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26년 역질로 10만명이상 숨져… “전쟁보다 끔찍”
◇김준근이 ‘기산풍속도첩’에서 묘사한 평양식 마마배송굿 장면. 마마(천연두)는 예로부터 가장 큰 공포의 대상으로 백성들에게 천연두는 엎드려 절하면서 “제발 가 달라”고 부탁하는 신의 존재로까지 격상됐다.
#1. 전쟁보다 무서웠던 전염병
전염병, 즉 역병(疫病) 또는 역질(疫疾)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5년 백제 온조왕 4년의 일이다. ‘삼국사기’ 온조왕에 관한 기록에는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생기고, 역병이 유행하였다’고 기록하여 당시 전염병이 들끓었던 시대상을 짧게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역병이나 역질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200여건 이상 달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최초의 기록은 1393년 3월 태조가 심혈을 기울여 창건한 절인 양주 회암사에 역질이 유행한 것이다. 회암사의 역질이 수개월간 계속되자 왕사(王師) 자초는 급히 거처를 광명사로 옮겼다.
“왕사(王師) 자초(自超)가 이르니 광명사에 거처하게 하였다. 처음에 자초가 회암사에 있었는데, 금년 봄에 이르러 회암사에서 역질이 발생했으므로, 자초가 연복사의 문수 법회(文殊法會)에 왔다가 법회가 파하고 난 뒤에 회암사로 돌아가지 않고 곡주의 불국장으로 가서 거처하였다. 여름에 회암사에서 역질이 크게 성하니 중들이 많이 죽었다.”(‘태조실록’ 태조 2년 7월 19일)
실록에는 이후에도 꾸준히 역질에 관한 기록들이 나온다. 태종 11년 5월에는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는 동안에 경외에 역질이 돌아 백성들이 많이 요사(夭死)하였다’고 하였고, 세종 4년 3월에는 ‘이달에 서울과 지방에서 큰 역질이 있어,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하는 등 역질의 유행은 끊이지가 않았다. 현종 12년 1월 3일에는 ‘경상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5100여명이었는데 역병이 잇따라 번져서 죽은 자가 200여명이었다. 소의 역질도 계속 심하게 번졌다’는 기록이 있고, 이해 8월에는 역질로 소 779마리가 죽었다.
전염병이 전쟁보다 무서웠음은 ‘현종실록’의 다음 기록에서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팔도에 기아와 여역(열병)과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 정도였는데, 삼남(三南)이 더욱 심하였다. 그리고 물에 빠지고 불에 타서 죽고 범에게 물려 죽은 자도 많았다. 늙은이들의 말로는 이런 상황은 태어난 뒤로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서 참혹한 죽음이 임진년의 병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현종실록’ 현종 12년 2월 29일)
◇조선 초 ‘악학궤범’에 등장하는 처용무의 한 장면. 처용무는 삼국시대 ‘역질’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1733년(영조 9)에는 전라도에 역질이 유행하여 2081명이 사망하였고, 1741년(영조 17) 7월에는 관서지방에 역질이 들어 3700명이 사망하였다. 당시 평안도 지역의 인구를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의 백성들이 희생된 것이었다. 1750년(영조 26)에는 전국에서 역질이 유행하였다. 실록에서는 ‘이때에 8도에 역질이 성하여 죽은 자가 즐비하였다’고 하여 당시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영조는 즉시 하교를 내렸다.
“시신을 묻어 주는 것은 왕정(王政)의 큰 일이다. 더군다나 경외에 역질이 치성하여 사망자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아 해는 이미 바뀌어 만물이 모두 봄기운을 타고 있는데, 아 우리 백성들은 친척·형제·고아·과처(寡妻)가 울부짖고 서러워하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저절로 처절해진다. 경외에 분부하여 죽은 자는 방법을 다하여 거두어 묻어 주고 산 사람은 특별히 구원하여 살려내게 하라.”
하교 사망자의 시신 수습과 산 자의 구휼 정책에 즉각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에도 사망자의 수는 급격히 늘어갔다. 경기에서 3487명, 강도(江都)에서 349명, 영남에서 1933명, 해서에서 46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엄청난 전염병의 폭풍이 조선을 휩쓸고 지나갔다.
조선 후기의 주된 전염병은 콜레라, 두창, 성홍열, 장티푸스, 이질, 홍역 등이었다. 이 중에서도 백성들을 가장 공포에 떨게 한 것은 콜레라와 마마라고도 불렸던 두창(천연두)이었다. 질병사 연구에 따르면 18, 19세기 전염병의 유행은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하는데, 조선 또한 이 유행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었다.
#2. 신(神)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던 마마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질병을 꼽으라면 무엇일까? 아마도 지금도 진단을 받으면 곧 사형선고를 연상하는 암일 것이다. 암이라는 존재에 대해 거의 몰랐던 조선시대, 가장 백성들을 두렵게 했던 병은 바로 천연두(天然痘)였다.
얼마나 공포의 대상이 되었길래 호환(虎患)보다도 무서웠고, 아예 ‘마마신’이라 하여 엎드려 절하면서 제발 가 달라고 부탁하는 신이 되어 버렸다. 천연두는 인공적인 인두(人痘), 우두(牛痘)가 생긴 후 천연적으로 생기는 병이라 해서 천연두라 불렀다. 두창(痘瘡), 두진(痘疹)이라 부른 것은 피부에 콩알만 한 돌기(疹)가 솟아 곪고 헐기(瘡) 때문이다. 마마가 무서웠던 것은 사망률이 높았을 뿐 아니라, 겨우 살아나도 병의 후유증으로 얼굴이 얽기 때문이었다. 곰보 자국이 생기는 것이다.
◇고위관료들의 초상을 모은 화첩인 ‘진신화상첩’ 중 일부. 화첩에 실린 22명 중 다섯 명의 얼굴에서 천연두의 후유증인 곰보 자국을 발견할 수 있는데, 상대적으로 의료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던 일반 백성의 태반은 얼굴이 얽었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는 ‘진신화상첩’이라는 선비들의 초상화첩이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그려진 인물 22명 중 오재소 등 5명의 얼굴에 선명한 곰보 자국이 나타나 있다.
고위 관료까지 지낸 사람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곰보였다면 의료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던 일반 백성들이 곰보였을 확률은 그만큼 높아진다.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의 초상화에도 마마 자국이 나타나며,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의 사진에서도 어렵지 않게 마마 자국을 찾을 수가 있다. 마마의 공포는 왕실에도 예외 없이 찾아왔다. 세종이 총애했던 막내아들 성녕대군은 마마로 14세에 사망하였고, 선조는 역시 마마로 아들과 손자를 잃었다. 숙종은 왕으로 재위하던 시절 마마를 앓아 큰 곤욕을 치렀으며,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는 마마로 세상을 떴다.
영조는 세제인 연잉군으로 있을 때인 1711년(숙종 37) 마마를 앓았다. 영조가 마마를 앓자, 영조와 함께 거처하는 중궁전(中宮殿: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의 거처를 옮겼다. 결국 인경왕후는 마마에 걸렸으나 곧 회복되었다. 이를 기념하는 별시(別試)가 행해졌을 만큼 마마는 무서웠다.
일반적으로 못생긴 여자를 뜻하는 박색(薄色)이라는 용어는 원래 얽었다는 뜻의 박색(縛色)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을 보면, 마마를 앓은 사람은 병에 걸린 것도 억울한데 그 흔적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으로 천시를 받는 이중의 아픔을 겪었음을 알 수가 있다.
#3. 역병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들
조선시대에도 역병이 유행하면 기본적으로 격리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한양에 역병이 발생하면 환자나 시체를 도성 밖으로 추방하는 조처를 일단 취하였다. 성 밖에서 역병에 걸린 환자를 전담하던 곳은 활인서(活人署)였다.
동소문 밖에 동활인서를, 서소문 밖에 서활인서를 두고, 의원(醫員)과 의무(醫巫)를 배치하였다. 평소에는 무의탁 병자를 돌보는 일을 맡다가, 역병이 유행하면, 따로 여막(廬幕)을 가설하여 환자들을 보살폈다. 활인서에서는 약물 치료보다는 죽 등의 음식물을 공급하여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귀신을 겁주어서 쫓아내는 방법도 동원되었다. 무당이 나서서 굿을 해서 몸에 악귀가 붙지 않도록 부채와 방울도 흔들고 장구도 치곤 했다. ‘무당내력(巫黨來歷)’이라는 책에는 마마신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한 무당의 노력이 그림과 함께 실려 있다.
역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여제(祭)가 상시적, 또는 임시적으로 베풀어졌다. 서울은 북한산에 여제단을 설치하여 청명, 7월 보름, 11월 초하루에 제사를 지냈다. 역병을 미리 예방하고자 함이었다. 역병이 유행할 때에는 국왕까지 나섰다. 1750년(영조 26) 전국에 역병이 돌아 사망자가 10만명에 이르자, 영조는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8도에 두루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숙종 역시 1708년(숙종 44) 3월 ‘역질이 치열하게 만연되었기 때문에’ 중신(重臣)을 보내어 경도(京都)의 산천과 성황당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지석영은 1885년 ‘우두신설’을 저술해 우두법 등 천연두 치료에 큰 업적을 남겼다.
굿을 하고 제사를 지내도 역병의 유행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결국은 의학적인 치료 방법들이 필요하였다. 허준은 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해 명의(名醫)의 반열에 섰으며, 숙종 때의 어의(御醫) 유상은 숙종의 두창을 치료한 공으로 종2품직까지 올랐다.
정약용은 천연두에 관한 이론을 집대성한 책인 ‘마과회통’을 남겼다. 정약용은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았고 자식들도 천연두를 앓았던 아픔을 겪었던 만큼 천연두 극복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규장각에 근무하면서 최신 의학 서적을 볼 기회를 얻었고 이것이 ‘마과회통’의 집필로 이어졌다. 근대에 들어와 천연두 극복에 앞장선 인물은 우두법을 처음 시행했던 지석영이었다. 1885년 지석영은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하여 천연두 치료에 공헌하였다. 의학자들의 노력은 난공불락과도 같았던 천연두의 벽을 결국에는 무너뜨렸던 것이다.
'역사 ,세계사 > 옛 우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조반정, 그 비극의 뿌리(2) (0) | 2013.06.19 |
---|---|
인조반정, 그 비극의 뿌리(1) (0) | 2013.06.19 |
역사 속 지도자들의 마지막 모습 (0) | 2013.06.19 |
박지원의 열하일기 (0) | 2013.06.19 |
왕실 국장의 절차와 기록들 (0) | 2013.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