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종친들의 삶

구름위 2013. 6. 1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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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피붙이일수록 권력과는 멀어졌다

 

◇경기 과천시 문원동 연주암 효령각에 보관돼 있는 효령대군 영정(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1호). 조선시대 대군 초상화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희귀한 예다.


조선시대 역사에서도 왕의 종친(宗親)들이 권력의 역사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권력에 대한 견제 장치 또한 적지 않았다. 조선시대 왕실 친인척 종친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1. 왕실의 반란, 왕자의 난

 

조선시대 역사에서도 그 시작부터 왕자들이 권력의 전면에 뛰어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서막을 연 인물은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 이방원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 단서를 제공한 인물은 건국의 시조 태조 이성계였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방원을 비롯하여 왕실의 부계 친족인 종친의 군사력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태조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종친불임이사(宗親不任以事)’의 원칙을 무시하고 종친에게 관직을 허용했다. 이에 종친은 건국 초부터 관직과 함께 사병을 유지할 수 있었고, 특히 왕자들이 보유한 사병은 훗날 비수가 되어 왕실을 겨냥하게 된다.

 

이방원은 자신이 보유한 사병을 기반으로 하여 태조가 지명한 세자이자 동생인 방석을 제거하고 마침내 권력의 정점에 이르게 되었다(1차 왕자의 난, 1398년). 권력을 잡은 이방원은 왕위를 형인 방과(정종)에게 물려주었지만, 바로 위의 형 방간이 왕위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자, 또 한번 권력 투쟁에 나선다. 이것이 1400년의 2차 왕자의 난이며, 이후 방원은 태종으로 즉위하여 본격적인 왕권 강화에 들어갔다. 건국 초 두 번에 걸쳐 일어난 왕자의 난은 왕자들의 정치적 야심과 군사력이 바탕이 되면 왕위는 쉽게 바뀔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어 주었다.

이런 경험이 반면교사가 되었을까. 이후 조선의 왕은 철저하게 종친을 권력에서 배제하는 정책을 쓰게 되었다. 종친은 왕실의 부계친속(父系親屬)을 뜻한다. 종족(宗族), 본종(本宗), 본족(本族), 동종(同宗)이라고도 한다. 왕의 자손으로 4대 밖인 자로서, 동성을 ‘종’이라 하고, 부계를 ‘친’이라 일컬은 데서 유래한 용어이다. 모계나 처계의 친속을 ‘척(戚)’이라 표현한 데 대해 부계의 친속에 ‘종’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그만큼 부계 친속이 으뜸임을 표시한 것이다. 조선초기에는 종친의 범위가 넓었지만 세종 대에 와서 종친은 해당 왕의 4대손까지 포함하는 범위로 정해졌다.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강원 영월로 유배돼 1457년 목숨을 끊은 장릉 장자각에 있는 단종 관련 그림.


#2. 종친부(宗親府)를 설치한 뜻은?

 

조선시대에는 종친들에게 품계를 부여하였다. 이를 종친계라 하는데 1443년(세종 25) 처음 실시하였다. 종친계는 정 1품 (현록대부, 흥록대부)부터 정 6품(집순랑, 종순랑)까지 쌍계로 되어 있었다. 품계만 있고 실직이 없는 명예직이었다. 종친계를 문신이나 무신의 품계와 구분한 것은 이들의 정치 참여를 막기 위해서였다. 종친들의 정치 간여는 국왕의 지위를 위태롭게 할 뿐만 아니라 양반 관리들에게도 결코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친은 친진(親盡)이라 하여 왕과 4대의 친분이 끝나면 그 지위에서 벗어나 관리로 나갈 수 있었다.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은 전주 이씨였기 때문에 그의 집안은 한동안 관리가 될 수 없었지만, 부친 이희검 대에 이르러 왕실과의 인연이 끊어져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종친을 위한 과거 시험도 있었다. 성종 대인 1484년 종친만을 위한 과거 시험을 따로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관리 임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친들의 학문 권장을 위해 실시한 것이었다. 사서삼경을 시험하고 1, 2, 3등 합격자에게 각각 3, 2, 1등급의 품계를 올려주었다. 그러나 명예직 성격인 까닭에 종친들의 호응이 그리 크지 않았고 결국 중종 대 이후에 폐지되고 말았다.

 

종친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는 종친부가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제왕자부(諸王子府)가 조선에 이르러 재내제군소(在內諸君所)로 명칭이 바뀌었다. 세종 때인 1428년에는 재내제군소에 종부시를 두고 종친의 비위 규찰을 전담하게 하였다. 1430년 재내제군소가 종친부로 승격하고, 종친부는 정1품 아문이 되었다. 형식상으로는 최고 서열이었지만 실질적인 권력 행사는 할 수 없는 기관이었다. ‘경국대전’에는 종친부의 역할과 품계가 법으로 규정되었다. 종친부에서는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의 제작, 왕실에서 사용하는 옷감 봉진(奉進) 등의 일을 맡았으며, 정치적 역할은 일체 금지되었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 정독도서관 내에 위치한 종친부 건물(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호). 종친부 내 종부시는 종친의 비위 규찰을 전담했다.

 

결국 종친부 설치는 제도적으로 종친의 정치 참여를 막는 동시에 종친들의 비위까지 규찰하는 기능을 담당하게 한 것이었다.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왕의 외척들의 정치 참여가 활발한 것에 비하여 종친에 의한 정치 부정과 비리가 많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제도적 장치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3. 대군의 원조, 양녕대군

 

장자 상속이 원칙인 조선 사회에서 살아있는 왕의 형님 존재는 그리 흔치 않았다. 그런 점에서 양녕대군의 이력은 특이하다. 부왕인 태종에 의해 왕세자의 자리를 박탈당한 양녕대군은 도성을 떠나 풍류남아로 주로 생을 보냈다. 그렇지만 살아 있는 형의 존재는 왕에게 커다란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왔다. 양녕대군에 대한 처벌 논의도 있었지만, 동생 세종은 그때마다 양녕을 감쌌다. 자주 서울에 불러 음식을 대접하면서 형제의 우애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소동파의 명작 ‘후적부’를 초서체로 쓴 양녕대군의 구곡병풍. 자유분방함이 묻어나는 작품이다(지덕사 소장).

 

양녕대군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간여한 사례는 단종의 폐출 때이다. 역시 대군의 위치에서 조카를 압박하여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에게 유배되기는 했지만 살아있는 전왕 단종의 존재는 최대의 부담이었다. 이때까지 살아있었던 양녕대군은 단종의 제거를 적극 주장하는 왕실의 원로로 화려하게(?) 정치에 참여한다. 실록의 기록을 보자.

 

“양녕대군 이제 등이 아뢰기를 ‘전일에 노산군 및 이유(李瑜·금성대군) 등의 죄를 청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도 유윤(兪允)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속히 법대로 처치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제가 재차 아뢰기를 ‘큰 역모와 같은 일이 종사에 관계되는 것은 생각할 바가 아닙니다. 청컨대 대의로써 결단하소서.’”(‘세조실록’ 세조 3년 10월 19일)

 

위 기록이 양녕대군 스스로의 입장인지 세조 정권의 압박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양녕의 단종에 대한 적극적인 처벌 주장이 세조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음은 분명하다.

 

#4. 시, 서, 화에 능했던 안평대군

 

능력은 갖추었으되 현실적으로 관직 진출이 좌절된 삶. 이러한 현실적 벽 때문에 종친들은 예술 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 인물이 세종의 세 번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안평대군이다. 안평대군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특히 시와 서예, 그림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삼절(三絶)로도 칭해졌다. 서예가로서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졌고 조선전기에는 그의 서풍이 널리 유행하였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쓴 발문이 대표적이다.

 

안평대군은 불행하게도 예술적 재능과 함께 정치력도 갖춘 인물이었다. 단종이 왕위에 오른 후 힘을 얻게 된 김종서와 황보인은 야심가 수양대군보다는 안평대군을 그들의 왕실 파트너로 선택하였고 안평대군도 이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동거는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산산이 조각이 났다. 안평대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갔다가 결국 이곳에서 사사되었다.

 

위에서 조선시대 종친들의 삶을 소개해 보았는데, 전체적으로 종친의 정치 참여는 엄격히 제한되었다. 조선초기 왕자의 난이나 계유정난처럼 왕자들이 전면에 나서 권력을 잡는 상황이 거듭하자, 성종 대에는 법적으로 종친의 참여를 원천 차단하였다. 이러한 장치 때문인지 조선중기 이후 종친들은 권력의 전면에 거의 등장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에는 종친을 대신하여 모계나 처가의 외척들이 정권의 핵심에 등장하였다. 명종 때 윤원형을 비롯하여, 19세기 세도정치 시기에는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이 외척의 전성시대를 열기도 했다.