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왕실 최고의 휴식처, 온천

구름위 2013. 6. 19.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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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신병치료 동시에…

 

◇조선 왕의 목욕 모습을 묘사한 영화 ‘음란서생’의 한 장면.


조선시대 온천은 특별한 곳이었다. 특히 왕이 자주 찾는 온양의 온천에는 따로 행궁을 두고 이곳에서 정치 행위를 하기도 했다. 왕에 대한 특별한 목욕 시설이 여의치 않았던 시절, 온양온천은 목욕뿐만 아니라 질병을 치료하는 곳이기도 했다. 온양행궁에 대해서는 당시 모습을 그린 그림까지 남아 있다. 조선시대 왕들의 온천 행차 이야기로 들어가 본다.

 

#1. 온천을 자주 찾은 조선의 왕들

 

실록에는 첫 왕 태조부터 온천을 자주 찾은 기록이 나타난다. 태조가 즐겨 찾은 온천은 황해도 평산. 태조 때에는 평주로 불렸던 곳이다. 태조는 1392년 8월 대간·중방(重房)·사관 각 1명씩과 의흥친군위 군대를 거느리고 평주 온천에 거둥(임금의 나들이·擧動)하였다. 1393년 4월에도 평주온천을 다녀온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왕들이 목욕을 즐기기 위해 행차한 온양행궁의 모습을 기록한 ‘영괴대기’의 ‘온양별궁전도’.

 

“하찮은 병으로 온천에 목욕하고 돌아와서 몸이 몹시 피곤하다”고 토로한 것으로 보아 신병 치료를 위해 온천에 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에도 태조의 온천 행차는 계속된다.

 

일부 신하는 평주 온천이 한양과 300리나 떨어져 있으므로 자제할 것을 청했지만, 태조는 자신의 병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신하들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였다.

 

1396년의 실록에는 ‘임금(태조)이 충청도 온천으로 행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확한 지명을 표기하지는 않았지만, 온양온천을 지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온양온천은 태조 때부터 왕실이 주로 이용한 대표적인 명소였다.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온양군’의 ‘온천’ 항목에는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서 우리 태조·세종·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거둥하여 머무르면서 목욕하였는데, 유숙한 어실(御室)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를 뵙기 위해 평주 온천을 몇 차례 찾았으며, 자신 역시 풍질(風疾)이 심해지자 평주·이천 등지의 온천에 거둥하였다.

 

세종 역시 평산·이천 등지의 온천을 찾았으며, 서울과 가까운 경기지방에 온천이 있는 곳을 찾게 하여 찾은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릴 것을 약속했다. 1443년(세종 25) 3월1일 세종은 왕비와 더불어 충청도 온양온천에 거둥하였다. 평소 피부병과 안질로 고생하던 세종이 왕세자와 의정부, 육조의 대신 등 대규모 관리들을 거느리고 온양 행차를 결심한 것을 보면, 온천욕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온양온천을 즐겨 찾은 태조 어진, 세종 초상, 영조 어진.(사진왼쪽부터)

 

조선시대 백성들도 온천에 갈 수 있었을까? 성종 1년 4월17일 성종이 충청도 관찰사 김필에게 내려준 하교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도내 온양 온정(溫井)의 어실(御室) 및 휴식소와 세자궁의 침실 외에는 다른 사람이 목욕하는 것을 허락하고, 남쪽 탕자(湯子)는 재상 및 사족의 부녀에게 또한 목욕하는 것을 허락하라”는 기사에서, 비록 사족의 부녀에게 한정되었지만 일반인도 온천욕을 할 수 있었음이 나타난다.

 

#2. 온천 마니아, 현종

 

조선시대 최고의 온천욕 장소로 각광을 받았던 곳은 온양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평산과 이천 온천에 왕들이 거둥하기도 했지만, 온양온천의 뛰어난 치료 효능과 지리적 여건은 이곳에 행궁을 조성하고 일부 정사를 보게 하는 공간이 되게 하였다. “평산 온천은 너무 뜨겁고 이천은 길이 험해 온양으로 정한다”는 ‘현종실록’의 기록에서 온양이 왕들의 온천으로 완전히 정착돼 갔음을 알 수 있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온양 행궁에 행차하여 장기간 머물렀던 왕은 세종·세조·현종·숙종·영조 5명의 임금과 사도세자로 확인되고 있다.

 

세종과 세조·현종 등이 모두 피부병으로 고생한 전력이 있음을 감안하면, 왕의 온양 행차는 질병을 치료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왕 중에서 온양행궁을 가장 많이 찾은 왕은 현종이었다. 재임 기간 내내 종기와 피부병으로 시달렸기 때문이다. 현종 6∼10년의 실록 기록에는 왕이 온천에 머문 기사가 평균 50건 정도가 발견될 정도이다. ‘현종실록’의 다음 기록에는 민폐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온천욕의 뛰어난 효능을 인정한 왕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조선 정조가 온양에 왔던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며 그 자취를 기록한 책 ‘영괴대기’.

 

“상이 의관을 시켜 약방에 말을 전하기를, ‘요즈음 부스럼이 온몸에 나 고통을 견디기 어려운데, 온천에 목욕하는 것이 효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민폐가 염려되어 할 생각을 못하였다. 지금 눈병과 부스럼이 한꺼번에 발하여 약은 오래 복용하였으나 효험이 없고 침은 겨우 당장 위급한 것만 치료할 뿐이다. 일찍이 듣건대, 온천이 습열(濕熱)을 배설시키고 또 눈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니, 지금 기회에 가서 목욕하였으면 한다. 여러 의원들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는데, 도제조 허적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성상의 몸을 돌보는 자리에 있으면서 보익(補益)한 바는 없이 마음 졸이며 걱정만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고는 즉시 여러 의관을 불러 물어보니, 여러 의관이 모두 ‘성상의 눈병과 부스럼은 모두 습열 탓에 생긴 것이다. 이런 때에는 온정(溫井)이 가장 좋다’고 하였습니다.’”(‘현종개수실록’ 현종 6년 3월14일)

 

위의 기록에는 어의들이 현종의 눈병과 피부병에 온천욕만큼 효능이 뛰어난 것이 없음을 강조한 대목이 나온다. 실제 현종은 자신의 병에 침과 약이 효험이 없자 온천욕을 대안으로 찾았고 잦은 행차를 했다. 왕의 행차였던 만큼 그 규모도 대단했다.

 

“상이 온양온천에 거둥하였다. 인시에 상은 군복을 입고 칼과 활·화살통을 차고서 작은 수레를 타고 나가 인정문 밖에 도착하였다. 수레에서 내려 말을 타고 숭례문 밖에 도착하여서부터는 교자를 타고 출발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허적, 병조 판서 홍중보, 호조 판서 정치화, 이조 판서 김수항, 한성 판윤 오정일… 각사의 관원과 종반(宗班) 숭선군 이징 등 8인, 의빈(儀賓)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 등 5인, 침의(鍼醫) 윤후익(尹後益) 등 4인, 약의(藥醫) 이동형(李東馨) 등 4인이 따라갔으며, 영풍군 이식 등 형제 4인도 자원하여 어가를 수행하였다. 무예 별감(武藝別監) 30인, 어영군 1200명, 기병 50명, 군뢰(軍牢)와 잡색(雜色)이 합해 400명이었는데, 대장 유혁연과 중군(中軍) 유정(兪)이 이끌고, 금군 500명은 별장 이지원(李枝遠)이 이끌고, 마병 470명과 포수 800명은 별장 유비연(柳斐然)·한여윤(韓汝尹)이 이끌었다.”(‘현종개수실록’ 현종 6년 4월17일)

 

이렇듯 왕의 온천 행차에는 대신들과 대규모 병력이 수행하였다. 국정에 상당한 차질을 빚었음도 물론이다. 현종 시대에 주목할 만한 업적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던 한 원인을 현종의 잦은 온천행에서 찾을 수가 있다.

 

#3. 온양온천 모습이 담긴 ‘온양별궁전도’

 

조선시대 왕실 목욕탕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 궁금증을 풀어주는 자료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영괴대기(靈槐臺記)’라는 제목의 책 속에 포함되어 있는 ‘온양별궁전도’가 그것이다. ‘영괴대기’는 정조가 온양에 왔던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며 그 자취를 1795년(정조 19) 기록한 책이다. ‘영괴대’란 신령스러운 느티나무 옆에 설치한 사대(射臺)라는 뜻이다.

 

1760년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에 행차해서 활을 쏠 때 그늘을 만들기 위해 심었던 세 그루의 느티나무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영괴대는 현재 충남 아산시 온양온천동에 자리하고 있다.

‘영괴대기’에는 온양온천의 모습을 담은 ‘온양별궁전도’가 그려져 있다. 지도에 하얗게 표시된 어도(御道)를 따라 들어가면 왕의 침소인 내정전(內正殿)과 집무실인 외정전(外正殿)이 눈에 들어온다.

 

초가지붕 또는 기와지붕으로 표시된 홍문관·승정원·상서원·사간원·수문장청 등의 건물은 온양행궁이 임시 궁궐로 기능하였음을 보여준다. 가장 넓게 표시된 수라간의 존재는 수행 인원이 행궁에 대거 머물렀음을 짐작하게 한다. 화면의 좌측 상단에는 ‘영괴대’가 표시되어 있어 이곳에 머물렀던 사도세자와 정조의 자취를 느낄 수가 있다.

 

화면의 중심에 온천이라고 표시된 큰 건물이 바로 왕이 목욕을 즐겼던 온천탕이다. ‘온궁사실’의 기록에는 그림으로 표시된 ‘온천’의 구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타난다. 12칸짜리 온천 건물에는 욕실, 양방(凉房), 협실(挾室), 탕실(湯室)이 있었다.

 

탕실은 온천수가 솟는 곳과 욕조가 있는 곳으로 구성된 듯하다. 탕실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에 통로로 보이는 협루가 있고, 찬바람을 쐴 수 있는 방이 남북으로 하나씩 있었다. 온돌을 깐 욕실은 동서 양쪽에 있었음이 나타나 기본 구조는 현재의 목욕탕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4. 온천 행차에 관한 기록들

 

현재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는 왕들의 온양 행차에 관한 기록이 몇 건 소장되어 있다. ‘온행일기(溫幸日記)’는 1750년(영조 26) 9월12일부터 19일까지 영조가 온양온천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기록한 책이다. 영조가 피부병이 생겨 온천욕을 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금을 감면하고 과거시험을 치르게 한 내용이 들어 있다.

 

1760년(영조 36) 사도세자가 온양에 행차한 사실은 ‘온궁사실(溫宮事實)’과 ‘온천일기’란 책으로 남아 있다. 1760년 7월18일 온양행궁에 도착한 사도세자는 16일간의 요양을 끝내고 8월1일 온양을 출발, 4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사도세자의 온양 행차는 세자의 다리에 종기가 곪아 터지자 여러 의원들이 습창(濕瘡)을 제거하는 데는 온천이 좋다고 하여 추진되었다.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에 묵는 것을 대비하여 온양행궁에서는 건물을 보수하고 각종 준비물을 챙겼다. ‘온궁사실’에는 오동나무 바가지, 큰 함지박, 조그만 물바가지, 놋대야, 의자, 수건(14장) 등 사도세자가 목욕할 때 사용했던 목욕 용품들까지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의 왕들 역시 현대인과도 비슷한 용품을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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