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인조반정, 그 비극의 뿌리(3)

구름위 2013. 6. 1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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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손 대신 동생을 후사로 세우는 인조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였다. 당시 종법에 따르면 당연히 소현세자의 맏아들 석철이 뒤를 이어 세손이 되어야 했다.
  세자시강원의 필선 안시현이 "원손을 세손으로 세우자"라는 상소를 올린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석철은 원손으로 불리고 있었다. 인조는 이 내용의 당연한 상소를 즉각 물리치면서 "이러한 소인의 행태는 내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다"라면서 안시현을 파직시켜 버렸다. 원손이 뒤를 잇게 하지 않으려는 인조의 속셈은 소현세자가 비명에 급서한 석달 후인 재위 23년 윤6월 2일 드러난다. 인조는 대신 및 정부의 당상.육경.판윤과 양사의 장관 16명을 인접한 자리에서 폭탄선언을 한다.
  "내게 오래 묵은 병이 있는데 원손이 저렇게 미약하니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는 원손이 아닌 다른 인물, 즉 대군을 후사로 삼겠다는 충격발언이었다. 자칫하다가는 훗날 조정에 피바람이 불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이럴 때의 가장 좋은 처신은 법과 원칙에 따르는 것이었다. 법과 원칙에 따르면 원손이 세손이 되어야 했으므로 당연히 반대가 잇달았다. 좌의정 홍서봉이 나섰다.
  "옛 역사를 상고해 보면 태자가 없으면 태손이 뒤를 이었으니 이것이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입니다. 상도를 어기고 권도를 행하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닐 듯합니다."
  영중추부사 심열, 판중추부사 이경여, 원손 사부 김육 등도 모두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인조는 영의정 김류를 끌어들였다.
  "이 일은 오로지 영상에게 달려 있으니, 경이 결단하라."
 후사를 정하는 일은 영의정의 권한이 아니라느 점에서 이는 인조와 반정 주역 김류 사이에 밀약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김류는 미리 계획한 대로 세조의 둘째 아들로서 보위를 이은 예종과 덕종의 둘째 아들 성종이 왕위를 이은 예를 들었다. 둘째 아들이 보위를 이은 예를 듦으로써 원손을 폐하고 대군을 세우려는 인조의 의중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우찬성 이덕형, 병조판서 구인후, 공조판서 이시백, 이조판서 이경석 등이 모두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원손을 폐하려는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대다수 신하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인조와 사전 밀약한 또 한 인물 낙흥부원군 김자점이 인조의 의중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 일은 성상의 깊고 원대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의당 속히 결정해야 할 일인데, 어찌 우물쭈물 미룰 필요가 있겠습니까?"
  인조가 기뻐하며 말했다.
  "그 말이 옳다."
  드디어 김류가 김자점과 한편임을 실토한다.
  "지금은 신민들의 기대가 모두 원손에게 있는데도 전하께서 이러시는 것은 반드시 바깥 사람이 알 수 없는 궁중의 일입니다. 그러니 성상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면 신이 어찌 감히 다른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인조가 드디어 자신의 본뜻을 밝혔다.
  "원손은 자질이 밝지 못하여 결코 나라를 감당할 만한 재목이 아니다."
  원손 사부 이식이 이 말을 반박했다.
  "진강할 때 보니 원손의 재기가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인조의 의사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우찬성 이덕형이 인조의 눈치를 보는 여러 신하들을 비판하고 나섰다.
  "오늘 성상께서는 비록 종사를 위해서라고 말씀하시지만 갑자기 하루아침에 이미 바로잡힌 원손의 명호를 바꾸려고 하시는데 뭇 신하들이 모두 바람에 쏠리듯이 따라 보린다면 장차 저런 신하들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인조가 한참 동안 묵묵히 있다가 물었다.
  "대신들의 뜻이 모두 일치하였는가?"
  김류가 대답했다.
  "이의가 없는 듯합니다."
  원손을 폐하고 대군을 세우자는 말이었다. 인조가 물었다.
  "자식이 둘이 남아 있으니 대신이 그 중에 나은 사람을 결정하라."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중에서 고르라는 말이었다. 신하들에게 다음 왕이 될 사람을 고르라는 이 한심한 하교에 홍서봉이 아뢰었다.
  "대군은 조신들과 서로 접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그 우열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상의 간택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은 다 용렬하니 취하고 버릴 것도 없다. 나는 그 중에 장자를 세우고자 하는데 어떤가?"
  김류가 맞장구쳤다.
  "장자로 적통을 세우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삼노라."
  이에 원손 석철이 폐위되고 봉림대군이 세자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원손의 자리를 대군으로 바꾸는 데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나라 사람들이 후사로 믿고 있던 원손이 폐립된다면 이는 자리를 빼앗기는 데서 국한되지 않고 목숨까지 빼앗길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며느리와 손자들을 죽이는 인조


  원손의 지위를 빼앗았음에도 세자 일가에 대한 인조의 분노와 저주는 끝나지 않았다. 인조의 저주는 이제 세자빈 강씨에게 향했다. 인조는 강빈을 얽어 넣기 위해 강빈 소속의 궁녀들을 고문하고 강빈을 고립시키기 위해 오라비를 귀양보내는 등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남편을 잃고 상심해 있는 며느리에 대한 인조의 저주는 급기야 인조 24년 정월 임금에게 올린 전복 구이에 독이 묻은 사건이 발생하면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인조는 이번에도 강빈에게 혐의를 돌려 궁인들을 내사옥에 하옥해 국문했으며 강빈을 후원 별당에 감금했다. 강빈의 일거수 일투족을 인조의 수하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강빈이 독을 넣는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조가 이미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라고 엄명하여 강빈의 수족을 완전히 묶어 놓은 상태였다는 점에서 이 사건도 인조의 자작극이었다.
  이번에도 강빈의 궁녀들이 정렬과 유덕이 하옥되어 압술과 낙형(인두로 지지는 것) 같은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들도 조작된 시나리오를 승인하기를 거부하고 고문 속에 죽어갔다. 그러나 인조는 연일 무고한 궁녀들이 죽어감에도 며느리의 목숨을 끊어 놓으려는 집요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전복 구이에 독을 넣은 사건도 오리무중에 빠진 후 인조는 비망기를 내리는데, 그 내용은 그 자신이 소현세자를 죽인 범인이며 저주사건과 독약 사건을 자작한 범인이라는 자백이나 다름없었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 적의를 만들어 놓고 내전의 칭호를 외람되이 사용하였다. 지난해 가을에 매우 가까운 곳에 와서 분한 마음 때문에 시끄럽게 성내는가 하면 사람을 보내 문안하는 예까지 폐한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이런 짓도 하는데 어떤 짓인들 못하겠는가. 이것으로 미루어 헤아려 본다면 흉한 물건을 파 놓아 저주하고 음식이 독을 넣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예부터 난신적자가 어느 시대나 없었겠는가만 그 흉악함이 이 역적처럼 극심한 자는 없었다. 군부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천지에서 하루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없으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품의해 처리하게 하라."
  강빈이 역적이라는 이 비망기는 그러나 인조 자신이 이 모든 비극의 주범임을 실토하는 자백서나 마찬가지였다. 저주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죄가 비망기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도 잊고 말았다.
  신하들은 물론 인조가 주범이고 강빈이 무죄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녀를 역적죄로 품의해 올리라는 인조의 명을 거부했다. 그러자 인조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위기의식을 조장했다. 병조판서를 궁중에 머무르게 하고 김자점을 호위청에 입직시켰으며 포도대장에게 궁궐의 엄중한 경비를 명했다. 이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후 강빈을 처형하라고 명했다.
  강빈을 처형하려는 이 명령에 대해 대사헌 홍무적 등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으나 인조는 요지부동이었다. 드디어 인조는 재위 24년 2월 강빈을 폐출하고 사사하라고 명했다. 이 명을 거두어달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인조는 끝내 자신에 의해 과부가 된 며느리에 대한 증오를 거두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사저로 쫓겨난 후 사약을 마셔야 했고 교명 죽책 등은 거두어 불태워졌다. 인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강빈의 형제들에게도 죄를 씌워 장살시켰다.
  소현세자에 이어 강빈마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도 세자 일가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강빈을 죽인 후 인조는 이전의 저주사건을 재심해 궁녀들을 고문함으로써 강빈의 친정 어머니까지 옥사를 확대시켰다. 결국 강빈의 어머니마저 처형당했다.
  인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석철을 비롯한 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인조는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해 제주도로 귀양갔던 이경여와 강빈을 죽이는 데 반발해 제주도로 유배다한 홍무적을 각각 남해현과 북쪽 변경으로 옮긴 후 세자의 아들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낸 것이다.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조선의 임금이 되어야 했던 석철은 인조 25년 7월 죄수의 몸으로 제주도에 도착했다. 이제 겨우 12세의 어린 나이였다. 이날 사관은 인조의 이런 처사를 개탄하는 글을 '인조실록'에 덧붙였다.
  "지금 석철 등이 국법으로 따지면 연좌되어야 하나 조그만 어린 아이가 무슨 아는 것이 있겠는가. 그를 독한 안개와 풍토병이 있는 큰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 두었다가 하루아침에 병에 걸려 주기라도 소현세자의 영혼이 깜깜한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지 않겠는가."
  이 사관의 우려대로 석철은 과연 다음해 9월 제주도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석철이 사망하자 사관은 인조를 직접 비난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석철이 역강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성상의 손자가 아닌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지친으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풍토병이 있는 제주도에 귀양 보내어 결국 죽게 하였으니, 그 유골을 아버지의 묘 곁에다 장사지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슬플 뿐이다."
  '인조실록'은 석철의 죽음을 풍토병 때문이라고 기록했으나 이 또한 독살의 혐의가 분분하다. 당시 지각 있는 사람들은 인조가 석철을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석철을 데려다 기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골대가 석철을 키운 후 자신을 폐위시키고 그에게 왕위를 줄 것을 우려한 인조가 석철을 그냥 둘 리 없었다. 청의 사신들은 돌아갈 때는 꼭 소현세자의 묘에 들려 참배하는 등 소현세자의 죽음을 슬퍼했으므로 인조는 석철이 더욱 두려웠던 것이다. 비록 석철이 독살이 아닌 풍토병으로 죽었다 해도 이는 어린 손자를 사지로 몰아 넣은 인조에 의한 타살과 다름없다. 그리고 세자의 둘째 아들 석린도 석 달 후 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사관이 이런 기록을 남겼을 정도이니 당시 사람들의 비난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자 인조는 그 책임을 나인 옥진에게 돌려 여러 차례 고문한 끝에 죽게 만들었다. 석철과 석린을 잘 모시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인조는 강빈을 사사한 지 3년 만인 인조 27년(1649)에 세상을 떠나고 봉림대군이 뒤를 이었으니 이가 바로 효종이었다.
  효종과 그 비의 죽음을 둘러싼 예송논쟁이 단순히 상복 착용기간을 둘러싼 이론논쟁이 아니라 정권의 정통성을 묻는 예각의 정치논쟁이었던 이유가 바로 인조의 종법을 무시한 이러한 후사책봉에 있었다. 소현세자의 뒤를 이을 적통은 봉림대군이 아니라 원손 석철이었다. 소현세자처럼 성인이 된 후 죽었을 경우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인조가 무리해가며 봉림대군을 후사로 결정했기 때문에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은 효종의 승통이 정당한 것이냐는 극도로 민감한 정치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소현세자 가족의 핏빛 참사 위에서 즉위한 임금이 효종이었기에 그와 그의 부인의 죽음을 둘러싼 상복 문제가 첨예한 당쟁의 소재가 될 수밖에 었었다. 인조가 강행한 효종의 승통이 정당한 것이냐에 대한 논란이 예송논쟁의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측면에서 조선말 당쟁을 말기적 증상으로 몰고 갔던 왕위 계승에 대한 논란은 인조와 서인정권이 자초한 것이었다. 증오에 휩싸여 종법을 무시한 왕위계승이 왕위계승의 적법성 논란을 불러일으킨 근본 원인이었다.
  당시 송시열을 비롯한 산림은 소현세자와 강빈의 불행 뒤에는 조귀인과 낙당의 영수인 김자점이 있다고 믿었다. 조귀인과 김자점은 사돈지간이었다. 조귀인 소생이자 인조의 외딸인 효명옹주의 남편 김세룡이 김자점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김자점의 낙당 또한 서인의 한 갈래지만 김집.송시열.송준길 등이 주도하던 산림은 당시만 해도 이런 정치 공작에 반대했다. 이때만 해도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강빈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선명성이 무기였던 산림은 강빈의 한을 풀어주는 '강빈의 신원'을 당론으로 삼았다. 효종과의 한판 격돌이 불가피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