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왕실 국장의 절차와 기록들

구름위 2013. 6. 19.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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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승하하면 신료들은 3일동안 머리 풀고 음식 끊어

 

◇최근 공개된 고종 황제 국장 모습. 죽안거마 등 국장 행렬이 종로 일대를 지나자 백성들이 지붕 위에까지 올라가 대한제국 첫 황제의 마지막 길을 참담하게 바라보고 있다.


#1. 국왕의 죽음에 관련된 의식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국왕이나 왕비, 태상왕(비), 세자(빈), 세손(빈)이 사망하면 그 장례를 국상으로 치렀다. 그렇지만 국상에 대한 표현은 대상자에 따라 달랐다. 국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國葬)이라 일컬었고, 세자와 세자빈의 장례는 예장(禮葬), 황제의 장례는 어장(御葬)이라 했다. 또한 사망을 표현하는 말도 대상자에 따라 달랐다. ‘예기’를 보면 천자는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大夫)는 졸(卒), 사(士)는 불록(不祿), 서민은 사(死)라고 규정했다. 조선의 국왕은 제후에 해당하므로 ‘훙’이란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통상 “상(上)이 승하(昇遐)하였다”고 표현했다. 왕이 가장 많이 사망한 공간은 왕의 침전이었다. 창덕궁의 침전인 대조전에서는 성종, 인조, 효종, 철종 등이 승하했다.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그의 아들이자 대한제국 두 번째 황제인 순종황제(가운데)가 상주 역할을 하고 있다.


왕의 병이 깊어 죽음에 임박하면 유언을 듣게 되는데, 이를 고명(誥命)이라고 한다. 대개 왕의 신임을 받는 측근 신하가 고명을 받아 왕의 유교(遺敎)를 작성한다. 고명을 받은 신하를 고명대신이라 하였다. 왕이 사망하면 머리를 동쪽을 향하도록 눕히고, 내시가 솜을 입과 코 위에 놓고 숨을 쉬는가를 살폈다. 사망이 확인되면 내시가 왕이 평소 입던 옷을 가지고 궁궐 지붕에 올라가 용마루를 밟고 세 번 “상위복(上位復)”이라 외친다. 이는 떠나가는 국왕의 혼령에게 돌아오라고 부르는 것이다.

 

왕이 사망하면 왕세자 이하 신료들은 머리에 썼던 관과 입었던 옷을 벗고 머리를 풀었다. 그리고 흰색 옷과 신발, 버선을 착용하며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세종실록’에는 “졸곡(卒哭) 뒤에도 오히려 소선(素膳)을 하시어 성체(聖體)가 파리하고 검게 되어 여러 신하들이 바라보고 놀랍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또 전하께서 평일에 육식이 아니면 수라를 드시지 못하는 터인데, 이제 소선한 지도 이미 오래되어 병환이 나실까 염려됩니다”(세종 4년 9월 21일)라고 하여 육식을 무척이나 즐겼던 세종이 국상 때문에 음식을 들지 못해 신하들이 걱정한 기록이 보인다.

 

졸곡 때까지 궁중의 모든 제사와 음악 연주가 중지되며, 이후 삼년상이 끝날 때까지 사직 제사만 올리고 음악은 대사(大祀) 때에만 연주하였다. 또한 민간에서도 국왕의 사망을 애도하기 위해 5일 동안 시장이 열리지 않으며, 결혼과 도살이 금지되었다. 망자에 대한 최대한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왕의 죽음이 확인된 후에는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고 의복을 갈아입히는 습(襲), 옷과 이불로 시신을 감싸는 소렴(小殮)과 대렴(大斂)이 진행되었다. 대렴이 끝나면 시신을 넣은 재궁(梓宮: 가래나무로 만든 왕의 관)을 빈전에 모셨다. 일반인의 상례 때에는 빈소에 관을 그대로 두지만, 국장에서는 ‘찬궁’이라는 큰 상자를 만들어 그곳에 재궁을 모셨다. 찬궁의 사면에는 청룡(동)·백호(서)·주작(남)·현무(북)의 사신도(四神圖)를 그려 넣었다. 국왕이 사망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대신을 사직과 종묘에 보내 국왕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아뢰었다.

 
#2. 국왕의 장례 절차

 

◇능역 조성의 기본 풍수 설명도.

성복(成服: 상주가 상복을 입음)은 대렴을 한 다음날 거행하며, 새 국왕의 즉위식은 성복이 끝난 후에 치렀다. 새 국왕은 전 국왕의 장례 절차가 한창 진행되는 도중 간략한 의식을 거쳐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조선시대 왕의 즉위식은 흔히 상상하듯이 매우 화려하고 기쁜 의식이 아니었다. 선왕의 장례식이 중심 의례였기에 오히려 슬픔이 교차하는 의식이었다. 새 국왕은 즉위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만 상복에서 면복(冕服: 예복)을 갈아입었다. 다만 태종이 상왕으로 있으면서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세종의 즉위식과 스스로 왕에서 황제임을 선포한 고종의 황제 즉위식은 활기 넘치는 즉위식이 되었다.

 

국왕이 사망한 다음 달에는 새 국왕이 전 왕의 묘호(廟號: 종묘에 신주를 모실 때의 호칭), 능호(陵號: 왕릉의 호칭), 시호(諡號: 생전의 공적을 칭송하는 호칭)를 정하여 올리게 하였다. 영조를 예로 들면, 묘호는 영종(英宗: 영종이 영조로 바뀐 것은 고종 때이다), 능호는 원릉(元陵)이었다. 또한 국왕의 평생 행적을 기록한 행장(行狀)과 책문(冊文), 비문(碑文), 지문(誌文)을 고위 신료들이 분담하여 작성하였다. 이때에 작성된 글들은 ‘조선왕조실록’ 각 왕의 기록 마지막 부분에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발인(發引)이 시작되면, 국왕의 관은 궁궐을 떠나 노제(路祭: 길에서 지내는 제사)를 거쳐 장지에 이르렀다. 산릉도감이 미리 조성해 놓은 왕릉 자리에 도착하면 관을 정자각(丁字閣)에 모시고, 찬궁에서 관을 꺼내어 하관하였다. 하관에는 사전에 설치해 둔 녹로 등의 기계를 이용하였다. 왕릉 조성이 끝나면 우제(虞祭: 시신을 매장한 후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고, 가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왔다. 가신주를 안치하고 나면 왕실의 장례를 주관한 관청인 국장도감은 그 업무를 종결하고 해산되었다. 그러나 국장 의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가신주를 혼전에 모시고 삼년상(대략 27개월 정도)을 지냈으며, 이 기간이 끝나면 혼전에 모신 가신주를 꺼내어 종묘 터에 묻고 새 신주를 만들어 종 묘에 모셨다. 이를 부묘라 하였다.

 

◇고종 황제의 시신을 실은 대여가 동대문 인근을 지나고 있다.


국장이 끝나면 국장도감, 빈전도감, 산릉도감, 혼전도감, 부묘도감 등 각 도감(都監)에서 의궤를 작성하였다. 도감은 장례의 집행을 담당하는 임시 관청이었다. 국장 관련 도감으로는 장례를 총괄하는 국장도감(國葬都監),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을 설치하고 염습과 복식을 준비하는 빈전도감(殯殿都監), 무덤을 조성하는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설치되었다. 오늘날의 장례의식으로 말하자면 장례를 총괄하는 집행부는 국장도감,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는 일은 빈전도감, 능을 조성하는 작업은 산릉도감이 담당했던 것이다.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는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일부. 
 
#3. 의궤에 기록된 국장의 모습

 

국장에 관련한 도감이 부서별로 설치되고, 의식이 끝난 후 관련 의궤가 다양하게 제작된 것은 국장을 엄수하는 것을 최고의 예법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국장도감의궤’에는 재궁, 각종 수레, 책보(冊寶), 각종 의장, 제기의 제작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였고 말미에는 국장 행렬을 담은 반차도(班次圖)를 그렸다. ‘정조국장도감의궤’의 기록을 보면, 반차도는 발인하기 약 10일 전까지는 완성하여 확인을 받도록 하였다. 엄숙하고 장중하게 치러야 하는 행사였기에 수많은 참가자들은 미리 반차도를 통해 도상연습을 하고, 행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숙지하였던 것이다. 1780년에 있었던 정조의 국장 행렬을 그린 반차도는 총 40면에 걸쳐 그려져 있고 1440명의 인원이 나타난다. 1897년의 명성황후 국장 반차도에는 총 78면에 2035명의 인원이 동원된 것으로 그려져 있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이후 황실 행사였으므로 그 규모가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정조대왕국장도감의궤’ 중 ‘능행반차도’.

 

국장 행렬의 주요 장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행렬의 중간, 화면의 중앙부에 향로를 실은 가마를 앞세우고 각종 의장물과 악대가 지나가며, 붉은 일산(日傘) 다음에 12명의 시위 별감이 인도하는 신연(神輦: 국왕의 가신주를 모신 가마)이 삼색의 촛불을 켜고서 지나간다. 장례가 끝나면 이 신연에 실린 신주는 다시 궁궐로 돌아오게 된다. 다시 여러 개의 채색 가마가 지나가는데, 여기에는 각종 제기 및 장례에 사용하는 집기류를 싣고 있다. 그림 하단에 그려진 4인의 방상시(方相氏)는 악귀를 쫓는 역할을 하였다. 방상시 뒤로는 수십개의 만장이 늘어섰는데, 만장은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담은 휘장이다. 의장물인 죽산마(국왕과 왕비의 장례에 쓰인 말 모양의 제구)와 죽안마를 실은 수레가 지나가는 것도 보인다.

 
◇조선 정조의 장례 절차 등을 기록한 ‘정조대왕국장도감의궤’ 중 반차도 일부.


행렬의 중심에 등장하는 것은 견여(肩轝)와 대여(大轝)이다. 140여명이 메고 가는 견여는 국왕의 시신이 들어 있는 재궁을 대여(大轝)에 올리고 내릴 때나 좁을 길을 갈 때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마이다. 견여 다음에 향로를 실은 향정자와 국왕의 이름을 밝힌 명정(銘旌)을 앞세우고 대여가 지나간다. 대여는 국왕의 시신이 있는 가마이다. 견여보다 규모가 크며, 행렬의 가장 중심이 된다. 대여의 양옆에는 24명의 군사가 등불을 밝히고 그 바깥에는 호위 군사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앞에서는 12명의 별감(別監)이 호위하고 있다. 대여의 후미에는 국장도감의 각급 관리와 중앙 관청의 관리들이 따라가며, 다시 만장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곡(哭)을 담당하는 궁녀 10명이 지나간다. 행렬의 후반부에는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의 관리들이 지나가고, 행렬의 맨 뒤에는 후미에서 경호를 담당하는 병력인 후상군(後廂軍)이 배치되어 있다.

 

국장 관련 기록은 ‘국장도감의궤’ 이외에 다른 형식의 의궤로도 정리되었다. ‘빈전도감의궤’에는 염습·상복·빈전에 소용되는 물품 등을 기록하였고, ‘산릉도감의궤’에는 공조판서의 지휘 하에 왕릉 조성의 토목공사, 왕릉에 배치되는 각종 석물, 왕릉 주변의 식목(植木) 등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혼전도감의궤’에는 혼전의 조성에 관한 내용을, ‘부묘도감의궤’에는 국왕의 신주를 만들어 종묘에 부묘(?廟)하는 과정을 기록으로 담았다.

 

조선시대 왕실의 국장은 최대의 예법을 다하여 엄수되었으며, 의식별로 의궤를 작성하였다. 당대에는 물론이고 현재 남아 있는 의궤 중에서도 국장에 관한 의궤들이 가장 많다. 이들 기록은 후대에도 널리 국장 의식을 계승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현재까지 조선시대 국장의 현장 모습들을 생생히 접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