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소 이야기

구름위 2013. 6. 19.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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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영향 살생 금지… 조선왕실 제사·잔치때만 식용
 


牛1. 고대·중세 농업사회 생산력의 으뜸

 

 

소가 문헌에 기록된 것은 고대의 역사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에서도 소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희생(犧牲)으로부터 쓰였음이 ‘맹자’ 등의 유가 경전에 등장한다. 중국 삼국시대 우리의 풍속을 기록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부여’ 부분에 육축(六畜)을 기르고, 마가·우가·저가·구가 등 동물의 이름을 관직명에 사용하였음이 나타난다. 농경사회인 만큼 관직명에 소 등의 가축명을 쓸 정도로 가축이 중시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같은 사서에 “군사(軍事)가 있을 때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발굽의 상태를 관찰하여 그것이 벌어져 있으면 흉한 징조이고 합쳐져 있으면 길한 징조라고 여겼다”는 기록은 소가 희생용과 점술용으로 이용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4세기 신라 눌지왕 때(438년) 백성에게 소로 수레를 끄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나와서 우차(牛車)가 본격적으로 활용되었음을 볼 수 있는데 경주 98호 고분에서는 진흙으로 만든 우차가 출토되기도 했다. 6세기 지증왕 때(502년)는 우경(牛耕)이 시작되었다. 이제까지 인력으로 하던 농사를 소가 대체함으로써 농업 생산력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이것은 결국 신라 번영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영향과 화랑도의 세속오계 중 ‘살생유택’에서도 보이듯 살생을 금지하는 사회 풍조 때문에 소를 식용하는 사례는 드물었다. 법흥왕 16년(529)에는 ‘하령금살생(下令禁殺生)’, 즉 왕명을 내려 살생을 금하기도 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소가 자주 등장한다. 안악 3호분 대행렬도에는 소가 수레를 끌고 2명의 수레꾼들이 소를 몰고 가는 그림이 있으며, 쌍영총의 ‘거마행렬도’에는 황소와 황소 옆의 젊은 차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외에 무용총, 평양 부근의 덕흥리 벽화에도 소의 그림이 보여서 고구려에서도 소는 친근한 동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야의 역사와 소의 인연은 ‘삼국유사’의 ‘수로부인 조’에 “소를 끌고 가던 견우노옹(牽牛老翁)이 벼랑 위의 철쭉 꽃을 꺾어다가 수로 부인에게 바쳤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삼국시대를 이어 소가 운반용, 농사용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국가 이념으로 채택된 불교의 영향으로 가축 살생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2세기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의 풍속을 기록한 ‘고려도경’은 “그 정치가 심히 어질고 불교를 좋아하여 살생을 경계했다. 고로 국왕이나 높은 신하가 아니면 양과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또한 도살하는 방법도 능숙하지 않았다(其政 甚仁好佛戒殺 故非國王相臣 不食羊豕 亦不善屠宰)”고 기록하고 있다.

 

牛2. 조선시대 소 식용은 엄격히 제한

 

조선시대에는 소의 식용이 일부 이뤄지기는 했으나, 농사를 짓는 대표적인 가축이었기 때문에 식용을 위한 소의 양육은 매우 제한되었다.

 

다만 왕실의 제사나 잔치 등 특수한 경우에 소의 식용이 이루어졌다. 1398년(태조 7)의 기록에는 “제주도 목장의 우마적(牛馬籍)을 조정에 바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각 목장에 우적(소의 호적)과 마적을 비치하고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소가 왕실에서 식용으로 쓰인 주요 사례는 1795년 정조가 화성에 행차하여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회갑 잔치를 벌인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당시 회갑연 때 혜경궁에게 바친 70종의 음식 중에는 완자탕 1그릇(쇠고기, 양, 돼지고기 약 4냥) 국수 1그릇(쇠고기 안심육 3냥), 저포탕(渚脯蕩) 1그릇(쇠고기 1근), 홍합탕(쇠고기 1근), 화양자(花陽炙, 적·쇠고기 안심육 7근), 꿩찜·숭어찜·어린돼지찜(쇠고기 1근), 해삼찜(쇠고기 3근), 각종 만두(쇠고기 각 2근) 등 쇠고기가 들어간 재료가 적지 않았다.

 
이외에 ‘조선왕조실록’에는 소를 함부로 잡아먹지 말 것에 대한 기록, 큰 홍수 때 소나 돼지 등 가축의 피해 상황까지 기록하고 있다. 우역(牛疫)이라 하여 소의 전염병에 대한 대책에도 골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인조실록’ 인조 15년(1637) 8월 8일의 기록을 보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소의 역병 우환은 팔도가 같아서 내년 농사가 매우 염려됩니다. 제주에는 소가 가장 많아서 그 값이 매우 싸다 하니, 본도의 감사를 시켜 공사의 소 숫자와 값이 얼마인지를 상세히 묻고 수송하는 방책도 생각하여 아뢰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잠시 동안 소 역병이 그치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우역은 시베리아와 몽골 지방을 경유해서 들어온 소 전염병으로 3∼4년 주기로 큰 피해를 주었다. 우역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 인종 20년(1142년)에 우역과 마역을 기록한 것이며, ‘조선왕조실록’에도 소의 역병은 자주 나타난다. 최근에 제기된 광우병 공포까지 고려하면 소는 인간에게 가장 친근하면서도 가끔은 경계의 대상이 됨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 ‘만물문’ ‘우이(牛耳)’에서 귀를 통해서 소의 온순한 성질을 기록하고 있다.

 

“육축(六畜) 따위를 상고해 보니, 말은 화(火)에 속한 까닭에 털빛이 붉은 것이 많고, 소는 토(土)에 속한 까닭에 털빛이 누른 것이 많으며, 돼지는 수(水)에 속한 까닭에 털빛이 검은 것이 많다. 이는 가장 분별하기 쉬운 까닭에 하루 12시간 중에서 말은 오(午)에 소는 축(丑)에 돼지는 해(亥)에 속하게 되었다. 또 그 생긴 모습을 보면 말의 귀는 위를 가리키고, 소의 귀는 가로 바르게 되었으며, 돼지의 귀는 아래로 처졌으니, 이는 모두 그 성질에 따라 그렇게 되었다. … 토(土)의 성질은 편편한 까닭에 그 귀가 위로 치켜들지도 아래로 처지지도 않고 가로 바르게 되었다. 이는 제대로 주장하는 것이 없고 성질이 순해서 여럿을 따르기 때문에 제후들이 모여서 맹세할 때에 반드시 소의 피를 갖고 서로 마신다는 것이다.”

 
牛3. 성실함과 온순함의 대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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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에 대해서는 가족을 뜻하는 구(口)를 붙여 ‘생구(生口)’라 부른 것에서 그만큼 귀중하게 여기고 가족의 일환으로 여겼던 의식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황희 정승과 소에 관한 일화가 유명하다. 밭을 가는 농부에게 황희가 어느 소가 일을 잘하느냐고 묻자, 농부는 “미물일지라도 그 마음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니 한쪽 편을 들 수 없다”는 취지로 답변을 하였고, 황희가 이에 큰 감명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소의 마음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한 내용으로 마치 지금의 영화 ‘워낭소리’와도 닮아 있다.

 

조선시대 충신·효자 열녀의 행적을 담은 ‘삼강행실도’에는 ‘의우도(義牛圖)’라는 그림으로 소의 의로운 행적을 전하고 있으며, 경상도에서는 호랑이와 맞서 싸운 의우(義牛) 이야기가 유행하였다. 상주군 낙동면에서 호랑이가 출몰하여 권씨라는 농부가 위기에 처하자 기르던 소가 호랑이와 맞서 싸우다 주인을 구하다가 죽은 이야기이다. 이 외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선산지도에는 ‘의우총(義牛塚)’을 크게 표시하여 의로운 소의 기억을 영원하게 하였다.

 

소와 민속에 얽힌 이야기도 많이 있다. 일 년 중 정월 들어 첫 번째 맞는 축일(丑日) 즉 ‘소날’이라 하여 이 날에는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여물을 잘 먹였다고 한다. 소를 사거나(納牛日) 외양을 짓거나 할 때에도 반드시 길일(吉日)을 정했다고 한다.

 

소와 관련된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양주의 소놀이굿과 청도와 진주의 소싸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소싸움은 지금까지 지역의 대표적인 행사로 자리하고 있다. 소와의 끈끈한 인연 덕분인지 소에 관한 그림도 많이 전한다. 조선시대의 화가 김식은 ‘고목우도(枯木牛圖)’와 ‘모자섭우도(母子涉牛圖)’를 남겼으며, 이경윤 역시 소 그림을 잘 그렸다.

 

불교에서는 선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는 순서를 표시한 그림인 ‘십우도(十牛圖)’나 ‘심우도(尋牛圖)’에서 사람의 진면목을 소에 비유하였다. 고려의 승려 지눌의 호 목우자(牧牛子) 역시 소와의 인연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 소를 잘 그린 화가로는 이중섭(1916∼1956)이 있다. 이중섭은 황소, 흰 소, 움직이는 흰 소, 소와 어린이, 싸우는 소 등 다양한 소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느릿느릿 걸어도 황소 걸음’ ‘소도 기댈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 ‘소귀에 경 읽기’ ‘새끼 많이 둔 소가 길마 벗을 날 없다’ ‘소 뒷걸음질하다가 쥐 잡는다’ 등 소에 관한 재미있는 속담도 많은데, 대개 소의 성실함과 소중함, 미련함 등을 비유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