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겸재의 예술혼

구름위 2013. 6. 19.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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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한강… 진경산수의 ‘진수’와 함께 古都 서울 여행을

 

◇겸재 정선 ‘경교명승첩’의 ‘청송당’.

 

#1. 진경산수화의 중심, 겸재 정선

 

이번 특별전의 중심인물은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이다. 정선은 흔히 조선에 진경산수화풍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의 산천이 아닌 조선의 산천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다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진경시대란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조선 고유의 진경문화를 이루어낸 시기이다. 대개 숙종시대부터 영조시대까지인데 정선이 활동한 영조대는 진경시대 중 최고의 전성기였다. 


정선은 아버지 시익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현재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경복고등학교가 위치한 북악산 서남쪽 기슭에서 태어났다. 정선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인왕제색도’와 같이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 많은 것은 그의 근거지가 바로 인왕산 일대였기 때문이다. 정선은 인근에 살던 안동 김씨 명문가인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성리학과 시문을 수업 받으며 이들 집안과 깊은 인연을 쌓아갔다. 안동 김문은 그를 후원했고, 정선은 감사의 뜻으로 김문의 주거지인 ‘청풍계(淸風溪)’를 여러 번 그렸다. 청풍계는 정선의 그림 중에도 가장 걸작으로 손꼽힌다, 현재에도 청풍계가 위치했던 곳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청운초등학교 건너편 어느 주택 안 담벼락에 남아 있는 이 글씨에서 청풍계의 옛 자취를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가 있다.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정선은 안동 김문의 후원과 더불어 국왕인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예술에 상당한 조예를 지니고 있던 영조는 정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꼭 호로만 부를 정도로 그 재능을 아끼고 존중했다고 한다. 1733년 영조는 정선을 경상도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는 청하현감으로 임명했다. 정선의 나이 58세 때였다. 65세 때에는 현재 서울에 편입된 경기도의 양천현령에 임명되어 서울 근교의 명승들과 한강변의 풍경들을 화폭에 담았다. 1747년에는 금강산 여행을 다녀온 후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을 남겼다.

 
정선은 80세 이상 장수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그의 붓끝에서 조선의 산하가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생생한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그가 80세를 넘길 즈음에는 거의 모든 집에서 그의 그림을 소장할 만큼 화가 정선의 위상이 높아졌다. 정선은 ‘인왕제색도’나 ‘금강산전도’와 같이 우람하고 힘찬 산수화는 물론이고 섬세한 붓 터치가 돋보이는 ‘초충도(草蟲圖)’에 이르기까지 회화의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였다. 정선을 김홍도, 신윤복과 함께 조선후기 3대 화가로 손꼽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2. 정선이 그린 300년 전의 서울 풍경들

◇겸재 정선 ‘경교명승첩’의 ‘시화상간도’는 오랜 벗인 겸재와 사천 이병연이 마주앉아 시와 그림을 주고받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정선이 그린 그림 중에는 18세기 한양과 그 주변 풍경을 담은 그림들이 돋보인다. 인왕산에 있던 자신의 집을 배경으로 한 ‘인곡유거(仁谷幽居)’와 이곳에서 쉬고 있는 정선 자신의 모습을 그린 ‘독서여가(讀書餘暇)’를 비롯하여 ‘백악산’ ‘대은암’ ‘청송당’ ‘자하동’ ‘창의문’ ‘백운동’ ‘필운대’ ‘경복궁’ ‘동소문’ ‘세검정’ 등은 300년 전 서울의 풍경화 그 자체이다. ‘청송당’의 그림에 그려진 큰 바위는 현재 경기상고 안에 그대로 남아 있어 정선의 그림이 진경산수임을 실감나게 한다.

 

제목 그대로 서울과 주변의 명승을 담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한양의 주변 지역의 모습이 담겨 있다. 양수리 부근에서 한양으로 들어와 행주산성까지 이르는 한강과 주변의 명승지가 30여점의 그림으로 형상화되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림을 그린 배경도 흥미롭다. 65세인 1740년 정선은 양천현령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벗 사천 이병연(李秉淵:1671∼1751)에게 이런 제안을 하였다. “그대가 시를 지어 보내면 나는 그림을 그려 화첩(畵帖)을 만들겠다.” 그리고 제안은 결국 1741년 ‘경교명승첩’ 2권으로 완성을 보았다. 이 화첩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컸던지 정선은 “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千金勿傳)”는 인장(印章)까지 남겨 두었다.

 
‘경교명승첩’은 한강 상류의 절경을 담은 ‘녹운탄(綠雲灘)’과 ‘독백탄(獨栢灘)’에서 시작한다. ‘탄’은 ‘여울’이란 뜻으로, 현재의 양수리 부근으로 추정된다. 한강 상류에서 시작한 그림은 현재의 서울 중심으로 향한다. ‘압구정(狎鷗亭)’은 조선초기 세도가 한명회의 별장 주변을 담은 그림이다. 그림의 중앙부 우뚝 솟은 바위 위에 별장이 위치하고, 백사장이 길게 뻗어 나온 모습이나 돛단배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은 최고급 아파트가 들어선 현재와는 너무나 다른 평화로운 풍경들이다.

 

◇겸재 정선의 ‘독서여가’는 인왕산 자락 자택에서 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광진’과 ‘송파진’, ‘동작진’의 그림들은 18세기에 이 지역이 포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작진’에는 18척의 많은 배가 그림에 등장하며 바다와 강을 왕래하는 쌍돛대를 단 배도 등장하고 있다. 물화(物貨)의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한강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행호관어(杏湖觀漁)’에는 고깃배가 등장하는 점이 흥미롭다. ‘행호’는 지금의 행주산성 앞 한강으로 이 일대에 많은 고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한강의 명물이었던 웅어는 바닷물과 민물이 합류하는 곳에 살았으며, 웅어는 그 맛이 뛰어나 왕에게 진상하는 물품으로 사용되었다. ‘행호관어’에는 웅어가 뛰어놀았던 한강의 운치가 느껴진다.

남산의 풍광을 그린 ‘목멱조돈(木覓朝暾)’은 이병연이 보내온 ‘새벽 빛 한강에 떠오르니, 언덕들 낚싯배에 가린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 떠오른다’는 시에 맞추어 남산에 떠오른 일출의 장관을 그린 것이다. 정선과 이병연이 약속한 시화상간(詩畵相看:시와 그림을 맞바꾸며 감상함)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