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잃어버린 문화재 '외규장각 의궤'

구름위 2013. 6. 19.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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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올 날 기다리는 조선 기록문화의 진수

 

최근 문화재 2점의 경매를 둘러싸고 중국과 프랑스 간 외교마찰이 일어나고 있다. 쟁점이 된 문화재는 청나라 원명원(황실의 여름 별장)에 보관되어 있다가 제2차 아편전쟁 때 프랑스가 약탈해 간 쥐머리상과 토끼머리상 등 십이지동상 2점이다. 중국 정부는 약탈문화재는 원래 소유국에 반환돼야 한다는 입장에서 경매를 주도한 프랑스 측을 강하게 비난했고, 결국 중국인 수집상이 이 청동상을 고가에 낙찰받은 뒤 약탈문화재라는 이유로 대금 지급을 거부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1866년 프랑스가 약탈한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병인양요 때 불에 타 사라진 외규장각을 복원하기 위해 1891년 만들어진 ‘강화부 궁전도’.

 

#1. 외규장각의 설치와 어람용 의궤의 보관

 

규장각은 정조 이후 그 위상이 커지면서 열성조의 어제, 어필을 비롯해 국가의 주요한 행사 기록을 담은 의궤, 각종 문집 등 조선후기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들을 간행하고 이를 보존해 왔다. 규장각을 중심으로 편찬활동과 서적 보관에 힘을 기울이던 정조는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지을 것을 명했다. 더욱 안전하게 왕실의 기록물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역사적 경험상 궁궐 내에 국가의 중요 기록물을 보관하는 것이 불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1782년(정조 6년) 2월 ‘강화도 외규장각 공사의 완공’을 알리는 강화유수의 보고가 올라왔다. 1781년 3월 정조가 강화도에 외규장각의 기공을 명령한 지 11개월이 지난 즈음이었다. 이를 계기로 강화도 외규장각에는 어첩, 어필, 의궤 등 왕실 관련 자료들을 집중적으로 보관했으며, 이후 외규장각은 100여년간 조선 왕실의 보물창고로 자리 잡게 됐다.

 

1784년에 편찬된 ‘규장각지(奎章閣志)’에 따르면 외규장각은 6칸 크기의 규모로 행궁의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외규장각은 조선후기 문화운동을 선도했던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됐다. 이곳을 ‘규장외각’ 또는 ‘외규장각’이라 이름을 붙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외규장각에 보관된 자료 중 현재 국제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 자료가 의궤(儀軌)이다. 의궤는 의식과 궤범을 뜻하는 말로, 조선시대 왕실 행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그림으로 남긴 국가기록물이다. 의궤는 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와 사고에서의 보관을 위해 제작하는 분상용 의궤가 있었다. 어람용 의궤는 더욱 안전한 보관을 위하여 정조시대 이후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보관했다.

 

왕에게 직접 바치기 위해 제작된 만큼 어람용 의궤는 표지와 종이 질, 선명한 글씨 등 문화재로서도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어람용 의궤는 종이로 고급 초주지(草注紙)를 사용하고 사자관(寫字官)이 해서체(楷書體)로 정성을 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했다. 어람용은 책을 엮는 장정 또한 철저했다. 놋쇠 물림(경첩)으로 묶었으며, 원환, 5개의 국화동(菊花童) 등을 사용하여 장정했다. 표지는 비단으로 화려하게 만들어서 왕실의 품격을 한껏 높였다. 분상용 의궤에는 초주지보다 질이 떨어지는 저주지(楮注紙)가 사용되었으며, 검은 선을 두르고 표지는 삼베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장정에는 정철(正鐵)과 박을정(朴乙丁) 3개가 사용됐다.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고려궁터에 복원한 외규장각의 모습.

 

#2. 1866년, 외규장각 의궤를 약탈당하다

 

외규장각의 책 중에서도 프랑스 군인들의 눈을 특히 자극한 것은 의궤였다. 채색 비단 장정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돼 눈에 확 들어왔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을 방화하는 과정에서도 의궤는 불태우지 않았다. 화려하고 품격이 있는 의궤의 장정과 비단표지, 그리고 의궤에 그려진 채색그림이 지닌 가치와 예술성이 벽안의 눈에 번쩍 띄었기 때문일 것이다. 방화된 대부분의 책과 달리 300여책의 의궤는 프랑스군의 퇴각과 함께 약탈당했다. 당시 화염에 휩싸였던 외규장각은 아직도 조선왕실의 위용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 프랑스에는 외규장각에서 유출된 의궤 297책이 보관돼 있다.

 
한국과 프랑스 간에는 의궤의 현지 실제 조사, 반환 협상이 꾸준히 추진됐으며, 최근에는 외규장각 의궤의 디지털화 사업 등을 합의해 2008년 유일본 의궤 30책과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반차도 50면, 원래의 비단 표지를 한 의궤의 앞뒤 표지 등에 대한 디지털화가 완료되기도 했다.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다가 방화로 사라진 의궤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광해군대 과학과 천문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흠경각영건의궤’와 ‘보루각수개의궤’를 들 수 있다. 이들 의궤는 현존하고 있지는 않지만, 광해군대에 과학기기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의궤는 국가기록물인 만큼 불상이나 미술작품 등 감상을 주로 하는 물품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한마디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 연구에 매우 필수적인 자료이다. 특히 계기적으로 조선 왕실의 행사 변화를 연구하는 데 매우 소중하다. 또한 어람용 의궤는 그 내용뿐만 아니라 표지나 장정이 뛰어나 의궤 제작의 형태를 연구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프랑스에 보관돼 있는 의궤와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의궤의 비교 연구도 필요하다. 이처럼 의궤가 한국에 있는 경우와 타국에 있는 경우, 그 가치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공식 국가기록물이 타국에 있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프랑스군이 1866년 병인양요 때 약탈해간 문화재 중 하나인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반차도. 병인양요 당시 외규장각에 보관된 의궤 등을 발견한 프랑스군은 “우리는 이 책들이 뛰어난 양피지로 만든 것 같은 종이와 수많은 책을 경첩과 걸쇠와 구리로 된 쇠붙이로 장식한 제본기술을 보고 감탄했다. 이 책들은 비단천으로 싸여 있고 모두 붉은색과 금빛으로 칠한 나무상자 속에 들어 있었다. 잘 정리된 왕실도서였다”고 평가한 기록을 남겼다.

 

#3. 파리에서 만난 어람용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의궤 중 필자가 가장 보고싶었던 의궤는 바로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였다. 필자가 규장각에서 처음 일하면서 목록과 색인 작업을 했던 의궤였고, 2001년에는 이 의궤를 바탕으로 ‘66세의 영조, 15세의 신부를 맞이하다’라는 제목의 책을 펴낼 만큼 이 의궤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바로 이 의궤가 파리국립도서관 의궤 목록에 수록돼 있었으니, 여러 의궤 중에서도 이 의궤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흥분됐다.

 

총 5일간 의궤를 조사하기로 예정된 날 중 3일째 되는 날에 바로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가 프랑스 측 사서에 의해 필자에게 전달됐다. 묘한 흥분으로 책을 받았으나 먼저 실망이 찾아왔다. 표지가 모두 개정됐던 것이다. 조선시대 초록 비단 표지와 국화동 5개로 장정된 화려한 의궤의 표지는 온 데 간 데가 없고, 후대에 개장된 형태의 표지로 의궤는 다가왔다.

 

실망도 잠시였다. 의궤의 속을 한 장 한 장 펼치자 품위와 격이 느껴지는 종이와 정성들여 쓴 글씨, 그리고 마지막에 그림으로 수놓은 화려한 반차도는 어람용 의궤의 진가를 한눈에 보는 듯했다.

 

특히 규장각에 소장된 분상본 의궤의 반차도 그림의 상태를 알고 있는 필자로서는 어람용 반차도의 정밀함, 가마나 의장물의 섬세한 표시라든가, 인물의 눈매와 수염까지 뚜렷한 모습에 놀랐다. 이들 의궤가 국내의 분상용 의궤와 함께 비교 연구된다면 훨씬 큰 학술적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섰다.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를 비롯한 1866년 이전의 어람용 의궤는 현재 대부분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현재 의궤 반환을 위한 노력들이 여러 경로로 진행중이지만, 하루빨리 조선의 최고 명품들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

 

의궤 반환을 둘러싸고 우리 정부와 프랑스 정부 사이에는 몇 차례의 협상이 있었지만 명쾌한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고 있다. 양국 간의 입장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결국 문화재를 돌려받는 일에는 양국 간의 신뢰와 합의,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에 대한 존중과 관심, 국제관계 등 다양한 변수가 작용할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 의궤와 같은 국가기록물의 가치를 알리는 연구작업이 병행돼야 한다. 많은 연구자가 의궤의 중요성과 가치를 알리는 연구를 수행해갈 때 의궤에 대한 인지도는 높아질 것이고, 의궤가 꼭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에 대한 국내외 인식도 확산할 것으로 여겨진다.

 

의궤에 대한 연구의 확산과 대중적 보급은 반환 협상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과 같이 문화재를 약탈당한 국가 간의 연대 협력도 필요하다. 외규장각 의궤 297책을 보관하고 연구할 수 있는 최적의 곳은 우리 대한민국임이 분명하다. 의궤를 통해 조선시대 기록문화와 왕실문화의 진수들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기를 기대한다.

 

# 2002년 1월 필자는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을 찾았다. 병인양요 때 약탈 당해 파리국립도관에 소장된 의궤의 반환을 둘러싸고 이제까지 한국과 프랑스 정부가 여러 차례 협상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결국 양국 간에는 한국 측의 의궤 전문가가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의궤의 실물을 직접 조사하는 데 합의했고, 필자는 한국 측 실사단의 일원으로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의궤를 직접 조사했다.

 

정조시대 이후 외규장각은 조선시대 국가기록물을 보관하는 주요한 공간이 됐다. 그러나 외규장각은 정조대의 영광을 뒤로하고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철저히 파괴됐다. 강화도에 주둔했던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퇴각하면서 외규장각에 보관돼던 왕실의 기록물들을 파괴하였다. 당시 외규장각에는 약 6000점의 자료가 보관돼 있었다. 1858년에 작성된 ‘강화도외규장각형지안’의 ‘규9318’에는 당시까지 보관하고 있던 의궤류 등 서책들의 목록이 모두 기록돼 있다.

 

조선왕조는 19세기 후반 이후 국가기록물의 관리라는 측면에서 큰 위기를 맞았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세력의 조선 침략으로 이제까지 매우 체계적으로 보관, 관리돼 오던 조선왕조의 국가기록물 상당수가 훼손된 것이다. 조선왕실의 기록물 보존과 관리에서 그 영광과 수난의 사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강화도에 설치한 외규장각이다. 조선의 22대왕 정조가 1776년 왕위에 올라 제일 먼저 한 일은 규장각의 설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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