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북벌의 시대, 대동법의 시대(2)

구름위 2013. 6. 1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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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독대...효종과 송시열의 담판


  효종 10년(1659) 3월 11일은 태백이 낮에 나타난 날이었다. 이날은 효종과 송시열이 그 유명한 기해독대를 한 날이었는데, 사실상 이날 독대를 먼저 요구한 것은 송시열이었다. 효종이 바라던 바를 송시열이 먼저 제기한 것이었다. 송시열은 효종과 시사를 논하던 도중 효종에게 전가의 보도인 남송 효종의 예를 들며 독대를 요구한 것이었다.
  "송 효종이 당초에 큰일(중원 수복)을 하려는 뜻을 품고 장남헌(남송의 장식을 부를 때에 만일 전상에서 만나보면 혹시 엿듣는 자가 있을까 싶어서 뜰 가운데다 장막을 설치하고 그를 보았는데 좌우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가 이와 같아야만 큰일을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효종이 말했다.
  "근래에 경의 병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서로 만나보지 못해 늘 매우 답답하였다. 오늘은 자못 조용한 듯하니 경은 나가지 말라."
  효종은 승지 이경억에게 일렀다.
  "오늘은 승지가 먼저 물러가라."
  그리고 사관과 환관도 모두 물러가라고 분부했다. '효종실록'은 이때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송시열 혼자 입시하였는데, 외조에 있는 신하들은 송시열이 어떤 일을 말씀드렸는지 몰랐다."
  효종은 이날 내관(내시)에게 문을 열어 놓은 다음 나가게 했다. 엿듣는 사람이 없게 하려는 조치였다. 독대의 완벽한 조건을 갖춘 것이다. 그러나 이 날의 대화를 송시열이 기록해 놓았으므로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알 수 있으니 재연해 보자.
  흥정당에는 효종과 송시열, 두 군신만이 남아 있었다. 임금과 신하가 단 둘이 마주하는 것, 바로 독대였다. 독대는 조선에서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조선 500년 역사를 통틀어서 독대는 이때의 기해독대와 선조 때 유경영과의 독대, 그리고 숙종 때 이이명과의 정유독대(1717) 등 손에 꼽을 정도이다. 조선에서 독대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정치는 떳떳하게 공개된 상태에서 수행하는 공기이지 남이 볼까 두려워 밀실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사기가 아니라는 정치철학의 소산이었다.
  독대가 금지되는 정치원칙은 공작정치의 씨앗 자체가 자랄 수 없는 토대이다. 해방 후 한국정치에 독대가 횡행하고 공작정치가 거리낌없이 자행된 것은 '오야봉'이 '꼬봉'을 불러 신임을 과시하는 일제의 무사풍토에서 나온 일제 무단통치의 유산에 불과할 뿐 조선에서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던 일이었다.
  효종과 송시열 두 사람 사이엔 긴장이 흘렀다. 비상한 상황임을 둘은 잘 알고 있었다. 효종이 입을 열었다.
  "경과 조용히 대화를 하고 싶어 여러 달을 기다렸지만 끝내 기회가 없었다. 오늘은 내가 마음먹고 이 자리를 만든 것이다. 오늘은 나도 다행히 기운이 회복되었으니 내 뜻을 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잠시 말을 끊은 효종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현재의 대사(북벌)를 논의하기 위함이다. 저 오랑캐(청나라)는 반드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다. 예전의 한(청나라 황제 세조를 낮춰 부르는 말)은 그 형제들이 매우 번성했었는데 지금은 점점 줄어들었으며, 예전의 한은 인재가 매우 많았는데 지금은 모두 용렬하다. 예전의 한은 오로지 무예와 전쟁을 숭상했는데 지금은 점점 무사를 폐하고 중국의 문물을 본받고 있다."
  송시열 자신이 독대를 요구한 명분인 '큰일'이 북벌임은 잘 알고 있었다. 효종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오랑캐의 지금 상황은 경이 언제가 주자의 말을 빌어 말한 '오랑캐가 중원의 인재를 얻어 중국의 제도를 배우면 점점 쇠약해진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의 한이 비록 영웅이라고 하나 주색에 깊이빠져 있어 그 형세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신하들은 모두 내가 군사를 다스리지 않기를 바라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천시와 인사가 언제 맞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효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사권을 병조나 비변사에 맡기지 않고 직접 지휘하려 했는데, 그 목적도 물론 때가 되면 북벌을 단행하기 위함이었다.

 

효종의 계획...조선군이 들어가면 한족이 일어선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정예 포병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관(산해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다. 그러면 중원의 의사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효종의 북벌계획은 군사전략상으로 허황한 것이 아니었다. 포병 10만은 몇 십만보다 훨씬 위력이 있었다. 청나라는 겉으론 견고해 보여도 구조상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지배층은 만주족이지만 중하위 관료를 비롯한 대부분의 백성들은 한족이었다. 지배층인 만주족은 피지배층인 한족에 비해 수적으로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다. 현재의 인구비율로 따지면 약170분의 1에 불과하다. 중화사상을 지닌 피지배층 한족이 만주족에 대해 민족감정이 없을 수 없었다. 10만의 조선 포병이 기세를 올리며 선전하면 중국 각지에서 한족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면 소수의 만주족으로서는 조선군에 맞서 싸우는 동시에 한족을 상대하기에는 인원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 효종의 전략은 바로 이것이었다.
  실제로 기해독대 15년 후인 현종 15년(1674)에 한족 오삼계가 군사를 일으켜 중국 남방이 혼란에 빠지는 일이 발생하자, 유생 나석좌 등이 북벌하자는 상소를 올렸을 정도로 효종의 이 계획은 조선군이 힘을 갖추고 있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효종의 설명은 계속된다.
  "저들은 방비에 힘쓰지 않아 요동과 심양의 천 리 길에 활을 잡고 말을 타는 자가 전혀 없으니, 우리가 쳐들어가면 무인 지경에 들어가듯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저들이 우리나라의 조공품을 모두 요동과 심양에 쌓아두고 있다. 이는 이 물건들을 다시 우리의 것이 되게 하려는 하늘의 뜻인 듯하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붙잡혀 간 수만 명의 포로가 그곳에 억류되어 있으니, 어찌 내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효종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오늘의 대사는 과감하게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효종은 흉중에 감추었던 모든 계획을 말했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 송시열이 답할 차례였다.
  "전하의 뜻이 이와 같으시니 이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만대의 다행입니다. 하나 제갈량도 뜻대로 되지 않자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 세상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에 하나 차질이 생겨 오랑캐에게 나라가 망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찌 하시렵니까?"
  효종은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경이 나를 시험하는 말이다. 나는 내 능력이 대사를 수행하는 데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천리나 인심으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데, 어찌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 하여 스스로 포기할 수 있겠는가.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있으니 나는 나라가 망하는 불행한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하늘이 내게 부여해 준 자질이 그리 용렬하지 않는 데다가, 나로 하여금 일찍이 환란을 당하게 하여 부족한 면을 채워 주었고, 나로 하여금 일찍이 궁마와 진법을 익히게 하였으며, 나로 하여금 저들 속에 들어가 저들의 형세와 산천 지리를 익히 알게 하였고, 나로 하여금 적지에 오랫동안 있게 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였다.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하늘이 나에게 이러한 시련을 겪게 한 뜻이 우연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가하고 있다."
  소현세자의 심양 볼모 생활이 청나라가 주도하는 세상에 대한 화해 기간이었다면 봉림대군(효종)의 심양 생활은 청나라에게 복수할 정보를 수집하는 기간이었다. 봉림대군은 어떻게 하면 현실의 치욕을 씻을 수 있을까를 연구하면 궁마와 진법을 익히고 요동의 지리를 익혔다. 북벌은 이런 노력의 소산이 확신으로 승화된 신념이었다.
  "나는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10년을 기한으로 삼고 있는데, 앞으로 10년이면 내 나이 50이 된다. 10년 안에 이 일을 이루지 못하면 나의 지기가 점점 쇠하여 다시는 가망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도 경이 물러가기를 허락할 것이다. 그때엔 경이 물러 가도 괜찮을 것이다."
  효종은 신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자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임금이었다. 그는 북벌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몸의 기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여자 관계도 삼가는 인물이었다.
  "내가 내전에 들어가는 날은 혈기가 손상될 뿐만 아니라, 지기 또한 해이해져서 일을 처리하는 데 온당치 못한 일이 많아진다. 옛 사람들이 요절하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 여색과 관계가 있으니 진실로 무일의 경계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주색을 끊고 경계하여 가까이 하지 않은 결과 늘 정신이 맑고 몸도 건강해졌으니 어찌 앞으로 10년을 보장할 수 없겠는가."
  효종은 실제로 인선왕후 이외에 안빈 이씨라는 한 명의 후궁을 두었을 뿐이다. 효종은 대의를 위해 일상의 즐거움을 버릴 줄 아는 지사였다.
  "하늘이 나에게 10년의 기간을 허용해 준다면 성패와 관계없이 한 번 거사해 볼 계획이니, 경이 은밀히 동지들과 의논해 보도록 하라."
  효종은 각 신하들의 성향을 물었다.
  "내가 보기에 송준길은 함께 할 의사가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함께 할 뜻이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람은 기질이 약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 생각에 허적은 굳세고 용감하여 일을 맡길 수 있겠으나, 주색에 빠져 자못 행실이 좋지 않다고 하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내 일찍이 생각하기를 나와 이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자는 오랑캐의 손에 죽은 집안의 자제들 뿐이고 그밖의 사람들은 어렵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는 송시열의 종형 송시형이 강화도에서 순절한 것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다른 신하들이 북벌에 무관심하거나 북벌을 두려워하는 것을 질타했다.
  "내가 만수전을 지을 때 터잡는 일을 핑계로 몇 명을 만나 은밀히 시험해 보았는데, 모두 무관심하여 깊이 생각하는 자가 없으니, 이처럼 통탄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신하들이 모두 눈앞의 부귀만을 도모하면서 북벌을 하면 나라가 망하게 되는 듯이 두려워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말하면 모두 간담이 서늘해져서 놀라기만 하니, 나 혼자 부질없이 탄식할 뿐이다. 저들이 모두 자기 자손들을 위한 계획만 세우고 나를 도우려 하지 않고 있다."
  신하들에 대한 효종의 질타에 송시열은 정면에서 반박했다.
  "예로부터 제왕들은 먼저 자신을 닦고 가정을 다스린 뒤에야 법도와 기강을 세웠는데 이것이 일의 순서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혼잡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떨쳐버리지 못하시니 지기가 있는 선비들의 마음이 게을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으며, 뭇 신하들이 제 집안을 살찌우는 데에만 힘쓰는 것도 전하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진실로 심신을 깨끗이 하시어 잡다한 모든 일들을 일체 제거하시고 마음과 생각에 한결같이 이 일만을 위주로 하신다면, 신하들도 어찌 감히 나라를 위해 제 몸을 바치려 하지 않겠습니까?"
  송시열은 신하들의 부패와 안일을 효종의 책임으로 돌렸다. 효종으로서 이는 모욕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송시열의 이런 말까지도 받아들였다. 북벌을 위해서는 송시열의 지지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경의 말이 옳다."
  효종은 이렇게까지 양보했다. 하지만 송시열이 제시하는 대안은 그저 치자의 근본도리는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뜻의 '수기형가'이며 이것이 북벌의 선결조건이라는 말뿐이었다. 훗날 송시열이 반대당파로부터 '수기형가' 네 자로 북벌의 책임을 때우려 했다는 비난을 받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강빈은 과연 역적이었는가
  송시열을 비롯한 산당이 출사하며 명분으로 삼았던 것은 소현세자 빈 강빈에 대한 신원이었다. 강빈이 역모로 몰린 것은 억울한 일이니 신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이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했다.
  "강빈의 옥사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불평이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효종으로서는 강빈이 무고하다고 인정할 수는 없었다. 이 경우 자신의 왕통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이 문제는 여러 차례 해명한 터였다. 효종3년 4월에 부교리 민정중에게 설명했으며, 5월에도 여러 신하들에게 해명한 터였다. 물론 강빈이 역적이라는 해명이었다. 이때 효종는 "지금 역강(역적 강씨라는 뜻)을 구하려 하는 자들은 어찌 반역을 꾀한 자와 동등한 자가 아니겠는가"라며 화를 내 '여러 신하들이 모두 겁을 먹고 대답하지 못했다'라고 '효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는데, 그 7년 후에 송시열이 다시 거론한 것이다. 이때 효종은 송시열에게는 화를 내지 못했다.
  "내가 늘 경과 그 일에 대해 말하려 했는데 틈이 없어서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효종은 강빈을 악녀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비화 하나를 공개했다.
  "강씨의 못된 짓을 어떻게 한 입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내 한 예를 들을 테니 한번 들어보라.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짐승들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강씨는 그렇지 않았다. 소현세자가 돌아가셨을 때 대조(인조)께서 애통해 하시며, '이는 잠자리를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책망하시자, 강씨는 즉각, '모월 이후로는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발악했다. 그 후 자식을 낳게 되자 모월 이후로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말을 실증하기 위해 곧 자식을 죽이고 그 사실을 은닉하였다."
  강빈은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였음을 짐작하고 있었던 듯하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여 놓고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자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효종은 나아가 강빈이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했다.
  "강씨의 성품이 이렇듯 악독하니 그가 역모를 꾸민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 역모를 꾸민 것은 궁내에서만 알고 있는 것이니 밖의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이 일은 확연히 드러나 의심할 것이 전혀 없는데도 밖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원통해 하고 있으니 내 가슴이 실로 아프다."
  송시열은 강빈이 억울하게 죽은 증거로 인조의 전교를 들었다.
  "선왕의 전교에, '흉한 것을 땅에 묻어 저주하고 독약을 넣은 것은 '필시' 강씨의 소행일 것이다'라고 쓴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필시'라는 두 글자는 분명한 증거가 없는 것을 억지로 단정하는 말입니다. 분명한 증거가 없는 사람을 대역죄로 몰아 죽였는데 사람들이 원통해 하지 않을 리 있습니까? 지금 이 '필시'라는 두 글자 때문에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않고 있습니다."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의 자작극으로 의심받는 저주사건을 담은 전교의 허점을 송시열이 파고 든 것이다. 전교 자체가 강빈을 죄 없이 죽였음을 시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효종은 깜짝 놀라는 척했다.
  "그 점은 내가 아직 생각하지 못했는데, 과연 경의 말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강씨가 역모를 꾀한 일은 의심할 것이 없다."
  효종으로서는 애매하게 말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강빈이 무고라고 말하면 종통은 자신이 아니라 아직 살아있는 그녀의 아들, 즉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송시열의 진퇴양난


  독대라는 파격적 대우도 송시열을 북벌론자로 만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송시열로서도 고민은 있었다. 효종이 이토록 북벌을 호소하는데 정권을 위임받은 신하로서 북벌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효종이 그에게 중대한 정치적 양보를 한 이유도 여기 있었다.
  기해독대 때 효종은 심지어, "조만간 경에게 큰 임무를 맡기고 양전(이조판서와 병조판서)을 겸직하게 하려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파격적인 대우에는 조건이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북벌을 수행하라는 조건이었다.
  송시열이 북벌 자체를 반대한다면 효종은 어떤 위기가 닥치더라도 미련 없이 그를 버릴 것이다. 송시열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실권을 계속 유지하려면 북벌을 소리 높이 드높여야 했다. 하지만 송시열의 속마음에 북벌은 먼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었다. 송시열이 영의정 정태화를 찾은 것은 이런 모순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송시열은 며칠 후 실제 군사를 이끌고 북벌에 나설 것처럼 호언장담했다. 한참 호언하더니 말미에 지나가는 말처럼 정태화의 의견을 물었다. 정태화를 끌어들여 북벌의 책임을 지우려 한 것이다. 하지만 정태화는 송시열보다 처세에 능수능란한 인물이었다. 효종 10년3월 제수된 영상을 사양하려 한 것도 북벌의 시기에 영의정을 맡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는지 모른다. 정태화는 송시열이 자신을 끌어들여 북벌의 책임을 지우고자 하는 의도를 간파했다. 정태화의 대답은 이런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공(송시열)의 지략이 성상의 위임을 받아 천하의 대의인 대사(북벌)를 경영하시니 무슨 일인들 못하겠고. 나는 이미 늙고 무능하여 아무것도 도와드리지 못하지만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살아서 대감이 비상한 공을 세우고 천하에 대의를 펴는 것을 한 번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오."
  정태화의 이 말은 물론 거절이었다. 송시열이 실망한 낯빛이 되어 돌아가자 정태화의 아들이 물었다.
  "아버님은 지금 국제정세가 어느 때인데 북벌을 할 수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이 말에 정태화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언제 북벌한다고 말했더냐. 송대감이 북벌을 임무로 삼아 성상에게 무한한 위임을 받았으나, 시간이 흘러도 성공할 묘책이 없으니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그의 생각에 내가 북벌이 가망 없다고 하면 그 한마디를 구실 삼아 나에게 죄를 돌리고 자기의 발을 빼려는 것인데 내가 왜 남에게 팔린단 말인가. 그가 나에게 권모술수로 대하니 나 또한 권모술수로 답한 것이다. 우리 속담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라고 하지 않더냐."
  정태화와 그 아들의 대화는 북벌에 대한 조선 지배층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북벌을 효종 혼자만이 꾸는 꿈으로 여겼다. 청을 건국한 만주족이 조선보다도 인구가 적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효종처럼 청의 취약한 구조에 대한 분석도 없었다. 그저 북벌은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보편적 생각이었다. 송시열도 정태화와 마찬가지 생각이었으나 처지가 달랐다. 정태화는 북벌을 모른 척하면 되지만 송시열은 북벌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송시열은 대일통을 기치로 북벌을 소리 높이 외쳤지만 북벌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북벌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순간 효종과 맺은 암묵적 연합전선이 깨지기 때문이었다. 작은 것 하나까지 직접 챙기는 효종이 인사권과 행정권, 그리고 군사권까지 위임하며 맡긴 대임을 방기할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던 것이다. 이때 송시열을 위기에서 구해 주는 급박한 사태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