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북벌의 시대, 대동법의 시대(3)

구름위 2013. 6. 19.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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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의 군주 효종, 급서하다


  효종이 급서한 것이다. 효종 10년 5월 4일, 송시열과 독대한 지 두 달이 채 안된 시점이었다. 불과 두 달 전의 독대 때 최소한 10년 살 자신이 있다고 호언하던 효종이었다. 그때 효종의 나이 만40세의 장년이었으니 허언은 아니었다. 처음 효종의 발병 증세는 사소한 것이었다. 머리 위의 작은 종기가 원인이었던 것이다.
  '효종실록'에 병세가 처음 기록된 날은  그 해 4월 27일이었다.
  종기의 독이 점점 퍼져 얼굴에까지 번졌으나 '의원들이 그저 심상한 처방만 일삼고 있다'고 효종이 불평할 정도로 큰 병은 아니었다. 효종은 산침을 놓아 독기를 배설시켜야 한다는 처방에 따라 산침을 맞았다.
  이때 한 인물이 등장한다. 문제의 어의 신가귀였다. 당시 병으로 집에 있던 그는 효종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입궐해 처방을 내린다.
  "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농증을 이루려 하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낸 뒤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다른 어의 유후성이 말리고 나섰으나 효종이 침을 맞을 것을 결정했는데 신가귀가 침을 놓자 잠시 후 침구멍으로 피가 나왔다. 효종은 "가귀가 아니었다면 병이 위태로울 뻔했다"며 안도했다. 그러나 피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나왔으며 '효종실록'에는 침이 혈락을 범한 탓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효종은 침 맞은 자리에서 피가 계속 솟아 나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종기에 침을 놓은 신가귀는 수전증, 즉 손이 떨리는 증세를 있는 의원이었다. 이 부분에서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신가귀가 일부러 효종의 혈락을 범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전증의 어의가 옥체에 침을 놓는다는 것은 왕조국가에서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북벌군주 효종은 이렇게 손 한번 제대로 못 써보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허무한 노릇이었다. 그 누구도 예견 못한 급박한 사태였다. 훈련대장 이완이 훈련도감의 군병을 거느리고 궁성을 호위해야 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천추의 한을 남기고 떠나서인지 효종 사후에도 문제가 잇달았다. 첫번째 문제는 효종의 시신에 부기가 있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가 송시열을 불러 전교했다.
  "옥체에 부기가 있으니 어찌하리오."
  그녀는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로서 당시 효종보다 한 살 위인 만 41세였다.
  "이는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보통 초상에 부기가 극도로 되면 도로 빠집니다. 이제 대렴할 날이 멀었으니 그 전에 반드시 바로 될 것입니다."
  과연 다음날 저녁에 부기는 빠졌다. 이때 국상의 예법은 송익필->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지는 조선 예학의 계보를 이은 송시열의 자문을 받았다. 송시열은 소렴 때의 예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소렴할 때 끈을 매되 조르지 않고 그 얼굴은 덮지 않은 법입니다. 이는 효자가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릴 뿐만 아니라, 수시로 그 얼굴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가에서 끈을 졸라매는 것은 염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시신의 대소.장단을 재어 관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국상의 경우는 관이 예비되어 있으니 전례에 따라 졸라매지 말아야 합니다."
  영상 정태화와 송준길이 상의해서 끈을 졸라매되 단지 한두 마디를 빼어 효의 뜻을 표시하자고 절충해 그대로 시행했으나 문제는 끈을 졸라매느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송시열의 말대로 국상이므로 '관이 예비'되어 있었으나 그 관의 폭이 염한 시신보다 작은 문제가 발생했다. 두 번째 문제였다. 깜짝 놀란 송시열이 내시를 불러 말했다.
  "이 관에는 옥체가 들어가지 않을 듯하니 가는 댓조각을 가지고 시신을 재어 오라."
  내시가 재어 온 바로는 과연 시신이 관턱을 걸치고도 남았다. 임금의 관이 시신보다 작은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송시열이 영의정 정태화에게 알리니 여러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랐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염한 옷이 너무 두터운 때문인지 모른다고 생각해 손으로 만져 보았으나 아주 얇았다. 시신 썩기 쉬운 한여름에 두터운 옷을 입힐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어깨가 관보다 넓었다. 정태화가 세자에게 말했다.
  "망극한 가운데 더욱 망극한 일이 생겼습니다."
  망극하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결국 급한 대로 널판을 구해 잇대어 관을 크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연성군 이시방이 널판을 이어 이 문제를 겨우 해결했다. 국왕의 관을 재궁이라고 부른다. 관 자체가 궁이라는 뜻이다. 이런 재궁을 너덜너덜 하게 잇는 일이 성리학과 예학의 나라 조선에서 발생한 것이다. 훗날 송시열은 죽을 때 자신의 관도 덧붙인 널판을 이용하라고 유언했다. 효종의 관에 덧붙인 널판을 사용한 것이 미안하다는 뜻이었으나 그간 이 문제로 수많은 공격을 당한 결과이기도 했다. 뒤이어 벌어진 예송논쟁 때 남인 윤선도는 효종의 시신보다 관이 작은 연유나 시신에 부기가 있었던 까닭을 송시열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즉 송시열이 효종 시신의 염을 빨리 못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공격들을 뼈아프게 생각한 송시열이 자신의 관도 널판을 사용하게 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효종의 죽음이 가져온 파문은 시신의 부기와 시신보다 작은 재궁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장지도 문제가 되었다. 이세상에서 못다 한 일이 많은 효종의 한이 거듭 문제를 일으키는지도 몰랐다. 처음 효종의 장지를 결정한 인물은 풍수에 능한 전 참의 윤선도였는데, 그는 수원부 청사 뒷산등성이를 명당이라고 지목했다.
  "수원 호장 집 뒷산이 용혈로서 앞산과 물이 모두 좋아서 천 리 안에는 없는 명당이므로 영릉(세종의 능) 다음가는 곳이니 주자가 말한 바, 종묘의 제사를 영구하게 하는 계책은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지관들도 그곳이 길지라고 호응했다. 이에 따라 세자는 이곳을 장지로 삼기로 마음먹었으나 다른 대신들과 삼사에서 반대하고 나섰다. 영중추부사 이경석도 반대한 대신 중의 한 명이었다.
  "살아서 남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은 죽어서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농사 짓지 못할 땅을 선택해서 장사 지내는 것이 인인과 군자의 마음입니다."
  수원을 장지로 정하면 수원부를 옮겨야 하므로 군사들과 백성들의 고통이 클 것이라는 이유였다. 장지를 결정하는 데 풍수설을 좇을 것은 없고 그 땅이 길이 되거나 집터가 되거나 수해가 있는 등의 문제를 뜻하는 오한만 없으면 된다는 송나라 사마광의 이론을 딴 반대였다. 판의금부사 송시열도 반대하고 나섰다.
  "대행왕은 마음이 지극히 어질고 넓어서 두루 사랑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으나 그 중에서도 군사에 대해서는 특별했습니다. 그러므로 수원을 7천 병력의 주둔지로 만들어 가장 훌륭한 장수와 군사를 뽑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고을을 철거하고 그 농토와 가산을 파괴하여 그곳 사람들을 슬피 한탄하게 함은 결코 대행왕의 뜻이 아닙니다."
  효종의 장지 문제에 대한 송시열 등 서인들의 반대는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군비확장에 안민론으로 맞섰던 것처럼 송시열은 효종의 장지 역시 백성들의 생활을 명분으로 수원으로 정하는 데 반대했다. 이 자리에는 공교롭게도 약 100여 년 후 정조에 의해 효종의 현손인 사도세자의 현릉원이 조성된다. 이때 정조가 내탕금으로 이주 비용을 마련해 주자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이는 시행 의지의 문제이지 민생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더구나 정조가 현릉원을 이곳으로 옮긴 후 수원은 더욱 발전된 행정.군사의 중심지가 되었음을 볼 때 군사를 빗댄 반대론도 근거가 있는 반대는 아니었다.
  손 떨리는 어의가 침통을 잡는 것 하나 막지 못해 비명에 가게 하고 임금의 관 하나 제대로 마련 못한 신하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반대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서인의 세상이어서 효종의 능은 건원릉 오른쪽 산등성이에 정했다. 윤선도는 또 한번 정치적 패배를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15년 후인 현종 14년(1673)에 효종의 능인 영릉의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 하여 세종의 능 옆으로 옮겼다.
  이때 남인들은 이 모든 원인을 송시열의 탓으로 몰아 공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해 송시열이 무너지는 제2차 예송논쟁이 일어났으니 송시열과 효종은 좋든 나쁘든 죽어서도 끊어지지 않는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문제의 어의 이기선과 송시열


  그런데 효종 사망 다음달에 이기선이란 의관이 갑자기 엄형을 받은 일은 특기할 만하다.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 다름 아닌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이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지난달 초삼일 밤 입진 때, 의관 이기선이 많이 부어 있는 것을 보고는 감히 꽁무니를 뺄 생각으로 진맥할 줄을 모른다고 아뢰었는데, 만약 그의 말대로라면 작년 편찮으셨을 때는 어떻게 맥을 논했다는 말인가? 그의 정상이 매우 흉측 교묘하여 엄히 징벌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를 잡아들여 국문 처리하라."
  현종은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이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의 이기선이 갑자기 발을 뺀 것이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여긴 후왕 현종은 이기선이 원래 맥 짚는 법을 모른다고 발뺌하자 화를 냈다.
  "맥 짚는 법을 모른다면 어떻게 의원이 되었느냐?"
  현종은 엄형을 가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최고의 실력을 지닌 어의가 맥 짚는 법을 모를리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맥을 짚을 줄 모른다는 이기선의 말은 누가 들어도 어불성설의 변명이었다. 현종이 어의 이기선을 추궁한 것은 바로 이런 의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이기선을 옹호하고 나서는 인물이 송시열이었다. 이들은 현종 즉위년 6월 11일 정반대의 주장을 한다. 송시열과 정유성이 "이기선은 사실 맥 짚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옹호하고 나서서 그를 사지에서 구했다. 이기선은 송시열의 말대로 맥을 짚을 줄 모르는 의원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현종의 말대로 맥도 짚을 줄 모르는 인물이 어떻게 의원, 그것도 어의가 되었는지 의문이다. 이런 숱한 의혹들을 남긴 채 군사강국을 지향했던 효종은 세상을 떠났고 조선을 다시 송시열 등이 주도하는 극심한 문치의 나라로 돌아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