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박지원의 열하일기

구름위 2013. 6. 19.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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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선비 3000리 길 열하에서 새 세상을 만나다

 

최근 연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직접 수정, 보완한 ‘열하일기’가 발견돼 학계의 화제가 된 바가 있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워낙 그 내용이 재미있어서 여러 종의 필사본이 나돌아 다닌 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아들이 직접 수정한 ‘열하일기’가 발견되었으니, 박지원이 일기를 쓴 진의를 보다 명확히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30년 전 아직도 청나라에 대한 복수 의식이 팽배했던 시절,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통해 이념보다는 개방과 소통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1. 국경을 건너면서

 

◇연암 박지원 초상.

‘열하일기’는 조선후기의 북학파 학자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1780년(정조 4) 청나라를 다녀온 후에 쓴 기행문으로 1783년에 완성되었다.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연을 맞아 재종형 박명원의 자제군관의 신분으로 청나라에 들어갔다가 견문한 내용을 쓴 것이다.

 

청나라에 대한 복수 의식인 북벌(北伐) 이념이 여전히 지배하던 시대. 박지원은 청나라 곳곳을 견문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귀국 후 그의 충격적 경험은 ‘열하일기’의 집필로 이어졌다. 애초의 목적지인 연경에 갔다가 당시 건륭제가 휴가를 취하고 있는 열하의 피서산장까지 갔기 때문에 제목을 ‘열하일기’라 한 것이다.

 

1780년 여름 동지사 박명원 일행은 청나라 건륭제가 있는 북경을 향해 압록강을 건넜다. 일행 중에는 박지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청나라 여행에 임하는 박지원의 기분은 처음 한껏 달아 있었지만 막상 국경에 다다르니 고향 생각도 나고 약간의 착잡한 마음도 있었던 듯하다.

 

“멀리 앞길을 헤어볼 때 무더위가 사람을 찌는 듯하고, 돌이켜 고향을 생각할 때는 구름과 산에 막혀 아득한지라 사람의 정리도 이럴 때는 느닷없이 떠오르는 가벼운 후회가 없지 못할 것이다.”(‘열하일기―도강록’에서)

 

◇‘연행도’ 제13폭 ‘유리창(琉璃廠)’. 연경 유리창의 화려한 가게들과 번화한 거리를 묘사한 그림이다. 2명의 인물이 각각 낙타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가운데 아래)은 조선에서 구경하기 어려운 낯선 풍경이다.


박지원의 여행 준비물은 그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고려하면 의외로 간단했다. “창대(昌大:박지원의 마부 이름)는 앞에 서고, 장복(張福:박지원의 하인 이름)이는 뒤에 붙었다. 안장에 걸린 양쪽 걸랑에는 왼쪽은 벼루, 오른쪽은 석경, 붓 두 자루에 먹 한 장, 공책 네 권에 ‘이정록(里程錄)’ 한 축, 행장이 이렇듯 간편하니 국경의 세관 검사가 엄하다 하더라도 염려 없었다.” 요즈음으로 보면 여행안내서와 필기구, 메모지만 단촐하게 준비하고 여행에 임한 셈이다.

 

박지원은 국경에서의 소지품 검사 광경도 자세하게 묘사하였다. “하인들의 경우 윗옷을 풀어 헤치기도 하고 바짓가랑이도 내리 훑어보며, 비장이나 역관의 경우에는 행장을 끌러 본다. 이불 보퉁이, 옷 보따리들이 강가에 풀어 흐트러지고 가죽 상자, 종이 함짝들은 풀섶에 나뒹구는데 서로 흘깃흘깃 쳐다보면서 저마다 수습하기에 야단법석이다.” (‘열하일기―도강록’에서)

 

압록강에서 국경을 넘을 때의 정경을 마치 현장을 보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박지원은 수색을 당해 체면이 손상된 것에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순순히 수색에 응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렇게 바랐던 국경을 넘었다.

 

◇‘열하일기’ 여정도.


#2. ‘천하의 두뇌’ 열하로 가다

 

박지원이 열하까지 간 여정을 대략 살펴보면 압록강에서 연경까지 약 2300여리, 연경에서 열하까지 700리로 육로 3000리의 긴 여행이었다.

 

거리도 거리려니와 끝없이 펼쳐지는 중원의 변화무쌍한 날씨는 여행을 힘들게 하였다. 그러나 박지원은 뜻밖의 행운에 모험을 즐기며 가는 곳마다 세심하게 여행스케치를 했다.

 

열하는 강희제 이후 중국 역대 황제들의 별궁으로 활용되었으며, 여름 최고기온이 24도를 넘지 않는 시원한 곳이었다. 그러나 열하로 가는 길은 험준한 지세에다 황제의 불 같은 재촉이 이어지면서 사신단 일행은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는 강행군을 하기도 하였다.

 

열하는 당시 북방의 오랑캐들을 제어할 수 있는 ‘천하의 두뇌’에 해당하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박지원은 이곳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동물, 몽골, 위구르, 티베트, 서양 등 이국문명을 접하면서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른 문화충격을 받게 된다.

 

◇중국 청나라 황제들을 위한 휴양지였던 허베이성 청더의 피서산장. 연암 박지원의 청나라 기행기인 ‘열하일기’의 열하가 바로 지금의 청더다.


여행 기간은 5월25일부터 10월27일까지 약 5개월간이었다. 한양→박천→의주→요양→성경(심양)→거류하→소흑산→북진→고령역→산해관→풍윤→옥전→계주→연경(북경)→밀운성→고북구→열하 등이 주요 행선지였다.

 

‘열하일기’는 독립적으로 전하는 경우 총 26권 12책으로 구성되었는데, 주요 구성은 1책 도강록, 2책 성경잡지, 3책 일신수필, 4책 관내정사, 5책 막북행정록, 태학유관록, 6책 환연도중록, 경개록, 황교문답, 반성시말, 찰십윤포, 7책 망양록, 심세편, 8책 혹정필담, 산장잡기, 9책 환희, 피서록, 행재잡록, 희본명목, 10책 구외이문, 옥갑야화, 금류소초, 11책 황도기략, 알성퇴술, 앙엽기, 12책 동란섭필 등이다.

 
#3. ‘열하일기’에 녹아 있는 박지원의 사상

 

◇박지원이 ‘열하일기’의 일신수필에서 언급한 청나라의 수레를 묘사한 그림.

 

“무릇 수레라는 것은 하늘이 낸 물건이로되 땅 위를 다니는 물건이다. 이는 뭍 위를 달리는 배요 움직이는 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우리 조선에도 수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바퀴가 완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궤도에 들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수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조선은 산과 계곡이 많아 수레를 쓰기에 적당하지 못하다고 한다. 이런 얼토당토않는 소리가 어디 있는가?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요,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 아닌가? 거리가 비좁고 산마루들이 험준하다는 것은 아무 쓸데없는 걱정이다. (중략) 그래도 사방의 넓이가 몇 천 리나 되는 나라에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이다지도 가난한 까닭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수레가 나라에 다니지 않는 탓이라 할 수 있다.”(‘열하일기―일신수필’ 중 ‘수레 만든 법식(車制)’에 관하여)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열하일기’ 곳곳에는 박지원의 북학사상이 진하게 배어 있다. ‘조선은 산과 계곡이 많아 수레를 쓰기에 적당하지 못하다고 한다’는 변명에 대해 박지원은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요,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 아닌가?”라 하여 수레를 만들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자세를 신랄히 비판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현대의 교통망 확보와도 흡사한 점이 있다. 1970년대 경제개발 기간 중 산을 깎고 터널을 뚫어 고속도로망을 확보한 것이 여러 측면에서 경제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과도 비슷한 이치이다. 수레를 단순한 교통수단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수레의 활용에서 비롯되는 도로망 건설 등 국가산업 전반의 발전을 꾀한 것이다.

 

청나라에 도착한 후에도 박지원은 가는 곳마다 보고 관찰한 내용들을 정리하여 ‘열하일기’에 담았다. 털모자에 대한 단상(斷想)을 담은 다음과 같은 글이 대표적이다.

 

◇박지원이 연경(베이징) 뒷골목에서 접한 뒤 크게 놀랐다는 요지경.


“우리나라에서 많이 쓰는 털모자는 다 이곳에서 나오고 있다. 털모자 점은 세 군데 있었는데, 한 점포가 40∼50칸씩이나 되고 모자 만드는 장인바치들이 백 명씩은 족히 될 것 같았다. 의주 상인들은 벌써 이곳에 우글우글 모여 모자들을 계약하고 돌아가는 길에 실어갈 모양이다. (중략) 모자는 사람마다 겨울에만 쓰다가 봄이 되어서 해지면 버리고 마는데, 천 년을 가도 헐지 않는 은으로 한 겨울만 쓰면 내버리는 모자와 바꾸고, 산에서 캐내는 한정 있는 은으로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땅에 갖다 버리니 그 얼마나 생각이 깊지 못한 일인가?”(‘열하일기―일신수필’ 중에서)

 

당시 털모자는 청나라에서 만들어져 겨울철 조선에 인기리에 수입되고 있었지만, 박지원은 털모자 수입에 대해 은을 낭비하는 행위라 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최근에도 일부 부유층을 상대로 하는 수입업자들이 외국산 모피나 명품 의류나 가방 등을 수입하면서 막대한 달러를 해외에 유출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박지원의 이야기가 결코 낯설지 않다.

 

◇‘열하일기’ 박종채본과 청 건륭제의 초상.


#4. 조선후기 최고의 베스트셀러

 

‘열하일기’는 조선후기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현재 내용이 조금씩 다른 ‘열하일기’ 필사본이 여러 종 남아 있는 것을 보아도 ‘열하일기’의 당시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열하일기’가 이처럼 유행한 것은 무엇보다 글이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지식인은 ‘열하일기’가 종종 턱이 빠질 정도로 웃도록 만드는 책이라고 평가한 바도 있다. 박지원은 조선의 토속적인 속담을 섞어 쓰기도 하였고, 하층 사람들과 주고받은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기록하기도 하였으며, 또 한문 문장에 중국어나 소설체 문체를 사용하는 등 당시 지식인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판에 박힌 글과는 전혀 다른 글을 쓰면서, 특유의 해학과 풍자를 가미하여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였다. 또한 박지원의 글에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고민이 녹아 있었기 때문에 의식 있는 지식인들의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박지원의 글은 문체와 그 내용의 파격성으로 인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국왕인 정조 역시 패관잡기를 불온시하고 순정문(醇正文)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였다. 정조는 직접 하교를 내려 박지원의 문장이 비속함을 지적하였다. 양반 신분질서에 대해 저항적인 성격을 지닌 그의 글이 널리 퍼진다면 사회 기강이 무너질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열하일기’는 연암이 세상을 떠난 약 80년 후인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다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열하일기’는 1911년 조선광문회에서 활자본으로 출간되면서 널리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북학사상의 선구자 박지원의 이름을 후대인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한여름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230여년 전 북학사상을 전파한 선구적인 지식인의 삶을 음미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