대로
  "서자를 후사로 세운 경우가 '체이부정'이고, 적손을 후사로 세운 경우가 '정이불체'였으니, 이 논리대로면 체이부정인 효종과 정이불체인 소현세자의 아들 석견 중 누가 정통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정이불체인 석견이 정통이라면 현 임금인 현종의 계위는 부당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예송논쟁은 효종뿐만 아니라 현종의 왕위 계승이 정당한가라는, 핵폭발에 버금갈 폭발력을 지진 민감한 문제였던 것이다.
  예송논쟁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전례 문제에 지나지 않지만 내부적으로는 변칙적으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의 종통이 정당한가하는 문제이자, 당시 신분제 사회가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현안으로 등장한 서얼허통 문제나 노비종모법 문제등 여러 가지 사회 개혁 현안에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송시열의 '체이부정' '정이불체'에 놀란 정태화가 ''국제'을 쓰고 싶다'고 말한 것은 정태화 특유의 절충안이었다. '국제', 즉 '경국대전'에는 장자와 차자의 구별 없이 아들의 상사에는 부모가 모두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태화는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는데 '체이부정'따위의 말을 쓸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송시열도 한발 물러섰다.
  "사종지설을 인용하는 것이 불가하다면 그렇게 하지요. '국제'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대명률'도 장자.차자를 막론하고 모두 기년(1년)복을 입게 되어 있소. 이를 인용해 기년복으로 결정하면 근거도 있고 성인이 주나라를 따른 뜻에도 합당하지 않겠소."
  즉 속마음은 효종이 인조의 적장자가 아니라는 '체이부정'을 들어 1년복을 주장하고 싶지만 이는 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역공을 받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장자.차자를 구분 않고 1년복으로 정한 '대명률'과 '국제(경국대전)'를 인용하자는 말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편법으로 자의대비에게 1년복을 입히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로 한 것이다.
  송시열은 이 편법이 15년 후에 자신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성인이 주나라를 따른 뜻'이란 말은 공자가, "주나라의 문물이 하 나라나 은 나라보다 빛나므로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는 '논어'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문물이 높은 명 나라의 '대명률'을 따르겠다는 뜻으로서 친명 사대주의자다운 발상이었다. 정태화와 송시열이 합의한 사실은 곧 서인의 당론으로 확정되었다. 새로 즉위한현종도'대명률'과 '국제'에 1년복으로 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또 집권당인 서인들이 모두 1년설을 주장하므로 그대로 따르게 했다. 그러나 남인 윤휴는 송시열 못지 않는 자기 이론이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유학의 경전 해석 문제를 두고 송시열과 사문난적 논쟁을 벌인 구원이 있던 터였다. 그는 이시백을 통해 송시열의 논리를 듣고 다시 자신의 논리를 가다듬었다. 윤휴는 '의례주소'의 '내종은 외종과 같다(내종유외종)'는 소를 인용하며 재차 반론을 펼쳤다.
  "내종은 다 참최복(3년복)을 입으니 대비의 복은 마땅히 3년복이어야 합니다."
  송시열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종의 부녀는 모두신하이다. 따라서 임금에게 감히 촌수를 계산하지 못하고 모두 3년복을 입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왕대비는 선대왕(효종)께서 신하로서 섬기던 분이다. 어찌 신하인 내종의 다른 부녀들처럼 참최복을 입는단 말인가? 당연히 1년복을 입어야 한다."
  윤휴의 반박도 계속되었다.
  "주나라 무왕은 어머니이자 문왕의 비인 문모를 신하로 삼았다."
  주 무왕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은 전례가 있다는 말이었다. 이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이었다. 주나라 무왕은, "나는 열 명의 어진 신하가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으며 공자는 이에 대해 "그 중에 부인이 한 사람 있다"고 평했다. 하지만 무왕이나 공자는 그 부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아 후세의 학자들은 그 부인을 어머니인 문모로 보기도 하고 무왕의 아내인 읍강으로 보기도 하는 등 논란이 있던 조항이었다.
  박학한 송시열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송시열은 주자의 말을 인용해 반박에 나섰다.
  "주자가 이미 유시독 말을 인용해 '아들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의리는 없다'면서 '옛글에 있는 그 말은 어머니인 문모가 아니라 자기 처인 읍강을 뜻한 것이다' 라고 말했으니 후세 사람이 어찌 감히 주자의 이 말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윤휴 또한 지지 않았다.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인과 다르다" 논란이 격화되면서 곤혹스런 처지에 빠진 인물은 현종이었다. 그는 속으로 3년복이 맞다고 여겼겠지만 이 논란이 계속될 경우 왕실의 권위에 치명적 상처를 입을 수 있다고 여겼다.
  논란이 계속되고 논쟁이 효종의 정통성 여부에까지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우선 '국제'에 의거해 1년복으로 결정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또한 '국제'에 따른 1년복의 결정이 현종으로서도 크게 불리할 바 없다는 계산이 작용했다.
  현종은 '국제'에 장자와 차자의 구별이 없으므로 효종이 적통과 종통을 이은 인물로서 1년복을 입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즉적통에 따라 1년복을 입는 것이라고 자위했던 것이다. 내심으로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이 차자이기 때문에 I년복을 입는 것이라고 여겼다. 즉 현종은 명실상부하게 '국제'대로 한 것이라고 믿은 반면 서인은 겉으로는 '국제'를 인용했으나 속마음으로는 차자의 복인 '고례'를 적용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같은 1년복을 놓고 서로 달리 생각한 이 계산법의 충돌이 15년 후의 제2차 예송논쟁이었다. 그러나 제2차 예송은 17년 후의 일이고 당장 제1차 예송논쟁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